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 운동

典禮運動

〔라〕motus liturgicus · 〔영〕liturgical mov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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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 운동의 지도자 마리아라흐 수도원의 헤르베겐 아빠스.

전례 운동의 지도자 마리아라흐 수도원의 헤르베겐 아빠스.

전례의 개혁과 쇄신을 위해 20세기에 성직자는 물론 평신도들이 함께 참여하여 일으킨 운동의 명칭. 교회의 전례에 신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회복시키려는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초기 교회의 전통과 더 조화를 이루고, 현대 신앙인들의 삶에 더 부합하는 전례를 형성하려는 노력이었다.
〔19세기의 가톨릭 전례 부흥〕 시대사적으로 볼 때 19세기 초에 계몽주의에 반대하여 낭만주의가 생겨났다. 낭만주의는 개인적이며 주관적 의미에서, 또한 종교적인 분야에서도 감성과 영혼의 상태를 강조하기에 합리주의에 반대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낭만주의적인 종교상의 모든 본질을 전례 정신에 적용하게 되자 전례의 본질이 전적으로 외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이 시대는 전례를 혁신하기보다는 오히려 예절과 전례를 예술화시키면서 그 가치를 경이와 감탄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이런 시대에 '가톨릭 부흥' 을 추구하였던 것은 계몽주의로 파괴되었던 것을 다시 이루려는 의지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특히 가톨릭 전례 부흥은 본래의 로마 전례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었다.
특히 교회에서 베네딕도회를 중심으로 전례 부흥의 동향이 활발히 일어났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프랑스 솔렘(Solesmes)수도원 원장인 게랑제(P.L.P. Gruéranger, 1805~
1875)였다. 그는 대표적인 저서인 《전례 제도》(Institutio-nes liturgiques, 1840~1852)와 《전례력》(L'année liturgique,1841~1866)에서 전례의 중요성과 아름다움을 명백히 나타내려 하였다. 그는 전례의 신비로운 성격을 강조하였다. 또한 기도 형태나 예식의 모든 변화를 생각하였다. 그는 로마 전례만이 모든 잘못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프랑스의 여러 교구에서 행해지던 갈리아 전례를 아주 강하게 공격하였으며, 그 가운데 많은 성공을 하였다. 이런 노력들은 독일에도 영향을 끼쳤다. 여기서 특별한 공적은 게랑제와 솔렘 수도원이 그레고리오 성가를 연구하여 깊이 탐구하였다는 것이다.
솔렘은 특히 보이론(Beuron) 수도원을 재건하고 혁신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 주역은 베네딕도회의 정신을 이해하기 위해서 1862~1863년까지 솔렘 수도원에 살았던 쾰른의 마우로(Mauro)와 플라치도 발터(Placi-do Walter) 형제였다. 이후 보이론 수도원은 전례 거행과 전례 연구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또한 여러 새 수도원에 이러한 정신이 퍼져나갔다. 이중 벨기에에 있는 마레수(Maredsous, 1872)와 독일의 마리아라흐(Maria Laach,1892), 루뱅 근처의 몽세자르(Mont-César) 수도원들이 20세기 전례 운동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전례 부흥에 있어 괄목할 일은 1884년 보이론 수도원의 수도승이었던 쇼트(A. Schott, 1843~1896)가 펴낸 《로마 미사 경본》의 독일어 번역(Das Messbuch der hl. Kirch, Freibuch)이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미사 전례에 대한 이해와 참여를 위해 수많은 미사 경본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후대 전례 혁신을 위해 중요한 것은 전례사를 다루는 학문적인 활동이었는데, 교부들의 저작에 대한 편집과 옛 문헌에 대한 작품들과 전례에 대한 많은 필사본들이 만들어졌다.
〔20세기 전례 운동〕 제1기(1909~1914) : 솔렘의 수도원장 게랑제의 전례 운동에 대한 사상이 20세기에 전파되어 저명한 지식층 인사들이 이 사상에 가담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20세기 전례 운동의 바탕을 이루게 되었다. 특히 교황 비오 10세(1903~1914)의 문헌 단 한 귀절이 전례 운동의 사목적인 측면의 시작을 위한 기초를 놓았다. 자의 교서 <트라 레 솔레치투디니>(Tra le Sollecitu-dini, 1903. 11.22)에서 교황은 거룩한 신비들과 교회의 공적이고 장엄한 기도에 있어 능동적인 참여를 주장하였다. 전례에 대한 신자들의 '능동적인 참여' 란 표현은 벨기에 몽세자르 수도원의 보뒤앵(L. Beuduin, 1873~1960)신부에 의해 본격화되었다.
