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 음악

典禮音樂

〔라〕musica liturgica · 〔영〕liturgical mu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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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양인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하는 천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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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양인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하는 천사들.

전례의 본질적 구성 요소로 책임 한계가 분명한 유기적 교회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을 공동으로 기념하는 감사와 찬미의 축제 음악. 일명 전례 노래(Litur-gischer Gesang) 혹은 제대 노래(Altargesang)라고도 한다. 미사와 시간 전례, 그리고 칠성사에 사용되는 전례 음악은 크게 예술적 전례 음악과 대중적 전례 음악으로 나뉜다. 전자는 전통적인 그레고리오 성가와 전례적 다성 음악을, 후자는 신자 공동체를 위한 자국어 장절 성가를 의미한다. 종교개혁 이전에도 전례에서의 사용이 암묵적으로 허락되었던 자국어 성가는 신자들의 '능동적인 전례 참여' (participatio activa)를 강조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의 정신에 따라 현재 매우 폭넓게 애창된다. 예술성과 대중성은 전례 음악의 두 얼굴이다.
전례 음악은 원칙적으로 가사, 곧 말씀이 지배하는 성악 음악이다.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는 '음악을 말씀의 시녀' (musica ancilla Verbi)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말씀 중심적 전례 음악관은 오늘도 유효하다. 그러나 전례 음악의 품위를 제고하기 위하여 전례 음악과-성체 현시, 성체 거동, 성체 강복, 십자가의 길 등 전례 밖 기도행사에 사용되는-비전례 음악을 구분한 공의회의 정신은 실제 연주에서 거의 지켜지지 않는다. 그러기에 전례 음악은 이러한 구분 이전의, 즉 전례 음악과 비전례 음악 모두를 포괄하는 교회 음악(musicaecclesiastica) 혹은 성음악(musica sacra)의 큰 범주 안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기능과 목적〕 '전례' 란 의미를 지닌 라틴어 '리투르지아' (liturgia)는 '레이토우르기아' (Λευτουργία)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하였는데, 이 단어는 구빈 사업 등 백성을 위한 공적인 봉사를 의미하였다. 그리스어 성서는 이를 사제들의 예배 행위로 의역하였다. 사제들의 예배 행위가 백성을 위한 봉사라는 생각에서였다. 가톨릭 교회의 전례는 "교회 활동의 정점이자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서"으로(전례 10항),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이미 구원 받은 하느님의 백성 공동체가 자신을 창조하고 영원한 삶을 살게 하는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공적인 경신례이다. 교황 비오 12세(1939~1958)는 "전례 음악은 그 선율의 움직임과 음악 고유의 힘을 통해서 신자 공동체의 기도를 보다 생생하고 열정적인 것으로 만들어 삼위 일체이신 하느님께 보다 힘 있게, 보다 열심히 또 보다 효과적으로 찬미와 기도를 바칠 수 있게 한다" 라고하였다(<성음악 훈령> 28~29조). 나아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례 음악의 목적을 하느님의 영광 찬미와 신자들의 일치와 성화로 규정하며 전례의 목적과 일치시켰다(전례 112항).
전례 음악의 필요성은 '역사적 현재성' , '공동체성' , 그리고 '축제성' 이라는 전례의 속성 자체에서 요청된다.'역사적 현재성' 은 신자 공동체가, 예컨대 세례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현실적으로 참여하고 성체성사를 통하여 이를 실제로 재현함을 뜻한다. 가톨릭 전례는 명상을 위한 놀이나 구원사에 대한 단순한 회상, 상징적 현재성을 넘어선다. '공동체성' 은 하느님의 인간 창조와 구원이 본질적으로 공동체적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으로 묶여진 신자 공동체는 그리스도와 머리이고 지체라는 신비체로 완전결속되기 때문에 개인적 차원의 전례 행위라도 항상 공동체적 의미를 지닌다. 마지막으로 '축제성' 은 전례가 그 자체로 화려하고 장엄함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특히 '공동체성' 과 '축제성' 은 지금 여기의 신자 공동체가 함께 노래하며 만드는 장엄한 전례 음악을 통하여 비로소 완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례 음악은 미사나 시간 전례 등 전례의 순서와 규정에 따라 구체적 형상을 갖는다. 그리고 전례와 전례자 그리고 신자 공동체(혹 성가대)의 삼위 일체적 협력에 의하여 효과를 낸다(전례 28항). 전통적으로 낭송식(accentus)음악과 노래식(concentus) 음악으로 구분된다. 본래 그레고리오 성가의 양식적 차이를 구분하던 이 전통은 현재 전례 음악의 일반 규범으로 되어 있다. 전자는 전례자의 독창, 전례자와 신자 공동체의 응답식 대화, 독서 및 복음 낭독 등 전례적 레치타티보(recitativio) : 말의 리듬과 강세를 모방 · 강조하는 독창에 간단한 화음 반주를 곁들인 노래 양식으로 16세기 말~17세기 초에 발전했음) 형식이다. 유대교의 시편 성가(Psalmody)에서 유래된 이것은 낭송음(tenor)에 몇 개의 장식적 음들을 추가한 형태다. 음악은 가사에 종속적이고, 선율은 가사의 형식이 엄숙할수록 더 장식적이다. 후자는 선율성이 강한 노래를 뜻한다. 예술적 성가와 실용적 대중 성가, 즉 본격적인 그레고리오 성가와 전례적 다성 음악 그리고 신자 공동체의 자국어 전례 성가 등 낭송식 음악이 아닌 모든 것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는 찬가(hymnus)에서 발전한 것으로, 흔히 한 음절에 한 음이 오는 음절적 노래(sillabic), 몇 음들이 붙는 노이마 노래(pneumatic) , 많은 음들이 붙는 멜리스마 노래(melismatic)로 구분된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시대의 고유한 음악 언어로 계속 창작되기 때문에-변화 없이 전승되는 낭송식 음악과 달리-다양한 양식적 틀을 갖는다.
