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 전체를 경축하는 일 년을 의미하는 용어. 즉 축일에 따른 한 해 주기의 전례 생활을 의미하며 육화, 즉 성탄부터 성령 강림까지, 또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까지 포함한다.
I. 전례 주년과 시간
모든 인간의 행위는 두 가지 본질적인 좌표, 곧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이루어진다. 우주는 시간과 공간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전례 거행도 그 좌표들 안에 배치되어 있는 반면, 그것에 영향을 끼칠 목적으로 조직되기도 한다. 전례 거행으로 방향 지어진 시간과 공간은 상징적인 가치와 전례적 표지들을 담고 있다. 또 예형적이고 예언적인 가치도 지니고 있으며, 현재의 기억을 통해 과거의 구원 사건을 재현하고 미래의 완성으로 개방되어있다. 이것은 모든 거행, 특히 성찬례에서 하느님의 '시간 (때)을 '미리 맛보고, 우리가 지향하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에서 거행될 천상 전례에 참여하는 것' 이기 때문이다(전례 8항). 전례 거행을 통해 구원의 신비는 거행의 시간과 공간을 거룩함으로 가득 채우게 되며, 또 거행을 위한 집회를 가질 때나 장소의 선택을 규정짓는 구체적인 요인들에 의해 독립적으로 채운다. 구원의 신비는 공동체의 역사적 좌표(시간과 공간) 안에서 구체적으로 구원 사건이 되게 만드는 것이다.
전례 거행은 나름대로 시간표를 갖고 있다. 이것이 '축일표' (Calendarium)이다. '거행의 시간' 은 로마 예식이나 다른 예식의 일반 축일표, 어느 한 교구나 수도 단체의 고유한 축일표, 그리고 교회의 전례력에 따라 선택된다. 이 축일표는 날〔日〕과 주간(週間)과 달〔月〕의 자연적인 흐름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그리스도 '신비의 업적을 거룩한 기념으로 거행하는지정된 날들' 을 알려 준다(전례 102항). 이러한 의미에서 축일표는 전례 주년의 체계적 표현이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주일들, 부활 대축일과 다른 대축일들, 축일과 기념, 전례 주기, 교회와 성인의 기념일, 그리고 평일 등이 모두 들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장소의 대중적인 전통과 역사에 의해 고정된 다른 주기들이 존재하는데, 예컨대 수호 성인 축일, 순례일 등이다. 더 분명하게는 공동체와 그 구성원의 삶, 곧 세례, 혼인, 서원, 축복, 장례 등이 해당된다. 하지만 이 거행을 위한 고유 전례력은 보편 전례력을 따라야 하는데, 그것은 모임이 전 교회 공동체와 함께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드러내려는 것이다.
〔시간의 의미〕 시간은 의미 있는 실재 : 인간이 가진 가장 복합적이고 풍부한 근본 원리들 중의 한 가지, 그리고 그 자체로 인해 설명하기 가장 힘든 것들 중의 하나가 '시간' 이다. 시간이란 때와 때 사이, 곧 '때의 길이' 에 관련되는 모든 것들의 도량(측량)이다. 그러나 시간은 시(時), 분(分), 초(秒) 또는 날〔日〕, 달〔月〕, 해〔年〕로 설명되는 수학적인 크기만이 아니다. 동질의 시간(때)은 리듬과 순환에 의해 표시되고 시각 측정과 별자리에 의해 인지되는데, 이것은 사물들의 시간 길이인 참 시간의 한 가지 표지 또는 한 가지 설명일 뿐이다. 시계 위에 드러나는 모든 시각들은 동등하며, 달력에는 날과 달의 차별이 없다. 서로가 서로를 냉정하게 이어가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의 차원이며, 하나의 준수(지킴)나 셈의 결과일 뿐이다. 이런 시간은 '수학적 시간' 이며, 세상의 운동에 기초를 둔 조건으로 인해 '우주적 시간' 또는 '연대적 시간' (χρόνος)이라 부른다.
내면의 시간 : 인간에게는 '내면(內面)의' 시간이 있다. 이는 우주의 시간에 의해 표시되는 리듬이나 빠르기와 무관하게 고유한 실존에서 생겨나는 숙고된 자의식이다. 여러 해를 살아가면서 그 한 해 한 해가 빠르게 지나간다는 경험을 하거나, 인간의 삶에 있어서 어릴 때 가장 '긴' 시간을 경험한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인간이 시간에 대해 가졌던 느낌을 여기서 규명할 수는 없다. 세상속에 파묻혀 살고 사물들의 본성과 본질과의 연결을 깨뜨리지 않은 사람에게 있어서 시간은 다른 차원들을 지닌다. 그것은 모든 순간들이 선별되고 고유한 가치를 갖는 것이다. 하루의 각 시간들은 저마다 고유하게 느낌이 다르다는 것을 안다. 저마다 자신이 중요성을 갖고 있는 한 순간이 있다. 인간은 시간의 흐름 앞에서 늘 같은 느낌으로 남지는 않는다. '운이 좋다거나' '운이 나쁘다거나 , '기분이 좋다' 거나 '우울하다' 거나 또는 '차분하다' 거나 '기분이 들뜬다' 거나 한다.
시간은 언제나 인간이 보기에 서로 구별되는 시간들이다. 오늘날 시간의 근본 원리, 한정된 시간들과 순간들의 특성, 무언가 일어나는 시간의 일부분들을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부분들에서 구별짓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순조로운 세상의 시간 앞에 '거룩한 시간'의 사상이 생겨났다. 둘 중의 어떤 것도 우주의 시간으로 부터 피할 수는 없다. 하지만 '거룩한 시간' (tempussacrum)은 울타리로 둘러 쌓인 한 공간, 하나의 시기, 사물들 생성의 절단(끊김), 존재의 냉혹한 흐름에 벗어난 한 때라는 모습을 띠고 있다.