그는 교황 비오 10세의 정신을 따라 20세기 전례 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다. '전례의 민주화 운동'의 필요성에 대해 역설하였던 그는 성직자의 전용물이었던 전례가 하느님의 모든 백성과 관련된 것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하지만 당시 벨기에 가톨릭 교회를 이끌던 인사들은 그의 이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에 보뒤앵 신부는 대표적인 평신도로 지식층에 널리 알려진 쿠르트(G. Kurt, 1847~1916) 교수를 찾아가 자기의 생각을 피력하였다. 쿠르트 교수는 1909년 11월 23일 벨기에 말린(Malines) 대교구 가톨릭 신자 모임의 발표를 통해 보뒤앵 신부의 사상을 전달하였다. 그는 여기서 미사 경본에 대한 신자들의 고충을 폭로하면서 "이제는 모든 신자들을 위하여 미사 경본에서 7개의 봉인을 떼어야 하며, 사제가 제대에서 무엇을 기도하는지 모든이가 알아야 한다"라고 외쳤다. 이로 인해 보뒤앵 신부의 사상이 새로운 발전을 찾게 되었다.
보뒤앵 신부는 매 주일 미사 경본과 주일 저녁 기도를 소수의 지식층뿐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해 모국어로 번역하여 전파할 것과 가능한 한 신심의 바탕을 전례 생활로부터 시작하도록 할 것을 역설하였다. 즉 개인 신심에서 전례 생활로 방향을 바꾸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연차 모임과 피정을 통하여 교회 안에 있는 성가대를 강화 · 육성할 것과 전례 교육을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방법으로 주일 미사 경본을 골자로 한 월간 잡지를 발행하고, 전례가 신자들의 기도라는 것과 강력한 일치를 맺는 것임을 가르치고, 종교적 교육의 광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에 따라 1911년부터 전례 잡지인 《전례 생활》(La Vie Liturgi-que)이 출판되었다.
제2기(1914~1918, 1931~1943) : 보뒤앵 신부의 사상이 활발히 전개된 곳은 벨기에보다 독일 지방이었다. 그 중심지는 독일 서부 라인란트팔츠 주의 코블렌츠(Koblenz) 인근에 있는 베네딕도회의 마리아라흐 수도원이었다. 그리고 이곳의 아빠스로 1913~1946년까지 재임하였던 헤르베겐(I. Herwegen)은 지도자로서 큰 역할을 하였다. 이 수도원을 중심으로 지식인들이 모여 전례를 수도자들과 함께하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성주간을 수도자들과 함께 지냄으로써 실질적인 전례 운동을 하였다. 지식인들이 모인 이유는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정치적인 상황으로 야기된 질서에 대한 소망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적인 혼란에 질서와 평화를 주는 영적인 감미로움을 전례를 통해서 얻으려고 하였다. 이것은 성직자들만의 전유물이었던 전례가 평신도와 연관을 맺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그 당시 낭만주의에 젖어 있었기에 모였다고도 하지만, 여기에 참여한 지식인들 중에는 그 경지를 초월한 사람이 많았다. 대표적인 인물인 독일의 재상이었던 브류닝(H. Bruning)과 프랑스의 수상을 역임한 슈리만(R. Schrimann)은 후에 사회 재건 운동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사람들은 정신적인 빈곤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재무장을 하여야 한다는 절박한 상황 인식을 하게 되었다. 이때 지식인들이 다시 모여 이 혼란을 타개하고자 노력하였다. 전례 문제와 관련되어서도 혼란을 겪는 시대였기에 전례와 관련된 신학적인 연구, 역사 연구가 필요하였다. 이에 따라 1919년부터 《전례 역사 탐구》라는 학술 연구지가 발간되었다. 1921년 마리아라흐 수도원에서는 《전례학을 위한 연간 잡지》(Jahrbuch für Liturgiewissenschaft)의 초판을 출판하였는데, 제2차 세계대전으로 정간되었다가 1950년에《전례학을 위한 문고》(Archiv für Liturgiewissenschaft)라는 명칭으로 속간되었다. 이 당시 전례 신학의 방향을 정립한 학자는 베네딕도회 회원인 카셀(O. Casel, 1886~1948)과 교수 자격 논문으로 <전례적 기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위치>(Die Stellung Christi im liturgischen Gebet, 1925)를 발표한 예수회의 젊은 신부이자 전례 학자인 융만(J.A. Jung-mann, 1889~1975)이었다.