전례 음악의 연주 방식은 원칙적으로 교창(交唱)이다. 교창은 본래 시편 성가와 그레고리오 성가의 연주 방식이었으나, 현재 전례 음악의 중요한 전통으로 자국어 성가를 포함한 전례 음악 전반에 적용된다. 전통적으로 교창은 독창자가 있고 없음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즉, 독창자와 합창단이 번갈아 노래하는 응답송적(應答頌的, responsorial) 교창과 독창자 없이 두 개의 합창 그룹(혹 신자 공동체)이 교대로 노래하는 대창송적(對唱頌的,antiphonal) 교창이다. 예컨대 통일 성가 편찬위원회가 펴낸 《가톨릭 성가》(1985)에서 이문근(李文根, 1917~1980) 신부가 작곡한 세 가지 한글 미사곡들(315~328)은 성가대와 신자 공동체의 교창이 가능하도록 창작 단계부터 배려되었다. 물론 사제와 교우로만 나누고 있는 김대붕(306~309)과 손상오(310~313)의 미사곡들도 교창을 할 수 있다. 전례 음악은 교창 방식의 연주로 전례의 목적에 보다 효과적으로 기능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음악은 언어와의 긴장 안에서 생성된다. 음악은 일상의 언어와 그 안에 담긴 정신을 예술적 언어로승화하며, 언어의 기능성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한다. 언어는 전례에서 불변하는 의미로서의 '말씀' 이다. 언어는 이 '말씀' 을 통해 미학적-자율적 범주를 벗어나 전달하려는 내용을 명시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말씀' 이 곧 음악은 아니다. 따라서 전례 음악은 그것을 만들고, 그것으로 남아 있게 하는, 창작자의 예술적-전례적 태도와, 수용자의 신앙적-음악적 정서에 의존적이다. 그러므로 전례 음악에 대한 서술은 하느님 백성의 교회관, 전례관, 음악관 등 신학적 사고에 대한 성찰을 전제로 한다. 실제로 이들은 전례 음악을 지속적으로 변화시켜 왔다.
〔역 사〕 전례 음악은 최후 만찬 때 부른 '찬송가' 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찬송가를 부른 다음 올리브산으로 떠나갔다"(마태 26, 30 ; 마르 14, 26). 깊은 신뢰 속에서 부른-아마도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같은 방식으로 불려졌던 시편 성가로 추정되는-이들의 노래는 전례 음악의 전형이다. 몇 장을 노래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찬송가' 는 적어도 아래의 일곱 과정을 거치며 본격적인 전례 음악으로 발전했다고 여겨진다. 첫 번째, 새로운 축일의 제정 등 특별한 목적을 위한 기도문들을 만들고, 이것들을 실용적 차원에서 하나의 기도서로 묶었다. 두 번째, 매년 반복되는 교회 축일들을 중심으로 일년 단위의 전례력을 제정하였다. 세 번째, 각각의 축일에 맞는 독서를 성서에서 발췌, 확정하였다. 네 번째, 시편성가 창법의 체계화와 함께 특정 시기와 날들에 사용하도록 시편 전체를 정리 · 확정지었다. 다섯번째, 성찬례의 법제화와 함께 그 준비로써 말씀 전례를 마련하였다. 여섯 번째, 동방 교회와 북 · 서유럽의 고유한 전례 양식이 나타났다. 일곱 번째, 전례의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하여, 낭송 부분(accentus)과 노래되어야 하는 부분(concentus)을 확정하고, 적합한 가사를 선택하거나 새로 작시하여 본격적인 전례 음악을 작곡했다. 이러한 발전적 변화는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로마 등 여러 도시에서 거의 동시에 진행되었다. 이 시기의 전례 언어(가사)는 그리스어, 시리아어, 곱트어, 라틴어 등 다양했다. 전례 음악도 로마 교회와 선교 지역 교회들이 서로 달랐다.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전례 음악을 비교하는 것은 쉽지 않다. 로마 전례의 공식 언어였던 그리스어가 4세기에 라틴어로 대체되면서 기존의 가사와 음악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다만 전례의 기본 구조가 이미 확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례 순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시간 전례의 주기에서, 그리고 각 기도 시간에 배치된 동일 가사에서도 드러난다. 예를 들어, 시편 148~150편은 아침 기도의 마지막 부분인 미사에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동방 교회가 찬미가를, 서방 교회는 발췌한 성서 구절, 특히 시편을 중심으로 시간 전례를 구성한 것은 두 전례 내지 전례 음악의 다른 점이다.
