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령
教皇領
〔라〕status Pontificium · 〔영〕The states of the Church (Papal st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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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핀 시대(왼쪽)와 1870년 당시의 교황령.
교황의 세속적 지배권이 미치었던 영토. 교황령은 8세 기 중엽에 형성되어 1870년까지 근 천년 동안 지속되었 다. 처음에는 교회가 이미 소유해 오던 로마와 그 주변의 토지, 이른바 베드로 세습령(Patrimonium Petri)에 랑고바 르디족으로 불리던 롬바르디아족이 점령하였던 광대한 영지가 추가됨으로써 발족하였다. 그 범위는 로마와 그 주변에서 시작하여 페루지아(Perugia)를 거쳐 멀리 아드 리아 해안의 안코나(Ancona)를 포함한 펜타폴리스 (Pentapolis)를 거쳐 멀리 북쪽 라벤나(Ravenna) 태수령 (太守領)에까지 미쳤다. 교황령은 중세를 통해 다소 신 축을 거듭하면서 북으로는 토스카나(Toscana), , 파르마 (Parma)와 모데나(Modena), 남으로는 캄파냐(Campagna) 와 스폴레토(Spoleto)까지 확대되었다. 그리고 교황의 아 비뇽(Avignon) 체류(1305~1378)를 전후하여 한때는 남부 프랑스의 일부 지역까지 차지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교 황 율리오 2세(1503~1513) 때를 정점으로 점차 축소되었 다. 나폴레옹 때는 폐지되었다가 1815년 빈 회의에서 복구되었으나 1870년 이탈리아 왕국에 완전히 병합됨으 로써 소멸되었다. 〔역 사〕 교황령의 탄생에서 9세기 중엽까지 : 교황령 이 형성되는 데에는 베드로의 세습 재산, 이탈리아에 대 한 비잔틴 제국의 통치력 쇠퇴, 북으로부터 롬바르디아 족의 이탈리아 침입 등 세 가지 동인(動因)이 작용하였 다. 로마 교회는 콘스탄틴의 종교 관용령(313) 이후 황제 와 귀족들의 기증으로 로마를 위시해서 그 주변에 광대 한 토지와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후에 베드 로의 세습 재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런데 비잔틴 세력 이 약화되면서 민족 대이동과 같은 때 교황들은 로마 주 민들을 돌보는 일을 떠맡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대 그레 고리오 교황(590~604)은 교황령에서 나오는 소득을 가지 고 곤궁에 빠진 로마와 인근 지역의 주민들을 효율적으 로 잘 도왔다. 뿐만 아니라 교황은 그들의 안녕 질서까지 걱정해야 하였다. 그것은 동시에 교황의 정치적 기능의 성장을 의미하였다. 북으로부터 롬바르디아족이 로마를 위협하게 되자 비잔틴으로부터 더 이상 도움을 기대할 수 없음을 인식한 교황은 로마를 군사적으로 보호해야 하였다. 과연 롬바 르디아 왕 아이스툴프(Aistulf)는 751년에 라벤나를 점령 한 후 로마를 위협하였다. 교황 자카리아는 그에게 협상 을 제의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자카리아의 후계자인 스 데파노 2세(752~757)는 비잔틴에 대한 기대를 단념하고 프랑크 왕 피핀(Pipin)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교황은 직 접 프랑스의 풍티옹(Ponthion)으로 가서 피핀을 만나고 이어 퀴에르지(Quierzy)에서 그와 동맹을 맺을 수 있었 다. 이때 피핀은 롬바르디아족을 물리치고 그들이 점령 하였던 땅을 교황에게 증여할 것을 약속하였다(754) 실 제로 피핀은 756년 아이스툴프를 굴복시키고 정복한 영 토(라벤나 태수령, 펜타폴리스, 마키오)를 교황에게 기증할 약속을 다시 하였고, 이번에는 그 약속을 정식으로 문서 로 작성하였다(피핀의 증여 문서). 이리하여 교황령이 탄 생하였다. 그러나 이 약속은 롬바르디아족의 계속된 침 입으로 지켜지지 못하였다. 그러자 피핀의 아들인 칼 대 제는 롬바르디아 왕국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774년 피핀 의 증여를 갱신하였고, 781년과 787년의 협정에서는 교 황령을 더욱 확대시켰다. 