저주

詛呪

[히]לְקַלֵל · [그]κατάρα · [라]maledictio · [영] cur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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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을 저주하려는 발람의 길을 막는 천사.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는 발람의 길을 막는 천사.

타인에게 재앙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 혹은 그러한 내용의 언어 표현. '축복' 과 대비(對比)되는 개념이다.
: I. 성서에서의 저주
성서의 배경이 되는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소아시아, 그리스 지역에서 저주는 흔한 일이었다. 저주는 비단 그 시대뿐 아니라 종종 후대에 이르기까지 내려졌으며, 자신(혹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을 지키기 위해 이루어지곤 했다. 저주는 일반적으로 신에게 부탁하여 제3자의 불행을 비는 형태를 가졌다. 또한 많은 문화권에서 신과 인간 사이의 무너진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저주가 사용되었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으리라는 의미에서 맹세 형태를 동반하였다. 말하자면 저주에는 마술이나 종교적인 색채가 가미될 부분이 충분히 있었다는 뜻이다.
[구약성서] 구약성서에서 '저주' 를 뜻하는 대표적인 용어로는 '알라' (אַלְלָה). '메에라' (מְאֵרָה) · '켈라라'(קְלָלָה) 등이 있다. 그중에서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켈라라' 이며, 동사형인 '클라라' (קָלַל)는 '비방하다' · '험담하다' · '욕하다' 라는 뜻을 갖고 있다(신명 23, 5 : 출애21, 17 : 2사무 16, 10-11). 구약성서에 나오는 저주는 주로 '축복' 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물론 구약성서에서 저주를 내리는 주체는 오직 하느님뿐이다(민수 6, 27 ; 23,8. 25-26). 그분의 분노는 저주의 말이 되어 이스라엘을 뒤덮기도 하지만 때로는 저주에서 축복으로 마음을 바꾸시기도 한다(신명 23, 5-6 : 느헤 13, 2 ; 말라 2, 2). 축복과 저주는 온전히 하느님의 몫인 것이다. 그러나 종종 하느님이 선택한 사람들이 그 일을 대신하는 경우도 구약성서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강력한 카리스마를 부여받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의 땅 이집트에서 인도해 낸 모세(신명33)와 여호수아(여호 14, 13), 이스라엘 통일 왕국의 꿈을 실현한 다윗(2사무 6, 18)과 예루살렘 성전 건설의 대위업을 이룩한 솔로몬(1열왕 8, 14-15), 그리고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사제들이 있다(레위 9, 22 ; 민수 6, 23). 구약성서에서 저주와 관련된 유명한 본문으로 이른바 저주 시편(시편 58 : 68, 21-23 : 69, 23-29 ; 109, 5-19 :137, 7-9)이 있다. 여기에는 하느님의 저주와 분노를 촉발시키 내용이 담겨 있어 영국 성공회에서는 1928년 이후 기도서에서 제외시켰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유명한 저주의 말씀인 신명기 27장은 십계명 전승의 후대 해석으로, 역사적으로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의 갈등이 그 배경이다. 이는 신명기 학파의 작업으로 여겨진다. 말하자면 저주와 축복이 이스라엘을 대하는 하느님의 두 가지 방법이며, 이는 전적으로 신명기계 법전을 준수하는지, 아닌지에 달려 있다는 역사관이다(신명 6, 14-15. 17-18 : 7, 12 이하 ; 8, 19-20 : 11, 13-15. 16-17. 26-28 등). 신명기 27장의 내용에 따르면 저주를 받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상을 만들거나 섬겼기 때문에(15절), 부모를 업신여기거나 (16절) 이웃집 땅의 경계선을 옮겼기 때문에(17절), 소경을 엉뚱한 길로 이끌거나(18절) 떠돌이와 고아와 과부의 인권을 짓밟아서(19절), 음행을 하거나(20절) 짐승과 교접해서(21절), 근친 상간을 하거나(22-23절) 동족을 살인했기 때문에(24절), 뇌물을 받고 무죄한 사람의 피를 흘리게 만들었거나(25절) 법을 짓밟았기 때문(26절) 등이다. 이외에도 하느님께 축복받은 사람을 저주한 경우(창세 12, 3)와 하느님의 계명을 실천하지 않거나(신명28, 15) 하느님의 백성을 괴롭힌 경우(신명 30, 6-7)에도 하느님으로부터 저주를 받는다. 또한 불의한 짓을 저지르거나(잠언 3, 33) 진실을 왜곡하고(잠언 24, 24) 가난한 사람을 외면하는 경우(잠언 28, 27)와 하느님의 이름을 기리지 않는 경우(말라 2, 2)에도 저주를 받는다. 그리고 이런 저주를 받는 경우 재앙을 입고 멸망할 것이라고 한다(신명 28, 20 : 29, 18-20).