초대 교회 : 초대 교회의 전례 음악은 사도 바오로에 의해, 신앙 고백의 노래와 영적인 송가(Oden)로 구분된다(1고린 14, 15). 전자는 전통적인 공동체 노래로 이성적이고(1디모 3, 16 ; 필립 2, 6), 후자는 개별적 정서 표현을 강조하는 새로운 노래로 감정적 · 주관적이다. 이 두 갈래는 전례 음악의 하느님 중심적 방향과 인간 중심적 방향을 지적하며, 혹은 대립 · 마찰하고 혹은 화합 공존하며 전례 음악에 생명력을 부여했다. 예컨대 그리스-로마의 전례 음악은 콘스탄틴 대제(306~337)의 밀라노 관용령(313) 이후 교세 확장 과정에서 선교 지역들의 고유한 음악 문화를 만났다. 이때 교부들은 그리스-로마식 전통을 보호하기 위하여 '천사들의 소리' 를 전례 음악의 이상으로 선언하고 주관적 · 감정적 노래의 사용을 엄하게 경고하며, 심지어 음악 전문가를 교회 밖으로 추방시킬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히폴리토법전 12조). 암브로시오(339~397)는 플라톤의 도덕적 음악관(Nomoi Ⅱ, 5. 8. 9.11 ; Politeia Ⅲ, 8. 10)의 영향 아래-아리우스주의자들의 찬가(Carmen Hymnorum)를 공격하며-서방 교회 처음으로 언어와 선율이 조화를 이루는 찬미가(Te Deum, 386)를 만들었다.
한편 아우구스티노(354~430)는 저서 《음악론》(De Mu-sica, 388~391)에서 리듬을 측정 가능한 시간의 단위, 곧'수' (數)로 규정하고 음악을ㅡ언어와 구분되는ㅡ감정의 표현이라 하였다. 그래서 그는 음악이 하느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도록 한다고 주장하였다(《고백록) Ⅸ,6, 7 ; Ⅹ, 33). "노래하는 사람은 두 번 기도한다" (Bis oratqui cantat)라는 말로 전례 음악의 기도적 기능을 강조한 그는 인간이 감각적 미(美)의 체험을 통해 차원높은 정신적 미로 나아간다며 '소리나는 음악' 에서 '소리나지 않는 음악' 으로, 음악의 '외적 들음' 에서 '내적 들음' 으로의 전이를 강조하였다. 그는 가사 없는-알렐루야의 마지막 (Jubilus)ㅡ부분을 "더 높은 단계로의 움직임"으로 파악하였다. 피타고라스(기원전 580?~500?)의 음악관에 뿌리을 두고 있는 아우구스티노의 이러한 수학적-감정적 음악 사상은 암브로시오의 도덕적 음악관을 크게 약화시키며 후대 교부들의 전례 음악적 사고를 지배하였다. 예를 들면 보에시우스(AM.T.S. Boethius, 470/475?~524), 이시도로(lsidorus Hispalensis, 560?~636), 마우로(Maurus, +856)는 음악을 하느님의 창조와 결부시키며, 하느님의 의지가 조화(harmonia)된 소리 안에서 표출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들은 음악을 우주의 음악, 인간의 음악, 도구적 음악으로 구분하며, 음악이 하느님의 중요한 창조 사업 가운데 하나로 전례의 첫째 자리를 차지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루터(M. Luther, 1483~1546)에 의해 프로테스탄트의 교회 음악관으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9~13세기 : 전례 음악은 일차적으로 그레고리오 성가(Cantus Gregorianus)를 의미한다. 여기서 일차적이란 그레고리오 성가가 전례적 다성 음악과 자국어 전례 성가에 앞선다는 의미이다. 이 성가는 선법적이고 단성부다. 선율은 한 옥타브의 음역 안에서 움직인다(작은 예외는 가능하다). 가사는 라틴어 전례 기도문이고( '기리에' 와 몇 노래는 그리스어다. 이 예외는 초대 교회의 그리스 영향을 시사한다), 필요에 따라 늘 새로 창작된다. 변함없이 교회의 대표적 전례 음악으로 자리하며 본래의 모습대로 무반주로, 혹 바로크 이후의 관습대로 오르간의 반주로 불려진다.-초대 교회는 악기를 배제시킨 성악만의 전례 음악전통을 고수하였다. 이 전통은 오늘 동방 교회에서 지켜진다-교황 그레고리오 1세(590~604)의 이름을 딴 이
이름은 카롤링거 왕조의 피핀(751~768)과 카알 대제(768~814)가 프랑스를 하나로 묶기 위한 정책으로 로마의 전례와 전례 음악을 보급하면서 처음 명명되었다. 교황은 밀라노(암브로시오 성가), 스페인(모자라빅 성가), 프랑스, 아일랜드-영국 등의 지역 전례와 성가를 로마의 전례와 음악에 맞도록 개혁 · 정리하였다.