거룩한 시간 : 인간은 특별한 시간 안에 드러나는 '체험' 을 갖고 있다. 시간 자체는 매정하다. 미래의 시간이 금방 다가왔다가 과거로 소멸해 버린다. 이 악순환을 넘어서는 시간이 '거룩한 시간' 이다. 이것은 '신(神)들의 시간' 과, 그리고 영원성과 조화를 이룬다. 또한 무한정의 시간이기보다 오히려 '더욱 큰 시간이다. 또한 '일상의 시간' (tempus ordinarium)에서 거룩한 모습의 시간으로 옮겨가려는 지향을 띠고 있음을 말해 준다. 인간은 전례 예식을 통해 거룩한 시간을 자신의 시간으로 만든다. 시간은 동일한 주기가 반복되지만, 특별히 기억하는 '그때에' (in illo tempore) 거룩한 시간에서 그 사건을 실현하고 현재의 것이 되게 만든다.
〔성서에서의 시간〕 역사적 사건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억으로 남을 때마다 축제로 전환되었다. 자연적 현상인 계절과 금기와 연결된 것들도 그들의 축제에 남아 있다. 인간의 역사적 사건은 사실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거룩한 시간' 의 개념으로 변환되었다. 인간 역사의 사건이지만 인간의 것만으로 이해하지 않고, 하느님이 개입하는 사건으로 이해하는 근본적인 변혁을 이루었다. 따라서 '성서적인 거룩한 시간' 을 설명하는 열쇠는 창조와 우주 생성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들이며, 이들 가운데 전형적인 예는 파스카, 이집트에서의 탈출, 선택된 백성으로 이스라엘을 세움 등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시간 안에서 '실행할 수 있는 날'(dies fastus)에 구원을 지향하는 새로운 모습을 만난다.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역사 안에, 곧 시간의 흐름(과정) 안에 나타난다. 그분의 개입(interventum)은 '역사적인 것' 들이며, 초기 우주 시간의 영원한 회귀로 축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여기서 그 결과를 가져다 주는 거룩한 시간은 단순히 때가 되어 반복하는 '신의 출현' (聖顯, hierophania)이 아니라, 당신 백성을 위한 하느님의 위격적인 행위의 표지(signum), 곧 '당신을 드러내심' (神顯, Theophania)이다. 거룩한 시간은 더 좋은 미래로 인간을 인도한다. 하나의 단순한 추억이나 반복이 아니라, 약속이요 예언이다. 인간의 구세주인 하느님의 모든 사건은 반복될 수 없고 매이지 않는 것이다. 인간이 항상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적 시간은 신성한 역사적 시간이 되도록 결실을 가져다 준다. 곧 '구원의 시간' 또는 '역사적 구원의 시간 인 것이다. 하느님이 활동하는 인간의 역사는 종교적으로 하느님의 백성에 의해, 또 그들의 예언자들에 의해 구원의 역사로 설명된다. 이 역사의 출발점, 곧 하느님 구원에 대한 묘사는 역사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에게 속하기 때문에 역사적 과정과 시간의 진행 가운데 드러나는 것이다. 신앙 차원의 자연적 개념이 신성하게 행위가 이루어지는 것과 혼합된 이 신비는 이제 하나의 사고이고 하느님 안에 감추어진 구원의 서술 또는 의도이며, 시간 안에서 계시되고 발전한다. 성서에서 역사란 시간 안에서 구원적 신비에 대해 전개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서에는 시간과 역사에 대해 설명하는 신앙적 관점, 곧 집단적이거나 개인적 차원처럼 우주적 차원에서 예언자적인 성찰을 내포한다. 세상과 백성의 역사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특별하고 개별적인 관계에 대한 조명하에 '예언' 이 되었다. 곧 '선택과 계약' 인 것이다. 시간은 더 이상 인간을 소모시키는 냉혹한 '연대적 시간'이 아니라, 구원 사건들의 책무인 '역사적 시간' (χρόνος)인 것이다. 여기에 시간들의 충만함은 '달성된 실재의 시간' 이며, 이 시간 안에서 그 약속이 실재를 만들고 선포가 확인되며 사건을 만든다. 임마누엘인 하느님이 육화(incamatio)를 통하여 시간 안에 들어오고, 새로운 시간, 곧 예수의 역사적 삶의 '그때' (in illo tempore)를 시작한다. 역사의 한 순간에(사도 신경에서 말하듯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 그리고 지리적으로 알려진 한 공간(팔레스티나라는 지역)에서 일어났던 것은 구원의 사건이다. 더 나아가 결정적인 구원 사건이며 이것은 한 가지 특징, 곧 한 번으로 영원히, 한 번으로 매 번을 위한 것이 된다(히브 10, 12. 14). 그로 인해 그리스도와 함께 구원의 역사는 그분의 완전함, 충만한 실재에 도달한다.
성서에 의한 시간, 곧 '역사적 구원 역사' 는 모든 사건이 과거와 미래를 둘러싸는, 그러나 기원으로의 신화적 회귀가 아니라 완전함의 새로운 약속으로 감싸는 하나의 지속적인 노선이다. 이것은 성서에서 유일한 구원 역사의 두 가지 면모 또는 순간으로 나타난다. 즉 선포와 성취, 약속과 실재, 예언과 실현이다. 이 두 가지 커다란 면모는 그리스도 전후와 함께, 구약과 신약성서와 함께, 그러나 필연적으로 구원의 전 역사와 나눌 수 없는 계약과 거룩한 계시의 일치를 깨트리지 않고 둘러싸고 있다. 여기서 버팀목이자 찬란한 중심은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세상 안에서의 하느님 현존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특히 그분 안에 접목된 역사의 구원적 가치의 발견이다.
