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戰爭

Ⅰ. 성서에서의 전쟁 · Ⅱ. 윤리 신학에서의 전쟁 · 〔라〕bellum · 〔영〕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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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야훼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 군대수를 줄인 기드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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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야훼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 군대수를 줄인 기드온.

국가 간의 또는 국가와 유사한 대규모 조직 집단 간의 무력 충돌. 때로 전쟁의 개념이 더 넓은 의미에서 군사무기 외의 다른 수단들, 특히 경제적 제재와 선전에 의해 수행되는 충돌에도 적용될 수 있다.
I. 성서에서의 전쟁
〔개념과 요소〕 고대의 모든 민족들에게 있어서 전쟁은 종교와 결부되었다. 전쟁은 신들의 명령, 혹은 적어도 그들의 허락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또 전쟁에는 희생 제사(犧牲祭祀)가 따르고 승리를 보장하는 신들의 도움으로 전쟁이 수행되고,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전쟁에서 얻은 노획물의 일부를 바침으로써 신에게 감사드리곤 하였다. 이렇게 볼 때 고대의 모든 종교는 넓은 의미로 '거룩한 전쟁' 〔聖戰〕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그곳에 사는 주민들과 전쟁을 해야 했다. 이스라엘의 전쟁은 야훼의 명령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스라엘이 거병(擧兵)할 때 그들은 "야훼의 백성" 혹은 "하느님의 백성" (판관 5,13 ; 20, 2), "하느님의 부대" (1사무 17, 26) 혹은 "야훼의 군대" (출애 7, 4 ; 12, 41)라고 불리었다. 군인들은 제의적(祭儀的)으로 정결한 상태에 있어야 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거룩해야 했다"(여호 3, 5). 그들은 수절 상태(守節狀態)를 지켜야 했고(1사무 21, 6 ; 2사무 11, 11), 야훼가 당신의 부대와 함께 야영하기 위해서는 진지 전체가 이 정결의 의무를 지켜야 했다(신명 23, 10-15).
이스라엘은 전쟁을 종교적인 차원의 것으로 간주했다. 그 독특한 양식을 보면, 먼저 '나팔' 을 불어 사람들을 전쟁에 소집했다. 특별한 소집 방법으로는 가축의 뿔을 벤후, 그 피 흐르는 조각을 보내는 것이 있었다(1사무 11, 7; 판관 19, 29). 진지에 모인 백성, 즉 '야훼의 군대' 는 엄격한 '종교 제도' 의 규율을 따라야 하며 이렇게 함으로써 성결(聖潔)한 군대가 되는 것이다(1사무 21, 5 이하)전쟁으로 행진하기 전에 야훼께 '제사' 를 드렸다(1사무7, 9 ; 13, 9. 12). 그리고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에봇이나 거룩한 '제비' 로(1사무 23, 9-10 ; 30, 7-8) '야훼의 뜻' 을 물어 보아야 했으며(판관 20, 23. 28 ; 1사무 14, 37; 23, 2. 4) 전쟁을 수행해도 좋을지 혹은 언제 전쟁을 시작해야 할지 야훼가 결정하였다. "야훼가 적군을 너희 손에 붙이셨느니라"는 완료형의 약속이 하느님 사람의 입을 통하여 울려 퍼진다. 야훼가 몸소 군대의 선두에 서고(판관 4, 14 ; 2사무 5, 24 : 신명 20, 4), 이때 적군은 완전히 공포에 사로잡힌다. '테루아' (תְּרוּעָ֖ה)는 크게 외치는 소리를 의미하는데, 큰 함성' 이라고 번역한다. 이 큰 함성' 이 울려 퍼짐으로써 전쟁은 시작된다. 이 외침은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축제의 외침이기도 하다. 적을 완전히 섬멸함으로써 싸움은 끝난다.