초기의 수사본들은 로마의 전례 음악이 선교 지역의 음악과 혼합되는 과정을 보여 준다. 그러나 당시의 미사 성가집들은 놀랍게도 통일성을 보여 준다. 입당송, 층계송(응답송), 알렐루야, 응송(Tractus), 봉헌송, 영성체송의 고유 미사 부분은 이미 9세기에 더 이상의 추가나 보완이 불필요할 정도로 거의 완벽한 체계를 갖추었다. 그레고리오 성가는 《그라두알레 로마눔》(Graduale Romanum)과 《안티포날레 로마눔》(Antiphonale Romanum)의 두 책에 전례력을 따라 수록되어 있다. 전자는 미사를 위한 성가들이다. 먼저, 세쿠엔치아를 포함한 고유 미사곡 부분들, 그리고 기리에(Kyrie) , 글로리아(Gloria), 그레도(Credo), 상투스(Sanctus), 아뉴스 데이(Agus Dei)의 통상 미사곡 부분들을 담는다. 여기에 죽은 사람을 위한 미사곡 레퀴엠(Requiem)도 포함된다. 후자는 시간 전례를 위한 성가책이다. 이들은 아침 기도(Laudes), 일시경(7시),삼시경(9시), 육시경(12시), 구시경(15시), 저녁 기도(Vesperae, 18시) 그리고 마침 기도(Completorium, 20시)의 순서로 정리된다. 새벽 기도(Matutinum. 독서 기도)를 위해서는 《마티투날레)(Matitunale)라는 별도의 성가책이 있다.
그레고리오 성가는 주로 고유 미사곡의 확대와 통상미사곡의 창작을 통해 발전하였다. 중세에서는 트로푸스(Tropus, 가사가 빈 선율에 가사를 채워넣는 작업)와 부속가(Squentia)가 많이 쓰여졌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5,000여 개에 달했던 부속가를 부활 대축일(Victimae paschali) ,성령 강림 대축일(Veni sancte spiritus), 성체 축일(LaudaSion) 그리고 레퀴엠(Dies irae)의 네 부속가만으로 제한하였다. 그레고리오 성가의 긴 생명력에는 기보의 도움도 컸다. 선법의 기초 위에 선율을 기록하는 소리의 시각화 작업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9세기에는 가사 위에 표기한 '네우마' (Neuma, 기호)들로 대강의 선율 흐름을 알 수 있었고 11세기 초에는 귀도(Guido d'Arezzo,990?~1050?)의 선보 창안과 그 후 4선보 사용으로 선율의 정확한 음고를 기록하였다. 리듬은 마디의 구분도 음가의 분할도 없는 악보 체계 안에서ㅡ귈리스마 등 몇을 제외하면-모든 음표가 동일한 음가를 가졌다. 이 음표들은 그러나 실제 연주에서 가사의 내용과 억양에 따라 상대적으로 더 길게 혹은 짧게 연주되었다. 선법은 글라레아누스(H. Glareanus, 1488~1563)에 의해 《12선법》(Dodeca-chordon, Basel, 1547)이란 저서로 정리되었고, 차를리노(G.Zarlino, 1517~1590)는 이것을 《화성의 가르침》(Istitutioniharmoniche, Venecia, 1558)이란 저서에서 장조와 단조 음계로 압축했다. 이것은 선법 대신에 조성이, 그레고리오 성가 대신에 장단조 성가의 새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이러한 기보의 발전은 또한 전례적 다성 음악의 창출에 크게 기여했다.
그레고리오 성가는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 의해 개혁되었다. '그레고리오 성가의 인간화' 로 압축되는 이 개혁은 음악-언어 관계의 인본주의적 해석에 기초한 것이다. 주된 개혁은 긴 멜리스마적 선율을 음절적으로 단순화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그레고리오 성가는 심하게 축소 · 변형 · 왜곡되었으며 전통과 단절되었다. 이러한 메디치판(1614) 그레고리오 성가는 300년 가까이 교회의 공인된 성가였다. 19세기 솔렘의 베네딕도회 수사들은 원전 연구를 통하여 그레고리오 성가의 멜리스마 원형을 복구하고 본래의 선율을 복원하는 데 성공하였다. 교황 비오 10세(1903~1914)는 자의 교서 <트라 레 솔레치투디니>(Tra le sollecitudini, 1903. 11. 22)를 통해 솔렘수사들의 그레고리오 성가 재건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이들의 《그라두알레》(1883)와 《안티포날레》(1891)를 토대로 현재의 바티칸판(1907)을 출판하였다. 그레고리오 성가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대표적인 전례 음악으로 재확인되었다. 그러나 공의회의 자국어 전례 허용으로 특히 비유럽 교회에서 그 사용이 크게 위축되었다. 전례적 다성 음악 : 전례적 다성 음악은 9세기에 그레고리오 성가를 4도나 5도의 음정으로 따라 부르던 2성부 합창 음악에서 시작되었다. 오르가눔(Organum)으로 불리우던 이 초창기 합창은 엄격한 의미에서는 즉흥 연주에 더 가까운 일종의 장식 음악이었다. 12~13세기에 파리 노트르담 주교좌 성당의 악장이었던 레오냉(Léo-nin, ?~?)과 페로탱(Pérotin, ?~?)은 이것을 3~4성부로 확대하며 예술성을 지향하였다. 이들은 악보에 자신의 이름을 밝힌 첫 실명제 작곡가들이었다. 이 과정에서 다가사(多歌詞)의 모테트와 미사곡이 나타났다. 먼저 고유미사곡, 그리고 미사 통상문이 완성되면서 처음에는 기리에' (자비송)와 '글로리아' (대영광송)만, 14세기에는 '그레도' (신앙 고백), '상투스' (거룩하시도다) '아뉴스 데이' (하느님의 어린양)까지, 즉 통상 미사곡 전체가 창작되었다. 중세의 마지막 대가인 마쇼(Guillaume de Machaut, 1300~1377)는 이 미사곡을 음악적 연곡으로 구성하였다. 이 전통은 주로 그레고리오 성가-그러나 가끔은 세속 노래의-선율을 고전 선율(cantus firmus)로 사용하는 방법이 되었다. 즉, 하나의 선율적 소재를 형식적 요소로 사용하여 미사곡 전체에 통일성을 부여한 것이다.