이후 '전례의 민주화' , 즉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를 전례에 능동적으로 참여시키기 위해 사목적인 관점에서 전력을 다해 실천한 사람은 오스트리아 아우구스티노회 클로스터노이부르크(Klosterneuburg) 수도원의 수사 신부였던 파르쉬(P. Parsch, 1884~1954)였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중에 군종 신부를 하면서 군인들이 성서와 전례 생활등의 영적인 면에서 멀어져 있음을 깊이 체험하였다. 이런 체험을 바탕으로 후에 그는 클로스터노이부르크 수도원을 중심으로 대중 전례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평범한 신자에게 전례를 교육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전례 운동을 계속 지탱하게 한 결정적인 요인은 '가톨릭 청년 운동' (Katholisch Jungmännerverbandes)이었다. 이 운동에 참여한 이들은 자신들의 정신적 수양을 전례 생활에서 찾았으며, 전례에 대해 제대로 알고 사랑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이 운동으로 전례 행사는 젊은 청년들, 특히 젊은 사제들의 활동무대가 되었으며, 이 단체들은 독일 국경을 넘어서 조직화되었다. 특히 이 운동에 공헌을 한 인물은 과르디니 (R. Guardini, 1885~1968)와 볼커(L. Wolker, 1887~1955)였다. 그러나 이 청년 운동은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박해와 시련를 받았다. 그로 인해 전례 운동과 청년 운동은 시험대에 올라섰지만, 그리스도교적인 청년들의 단결과 결의로 발전의 가능성은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전례 운동의 선구자들이 바라던 기대는 어긋났다. 1930년을 전후하여 전례 운동을 활발히 추진하던 열성을 재생시키고자 하였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더욱 침체 상태에 빠졌으며 교회 안에서 찬미의 노래 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한편 전례 운동을 이단시하는 일부 모임이 만들어져 교황청에서 전례 운동을 하지 못하도록 제재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전례 운동의 성숙을 위해서는 횡적 성장과 동시에 위로부터 권위 있는 기관에 의한 종적 성장이 동시에 필요하게 되었다.
제3기(1943~1955) : 20세기에 교회 전체가 횡적으로 성장하면서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를 일으켰을 때,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사목과 전례 운동이 처음으로 종적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 후 40년 동안 침묵을 지키다 교황 비오 12세(1939~1958)가 회칙 <메디아토르 데이>(Mediator Dei, 1947. 11. 20)를 반포하여 다시 전례 운동에 대한 방향과 지침을 주었다. 이 회칙이 반포되자 전례 운동을 반대하던 자들은 이제 가톨릭 교회 안에 불안전한 것이 없어질 것이며, 전례 운동은 종지부를 찍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물론 이 회칙에서 교황이 1940년을 전후하여 전례 운동이 초래한 무질서한 상태, 시기상조적인 발전과 기대를 책망하고 개인적으로 생각해 낸 모든 전례 행사를 금한 것은 당연하였다. 그러나 회칙의 근본 정신은 전례 운동을 염려한다는 것과 전례 운동의 이상을 살리며 동조하고 환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회칙에서 교황은 '전례의 능동적 참여' 를 주장하였으며, 특히 전례 행위에서 '신자들의 위치와 역할' 에 대한 신학적 고찰을 새롭게 상기시켰다. 즉 전례 안에서 '하느님 백성의 역할' 을 강조하고 있다.
이 회칙으로 20세기 전례 운동이 역사적인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즉 성직자들은 전례 운동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갖고 호감을 가지면서 전례의 횡적 성장을 가능하게 하고 촉진시켰다. 또 한편으로는 불안정한 전례 운동의 긴장 상태에서 전례 혁신 활동의 질서를 잡아가며 발전하게 되었다.