〔전례에서의 시간〕 그리스도교 전례는 시간 안에서 달성되고 인간 실존의 동일한 환경에서 계속 실재하는 것으로, 종교에서 시간이 갖는 거룩함을 넘어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거룩한 어머니인 교회는 한 해의 흐름을 통하여 지정된 날들에 하느님이신 자기 신랑의 구원 활동을 거룩한 기억으로 경축하는 것을 자기 임무라고 여긴다. 주간마다 주일이라고 불린 날에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또 일 년에 한 번 주님의 복된 수난과 함께 이 부활 축제를 가장 장엄하게 지낸다. 한 해를 주기로 하여, 육화와 성탄에서부터 승천, 성령 강림날까지, 또 복된 희망을 품고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까지 그리스도의 신비 전체를 펼친다" (전례 102항).
그리스도에 의해 실현된 인간의 구원은 역사적 · 시간적 조건들에서, 곧 시간 안에서 전례로 거행된다. '여기와 지금' (hic et nunc)이라는 구체성으로 인해 교회가 존재하며, 이로 인해 전례가 성립되는 것이다(전례 5~7항참조). <전례·헌장)(Sacrosanctum Concilium)은 그리스도의 신비를 거행하는 전례적 해〔年〕와 날〔日〕들이 존재한다고 하였다. 이 거행이 하나의 '거룩한 기념' 이며, 구원 신비의 기념적인 현재의 행위이다. 이로 인해, 시간을 따라 전례를 하는 것은 신비 교육(Mystagogia)의 반복이며, 또한 신비 교육의 한 형태임을 일깨워 준다. 그래서 거행의 날과 시간의 규정은 교회 전통과 역사의 결실로 이루어진 것이다. 주일의 경우도 "사도 전승에 따라, 바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에 그 기원을 둔 파스카 신비"(전례 106항)라고 강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전례적 시간들' 은 한 해를 통하여 그리스도 신비의 여러 측면들을 신비 교육적으로 배치하고 나누어 놓은 전례의 조직화된 구조를 갖고 있다. 외적이고 기능적인 관점에서 이 구조는 그리스도교 이전 종교들의 축일 달력들과 옛 이스라엘의 전례 달력과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전례적 시간' 은 인간의 시간 안에서 그리스도 현존에 대한 구원의 표지이며 모양이다. 전례의 시간도 인간의 시간을 따르기에 자연의 주기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전례 안에서 시간은 여러 가지 리듬을 따르도록 구성되어 있다. 곧 하루의 리듬, 주간의 리듬, 한 해의 리듬이 중심이 된다. 그 외에도 다른 형태의 리듬도 있다. 예컨대 25주년이나 50주년과 같은 특별한 때와 전례 안에서 중요한 대중 신심인 9일 기도나 8일 축제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하루의 리듬 : 전례 거행의 첫째요 기초가 되는 리듬은 현실적으로 자연의 '하루' 에서 나타난다. 이것은 전례적 시간 질서 전체에 근본적으로 일치하는 것이다. 사실 "매일은 하느님의 백성에 의한 전례 거행으로, 특히 성찬의 희생 제사와 시간 전례로 성화된다. 전례적 하루는 자정부터 다음날 자정까지의 시간이다. 하지만 주일과 대축일의 거행은 앞선 날의 저녁 기도부터 시작한다"(<전례 주년과 전례력의 순서를 위한 일반 규정> 3항). 전례적하루는 매일 0시부터 23시 59분 59초까지이다. 이것은 자정에서 자정까지를 하루로 측정하는 옛 그리스 · 로마관습의 현대적 형태이다. 하지만 주일과 대축일은 하루전 저녁부터 계산하는데, 하루의 시작을 저녁부터로 생각한 유대 방식의 모방이다(창세 1, 5). 이로 인해 제1 저녁 기도와 전야 기도(vigilia)가 생겼으며, 주일이나 축일의 규정을 완수하기 위해 유효한 전야 미사(Missa ves-pertina, 특전 미사)를 정당하게 만들었다.
주간의 리듬 : 주간은 달의 모습에 근거한 '음력'(calendarium lunare)에 기원을 두고 있는 7일의 기간이다. 음력 한 달은 29.7일이며, 달의 모습은 초기 반달, 보름, 후기 반달, 그몸의 시기로 한 주간씩 구분된다. 주간의 구분은 '음력 초하루' (neomenia)의 자연적 의미를 제외하고, 창조의 설명을 위한 축제적 휴식의 날을 기초로 세웠다(창세 1, 3-2, 3 ; 출애 20, 10-11 ; 신명 5, 12-15). '안식일' 은 유대교를 특징짓는 요소가 되었다. 그런데 초기 그리스도교 사상에서 안식일이 한동안 보존되었지만(마태 28, 1 : 요한 19, 42 : 사도 2, 46), 예수가 부활한 '주간의 첫날' 을 중심으로 바꿔다. 안식일이 축제의 날과 주간의 중심이었던 것이 중단된 것이다.
그리스-로마 세계에서도 주간을 이해하고 있었는데, 라틴어로 '일곱 묶음' 이란 뜻을 지닌 단어 '헵도마다' (hebdomada)를 사용하였다. 하지만 한 주간에서 각각의 하루는 별들의 이름에 따라 고유한 이름을 갖고 있다. 주간의 첫날은 '태양의 날' 이며(Justinus, Apologia Ⅰ, 67), 둘째날은 '달의 날' 등으로 붙여졌다. 오늘날 한국의 각 요일 이름도 서양에서 붙인 별들의 이름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즉, 태양( 日 , sol), 달(月, luna), 화성(火, mars), 수성(水, mercurius) 목성(木, jupiter), 금성(金, vinus), 토성(土, saturnus) 등이다. 하지만 첫째 날은 '주님의 날'(dominica)이란 뜻의 그리스도교적 이름이었으며, 그리스도교화가 비교적 뒤에 이루어졌던 앵글로-게르만 언어는 그대로 '태양의 날' (Sunday, Sonntag)이었다.