미사는 15~16세기 르네상스 전례 음악의 중심이었다. 뒤페(G. Dufay, 1400?~1474), 조스캠 데 프레(Josquinde Prez, 1445~1521), 윌라르트(A.Willaert, 1490?~1562) , 라소(Orlando di Lasso, 1530/1532~1594) 그리고 팔레스트리나(G.P. da Palestrina, 1525?~1594) 등 의 전례적 다성 음악은 근본적으로 대위법적 모방 기법에 기초하였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케를레(J. de Kerle, 1531/15327~1591)의 <특별 기도>(1561)와 팔레스트리나의 <마르첼로 교황 미사곡>(1562~1563)을 직접 청취, 평가한 후에야 그 시대의 전례적 다성 음악을 공인하였다. 팔레스트리나의 무반주(acapella) 합창 미사곡은 19세기에 전례적 성악 폴리포니의 절정으로, 표준적 교회 양식으로 선언되었다. 전례적 다성 음악은 양식적으로 선법적 폴리포니에서 조성적 폴리포니로, 그리고 17세기에는 화성적 호모포니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양식 변화는 시대 정신이 '음악의 인간화' 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인간관의 변화와 맞물렸기 때문이다. 인간을 '만물의 척도' 로 여긴 르네상스의 이성적 인간관은 이성적인 폴리포니 양식을, 인간을 느끼는 존재' 로 보았던 바로크의 인간관은 감정적 호모포니를 탄생시켰다. 이러한 새로운 창작은 비아다나(L. Viadana, 1560~1627) , 몬테베르디(C. Monteverdi,1567?~1643), 샤르팡티에(M.-A. Charpentier, 1636~1704) ,스카를라티(P.A.G. Scarlatti, 1660~1725), 칼다라(A. Caldara,1670~1736) 그리고 푹스(J.J. Fux, 1660~1741) 등 바로크 대가들의 전례적 다성 음악에서 나타났다. 이들은 장엄성을 통하여 신앙의 기쁨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미사곡, 모테트, 칸타타, 오라토리오, <테 데움>(Te Deum), <마리아의 노래〉(Magnificat), 〈스타밧 마테르>(Stabat Mater) 등장엄한 교향적 전례 음악의 출현은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나아가 사람들은 전례 본연의 범주를 확대하여 성체조배, 성모 성월, 성인 공경 등 다양한 신심 행위를, 그리고 상응하는 비전례 음악 형식들을 창출했다. 특히 나폴리악파는 계몽주의의 영향 아래 전례 음악의 세속화를 가속시켰다.
18~19세기 고전 · 낭만 시대의 전례 음악은 교황 베네딕도 14세(1740~1758)의 칙서 <안누스 귀>(Annus qui,1749)의 영향을 받았다. 이 칙서는 그레고리오 성가의 전례적 가치를 재확인하면서, 당대의 오케스트라 음악을 전례 안으로 수용하도록 하였다. <세실리아 미사곡>을 포함해 14곡의 미사곡을 작곡한 하이든(F.J. Haydn,1737~1809), <대관식 미사곡>을 포함한 20곡의 미사곡과 <레퀴엠>을 작곡한 모차르트(W.A. Mozart, 1756~1791), 2곡의 미사곡을 작곡한 베토벤(L. van Beethoven, 1770~1827)의 교향적 미사곡들과 하이든의 <천지 창조>(1798)를 포함한 많은 오라토리오가 뿜어내는 광채와 내면성은 그리스도교 신앙과는 다른, 세상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낙관주의와 낙관적 삶의 태도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이 렇게 전례 음악은 새로운 시대 정신과 앞선 음악적 유산이 대화하며 지속적으로 창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미사곡은 예컨대, 바흐(J.S. Bach, 1685~1750)의 곡>과 베토벤의 연주 시간만 120분인 <장엄 미사곡> 등 전례 밖의 연주회장을 위한 예술의 한 부분으로 확대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교회의 세속화로 교회적-정신적 삶이 더 이상 중심이 되지 못함을 지적한다. 그런데 이러한 세속화는 오히려 세속적인 것에 교회 정신을 심어 주는 역기능도 하였다. 이제 교회 정신의 유권적 보존자는 교회 음악이라는 특정한 음악 분야뿐 아니라 모든 음악으
로 확대되었다. 2개의 <장엄 미사곡>을 작곡한 슈베르트(F.P. Schubert, 1797~1828)와 <장엄 미사>와 2개의 <레퀴엠>을 작곡한 케루비니(L. Cherubini, 1760~1842) 등의 초 기 낭만주의 음악가들은 전에는 무관심했던 무명의 청중 집단에 눈을 돌리며 전례에서 실제로 연주되는 미사의 전통을 잇고자 했다. 이들은 전례의 본질적 요청에 순응하여 '음악과 함께 하는 미사' 를 지향했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은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반면, 2개의 <축제 미사곡>과 <레퀴엠>을 작곡한 리스트(F. Liszt, 1811~ 1886) ,<세실리아 장엄 미사>와 <레퀴엠> 등을 작곡한 구노(C.F.Gounod, 1818~1893) 그리고 2개의 교향적 미사곡과 <테데움>을 작곡한 브루크너(A. Bruckner, 1824~1896)는 규모가 큰 전례 음악 창작의 맥을 이었다.
