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교구 신부. 세례명은 안드레아. 1920년 4월 16일 황해도 은율군 은율읍 남천리에서 전인택(全仁澤, 크리소스토모)과 유(柳) 루갈다의 3남 3녀 중 3남으로 출생. 은율보통학교를 마치고 본당 주임 윤의 병(尹義炳, 바오로) 신부의 추천으로 1935년 4월 소신학교인 동성상업학교 을조에 입학하여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로 진학하였으나, 1940년 2월 신학교가 폐쇄되자 덕원신학교로 전학하였다 . 1946년 5월 월남하여 천주공교신학교를 졸업한 그해 11월 21일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주교의 주례로 명동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황해도 사리원 본당의 보좌로 임명되어 12월 18일 서울에 와 있던 본당 주임 박우철(朴遇哲, 바오로) 신부와 38선을 넘어 12월 20일 본당에 부임하였다. 본당 주임 박 신부는 공산정권의 탄압이 계속되자 남하하여 젊은 신부의 파송을 교구장 노기남 주교에게 요청하였고, 이로 인해 러시아어를 공부한 바 있던 전 신부가 선발되었던 것이다. 전 신부는 사리원 본당에서 공산당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신심 단체를 조직하는 등 활발한 사목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특히 청소년 교육에 깊은 관심을 보여 '79위 복자반 학생회' 를 운영하였고, 월남하는 성직자와 신자들을 도왔으며, 해주 · 신천 등 성직자가 월남한 본당도 박우철신부와 함께 돌보았다. 1950년 6 · 25 전쟁 중 폭격이 심해지자 일시 피난하였으나, 10월 12일 성당에 들러미사를 집전하고 성체를 거두어 피난처로 떠나기 전에 기독교연맹 회의에 참석하자고 찾아온 목사와 나간 후 행방불명되었다. 며칠 뒤 유엔군이 입성한 후 전 신부의 시신은 성당에서 1Km 떨어진 정치보위부 근처 방공호에서 발견되었는데, 전기 고문을 당한 흔적이 완연하고 목과 양손은 전깃줄로 묶여 있었다. 10월 17일 사리원 본당에서는 박우철 신부의 집전으로 장례 미사를 거행하고 성당 앞 상묏산에 안장하였다. 전 신부의 순교 내용은 월남한 사리원 본당 교우들에 의하여 1977년 《북한 교회의 마지막 종》이라는 소책자로 증언되었으며, 2001년에는 《전덕표 안드레아 신부님을 기리며》라는 추모집이 발간되었다.
※ 참고문헌 《북한 교회의 마지막 종》, 사리원 본당 신우회, ,1977/ 《전덕표 안드레아 신부님을 기리며》, 가톨릭출판사, 2001/徐相堯, 〈全德杓 신부>, 《교회와 역사》 79호(1982. 2),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黃海道天主教會史》, 황해도천주교회사 간행사업회,1984. 〔崔起榮〕
전덕표 (1920~1950)
全德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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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