전례는 주간의 계산을 유지하지만 '주일' 이란 이름으로 묘사하고 다른 날들은 '평일' (feria), 곧 둘째 평일(월요일), 셋째 평일(화요일) 등으로 표현한다. '평일들' 을 의미하는 '페리애' (Feriae)라는 단어는 '축제의 날' 이란 뜻이다. 전례에 있어서 매일이 축제적이다. 그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항구한 현존으로 교회 안에 시간의 성화가 이루어졌다(마태 28, 20)는 관점에서 매일이 축제적인 것이다.
옛 전례에서는 넷째 평일과 여섯째 평일인 수요일과 금요일이 중요성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부활 시기를 제외한 모든 시기에 단식의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 단식의 기원은 특히 금요일은(요한 19, 31) 주님의 수난에 대한 기념에 있지만, 수요일은 개연적인 기원이 있을 뿐이다. 6세기부터 평일에 성찬 거행을 시작하였는데, 사순 시기 수요일과 금요일에 시작하였다. 주간의 모든 날에 거행하는 것은 사순 시기(Quadragesima)와 사계(Quattuor Tem-pora) 때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항구하고 보편적인 달력이 가능할 것이라는 전제 아래, 주간의 리듬과 주간들의 연속을 보존하기를 확고부동하게 부과한 만큼(전례 1~4항),현행 전례는 주간의 중심과 핵심으로 주일에 가치를 새롭게 부여하고 있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주님의 날>,1998) .
한 해의 리듬 : 한 해는 시간에 대한 최초의 구분들 중 하나이다. 한 해의 존재 증명이 계절들의 흐름에 연계되었다는 개연성이 있지만, 또한 점성술에 근거를 갖고 있다. 달의 운동에 근거한 한 해의 계산은 한 달이라는 전체 태음월의 12번의 기간으로 이해하는 '태음년' (太陰年, annus lunaris)의 기원을 가져다주었다. 태양의 운동에 기초를 두고 옛 사람들은 현행 시민력의 한 해에 해당되는 '태양년' (太陽年, annus solaris)을 발견하였다. 태양년의 한 해 주기는 365일 5시간 48분 46초이다. 그래서 4년에 한 번씩 366일로 윤년을 만들었다. 반면, 태음년의 기간은 354일 8시간 45초이다. 태양년과 비교할 때 1년의 기간은 약 11일 정도가 차이가 생기므로 3년에 한 번씩 윤달을 넣는다.
한 해는 생활 여정 안에서, 특히 모든 시간에 대해 계절들의 연속과 더불어 특별한 상징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 결과 모든 그리스도 신비와 우리 가운데 이루신 당신의 구원 업적을 되풀이하기에 적절한 시기이다. 실상 주님의 육화와 성탄에서부터 당신의 영광과 마지막 다시 오심의 기다림에 이르기까지 이런 모든 여러 가지 측면들은 한 해의 여정 가운데 배분될 수 있다(전례 102항).
시민력의 한 해는 첫 달인 1월부터 시작하는 반면, 전례의 한 해 시작은 다르다. 전례력에 따른 성무 집전서(Sacramentarium)들에서는 주님의 성탄부터 한 해를 시작한다. 정확하게는 대림 시기부터이며, 이것으로 오늘날 전례 주년의 한 해를 시작한다. 성서에서는 '새해' 를 현행 이스라엘 축제의 기초인 9월에 시작하지만, 한 해는 봄에 시작한다(출애 12, 2). 또 로마인들은 한 해를 3월에 시작하였다. 그래서 윤년의 경우 하루가 더 늘어나는 것을 마지막 달인 2월에 넣었다.
〔전례적 시간의 성사적 가치〕 전례 거행의 시간과 리듬은 종교적 현상의 관점뿐 아니라, 구원 경륜의 맥락에서도 의미를 지닌다. 전례적 시간은 인간 실존 안에 주님 현존의 모습을 더욱 크게 만든다. 그래서 전례 거행은 구원 효과의 표지이며 전달자이다. 지나가는 삶의 상징으로서, 또 그리스도 신비를 성화하는 되살림의 일관된 구조로서 전례 주년이 이해된다.
전례 거행의 시간은 현재의 인간들을 위해 자유와 희망의 깊은 영성적 가치들을 감싸고 있다. 유대인들은 목자들과 농부들을 위한 이방 축제의 시간들을 하느님이 완수하신 구원 사건들을 '기념하는 시간' 으로 전환시켰지만, 그날의 놀이라는 측면과 공동체적이며 민속적인 측면들을 배제하지 않았다. 거행 시간의 인간적이고 종교적이며 단체적 의미를 띠는 '자리' (humus)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된 구원 업적의 '거룩한 기억' 을 안내해 왔다. 전례는 그리스도 은총의 전달자로서 구세주에 의해 설정된 성사들로 나타나는 것과 유사한 형태로 보편적이고 상징적인 수단을 받아들이게 만든다. 교회는 전례 주년과 고유한 축제 달력을 오랜 시간 동안 형성해 왔다. 그 이유는 인간적 실재들과, 인간을 위한 의미와 구원 설명의 힘이 축적되고 이미 존재해 왔기 때문이었다. 인간적 실재들을 받아들이면서 정화하였을 뿐 아니라, 그것들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해방하시는 능력이 육화하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전례 거행 시간은 참 '시간들' 로서, 인간 역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신비가 또한 달성되는 은총과 구원의 시간인 것이다(히브 13, 8 ; 묵시 1, 17).