이러한 전례 음악의 퇴조 경향에 체칠리아 운동(Cae-cilian movement)이 가세했다. 이 운동은 19세기 초부터 대두되었던, 세속화된 전례 음악의 재건을 목적으로 1868년 독일 레겐스부르크에서 창립되었다. 이들은 자국어 성가의 사용을 적극 권장함으로써 각 국가 고유의 민요적 전례 노래를 정착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트리엔트 공의회의 전례 음악관에 뿌리내린 이들은 그레고리오 성가와 팔레스트리나 양식의 옛 합창, 옛 다중 합창과 오르간 음악 등 역사적 전례 음악의 보존을 위해 더 노력했다. 무엇보다 동시대의 음악을 포기한 이들의 역사주의적 경건주의는 오히려 앞선 시대의 화려했던 가톨릭 전례 음악을 다시 한 번 크게 위축시켰다.
20세기의 미사곡 창작은 다비드(J.N. David, 1895~1977), 뫼싱거(Möschinger), 페핑(E. Peping, 1901~1981),브루너(A. Brunner), 브루크하르트(J. Burkhart), 토마스(K. Thomas) 등이 전통을 이었다. 그러나 개인의 언어에 의한 개인 작품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미사곡은 옛 음악과 그 변형들을 함축하면서도 전례 안에서의 연주 전통을 크게 벗어났다. 일례로, 스트라빈스키(IF. Strawinsky, 1882~1971)의 다조성(多調性)적 미사곡은 처음부터 전례가 아니라 예술에서 출발하였다. 작곡가가 이 미사곡으로 내적인 것, 자아에 연결된 것, 개인적인 것 등의 차원을 넘어 초국가적이고 초시간적인, 영원성을 추구하려 한 것은 라틴어 가사를 선택한 그의 의도에서 분명히 확인된다. 이렇게 현대 음악은 역사와 단절을 선언하고 개별 음악 작품이 미치는 효과에 집중한다. 언어의 의미 전달체로서의 음악은 이제 개인적-주관적인 것, 즉 자아 관련적-체험 관련적인 것 그리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채워진다.
교황 비오 10세는 자의 교서 <트라 레 솔레치투디니>를 통해 전례 음악의 보호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총 9장의 이 자의 교서는 19세기 체칠리아 운동의 결실인데, 전례의 중요성, 그레고리오 성가와 팔레스트리나 양식 중심의 전례 음악관, 라틴어 가사의 고수 등을 주요 골자로 한다. 교황은 전례 음악이 "전례의 일부"로 전례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며(7, 23) 하느님의 영광과 신자들의성화 및 교육을 위하는 전례의 일반적 목적에 동참한다(1, 1~2)는 언급으로 각기 훌륭한 전통을 가지고 있는 전례와 음악을 하나로 묶었다. 교황은 또한 본당 성가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성가대의 육성 요청은 교황 비오 12세(1939~1958)의 훈령 <무지체 사크레>(MusicaeSacrae, 1955. 12. 25)에서 더 강조되었다. 이 훈령은 성가대의 노래가 그 중요성으로 보아 "사제 및 신자 일동의 노래 다음가는 것"(7항)이고, 성가대는 "신자 일동을 대신하여 모든 것을 노래해서는 안 되며"(16항), "신자 일동이 자기에게 속한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20, 30항), 능동적으로 전례에 참여할 기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성가대와 신자 공동체의 교창이 전통적 대안임을 지적한 것이다.
