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교구 소속 본당. 전북 전주시 완산구 전동 1가 200-1 소재. 1889년 봄에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관할 구역은 전주시 완산구 전동 ·교동 · 풍암동 · 동완산동 전역과 서완산동 · 남노송동 · 다가동 · 중앙동 · 경원동 일부 지역. 〔교 세〕 1889~1890년 2,273명, 1894~1895년 3,804명, 1899~1900년 2,371명, 1909~1910년 2,643명, 1952~1953년 1,829명, 1959년 4,486명, 1971년 2,757명,1980년 3,329명, 1990년 4,629명, 2000년 7,710명. 〔역대 신부〕 초대 보두네(Baudounet, 尹沙勿) 프란치스코 사베리오(1889. 봄~1915. 5), 2대 라크루(Lacrout, 具瑪瑟) 마르첼리노(1915. 5~1929. 8), 임시 김승연(金承淵)아우구스티노(1916. 5~1918. 1), 3대 김양홍(金洋洪) 스테파노(1929. 8~1937. 4), 4대 김영구(金榮九) 베드로(1937. 5~1938. 6), 5대 이상화(李尙華) 바르톨로메오(1938. 6~1940. 4), 6대 박문규(朴文奎) 미카엘(1940.4~1941.5), 7대 최민순(崔玟順) 요한(1941.5~1942.5), 8대 김후상(金厚相) 바오로(1942. 5~1944. 6), 9대 김명제(金命濟) 베드로(1944. 6~1944. 12), 10대 이상화(1944.12~1947. 4), 11대 이약슬(李若瑟) 요셉(1947. 4~1954.5), 12대 강윤식(姜允植) 베네딕도(1954. 5~1961.9), 13대 오기순(吳基順) 알베르토(1961. 9~1963. 6), 14대 김종택(金鍾擇) 요셉(1963. 6~1967. 12), 15대 이상호(李尙浩) 아우구스티노(1967. 12~1969. 12), 16대 김재덕(金在德) 아우구스티노(1969. 12~1972. 9), 17대 범석규(范錫圭) 마티아(1972. 9~1974. 6), 18대 김환철(金丸喆) 스테파노(1974. 6~1979. 1), 19대 김병엽(金炳燁) 베드로(1979. 1~1984. 1), 20대 김치삼(金熾參) 스테파노(1984.1~1988. 1), 21대 리수현(李守鉉) 보나벤투라(1988.1~1992. 1), 22대 김봉희(金鳳熙) 세례자 요한(1992.2~1997. 2), 23대 김종길(金鍾吉) 라파엘(1997. 2~2001.8), 24대 김준호(金俊鎬) 십자가 바오로(2001.8~현재).전동 본당이 자리하고 있는 전주는 한국 천주교회사적으로 출중한 순교자를 낳은 순교지 가운데 한 곳이다. 특히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尹持忠, 바오로)과 권상연(權尙然, 야고보)은 1791년 12월 8일 전주 남문 밖(현 전동 본당 자리)에서 관장의 배교 권유와 회유를 단호히 거부하고 당당히 천주교가 진리의 종교임을 밝히면서 처형되었다. 그리고 신유박해 때인 1801년 9월 17일에는 전라도에 처음 복음을 전파한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과 그의 아우 관검(觀儉), 윤지헌(尹持憲,프란치스코)이 능지처참형을 당하였고, 김유산(金有山,토마)과 이우집(李宇集)은 참수형을 당하였다. 특히 정부는 유항검의 목을 풍남문 누각에 매달아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갖도록 하였으니, 현 전동 성당 터는 이들의 피가 서린 곳이다.