또한 이 회칙에 준하여 전례에 대한 학문 기관들이 생겨났다. 파리에서는 1943년 '사목 전례 중앙 연구원' 이, 로마에는 베네딕도회가 운영하는 '안셀모 전례학부' 가, 독일에는 1947년에 '트리어(Tier) 전례 연구소' 가 생겨났다. 이러한 연구소들을 중심으로 전례 문제가 연구 · 토의되고, 국제적인 전례 모임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제4기(1951~1959) : 이 시기에 전례 쇄신을 위한 국제모임과 전례 운동의 결산이 이루어졌다.
① 제1차 모임 : 1951년 7월 마리아라흐 수도원에서'로마 미사 경본' 이란 주제로 이루어졌다. 이 자리에서 1951년 2월 9일자로 개정된 부활 예식에 대한 각국의 결과 보고가 있었으며, 부활 성야 미사로서 부활의 상징을 최대로 표현하자는 점에 의견이 모아졌다. 그리고 미사 경본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이 제시되었다. 즉 반복을 피하자는 의견이 있었는데, 예컨대 사제는 교우나 합창단이 하는 부분을 반복하지 말자는 것이다. 또한, 층하경(화답송)의 새로운 형식을 모색하고, 말씀의 전례는 제대에서 하지 말고 강론대에서 할 것과 미사 때 본기도는 원칙적으로 하나만 하고 성서 봉독을 모국어로 할 것을 주장하였다. 주기적인 성서 봉독서를 만들고, 신경은 주일과 직결되기에 너무 자주 미사에 넣지 말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리고 성서 봉독 후 예물 봉헌 예식을 복구하고 감사송을 대폭 늘리며, 사제는 창미사 때 감사송 끝에 있는 '거룩하시도다' 가 끝난 후 미사를 계속할 것, 영성체전 고백의 기도 및 그에 따른 기도문을 삭제하고, 미사의 마지막 성서인 요한 복음(1, 1-14)을 폐지하고 사제의 강복으로 미사를 끝마칠 것을 결의하였다.
② 제2차 모임 : 1952년 10월 프랑스 북동부 알자스(Alsace) 지방의 오딜리엔베르(Odilienberg)에서 '현대인과 미사' 란 주제로 모임이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서 프랑스와 독일 지방을 중심으로 한 현황 보고가 있었으며, 성화되는 세계와 비그리스도화되는 세계의 사이에 놓인 간격을 의식하고 그 해결 방법을 모색하였다. 그리고 미사의 상징들이 지닌 의의에 대해 논하였다.
③ 제3차 모임 : 1953년 9월 스위스 남부의 루가노(Lugano) 시에서 '전례 거행에서 신자들의 능동적 참여'라는 주제로 개최되었다. 이 모임에서는 미사의 독서를 모국어로 봉헌하고, 독서의 확장을 강조하며, 전례 거행의 각 구성 요소 및 새로운 형태를 모색하자고 결의하였다. 특히 전교 지방에서의 미사 중 독서, 층계송(화답송)뿐 아니라 신자들의 기도(보편 지향 기도)를 비롯해 신자들에게 해당되는 모든 부분을 그 지역 모국어로 봉헌하는 것을 검토하였다. 성주간 예식의 변경과 그 의의에 대해서도 논하였다.
④ 제4차 모임 : 1954년 9월 루뱅 근처의 몽세자르 수도원에서 개최되었는데, 이 모임은 특별한 주제가 없었다. 오직 학술적인 연구를 하자는 목적으로 개최되었다. 특히 미사의 독서 주기와 합동 미사에 대한 연구와 전교 지방과 동방 교회에 대한 연구를 촉진시켜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⑤ 제5차 모임 : 1956년 9월 이탈리아 아시시(Assisi)에서 '시간 전례' 에 대한 주제로 개최되었다. 이 모임에서 교회의 성무 일도에 대한 역사적 연구가 필요하며 로마 성무 일도가 쇄신되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신자들의 능동적 참여를 시간 전례와도 관련시켜야하고, 시간 전례와 신자들의 신심 행사와의 관계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⑥ 제6차 모임 : 1958년 9월 스페인의 몽세라트(Montserat) 수도원에서 '교회의 성사' 란 주제로 개최되었다. 이 모임에서는 입문 성사인 세례, 견진성사의 중요성과 그 의의를 표현하는 새로운 예식을 모색하였다.
