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 때의 동정 순교자. 세례명은 아가타. 축일은 9월 20일. 1790년 서울의 외교인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궁에 들어가 의빈궁(宜嬪宮)의 궁녀가 되었고 궁녀 생활을 하면서 가까이 지내던 동료 박희순(朴喜順, 루치아)을 따라 천주교를 배워 믿게 되었다. 그 후 천주교를 자세히 배우고 싶었으나 궁 안에서는 자유로운 신앙 생활을 할 수가 없었으므로 궁을 나와 집으로 돌아오려고 하였다. 집안에서는 이러한 그녀의 의도를 알고 그녀가 궁에서 나오는 것을 반대했지만, 함께 신앙 생활을 하던 박희순이 궁을 떠나 자유롭게 천주교를 믿는 것을 보고 병을 핑계로 하여 궁을 나왔다. 이후 전경협은 박희순의 집에서 거처하며 지금까지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버리고 천주께서 자신을 돌보아 주시리라는 믿음을 갖고서 기도와 독서, 묵상과 덕행에 힘쓰며 겸손한 태도로 생활하여 교우들뿐만이 아닌 외교인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이들을 모두 천주교를 배워 믿게 하였다.
1839년 4월 15일(음 3월 1일) 박희순의 집에 포졸들이 들이닥쳐 함께 거처하던 그의 언니 박큰아기(마리아)와 전경협 3명을 모두 체포하여 포도청으로 압송하였다. 포도대장은 전경협과 박희순에게 "궁녀로서 높은 교육을 받았는데 사학(邪學)을 믿었다" 라고 말하며 다른 이들보다 혹독한 고문을 가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고문에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켜 나갔다. 한편, 전경협에게는 비신자인 오빠가 한 명 있었는데 작은 관직을 가지고 있어서 그 지방에서 어느 정도 유지로 행세 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누이가 천주교인으로 죽는다면 자신의 지위가 흔들리고 생활이 어려워질 것이라고 판단하여 전경협을 옥중에서 죽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독약이 든 음식을 차려 누이에게 보내어 먹게 하였으나 전경협이 오빠의 이런 의중을 알아차리고 음식에 자신이 갖고 있던 은비녀를 넣어 비녀의 색깔이 변하는 것을 보고 이를 먹지 않고 되돌려 보냈다. 그러자 다시 전경협의 오빠는 형조 서리(胥吏)와 곤장을 치는 사람을 매수하여 여동생을 매맞아 죽게 하여 줄 것을 청했으나 그녀는 이것마저도 이겨내고, "항상 칼에 치명하기를 바라노라" 고 말하며 하루 속히 순교하기를 원했다.
전경협은 이후 5개월여를 옥에 갇혀 있다가 마침내 다른 8명의 교우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9월 26일(음8월 19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50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하여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중, pp. 400~402, 468~471/ 《기해일기》, ,성황석두루가서원, pp. 95~98/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 증언록)/《최양업신부서한집》, 한국교회사연구소, pp. 349~351.(洪延周)
전경협 (1790~1839)
全敬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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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

고문의 상처가 기적으로 하루 아침에 씻은 듯이 나은 전경협 아가타(탁희성 작)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