1889년 봄 경상도 지역에서 사목하던 보두네 신부가 전주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당시 전주에는 감영(監營)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전주 부중(府中)에 신자가 한 명도 없어 배경집(裵敬執, 베드로) 회장의 안내로 우선 완주군 소양면 대성동(大成洞, 일명 대승리)에 정착하여 전주 이하 북쪽 지역을 관할하였다. 이것이 전주 본당, 즉 지금의 전동 본당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보두네 신부는 본당의 장래 발전을 위해 인구가 많은 전주 부중으로 본당을 이전하기 위해 노력하여 1891년 6월 23일에 전주 남문 밖에 있는 구례(求禮) 영저리(營低吏) 집을 매입하였다. 보두네 신부는 매입한 집의 안방을 자신의 침실로 사용하고, 맞은편 방을 개조하여 여자 교우청으로, 방과 방사이의 마루인 어간에는 제대를 설치하였다. 대성동에서 전주 부중으로 본당을 이전한 보두네 신부는 연령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전주 부중에 본당이 설립되자 본당 신부가 있는 곳에서 미사 참례하기가 소원이었던 타지방 신자들이 전주로 이사를 왔고, 본당 신자들의 열성적인 전교 활동으로 짧은 기간 안에 개종자가 많이 생겨남에 따라 전주 본당의 교세는 점차 증가하였다.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발발하자, 보두네 신부는 몇차례 피신을 한 후 복귀하여 1900년 9월 22일에 진안 어은동(현 진안) 본당을 분리 · 설정하여 11개 공소를 이관시켰다. 1908년 5월 5일에 보두네 신부는 오래 전부터 계획했던 성당 건축에 착수하였는데, 공사비는 외국의 원조 없이 보두네 신부 자신이 20여 년 동안 근검 절약하여 모은 돈과 신자들의 신공전(神功錢)이었다. 그리고 설계는 종현(현 명동) 본당 건축 공사를 감독했던 푸아넬(V.Poisnel, 朴道行) 신부가 하였다. 성당 공사가 한창 진행되던 중인 1907년부터 일제의 신작로 신설에 따라 전주의 성벽과 조선 관아 건물들을 철거하게 되자, 보두네 신부는 1909년 7월 남문 밖 성벽을 헐은 돌과 흙을 매입하여 공사에 이용하였다. 1909년 10월 21일에 성당 주춧돌 공사를 완료하였고, 1914년에는 외형적인 완공을 보게되었는데 제대 등 필요한 도구들을 완전히 갖추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두네 신부는 1915년 5월 27일 미사를 집전하던 중 쓰러져 선종하였다.
2대 주임 라크루 신부는 1915년 8월 24일 드망즈(F.Demange, 安世華) 주교의 주례로 종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라크루 신부가 1916년 5월 12일 제1차 세계대전으로 징집되자 임시로 김승연 신부가 본당 사목을 맡게 되었다. 1918년 1월 10일 본당으로 돌아온 라크루 신부는 성당 내 · 외부의 미화 작업, 사제관 신축 등을 추진하여 본당의 면모를 갖추었다. 또한 여교당(학원)을 설립하여 소녀들에게 교리와 한문 등을 가르치는 등 교육 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3대 주임으로 김양홍 신부가 부임한 후 전동 본당은 한국인 사제에 의한 사목이 시작되었다. 김양홍 신부는 1931년 5월 10일에 전라도 감목 대리구가 설정되면서 본당 주임과 감목대리직을 겸임하였고, 6월 18일에는 제대를 마련한 후 드망즈 주교의 집전으로 성당과 제대, 사제관 등의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김양홍 신부는 1932년 8월 학교 교사와 수녀원을 신축하였고, 이듬해 11월 10일 본당 내 학교를 해성보통학교로 인가 신청을 하였다. 1935년 6월 16일 이리(현 창인동) 본당을 분리 · 설립하였으며, 1937년 4월 13일에 전라도 감목 대리구가 전주교구로 승격됨과 동시에, 김양홍 신부가 초대 교구장에 임명되자 전동 본당은 전주교구의 주교좌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4대 주임 김영구 신부는 1937년 8월 학교 교사 4개 교실을 증축하였으며, 9월 8일 성당 내에 대형 십자가비를 건립하였고, 10월 12일에는 본당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도회의 분원을 설치하였다. 1938년 3월 30일에 본당 내 학교를 해성 심상소학교로 개편 창설하였으나, 10대 주임 이상화 신부 재임기인 1945년 4월에는 해성 심상소학교의 교사가 일제에 의해 저금 관리소로 징발되어 학생들이 공립학교로 편입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이상화 신부는 해방 후 전주 시민 초 · 중 · 고 교사를 대상으로 성심학교에서 한글 강습회를 무료로 개최하는 등 국민 계몽에 앞장섰다. 1946년 8월에 성심여학원 설립인가를 받았으며, 1947년 2월에는 성심여학원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11대 주임 이약슬 신부는 1948년 3월 3일에 성심유치원을 개원하였고, 3월 19일에는 성당 강당에 시약소를 설치하였으며, 7월 29일 전주 성심여자초급중학교를 정식 인가 받았다. 그러나 한국 전쟁의 발발로 성당은 인민군의 트럭 정비소로, 수녀원은 인민군의 전신국으로 사용되었고, 성당 제대와 기물 등 성당 내부가 파괴되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후 유엔군의 입성으로 신부들이 구출되고, 성당 복구에 진력하여 성당은 다시 제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전동 본당이 주축이 되어 교구 내의 신심 운동을 전개하였다. 12대 주임 강윤식 신부 재임기인 1955년 5월 교구 내에서는 최초로 레지오 마리애 단체인 '치명자의 모후 쁘레시디움' 이 창단되었다. 그리고 1957년에는 '파티마의 모후 꾸리아' 가 결성되었고, 이듬해 7월 21일에 '죄인의 의탁 쁘레시디움' 이 창단되었다. 한편 1957년 3월 7일에 전주 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된 후, 같은 해 6월 11일 주교좌 본당이 중앙 본당으로 옮겨졌다. 강윤식 신부는 1960년 1월21일에 전동 본당 재속 형제회를 발족시켰고, 2월 19일에는 해성중학교의 설립 인가를 받았으며, 9월 18일에 파티마의 모후 꾸리아가 꼬미시움으로 승격되었다. 이러한 단체들을 바탕으로 전동 본당은 1960년대에 레지오 마리애와 성 프란치스코 재속 3회 등 신심 단체의 활성화에 주력하였다.