⑦ 제7차 모임 : 1960년 2월 독일 뮌헨(München)에서 "동서 교회의 성찬례 및 합동 미사 형태 연구" 란 주제로 개최되었다. 참석자들은 신자들의 능동적 참여를 위한 성찬례의 거행 형태와 교회 건축의 양식 문제에 대해 논의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공의회 이후의 전례 혁신〕 전례 헌장의 역사적 의의 : 전례 쇄신을 표명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제1급의 쇄신 공의회로 평가되고 있다. 그 이유는 경신례가 교회의 중대한 행위로서 교회 자신의 표현 및 완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례의 쇄신은 곧 교회의 쇄신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최초로 공포한 문헌인 <전례 헌장>(Sacrosanctum Concilium, 1963. 12. 4)이 나오기까지 전례의 쇄신을 위한 연구와 노력이 계속 이어졌었다. 전례 역사에서 전례 부흥 운동은 1909년 시작된 전례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1909~1963년까지 변천의 시대, 노력의 시대, 도약의 시대, 연속적인 혁신의 시대였다. 그러한 노력 중에서 가장 기억할 만한 것은 교황 비오 12세의 전례 개혁이었다. 그리고 <전례 헌장>이 선포되었을 때 드디어 전례 운동의 깊은 의미가 결정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로써 전례의 역사적인 신기원이 시작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전례 헌장>은 획기적인 역사적 사건이며, 교회를 더욱 명확히 표현해 주고 쇄신하고자 하는 공의회의 전반적 임무에 부합하는 아름답고 특색있는 결실이었다.
전례 헌장의 목적 : <전례 헌장> 자체가 그 목적을 제시하고 있다. 즉 '전례의 쇄신과 증진' (전례 3항)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전례는 교회 생활의 표식일 뿐 아니라 교회 생활 그 자체라 할 수 있고, 교회 생활 최고의 형식과 방법이다. 예컨대 복음 선포도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지만, 교회나 각 개인을 위해 폭넓게 완성되는 것은 전례안에서이다. 결국 신앙의 행위들은 전례 안에서 종결점을 찾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경신례인 전례의 쇄신과 육성은 교회의 생활면 즉 교회 자체의 쇄신이요, 증진이라 보아야 한다. 그래서 공의회는 교회를 쇄신하고, 쇄신을 통해 더욱 믿을 수 있고 효과를 낼 수 있도록 하였다.그리고 이런 쇄신은 단지 전례만을 개혁하려는 것이 아니라, 전례를 통해 인간들까지 개혁하기를 원했다. 이것이 바로 공의회의 전반적인 목적이었다. 바로 이 목적에서 전례를 도입하고 전례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하게 된 것이다.
<전례 헌장>의 목적뿐만 아니라 공의회의 목적을 서론에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거룩한 공의회는 신자들 사이에서 그리스도교 생활을 나날이 발전시키고, 변경할 수 있는 그 제도들을 우리 시대의 요구에 더 잘 적응시키고,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이의 일치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증진하고, 또 모든 이를 교회의 품으로 부르는 데에 이로운 것은 무엇이든 강화하려고 하므로, 특별히 전례의 쇄신과 증진을 위한 배려도 자기 소임으로 여긴다" (1항).
<전례 헌장>이 이 같은 총체적인 목적하에서 언급한 중요한 관점들은 다음과 같다. 즉 전례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하면서 "그 효과는 교회의 다른 어떠한 행위와 같은 정도로 비교될 수 없다"(7항)라고 하였다. 그리고 신자들의 능동적인 참여 촉진(14항), 전례학과 전례 교육에 대한 재평가(15~19항), 전례에 대한 일반적인 개혁(21 ~24항)을 언급하였다. 또한, 전례에서 성서 독서의 수 증가와 평가에 특별한 중요성이 주어졌는데, "전례거행에 더 풍부하고 더 다양하고 더욱 적합한 성서 봉독이 마련되어야 한다" (35항)라고 하였다. 나아가 전례의 공동체적인 성격과 예식의 단순성 및 명백성에 관한 규정(34항)을 하면서 민족의 특성과 전통에 적응시키는 것에 대한 규정(37~40항)도 밝혔다.