이런 의미에서 전례적 시간은 전례적으로 특별한 표지이며, '의미자' (significans) 또는 상징적 실재이다. 전례적 시간의 구체화는 달력 안에 있다는 사실에 의존하는 것뿐만 아니라, 준수되고 거행된다는 사실에도 해당된다. 즉 전례적 시간은 준수되어야 하며, 의미가 부족한 단순한 날들이 아니라 인간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의 행동하심과 현존의 공간으로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모든 전례적 표지가 신성하고 불가시적인 실재의 기념비적 차원' 의 성격을 띠고 있고, 동시에 금방 도래하려는 것의 '예언적이고 예형적인 차원' 을 지닌다면, 전례 안에서의 시간은 여기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이 차원들은 구원 역사의 역동성 안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가능한 대부분의 능력과 분명함이 나타나며, 항상 앞으로 투사되는 직접적인 전개는 이 차원들의 결합으로 인해 은총과 구원의 '고유한 현재' 로 특성을 나타낸다. 전례적 시간은 이제 '현재가 되게 하는 시간' 이며, 구원 역사들을 달성할 뿐 아니라 특별한 모양으로 예수의 역사적 생애와 그분의 파스카 신비를 또한 성취하는 시간들의 상징적인 시간이다. 전례적 시간은 하나의 새로운 '시간' 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례적 시간은 인간 실존의 '여기와 지금' 안에 구원에 대해 현존하는 틀인 것이다. 하나의 단순한 되살림이나 기억이 아니며, 예수의 생애를 믿는 이들 앞에 본받아야 할 윤리적인 모범이나 삶 가운데 일치하도록 초대하고 소개하는 상황도 아니다. 오히려 그 이상으로 '현재가 되게 하는' 전례, 달리 표현하자면 '현재로 돌려 주는' 전례는 연속되는 시간 안에서 '예수 생애의 신비를 현재화'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주님은 시간의 규칙과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Ⅱ. 형성과 발전
전례 주년은 하나의 '이상' (理想)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자 시간 안에 현재화되는 그의 신비이며, 오늘날 교회가 '기념' , '현재' , '예언' 으로서 성사적으로 거행하는 그리스도의 신비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전례를 통하여 이해하고 전례로 드러내 왔는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신비의 핵심 요소 거행에서 점차 신비를 여러 측면에서 나누어 기념하게 되었다. 즉 파스카 신비를 여러 개의 신비로 구체화시켜 거행한 것이다.
교회 역사 초기에 파스카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전례, 선포의 유일한 대상이었다. 사실 교회의 경신례란 파스카에 의해 태어났고 파스카를 거행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초기 교회 시대에는 '신비들' 을 지내지않고 그리스도의 '신비' 만을 지냈다. 그리고 일요일은 유일한 축일이었으며, '주님의 날' 〔主日〕이라는 이름 외에 다른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다.
같은 시대에 유대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영향을 받아 파스카를 일 년에 한 번 성대하게 지내는 '대주일' (大主日)이 나타났고, 후에 이 축일은 파스카 삼일로 확대되었으며, 결국 파스카를 50일간 지내게 되었다. 4세기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겪은 수난 장면들을 묵상하고 느끼기 위해서 예수 수난의 장면을 실제로 재현하는 역사화가 일어났으며, 이는 성주간 형성의 기원을 이루었다. 파스카 성야에 3세기 초부터 행해졌던 세례와, 참회 규칙과 함께 파스카 목요일 아침에 이루어지는 5세기의 화해 예식은 성서의 '40일' 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파스카를 준비하는 기간이 탄생했는 데, 이것이 사순 시기이다.
성탄 시기(성탄과 공현)는 파스카 신비의 통합적 관점과는 독립적으로 4세기에 태어났다. 이는 동지에 지내는 이교도의 축제인 태양 축제로부터 신자들을 떼어 놓기 위해서였다. 4~5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신학적 논쟁은 성탄 축일에서 육화 신비에 대한 교의를 확정하기 위한 기회를 찾게 되었다. 4세기 말에는 파스카 시기에 맞추기 위해서 4주 또는 6주간의 준비 기간을 설정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대림 시기' 이다.
순교자 공경은 대단히 오래된 것으로서 파스카 신비에 대한 통합적 관점과 연계되어 있다. 곧 그리스도 때문에 피를 흘린 순교자들은 십자가 위에서 성부께 자신을 증언한 그리스도를 완전하게 닮은 것으로 여겨졌다. 마리아 공경은 역사적으로 순교자 공경보다 후에 이루어졌다. 특히 에페소 공의회(431) 이후 마리아 공경이 발전하였으며, 6세기에는 동방과 서방을 막론하고 성탄 시기에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더욱 공경되었다.
이로써 교회 전례 생활에서 전례 주년이 정착되었다. 교회에서 거행하는 연중 주기는 절기들(대림, 성탄, 사순, 부활, 연중)과 여러 축일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축일들은 보편 교회력 안에 표기된 성인들의 모든 축제일들도 포함한다. 또 지역 교회에 따라 어떤 성인을 더 보태어 기념하기도 한다. 하지만 성인들은 전례의 중심이 되는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 의 한 통로일 뿐이다. 곧 그리스도에 의해 이룩한 구원의 신비를 한 해 동안 펼쳐 놓는 것이다. 절기들 가운데 34주간을 구성하는 '연중 시기'사이에 성탄 시기와 사순 · 부활 시기가 있다.
성탄을 준비하는 시기는 대림 시기라 불린다. 그리고 곧 이어 성탄 축제를 거행하고, 주님 공현 축일과 성탄 시기 마지막 날인 주님 세례 축일 때까지 공현 시기를 지낸다. 이 마지막 축제일인 주님 세례 축일은 항상 주일에 거행한다. 그리고 성탄 시기가 끝난다. 이후 월요일부터 연중 시기 제1 주간이 이어진다. 연중 시기는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까지 진행된다.