야훼가 전쟁 중에 현존해 있음을 볼 수 있는 표시가 '계약의 궤' 이다. 전승에 의하면, 이 궤는 광야에서 백성들이 끝없는 방랑을 하는 동안 줄곧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이 방랑은 움직이는 군대의 행진으로 묘사되곤 하였다. 민수기 10장 35-36절은 고대 전투 때의 고함을 알려 주고 있다. 계약의 궤가 일어나 떠날 때에는 "주님, 일어나소서. 당신의 원수들은 흩어지고 당신을 미워하는 자들은 당신 앞에서 도망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그리고 계약의 궤가 멈춰 놓여질 때에는 "주님, 돌아오소서, 이스라엘의 수만 군중에게로!"라고 고함쳤다. 이스라엘이 정복 전쟁을 위해 '성별' (聖別)되었을 때, 계약의 궤는 그들을 요르단 너머로 인도했고(여호 3, 6), 예리고 정복 때에 그들이 그 성벽 주위로 장엄한 행렬을 했을 때에도 계약의 궤는 동반되었다(여호 6, 6-7). 후대 시대인 다윗 시대에도 계약의 궤는 모든 이스라엘과 함께 진을 치고 있었다(2사무 11, 11). 아벡에서의 전투는 특별히 교훈적이다(1사무 4장). 즉 불레셋인들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에 계약의 궤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계약의 궤는 성소(聖所)인 실로(Siloh)에서부터 옮겨지고, 그때에 불레셋인들은 "이스라엘 진지에 그들의 신이 도착했다" 라고 말한다. 계약의 궤가 아벡에 도착했을 때, 이스라엘은 전쟁 시작의 신호인 '큰 함성'(תְּרוּעָ֖ה)을 온 땅이 진동하도록 외치는데(1사무 4, 5-6), 이 외침은 계약의 궤에 관계된 제의(祭儀)의 한 요소이며(2사무 6, 15) 종교적인 외침이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계약의 궤가 승리를 가져다 주지 않는다. 오히려 계약의 궤를 적에게 빼앗긴다. 이것은 말할 수 없는 재난으로 느껴졌고, 군대 자체의 전멸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계약의 궤를 빼앗아 간 불레셋인들은 그 궤로 말미암아 큰 저주를 받고서 계약의 궤를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려보내게 된다(1사무 6장).
신뢰 : 전쟁에서 투사들은 승리하리라는 확신으로 안심한다. 그것은 "야훼께서 벌써 원수들을 그들(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셨기 때문이다"(여호 6, 2 : 8, 1. 18 ; 판관 3,28 ; 4, 7 ; 7, 9. 15 ; 1사무 23, 4 ; 24, 5 등). 신앙은 전쟁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꼭 필요한 요소이다. 이스라엘은 '신앙' 을 가져야만 하고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여호 8, 1; 10, 8. 25). 신앙이 없어서 두려워하는 자는 필요한 종교적 능력을 지니지 못한 자이며, 그는 집으로 보내져야 했다(판관 7. 3). 신명기 20장 8절에서는 심리적인 이유로 두려워하는 자도 집으로 보내졌는데, 이는 전쟁에 있어서 그 원래의 이유는 아니다.
이스라엘이 비록 외적인 면에서 열세에 놓여 있을 때에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 는 경고를 항상 받았다. 야훼계 문헌(J)에 의하면, 이집트 군대의 추격을 받았을 때에 모세는 갈대 바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야훼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워 주실 터이니, 너희는 잠자코 있기만 하여라"(출애 14, 14).
신명기에서 드러나는 군대 앞에서 행한 사제의 전쟁격려사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네가 적과 싸우러 나가서, 기마와 병거와 너보다 수가 더 많은 군대를 보더라도, 그들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너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주 너의 하느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때문이다. ··· '이스라엘아, 들어라. 너희가 오늘 적과 싸울 때가 다가왔다. 너희 마음을 약하게 가지지 말고 두려워하지 마라. 당황하지도 말고 그들 앞에서 떨지도 마라.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위하여 적들과 싸우시러너희와 함께 나아가셔서, 너희를 구원해 주시는 분이시다"(20, 1-4).