한편, 여성의 합창 활동 금지나 피아노 및 악대의 연주 금지 등에 대한 교황 비오 10세의 일부 조항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해 폐기되고, 전례 음악의 위상도 '전례의 일부' 에서 '전례의 본질적 구성요소' 로 높여졌다. 교황은 교회 작곡이 그레고리오 성가에 가까울수록 더 '전례적' 이라며 그레고리오 성가를 모든 교회 음악의 모범으로, 대표적 전례 음악으로 재확인하였다. 그러나 라틴어 가사를 강조하고 팔레스트리나 음악 양식을 모델로 삼는 전례 음악관은 선교 지방의 고유한 언어 · 음악 문화와 심한 충돌을 야기했다. 이 문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해결되었다. 공의회가 선교 지역 국가들의 고유한 문화 가치를 인정하고, 라틴어 대신 자국어로 미사를 봉헌하도록 허락함으로써 전례 음악의 새 시대를 연 것이다(전례 119항). 나아가 전례가 신자들의 적극적 참여를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다고 강조하며, 자국어 가사의 공동체 노래, 곧 대중 성가를 전통적인 그레고리오 성가나 전례적 · 예술적 다성 음악과 동일하게 인정하였다. 전례 음악의 연주 방법에서 거룩하고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언급도 새롭게 해석되었다. 물론 전례 음악이 세속 음악과 구분되어야 하나, 지금 여기의 살아 있는 음악을 포기한 채 옛 음악만으로 구성될 수는 없다는 생각이나, '거룩함' 을 '경건함' 으로 왜곡하여 신자들의 열정을 식히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 등이 있다. 전례가 엄격한 의미에서 '존재' 의 문제가 아니라 '행함' 의 문제라는 것은 전례 음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한국의, 한국적 전례 음악〕 '전례 음악' 이라는 개념은 한국 교회의 정기 간행물에서 '가톨릭 음악' , '교회음악' , '성음악' 과 함께 혼용되어 사용되었다. 한국 교회는 처음에 '가톨릭 음악' 이란 개념을 사용하였다. 1934년 경성 공회당에서 일본인 가톨릭 청년회가 주최한 가톨릭 음악회 기사에서 가톨릭 음악은 연주 곡목이 지적하듯 전례 음악과 비전례 음악을 구분하지 않는 포괄적 교회 음악을 의미하였다. 해방 후, 교회 음악' 과(<가톨릭신문> 1950. 2. 1)과 '성음악' 이란 용어가 등장하였다(<가톨릭 신문> 1950. 8. 25). 전자는 교회 음악의 의의와 목적' 에서 교회 음악을 포괄적 의미로 파악한다. 후자는 파리에서 개최된 국제 교회 음악 회의에 관한 보고 기사로 민족 음악의 전례 적용 문제와 신학생의 음악 및 예술 교육에 대한 문제를 언급할 때 등장하였다. 여기서 교회 음악'과 '성 음악' 은 동의어다. '전례' 란 개념은 1957년 7월 28일자 <가톨릭 신문>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 '전례의 민중화 촉진' 이란 제호의 이 글은 "전례의 민중화 운동이 세계적으로 고창되고 있는 이때에 신자 전원이 <복자 찬가> 등 성가를 개창하였다는 점은 더 한층 큰 의의를 가지는 일"이라고 기술하였다. '전례 음악' 은 1960년 8월 28일자 <가톨릭 신문>에 처음으로 등장하고, 1961년 4월 16일자 <가톨릭 신문>에는 교황청의 성가국 신설을 전하며 전례 음악의 발전 방안이 이루어질 것으로 전망 하였다. 그러나 전례 음악과 다른 개념들과의 구분은 아직, 그리고 지금도 분명하지 않다.
최명화(1924~1975) 신부는 주교 회의에 올리는 건의문(<가톨릭 신문> 1964. 3. 15)에서 신자들의 '능동적 전례 참여' 라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의 정신은 먼저 성가의 가사와 곡조가 "우리의 생리에 맞아야" 하고 주교들의 적극적 관심 아래에서만 그 구현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한국적 전례 음악에 관한 건의와 논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도 간헐적으로 수행되었다. 이는 라틴어 미사를 우리말로 거행하는 쇄신에 상응하는 전례 성가의 한국화(토착화) 요청으로 압축될 수 있다. 심도 깊은 연구와 논의는 이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한국적 전례 음악의 첫 시도는 이문근 신부의 〈우리말 미사곡>에서 찾을 수 있다(<가톨릭 신문> 1966. 9. 26). 신문기사는 이 미사곡이 <전례 헌장>(Sacrosanctum Concilium)의 정신을 따라 한국적 선율과 교회선법을 조화 · 융합시켜 하나의 새로운 한국적 전례 음악을 개척하였다고 극찬하였다. 실제로, 이 미사곡은 초대 한국 교회의 첫 성가인 <천주 가사>의 전통에 직결된다. 한글 가사를 민요장단(선율과 리듬)에 맞추어 부르던 우리 고유의 성가, 한국인 신자 공동체의 유일한 성가였던 <천주 가사>는 첫성가집 《죠션어 성가》(1924)가 출판될 때까지 적어도 140년 동안 한국을 대표하는 성가로, 박해 속에 핀 시편' 으로 널리 구전 · 애창되며 선교와 신자들의 교육에 크게 기여했다.