부활 시기를 준비하는 것이 사순 시기이다. 그리고 사순 시기의 마지막 주간인 성주간은 파스카 삼일을 포함한다. 파스카 삼일은 성 목요일 저녁 주님 만찬 미사부터 부활 대축일까지이다. 이어 부활 시기를 지내며, 부활 대축일 다음 40일째 되는 날에 주님 승천 대축일을 지낸다. 그리고 열흘 후에 성령 강림 대축일을 지낸다. 그 다음날부터 연중 시기가 계속 이어진다. 성령 강림 다음 주일은 삼위 일체 대축일이다. 이 대축일 다음 목요일(또는 주일)에 성체와 성혈 대축일을 지낸다. 예수 성심 대축일은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둘째 주간 금요일에 고정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전례 주년의 마지막 주일, 곧 연중 시기의 서른 네 번째 주일은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다. 전례 주년은 조직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교회의 삶에 바탕을 두고 발전되고 성장하였으며, 그리스도 신비의 내적 풍부함과 다양한 역사적 상황과 그에 따른 사목적 필요성에 관련된 것이다. 전례 주년 거행의 통합적 요소를 이해하기 위한 신학적 탐색은 발전이 된 다음에 이루어졌다.
Ⅲ. 성서적 · 신학적 근거
전례 주년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서 · 신학적 기초를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례 주년의 여러 요소들 안에서 발견되는 통합적 요소를 발견하지 못한다. 또한 전례 주년의 본질적 내용인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이해가 왜곡되며, 그로 인해 영적 · 사목적 차원에서 중대한 결함를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구세사에 기초한 전례 주년〕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공통된 특징은 하느님이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점이다. 시간은 영원을 실어 나르는 도구이다. 계시는 구원 계획, 즉 역사 안에서 역사를 통하여 "서로 긴밀히 연결된 업적과 말씀"(계시 2항)과 함께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계획이다. 이 구세사는 본질적으로 예언적 차원을 가지고 있다. 역사 안에 인간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도록 만들어 주는 계약을 실현하시기 위해 주도권을 쥐고 스스로 먼저 이루시는 하느님의 활동들이 모여 있다. 사도 바오로는 역사 안에서 실현되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신비' 라고 불렀다. 전례 주년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하느님의 신비를 지낸다. 따라서 전례 주년은 하느님이 역사 안에 그리고 인간의 삶 안에 들어오신 일련의 사건들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스도 지향의 통합과 종말론적 차원] 구세사의 기초가 되고 구세사를 이루는 것은 그리스도가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자 마침으로서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다(에페1, 4-5 ; 골로 1, 16-17). 이 구세사에서 그리스도는 중심이며, 모든 것은 그분으로부터 빛을 받고, 모든 것이 그 분을 중심으로 모인다. 창조로부터 종말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등장에 이르기까지의 하느님의 전체 계획을 이해하는 열쇠가 바로 그리스도이다. 피조물은 시초부터 그분에게로 향하고 있으며, 자신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시간 속의 여행을 하면서 그리스도의 몸과 일치를 이루는 순간까지 나아간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신비는 시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조직적 · 점진적 계획으로 이루어져 있다. 창조와 아담의 타락으로부터 구원 약속과 아브라함의 부르심까지, 시나이의 계약부터 새 계약의 선포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육화에서 죽음과 부활에 이르기까지 종말의 결정적 순간의 완전한 실현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하느님의 계획이다. 종말 때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1고린 15, 28). 구원 계획의 각 단계가 그 뒤의 다음 단계를 준비만 하는 것은 아니며, 성장하는 각 순간은 이미 시초부터 모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일체성과 전체성 안에서, 그리고 종말을 향해 나아가는 역동적 차원 안에서 신비를 보아야 한다.
창조는 약속이 아니라 구세사의 첫 행위이다. 구약은 말씀의 육화를 준비하는 역사인 것만은 아니며, 그 자체로 이미 구원 계획이다. 비록 이 구원 계획이 결정적인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에게서 절정에 이르는 것이지만. 구약 안에서 구약을 통하여 하느님은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고 당신 백성을 세우면서 구원을 완성시킬 사건을미리 내보이셨다.
예수의 인성 안에서 이미 우리의 구원이 된 그 구원 신비들이 완성되었다. 그 결과 교회의 시간 역시 그리스도의 시간과 근본적으로 일치되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말씀과 성사들을 통하여 완성된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서 사람들은 교회 자체인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게 된다. 역사 안의 하느님 계획은 어제와 오늘 그리고 영원히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루어진 구원이다. 이러한 관점은 전례 주년의 내적 통합성, 구조, 가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기본적인 것이자 본질적인 것이다.