그러나 칼 대제는 황제로 대관 된(800) 후로는 교황령을 독일 제국에 편입시키고 직접 주권(dominium eminens)을 행사하였다. 이리하여 교황령 은 프랑크 왕국의 보호령이 되어 버렸다. 물론 칼의 아 들, 루드비히 1세(일명 경건제)는 817년, 로타르 1세는 824년의 새 협정을 통해 피핀의 약속을 새롭게 하는 동 시에 교황의 주권도 회복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 황령은 여전히 독일 제국의 보호령의 신세를 면할 수 없 었다. 9세기 중엽에서 1122년(보름스 정교 조약)까지 : 사 라센의 침입, 귀족들의 발호 등으로 교황은 그 어느 때 보다도 황제의 도움을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카롤링거 왕조의 분열과 멸망, 특히 10세기 초 황제권의 약화로 교황과 교황령이 제대로 보호되지 못하였다. 교황령은 사실상 로마 공작령으로 축소되었는데 그나마도 귀족들 의 손에 들어갔고, 나머지 교황령들은 봉건 영주들의 차 지가 되었다. 교황 요한 22세는 귀족들에게서 해방되고 자 독일 왕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이때 독일 왕국은 유 능한 오토 대제를 맞아 다시 왕권이 강화되고 있었다. 오토 대제는 로마로 와서 귀족들을 진압하고 962년 황 제로 대관되는 동시에 로마 제국을 부활시켰다(신성 로마 제국). 동시에 오토는 이른바 '오토 특허' (Ottonianum)로, 824년의 카롤링거 왕조의 협정에 따라 교황령을 옛 경 계로 복구시켰다. 그러나 또다시 황제를 교황령의 보호 자로 만들었고 마침내는 교황의 임명권까지 황제들에게 위임되었다. 실제로 로마의 혼란과 무질서에서 해방되려 면 당시 교황들에게는 그 방법 외에 다른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황권의 몰락은 1046년을 정점 으로 다시 회복되고 상승되기 시작했다. 레오 9세(1049~ 1054)와 같은 유능한 교황들에 의해 교황령을 다시 장악 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되었을 뿐더러 새로운 증여로 교 황령이 크게 확대되었다. 남부 이탈리아의 노르만인들은 교황의 봉건 주권을 인정하고 자진하여 교황의 봉토(封 土)가 되었고(Benevento) , 북쪽의 마틸다(Matinlda)는 그녀 의 광대한 백작령(Toscana)을 교황에게 기증하였다(1076 년 이후, 그녀가 사망한 1115년부터는 교황령이 됨). 그레고리 오 7세(1073~1085) 교황 역시 노르만인의 지지를 얻어 황제 지배권(성직 서임권)을 강력히 억제할 수 있었다. 그 후에도 그칠 줄 몰랐던 속권과 성권(聖權)을 둘러싼 투 쟁은 1122년 보름스 정교 조약으로 양측이 양보하고 타 협함으로써 장기간의 싸움을 일단 끝내게 되었다. 이로 써 교회는 황제로부터 그간 점령했던 영토들을 돌려 받 았고 주교의 자유로운 선거도 보장받았다. 12~13세기 : 이 두 세기 동안의 교황들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그들의 자주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어떻게 하면 황제의 영향력을 무효화시킬 수 있느냐는 것이었 다. 이를 위해 북으로는 롬바르디아 도시들과의 동맹을 통해 황제의 세력을 막고, 남으로는 나폴리 왕국을 통해 황제의 시칠리아 정책을 좌절시키려 하였다. 그런데 도 리어 국내 사정, 다시 말해서 로마와 교황령에서의 교황 당과 황제당과의 파벌 싸움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황제 의 협조가 불가피하였다. 독일 황제들은 로마를 점령하 려 하였으므로 교황은 그 동안(1181~1191) 로마 밖에서 지내야 하였다. 하인리히 6세(1190~1197)는 남부의 시칠 리아와 동맹을 통해 그것을 제국에 통합시키려 하였다. 그렇게 되면 교황령이 붕괴될 위험에 처하게 되므로 교 황은 그 통합을 전력을 다해 막으려 하였다. 인노첸시오 3세(1198~1216) 교황은 그의 탁월한 통치력으로 황제의 시칠리아 정책에 대항, 교황령에서의 교황의 주권을 회 복시켰다. 그런데 시칠리아 왕 만프레드(Manfred)는 부 왕(父王) 프리드리히 2세의 시칠리아 정책을 계속 추진 시키려 했다. 