이렇게 전례 음악의 한국화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함께 효과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실제는 오히려 퇴보하였다. 물론 공의회 정신에 대한 이해 부족이 원인이었다. 어쩌면 1967년 4월 교황청 예부성성(현 전례 성사성)이 발표한 <성가 전례에 관한 개정령> 때문이기도 하다. 이 훈령은 완전하고 적극적인 전례 참여를 위하여 신자들이 부르는 성가의 범위를 넓혀 새로운 음악 형태나 다양한 악기를 사용하도록 권고하였다. 그러나 "각 지방의 모국어로 작곡된 새로운 성가는 어느 기간 동안 시험 과정을 거침으로써 완전히 숙달되도록 해야 할 것이나 신성한 성당과 전례의 위엄성과 신자들의 신앙에 적합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다만 시험적인 목적일지라도 이를 피하도록 해야 할 것"이라는 단서 첨부하였기 때문이다. 여하튼, 1970~1980년대의 한국 교회는 수많은 시행 착오를 거치며 공의회 정신의 구현을 위해 노력했다. 서울대교구 종교음악연구소(1981)와 대구 및 부산 가톨릭 음악원(1991)이 교육 기관으로 문을 열었다. 이들은 현재도 본래의 교육 기능을 탁월하게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전례 음악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전례 음악에 관련된 본격적인 연구는 부산가톨릭음악원이 펴낸 《한국 가톨릭 교회 음악 사료집>(1994~1996)이 고작이다. 물론 종교음악연구소를 중심으로 한 현행 《가톨릭 성가》의 출판(1985)은 이 시기의 주요 업적으로 평
가된다. 이 통일 성가집은 《죠션어 성가》 이후 출판된 다양한 성가집들을 토대로 한글 가사를 현대화하여 마련되었다. 이는 현행 성가집이-이문근 신부의 몇몇 성가들을 제외하고- '가사만 한글인 외국 성가 의 틀을 그대로 유지함을 의미한다.
한국 교회는 이러한 서양적 한글 성가의 개창으로 '혼자 듣던' 신자들을 '함께 노래하는' 하느님 백성 공동체로 전환시키며 능동적 전례 참여를 이끌었으나, 기존의 합창단, 합창 음악을 교회 밖으로 추방했다. 1980년대 접어들면서 교구와 본당을 중심으로 가톨릭 합창 운동이 다시 일어나며 많은 성가대가 재조직되고 이들의 발표회 및 경연 대회도 이어졌다. 이는 한국 교회가 자국어 대중성가와 예술적 다성 음악을 "전례의 필요하고도 필요 불가결한 구성 요소" (전례 112항)로 천명하며 화려하고 장엄한 전례 음악을 통해 전례의 완성도를 추구하기 시작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현행 성가, 곧 전례 음악은 실용적 대중 성가이든 예술적 다성 음악이든, 지나치게 서양 종속적이라는 비판을 듣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적 전례 음악이 결코 쉽게 창달될 수 없음을 예견하게 한다. 그러나 한국적 전례 음악의 절실함은 스스로 신앙을 받아들인 한국 교회의 소명이자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주요 과제임은 분명하다. 기존의 서양 성가 선율에 한글 번안 가사를 끼워 맞추는 왜곡된 성가 창작은 이제 지양되어야 한다. 음악과 언어의 일치, 한국적 전례 음악은 전례의 한국화와 함께 이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실제로, 몇 시도들은 매우 긍정적이다. 강수근(姜秀根) 신부 작곡의 <국악미사>는 현재 한국적 전례 음악의 좋은 본보기로 평가되고 있다. 한국 교회 주교단은 산하에 전례 음악 연구소를 상설하고, 몇 개의 시범 성당을 지정하여 이를 중심으로 지속적인 연구와 창작 발표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한국적 전례 음악의 창달은 성직자와 평신도 음악인들의 실험적 시도들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 가톨릭 음악 ; 구노 ; 국악 미사 ; 그레고리오 성가 ; 그레도 ; 글로리아 ; 기리에 ; 뒤페이 ; 모차르트 ; 몬테베르디 ; 미사곡 ; 바흐 ; 베토벤 ; 부속가 ; 상투스 ; 샤르팡티에 ; 서방 전례 ; 성가 ; 성가대 ; 성가집 ; 솔렘 ; 슈베르트 ; 스카를라티 ; 시간 전례 ; 시편 성가 ; 암브로시오 ; 전례 ;조스캠 데 프레 ; 찬가 ; 찬미가 ; 체칠리아 운동 ; 팔레스트리나 ; 하느님의 어린 양 ; 한국 가톨릭 음악)
※ 참고문헌  조선우 · 홍정 수 편저, 《음악은이》, 음악춘추사,2000/ 조선우 외, 《한국 가톨릭 교회 음악 사료집》 1-2, 부산가톨릭음악원, 1994~1996/ 조선우 · 권오연 역, 《음악과 언어 - 미사 창작의 역사》(T. Georgiades, 1973), 세종, 2000/ 조선우, <교회 음악의한국화 논의>, 《한국 가톨릭 이대로 좋은가》, 우리사상연구소,19771 박기현, <한국 가톨릭 교회 음악의 문제점>, <신학전망> 31호(1975, 겨울), 대건신학대학 전망 편집부, pp. 120~132/ 손상오,<현 전례와 전례 음악>, 《사목》 49호(1977. 1),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p. 62~71/ 부산교구, 교구 설정 40주년 기념 <본당 성가대발전을 위한 심포지엄>, 1997/ 부산가톨릭합창단, ,부산가톨릭합창단 20년사 1982~2002》, 동아인업, 2002/ K.G. Fellerer ed.,Geschichte der katholischen Kirchenmusik Ⅰ/Ⅱ, Baerenreiter, 1972~1976/ R. Steiner · H.O. Korth, 《MGG》 Ⅴ, pp. 1437~1446/ W. Gurlitted., Riemann Musik Lexikon, Sachteil,Schott's Söhne, 1967, pp. 453~454. 531. 〔趙善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