〔파스카 신비인 그리스도의 신비들〕 예수 사건은 그 전체적 맥락 안에서, 또 파스카 사건을 향한 긴장이라는 구원 계획의 차원 안에서, 그리고 우리 구원을 위한 것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예수의 삶 중에 있었던 사건들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비록 각각의 사건들이 그 나름의 구원에 대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죽음과 부활이라는 파스카를 향해 나아간다. 이 사건들을 단 하나의 신비 안에서 펼쳐지는 구원의 순간들로 보아야 한다. 이 중심, 곧 파스카 사건으로부터 예수의 인격과 임무를 고려하고 해석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복음서들과 신약의 저서들이 전해 주는 신학적 관점이다. 전례 주년은 역사적 관점에서 나자렛 예수의 지상 생활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분의 신비 또는 그리스도 자신을 반영한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구원 계획이 완전히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건에서 전례의 기념으로〕 하느님께서 역사안에서 이루신 구원이 전례를 통하여 모든 시대와 모든 지역의 사람들에게 효력을 지니고 현존하게 된다. 구약 시대에 구원 사건은 축제 형태 또는 기념 의식을 통하여 항구하게 기념되었으며, 이를 통하여 각 세대는 하느님 구원을 기념하고 현재화시키며 그 구원 사건의 완성이 앞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이스라엘의 모든 축제는 출애굽이라는 파스카 사건과 연계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구원 사건들을 완성하였으며, 동시에 이 사건들을 기념하는 축제들의 의미도 완성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서의 약속이 완성되며, 주님의 해가 시작된다. 즉 하느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결정적 구원이 이루어진 '오늘' 이 시작하는 것이다. 예수가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라" 고 말하였을 때, 만찬 의식을 통하여 당신의 파스카를 시간 속으로 집어넣으셨다. 이로써 구원 현실이 그분의 영광스러운 재림 때까지 성찬례를 통하여 인간 역사 안에서 영원히 지속되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 구세주 눈에 보이는 것이 성사 의식 안으로 들 어갔다"(교황 레오 1세, <승천에 대한 제2 강론>, 1, 4 ; PL54, pp. 397~399). 그러므로 교회 축제의 대상은 죽임을 당하고 영광스럽게 된 파스카 양인 그리스도이다.
교회 안에서의 전례적 시간은 그리스도에 의해 시작된 구원의 위대한 순간이다. 모든 전례 주년은 구세사를 시간 안에 나타낸 것이다. 점진적 · 조직적인 구원 계획의 전망에서, 전례 거행은 구원 계획의 실현 또는 그리스도 신비의 내면화라는 최종 목표에 도달하게 한다. 시간은 구원을 전달해 주는 성사 행위의 '질료' 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비들을 1년 단위로 지속 반복하여 지낸다 해서, 이것이 영원한 윤회 또는 회귀라는 개념에 따른 순환적 반복인 듯한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 우리를 위해서, 특히 전례 행위 안에서 실현되는 구세사는 우리 안에서 완성되는 것이며, 그리스도 신비의 완성을 향해서 열려 있고 그곳으로 올라가는 운동인 것이다. 교회가 매년 그리스도 신비를 여러 측면에서 지내는 것은 신비를 '반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뽑힌 이들과 함께 주님의 영광스러운 발현 때까지 '성장하기' 위해서이다.
IV. 쇄신과 사목
〔전례 주년을 지내는 동기〕 지금까지 교회는 성찬례에 교회의 모든 영적 보화, 우리의 파스카이신 그리스도를 가두어 왔다. 그리스도의 신비와 구세사의 모든 측면을 성찬례에 집중시키고 그 안에서만 보려하는 순간부터 전례 주년의 구조가 필요한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된다. 만일 구원의 실재가 매 성찬례 안에서 온전하고 전적으로 드러난다면 무슨 이유로 미사를 매일 봉헌하며, 일년에 걸쳐 축일들을 배치한 까닭은 또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교육적, 신학적 성격으로 전례 주년의 의미를 설명할 수 있다. 교회가 성령의 감도 아래 파스카 신비가 지닌 여러 면들을 구체화시키는 까닭은 무한히 풍부한 신비를 단 한 번에 관통하고 이해하기란 우리 능력 밖의 일이기때문이다. 유일한 신비의 여러 측면을 전례적으로 부각시키는 것을 전례 축일이라고 부른다. 이 밖에도 좁은 뜻의 신학적 이유도 있다. 하느님의 구원 업적과 하느님께 완전한 영광을 돌리는 일은 특별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파스카 신비만을 통해서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행위 모두가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들이며, 이 행위 각각은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특징을 지니면서 그 나름대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 신비들은 최종 사건으로 넘어가는 것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삶을 결정하는 방향을 형성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부의 사랑을 드러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신비의 재현인 전례는 신자들에게 특별한 은총을 전달하기 위해 구원 사건들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작업은 특히 성찬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따른 전례 주년의 쇄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부들은 전반적인 전례 개혁을 확정하였는데 <전례 헌장>은 전례 주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전례 주년을 재검토하여, 거룩한 시기들의 전통적인 관습과 규정들을 우리 시대의 상황에 따라 보존하거나 복구하고, 그리스도 구속의 신비, 주로 파스카 신비의 거행에서 신자들의 신심을 마땅히 배양하도록 전례 시기의 본질적 특성을 유지하여야 한다 ··· 신자들의 마음은 먼저, 주년을 통하여 구원의 신비들을 경축하는 주님의 축일들을 지향하여야 한다. 따라서 고유시기가 성인들의 축일 위에서 적절한 자리를 차지하여, 구원 신비의 완전한 주기가 마땅한 방법으로 기억되도록해야 한다"(107~108항).
이미 교황 비오 10세(1903~1914)와 요한 23세(1958~1963)는 다음과 같이 정한 바 있다. "주일의 원래 품위를 되살리고 그리하여 모든 이들이 주일을 '첫째가는 축일'로 여기도록 할 것이며, 그와 동시에 사순절의 전례를 복구할 것이다." 교황 비오 12세(1939~1958)도 서방 교회 안에서 부활 성야 예절을 복구하도록 하였으며, 이로써 그리스도교 입교 성사를 복구하면서 부활한 주 예수 그리스도와 맺은 영적 계약을 하느님의 백성이 갱신하도록 하였다. 교황 바오로 6세(1963~1978)는 자의 교서 <파스카 신비>(Mysterii paschalis, 1969.2. 14)를 발표하면서 <전례력과 축일표에 관한 일반 지침>을 반포하였는데, 위에 말한 교황들의 가르침이 여기에 모두 실려 있다.