[신약성서] 신약성서에서 '저주' 를 뜻하는 대표적인 용어는 '아라' (ἀρά) · '카타라' (κατάρα). '아나테마'(ἀνάθεμα)이다.
바오로는 율법과 복음을 저주와 축복의 관계 안에서 이해했다. 예수를 믿는 모든 이방인들은 축복을 받는 반면, 율법의 행업에 목숨을 걸고 있는 유대인들은 저주 아래 놓여 있다. 왜냐하면 율법의 요구 사항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지킬 수 없으나, 율법 이전에 믿음만 가지고 있었던 아브라함은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갈라 3, 8-10). "율법의 행업으로 (사는) 이들은 누구나 저주(카타라)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실상 '율법의 책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것을 실천하는 데에 항구하지 않은 자는 누구나 저주받아야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10절).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이른바 심판 설교(24-25장)에도 축복과 저주가 맞물려서 등장한다. '최후 심판의 비유'(25, 31-46)에 보면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떨치며 세상에 다시 올 때 두 부류의 인간만 존재하게 되는데, 하나는 예수가 주리고 목마르고 추웠을 때 구체적인 도움을 준 이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그렇게 하지 못한 자들이다. 그들에게는 제 분에 맞게 축복과 저주가 주어진다. "저주받을 자들아, 내게서 떠나 악마와 그 심부름꾼들을 위해서 마련된 영원한 불속으로 가라" (25, 41). 여기서 "저주받을 자들" (κατηραμένοι)은 완료 수동태 분사로 34절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 (εὐλογημένοι)과 완벽한 대비 개념이다. 이러한 바오로와 마태오의 예만 보더라도 신약성서의 저주는 축복과 맞물린 개념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는 구약성서에서 저주와 축복이 한짝을 이룬다는 데서 유래했다.
신약성서로 대변되는 1세기 교회에서는 저주를 제한하지 않았다. 오히려 복음 전파와 공동체의 질서를 지속시키는 역할을 하는 규율들을 위해 저주를 즐겨 사용했다. 이는 공동체에 주어진 가르침과 질서를 유지하고, 외부의 종교적인 적들과 싸워 나가려는 목적에서였다. 사도들의 선교 활동과 저주가 묶인 대표적인 예로는 간교한 마술사 시몬에게 베드로가 저주를 내린 이야기나(사도 8, 20-23), 선교를 방해하는 거짓 예언자 바르예수에게 한 바오로의 저주가 있다(사도13, 6-12). 그리고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저주' 라는 용어를 사용한 대표적인 예는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받으라" ἤτω ἀνάθεμα, 1고린 16, 22)라는 구절이다. 이외에도 다른 구절(갈라 1, 8-9 : 2베드 2. 14)에서 같은 쓰임새를 발견할 수 있다.
(예수의 저주] 신구약 성서를 통틀어 역사의 예수처럼 저주를 즐겨 사용한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역사의 예수는 대단한 '독설가' 였다. 그가 하는 저주의 말을 들어 보면 터럭과 뼈〔毛骨)마저 두려워 웅크릴[竦然] 정도이다. 예수는 공생활 기간 중에 때때로 저주의 말을 입에 담았는데, 일단 누구라도 그의 눈에 벗어났다 하면 퍼부어지는 저주를 피해 나갈 수 없었다.
유대인들 중에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불효를 일삼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부모 봉양을 피하려는 목적으로 자신의 재산을 두고 '코르반' (κορβᾶν) 서원을 했는데 (마르 7, 11), 이 서원은 재산을 하느님께 바쳤으니 속인은 사용할 수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미슈나》, 느다림8, 7). 결국 "종교를 빙자하여 인륜을 짓밟는 짓거리"였다. 예수는 그런 자들을 위선자로 몰아붙이며 힐난하였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마르 7. 6 ; 이사 29, 13). 또한 예수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기적을 베풀었으나 깨우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 도시를 두고 꾸짖는 말씀을 한다. "너 카파르나움아, 하늘에라도 오를 성싶으냐?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다"(루가 10, 16).