공의회 이후의 전례 혁신 : <전례 헌장>이 제시한 기본적인 정신에 기초하여 새로운 전례서들이 발간되었다.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실현하는 것이 새 전례서들과 이에 상응하는 예식들이 지닌 최종 목표이다. 이를 위해 전례 주년을 재구성하였는데, 《로마 전례력》(1969)과 《로마 미사 경본》(1969~1970) 및 《시간 전례서》(1970~1971)에 수록되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활 전야를 포함한 파스카 삼일의 거행으로써, 이 파스카 삼일 이후에 성령 강림 주일까지 50일간 부활 시기를 지낸다. 성인 축일들은 전례 시기 즉 사순, 부활, 대림, 성탄에 종속되어 있다. 전례 주년에는 축일의 등급이 부여되어 있기에 대축일, 축일, 의무 기념, 자유 기념 등을 큰 어려움 없이 성인들의 축일로 지낼 수 있다. 전체 교회에 중요성을 갖는 성인들의 경우에만 그 축일이 전(全)교회의 의무 축일이 되며, 다른 성인들의 경우 그 성인들과 특별한 관계를 갖는 지역 교회만이 전례를 지낸다. 이 같은 전례 주년에 맞추어 모든 신자는 능동적으로 성찬례의 공동 전례에 참여하도록 초대받는다. 또한 가능한 한도 내에서 시간 전례에도 참여할 것을 교회는 권고하고있다. 평신도 개인, 또는 단체 특히 가정 공동체가 실질적으로 드릴 수 있도록 시간 전례가 재편되었다.
시간 전례는 시편을 4주간으로 배열하고 각 기도 시간을 더 합리적으로 나눔으로써, 각 기도 시간을 제 때에 드리면 하루를 성화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같이 실질적으로 기도드릴 수 있도록 다듬어진 시간 전례는 독서의 기도 시간에는 성서 독서를 잘 배분하고 그 외의 기도 시간에도 수많은 성경 소구들을 배치하여 더욱 풍부해졌다. 이와 비슷하게 성사들의 전례도 새로이 정비되고 풍부해졌다. 즉, 입문 성사인 세례 · 견진 · 성체성사가 긴밀한 관련을 갖고 하나의 성사처럼 되었다.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도 정비되었고, 성품성사는 부제 · 사제 · 주교에 관한 고전적 등급이 강조되었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교 교회 생활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준성사들도 재정비 되어 성당 축성과 수도 서원 예식 등도 내용이 풍부해졌다.
이 같은 광범위한 개혁은 그리스도의 파스카로 인한 구원 행위, 즉 죽음과 부활을 공동체적으로 지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준 것이다. 즉 파스카 신비가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와 닮아가는 과정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천이자 그 정점이 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공식적인 전례 용어인 라틴어 본문들을 각 지역의 언어로 번역해야 할 쉽지 않은 과제를 안고 있는 각 지역 교회는 주님을 증거하고 그분이 다시 오심을 희망하는 가운데 믿는 이들의 구원을 위하여 부활의 신비를 삶 안에서 드러낼 수 있도록 이 모든 것을 거행하고 실현하는 임무를 지닌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은 전례로 형성되며, "전례를 통하여, 특히 거룩한 성찬의 희생 제사에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므로 , 전례는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신비와 참 교회의 진정한 본질을 생활로 표현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는 데에 가장 크게 이바지한다"(전례2항). (→ 게랑제 ; 과르디니 ; <메디아토르 데이> ; 베네딕도회 ; 보뒤앵 ; 솔렘 ; 시간 전례 ; 융만 ; 전례 ; 전례서 ; 전례 주년 ; <전례 헌장> ; 축일표 ; 카셀)
※ 참고문헌  AA.VV., Nuovo Dizionario di liturgia, Roma, 1984/ㅡ , Scientia liturgica Ⅰ Introduzione alla liturgia, Edizioni Piemme,1998/ Enrico Cattaneo, Ⅱ culto cristiano in Occidente, Roma, 1978. 〔鄭義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