전례 개혁은 전통과 전례의 단순화라는 신학적 · 사목적 기준에 의거하여 이루어졌다. 전례 개혁은 중복되는 축일을 피하고 특히 파스카 안에서 절정에 이르는 그리스도 신비의 중요성을 드러낼 수 있도록 더욱 논리적이고 조직적이며, 명백하고 질서정연하게 재구성하였다. 이리하여 전례 개혁은 다음과 같은 기초를 놓았다. 첫째, 주일은 첫째가는 축일로서, 따라서 신자들의 신심을 일깨워 이날을 존중하도록 해야 한다(전례 106항). 둘째, 파스카 신비와 파스카 신비가 중심을 차지하는 그리스도의 모든 신비의 거행을 첫 자리에 놓아야 한다(<전례력과 축일표에 관한 일반 지침> 17~18항). 셋째, 성인 축일 수를 줄여 참으로 보편적인 성인들의 축일만 지낸다(전례103~104항).
〔전례 주년의 영성〕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선언한 대로 전례는 "신자들이 진정한 그리스도교적 정신을 펴낼, 첫째요 또한 불가결의 샘이다"(전례 14항). 전례 주년을 통하여 "구원의 신비들을 기억하며, 자기 주님의 풍요로운 힘과 공로가 모든 시기에 어떻게든 현존하도록 그 보고를 신자들에게 열어 주어, 신자들이 거기에 다가가 구원의 은총으로 충만하도록 한다"(전례 102항). 교회로부터 올바른 것으로 인정받는 영성이라면 이 같은 일반적 샘(전례)을 만나 영양을 공급받아야 할 것이다.
전례 주년을 통해서 거행되는 그리스도의 신비에 근본적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심들' 에 의해 왜곡된 전례 주년에 대한 일방적이고도 지엽적인 관점들을 고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과 성서 · 교부 · 전례 신학에 비추어 그리스도 신비의 구세사적 · 종말론적 시야를 복구할 필요가 있다.이 말은 곧 파스카 신비의 풍요로움과 중요성을 복구하며, 전례 거행을 통해 우리가 그 신비에 실제적으로 참여하고 잠기는 것을 뜻한다. 사실 여기서 다루는 것은 오늘날 그 열매만을 취하는 이미 지나가 버린 구세사가 아니다. 성령이 베풀어 내면화시키는 은총을 통해 각 사람 안에서 완성되어져야 하는 구세사인 것이다.
"성부로부터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성부께"라는 고전적 양식문에 따른 전례의 그리스도 중심적 차원, 삼위 일체적 차원을 살리는 전례 주년에 대한 영성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기도와 예식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말씀 전례에 나오는 성서 본문들을 통하여 영성을 살펴보고 양분을 공급받는 것이 필요하다.
〔전례 주년의 사목〕 믿는 이들이 신비 안에 들어가도록, 그래서 그들의 삶 모두가 하느님께 합당한 영적 제사가 되기 위해 신자들의 모임에서 주님과 최고의 만남이 이루어지도록 돕는 것이 진정한 사목이다. 기념이란 파스카 신비에 초점을 맞춘 성사적 거행이다. 다른 모든 사건들이 지향하는 이 위대한 구원 사건, 곧 파스카 신비안에 이들을 들어가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하지만 전례 주년을 그리스도 신비에 대한 참된 거행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를 자신의 삶 안에서 드러내기 위한 힘과 안식을 얻도록 하는 사목의 기회로 자주 활용되고 있다. 또한 축일 거행은 그 축일이 기념하는 사건 안에서 신앙을 드러내기 위한 모임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단순히 수 차례에 걸쳐 갖는 모임을 위한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원인은 전례 거행에 앞서 이루어져야 할 복음화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전례는 전례 거행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고 돈독하게 할 줄 아는 신자들의 행위이다. 복음화를 위해 전례 주년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전례 주년으로 귀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를 더 깊이 있게 따르도록 신자들을 '전례 주년 안에서' 가르치는 것이다. 따라서 전례 주년에 대한 사목은 전례 시기(부활 시기, 성탄 시기, 사순 시기, 대림 시기)가 드러내고자 하는 구세사를 부각시키는 가운데 다음의 두 가지 사항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첫째, 전례 주년의 목적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파스카에 최대한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교 입교 성사의 거행을 전례 주년의 주기와 연관시킬 것, 특히 부활 시기와 사순 시기와 연계시켜야 한다.
이 같은 기준에 따라 사목적으로 거행되는 전례 주년은 그리스도 신비에 대한 선포와 실현을 위한 근간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거행은 개인의 주관적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성사적 차원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 대림 시기 ; 대축일 ; 마리아 축일 ; 부활 시기 ; 사순 시기 ; 성주간 ; 성탄 시기 ; 전례력 ; 축일표 ; 파스카 삼일)
※ 참고문헌 AA.VV., La Celebrazione nella Chiesa, vol.3, Ritmi e tempi della celebrazione, Editrice EDC, 1994, pp. 23~661 Dom Robert Le Gall, Dizionario di Liturgia, Editrice LDC, 1994, p. 24/ 一, Nuovo Dizionario di Liturgia, a cura di Domenico Sartore e Achille M. Triacca, pp. 65~71/ I.H. Dalmais · P. Jounel, L'Église en prière, Introduction a la Liturgie, IV. La Liturgie et le temps(김인영 역,《전례 주년》, 가톨릭대학 교 출판부, 1996). 〔羅基丁〕
전례 주년
典禮週年
Ⅰ. 전례 주년과 시간 · Ⅱ. 형성과 발전 · Ⅲ. 성서적 · 신학적 근거 · Ⅳ. 쇄신과 사목 · 〔라〕Annus liturgicus · 〔영〕Liturgical year
글자 크기
10권

<전례 주년 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