이에 교황 우르바노 4세(1261~1264)는 앙 주(Anjou)의 샤를을 지지하고 그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결국 샤를이 승리하여 시칠리아 왕이 되었고 그 결과 교 황령에 대한 독일 황제의 위협 중 하나가 제거되었다 (1266, Benevento 회복). 이어 1268년 호언쉬타우펀 왕가마 저 망함으로써 교황령의 회복의 가능성이 더 커졌다. 특 히 보니파시오 8세(1294~1303)는 교황령을 복구시키는 데 공이 컸다. 그러나 이 복구도 교황의 족벌주의로 불안 해지고 한편 황제당과 교황당과의 싸움도 그치지 않았 다. 14~16세기 : 14세기 초에 시작된 교황들의 아비뇽 체류는 교황의 로마 부재(不在)로 교황령을 무정부 상태 로 만들었다. 교황은 간신히 사절들을 통해 교황령을 다 스릴 수 있었으나 그것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알보르노스(Aegidius Albornoz) 추기경은 1353년 소위 '에지디오 법령' (Constitutiones Aegidianae)을 제정하여 교 황령에서 교황의 권위를 강화시키는 데 성공하였다(이 법은 1816년까지 교황령의 기본법이 되었다). 이 시기를 전후 하여 아비뇽과 그 이웃의 브네생(Venaissin)이 교황령에 첨가되었는데, 후자는 프랑스 왕이 기증하였고(1274), 전자는 교황이 매입하였다(1348). 알보르노스의 사망 후 교황령은 다시 혼란해졌다. 그것은 교황의 로마 귀환으 로도 종식되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곧 이어진 서구 대이교(1378-1415)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교황령은 분해되고, 로마는 전쟁 마당이 되어 40년 동안 시장이 20회나 바뀌었으며 그 밖의 도시들에서도 싸움이 그치 지 않았다. 이교가 끝나자 마르티노 5세(1417~31)는 비 로소 교황령을 재건할 수 있었고 볼로냐에서도 교황의 주권이 인정되었다(1429) 그러나 그는 교회 개혁을 위 해 속권의 재정립을 가장 필요한 조건으로 생각하고 그 협조자들을 가족 안에서 찾아 그들에게 봉토를 줄 생각 을 하였다. 이러한 족벌주의(Nepotismus)는 그의 후계자 들에게서 실현되고 르네상스 교황들에게서 성행하였다. 알렉산델 6세에 이르러서는 교황령을 가족들을 위해 독 립된 군주령으로 만들어 줄 정도였다. 그렇지 않아도 인 근 국가 세력의 개입으로 교황령에서도 전쟁이 일어나 평화를 유지하기가 어려웠는데, 족벌주의의 음모와 결탁 은 결국 국내 전쟁까지 일으켜 교황령을 비참한 상태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1503년 율리오 2세가 교황 위에 오 르자 그는 강력한 정부를 조직하여 지방권을 완전히 폐 지하고,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잃었던 영토를 탈환하고, 나아가서 교황령을 모데나(Modena), 파르마(Parma)까지 확대하였다. 식스토 5세(1585~1590)는 교황령에서의 반 란군과 그 지지 세력인 귀족들을 진압하고 그들에 대한 엄벌을 규정함으로써 율리오에서 시작된 교황령에서의 군주 정치 체제를 완성시켰다. 17세기부터 교황령의 소멸까지 : 17~18세기 동안 교 황령은 절대 군주제로 성직자에 의해 큰 어려움 없이 통 치되며 비교적 평온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이 일어 나고 그것이 국제 전쟁으로 확대되자 북쪽의 이탈리아가 프랑스군에 의해 점령되고 독립된 공화국으로 선언되었 다(1797, Tolentino 강화). 이에 따라 이 지역에 들어 있던 교 황령(Bologna, Ferrara, Modena, Romagna 등)이 희생될 수밖에 없었다. 1798년에는 로마가 점령되고 로마 공화국이 선 언되자 나머지 교황령도 양도되고, 고령의 비오 6세 교 황은 프랑스로 끌려가 거기서 사망하였다. 나폴레옹은 비오 6세의 후계자인 비오 7세도 프랑스로 끌어 오게 하 였다. 그러나 결국 나폴레옹은 망하였고 1815년 빈 회 의는 교황령을 거의 복구시켰다. 프랑스 혁명의 여파는 도처에서 자유주의, 입헌주의, 민족주의적 운동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러므로 교황령에 서는 종래의 철저한 군주제를 그대로 고수하기가 거의 불가능해졌다. 