14대 주임 김종택 신부는 1966년 4월 8일에 본당에서 관할했던 울음리 공소와 양생동 공소를 수류 본당 관할로 이관시켰으며, 8월에는 인보 성체 수도회 전동 분원을 설립하였다. 15대 주임 이상호 신부는 1968년 1월 1일 서학동 본당과 1968년 10월 1일 노송동 본당을 각각 분리 · 설립하였다. 그리고 1968년 12월 8일에 본당강당과 수녀원, 사무실을 신축 완공하여 본당 환경 재정비에 힘썼으며, 이듬해 10월 21일에는 회원 상호 친목도모와 신학생 장학 제도 등 교회 발전에 봉사하면서 평신도 사도직 수행에 노력하기 위해 전주 신우회를 발족시켰다. 18대 주임 김환철 신부는 1975년 '성전 건립 61주년' 을 맞이하여 다채로운 기념 행사를 개최하였으며, 1978년 4월 29일 효자동 본당을 분리 · 설정하였다.
이처럼 1970년대 교회 내적인 일에 충실하던 전동 본당은 1980년대 들어 교회의 사회 역할을 중시하고 사회참여의 폭을 넓혀갔다. 19대 주임 김병엽 신부는 1980년 12월 1일 본당 내에 한솔야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으며, 1981년 9월 25일에는 성당이 국가 문화재 사적 288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1982년에는 은퇴 신부 숙소 신축을 위한 교구 계획에 따라 구 수녀원을 철거하였다. 20대 주임 김치삼 신부는 1985년에 성당 앞 계단 및 평화상 건립과 함께 성당 정문을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그리고 1987년 6월 23일 교구 사제단 주최로 나라와 민주화를 위한 기도회를 갖고 본당에서 거행하였고, 중앙 성당까지 촛불 행진을 펼치기도 하였다.
한편 1988년 2월 24일 본당에서 개최된 부정 조작 대통령 취임 반대 집회에서 21대 주임 리수현 신부와 김진화 보좌 신부가 경찰들로부터 구타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10일에는 괴한에 의해 성전이 화염에 휩싸이는 수난을 당하였다. 지금도 정확한 화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1980년대 중반 이후 전동 성당이 민주화에 절대적 지지를 보내고, 전북 지역에서 민주화의 기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데에 따른 사건이었다. 리수현 신부는 1989년 12월 3일에 '본당 설정 100주년 기념식' 을 성대히 거행하였고, 이후 성전의 복원과 세월의 흐름에 따라 노후화된 건물의 부분적인 보수 등 장기 계획을 통한 성전 보수 작업에 착수하였다. 22대 주임 김봉희 신부는 5년 여의 재임 기간 동안 성전보수 작업에 주력한 결과 전동 본당은 1990년대 중반을 전후하여 성전 보수 마무리와 함께 훌륭한 조경 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이에 현재 전동 본당은 신자, 비신자 할 것 없이 지역민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으며 시민 공원의 역할까지 함으로써 전주 지역의 대표적인 성당으로 자리 잡고 있다. (→ 전주교구)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천주교 전주교구사》 Ⅰ · Ⅱ, 천주교 전주교구, 1998/ 전동성당 100년사 편찬위원회, 《전동성당 100년사》, 천주교 전주교구 전동교회, 1996/ 전동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사업회, 《전동 본당 100년사 자료집》 1집, 천주교 전동교회,1992/ 《전동 100년》, 천주교 전주교회 전동교회 1991/ 천주교 호남교회사연구소, 《전동성당과 순교자들》, 전동 천주교회 사목회,1994. 〔白秉根〕
전동 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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