예수가 생애 마지막에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처음으로 한 일은 성전을 정화시킨 행동이었다(마르 11, 15-19). 당시 성전에는 제물로 쓰여질 갖가지 동물들을 파는 상인들과 환전상들이 가득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순례객들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하여 좌판을 벌린 자들이었는데, 고향에서부터 동물을 데리고 와야 하는 엄청난 불편을 덜어 주고 외국에서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제물을 살 수 있도록 돈을 바꿔 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이렇게 거래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자연히 상인들은 이문을 남겼을 것이고, 성전 내에서도 좋은 장사 위치를 차지하려면 대제관들과 상인들 사이에 은밀한 접촉이 있었으리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예수는 이런 작태를 보고 좌판과 의자를 뒤엎으며 상인들에게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 "내 집은 모든 민족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그것을 '강도들의 소굴 로 만들어 버렸구나"(17절).
그러나 예수로부터 단골로 저주를 받은 자들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꼽을 수 있다. 마태오 복음 23장에서 "불행하도다. 너희 율사와 바리사이 위선자들아" 라는 말이 무려 7번이나 언급된다. 그들은 비록 겉은 깨끗해 보이지만 속에는 착취와 탐욕과 위선과 불법과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움이 가득 차 있는" (27절) 자들에 불과하다. 그들은 지옥으로 떨어지는 형벌을 피할 수 없으며, 아벨로부터 즈가리야에 이르기까지 흘린 모든 무죄한 피 값을 치를 것이다. 마침내 의로운 피를 흘리게 한 일의 대가가 "이 세대에게 들이닥칠 것이다"(36절). 한결같이 심장을 얼어붙게 만드는 저주의 말들이다.
예수가 저주를 퍼부은 상대들은 대부분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파 등 유대교의 종교 지도자들이었으며, 모두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들에 불과했다. 하느님의 율법을 핑계삼아 자신들의 특권을 마음껏 누리고, 겉으로는 점잖은 척하지만 뒤로는 이리저리 추잡한 욕심을 채우기에급급한 자들이었다. 예수의 독설을 통해 그들의 위선이 남김 없이 밝은 해 아래 드러난 것이다.
〔현대적인 이해〕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흔히 역사의 예수를 매우 고상한 분으로 여기고 자신도 그분처럼 고상하게 살아 보려는 사람들이 있다. 이를테면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마디 하나하나가 장미꽃으로 변해 공중에 떠다녔으리라는 상상을 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살펴보았듯이 역사의 예수는 고상한 언어와는 거리가 먼 분이었다. 그분은 갖가지 욕설을 입에 담았으며, 자극적이고 끔찍한 표현을 즐겨 사용했고, 사람의 면전에서 저주를 퍼붓는 행동을 한 분이었다. 일반적으로 복음사가들은 예수에게 누가 될 보도를 가능한 한 옮겨 적지 않으려 애쓴 사람들로 여겨진다. 그러나 복음사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모습이 이 정도였으니, 역사의 예수는 대단한 독설가' 였을 것이다. 따라서 신앙인이라면 역사의 예수에게 예의에 사로잡혀 할 말도 못하는 고상함을 배우려고 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두려움을 이겨내는 그분의 자신있는 태도와 심장을 뒤흔드는 힘있는 말씀에서 큰 용기를 얻어야 할 것이다. (→) 강복)

※ 참고문헌  정양모 역주,《마르코 복음서》, 200주년 기념 성서, 분도출판사, 1990/ 박태식,《나자렛 예수》, 바오로딸, 2001/ 《한국 기 독교 대백과 사전》 12권, 기독교문사, 1980, pp. 694~6971 D. Stuart,
W. Gesenius, Hebraisches und Aramcischess Handwoitereruch iiber das Alte Testament, Berlin, 1962/ K. und B. Aland, Wörterbuch zum Neuen Testament, Berlin, 1988. [朴泰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