교황 비오 9세(1846~1878)는 처음에는 이 러한 요구에 이해를 보이고, 민주적 헌법까지 제정하여 교황령에서 실시케 하였다(1848) . 그러나 그는 곧 그것 을 철회하고 구체제로 돌아갔다. 그런 후 로마에 남아 있기가 어려워지자 남부 이탈리아로 피신하였고 로마에 는 임시 정부가 세워졌다. 나폴레옹 3세는 이 로마 공화 국을 전복시키고 교황을 로마에 복구시켰다(1850). 이 무렵부터 카부르, 가리발디, 엠마누엘 등이 이끄는 이탈 리아 통일 운동(Risorgimento)의 군대들이 남과 북에서 로마를 향해 전진하였다. 당시 로마에는 프랑스군이 주 둔하고 있었다. 1870년 독일이 프랑스를 침략하면서 보 불전쟁(普佛戰爭)이 일어나자, 프랑스는 군대를 로마에 서 철수시켰다. 그러자 이탈리아군은 아무런 저항도 없 이 로마를 점령하고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시켰다. 그러 나 비오 9세는 이른바 '바티칸의 포로' 로 계속 바티칸에 머무르면서 새 상황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새 정부에서 제의한 보정법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제기된 이른바 '로마 문제' 는 해결되지 않은 채 계속 이 탈리아 국가와의 관계를 긴장시켜 나아갔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협상은 제1차 세계 대전 후에야 시작되었 다. 오랜 협상 끝에 마침내 1929년 교황청과 이탈리아 의 파시스트 정부 사이에 라테란 조약이 체결되고, 거기 서 '바티칸 시국' 이란 상징적인 국가의 설립과 더불어 교황의 세속 주권이 인정됨으로써 원만한 해결을 보게 되었다. 〔평 가〕 교황이 그의 영적 임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자주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세속적 영토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해, 그렇다면 교황령의 소유로 과연 교황의 영 적 주권이 보장될 수 있었는가라는 반론이 일찍부터 제 기되었다. 실제로 그간의 역사는 물론 긍정적인 면도 있 으나 대체로는 부정적이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구체적 으로 황제들과의 유혈적인 대립, 속권을 유지하기 위한 교회 징벌의 남발, 지방 행정 당국과의 분규, 재정난에 따른 과도한 조세 등을 들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근세 에 와서는 교황령의 존재가 무엇보다도 이탈리아를 통일 하는 데 큰 장애가 되었다. 뿐더러 교황령에 대한 교황 의 지나친 집착은 대내적으로 교황의 위신을 손상시켰 고, 또한 근대 사상에 대해 개방보다는 그 방어에 더 급 급하게 만들었다. 반면 교황령의 상실은 도리어 교황의 위신을 향상시키고 가톨릭 세계의 일치를 더욱 확고하게 하였다. (→ 교회사 ; 라테란 조약) ※ 참고문헌 M. Brosch, Geschichte des Kirchenstaat seit dem 16. Jahrhundert., 2 Bde, Gotha, 1880~1882/ G. Schnurer, Die Entstehumg des Kirchenstat, Köln, 1894/ L. Duschene, Les premiers temps de I'Etat pontifical, Paris, 1914-4/ F. Hayward, Le dernier siècle de la Rome pontifical 1769~1870, 2 ts., Paris, 1927~1928/ L. Pastor, Geschichte der Päpste seit dem Ausgang des MA., 16 Bde, Freiburg, 1886~1933/ J. Schmidlin, Papstgeschichte der neuesten Zeit, 4 Bde, Münster, 1933~1939/ Seppelt, W.Ulmann, The Growth of Papal Government in the Middle Age, Losangelus, 1955/ Catholicisme 4. 〔崔奭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