이 말은 예언자 이사야가 유다 임금 아하즈 시대에 아람이 에브라임에 진주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경고한 말과 거의 일치한다. "진정하고 안심하여라. 두려워하지마라. ··· 네 마음이 약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이사 7,4). 이사야서에서는 하느님을 믿는 대신 외국과의 군사적 동맹이나 칼이나 창 등 군사장비와 힘을 믿는 그릇된 생각을 아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 외에도 여러 곳에서 이런 사상이 언급되어 있다(시편 20, 8 : 146, 3 ; 즈가4, 6) '신앙' 이란 말은 어원상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는다' 라는 뜻이며, 본래 야훼의 전쟁〔聖戰〕 신앙에 근거를 두고 있다. 즉 적의 수가 많거나 힘이 아무리 세다 하더라도, 야훼가 승리를 가져다 준다는 확신을 갖고 공포에 떨지 말고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이것은 야훼가 승리를 주는 분이라는 사상과도 일치한다. 야훼가 모든 무기를 없애버리는 날을 고대하는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기대는 온 세계가 평화의 날을 맞이하기 시작할 때에 나타날 기대이다(시편 46, 9 이하 이사 2, 4 ; 9, 4 ; 즈가 9, 10).
야훼 하느님의 개입 : 전투 중에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는 이는 야훼이다(여호 10, 14. 42 ; 판관 20, 35). 그분이 인간의 활동에 관여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야훼의 영은 인간을 사로잡아 싸움에 충분히 승리할 수 있도록 강하게 만든다. 이는 대부분의 판관(判官)들, 그리고 사울이나 다윗 등 왕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하느님의 영(靈)은 인간에게 내려와 그를 감동시키고 또 옷처럼 '입혀져서' 그들이 자발적으로 구원 행위를 행할 수 있도록 자격을 부여하는 힘이다. 사울을 싸우게 만드는 기본 요소는 자발적인 하느님의 구원 행위이다(1사무 11, 13).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 [敬畏心] 때문에 이스라엘 남자들은 자원하여 종군했고(판관 5,2), 또 승리할 수 있었다. 다윗에게 '야훼의 영이 들이닥쳐 줄곧 그에게 머물렀다' (1사무 16, 13)는 사실은 지금까지 보잘것 없던 한 사람을 등장시키는 데에 있어서 야훼가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의미한다.
둘째, 야훼는 사제와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명령함으로써 모든 사건을 처리한다. 이때 제비의 일종인 우림(Urim)과 둠밈(Tummim)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민수 27,21 : 판관 1, 1 : 1사무 14, 37 : 23, 2 : 28, 6 ; 30, 8). 꿈도 야훼의 뜻을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판관 7, 13 이하 ; 사무28, 6. 15). 이러한 것들을 통하여 야훼는 자신의 뜻이나 지시를 알려 준다.
셋째, 야훼는 적군에게 공포감을 주고(출애 23, 27 이하; 신명 7, 20. 23), 적들을 혼란 속에 빠뜨리고(판관 4, 15; 7. 22 ; 1사무 7, 10 : 14, 20), 그들의 마음을 녹게 하고(여호 2, 11), 신적인 공포로 그들을 친다(1사무 14, 15). 넷째, 전쟁 중에 야훼는 자연을 마음대로 지배한다. 드보라의 싸움에서는 폭풍우를 이용하고(판관 5, 20 이하),도망치는 가나안 사람들 위에 큰 우박을 떨어뜨려 그들을 멸망시키기도 한다(여호 10, 11). 또한, 우뢰로 불레셋인들을 물리치기도 하며(1사무 7, 10), 갈대 바다에서 야훼는 어둠과 바닷물로 이집트인들을 쳐부순다(여호 20,7). 후대의 전설에서는 초자연적인 역사가 많이 등장하기도 한다. 하루 저녁에 파멸의 천사가 나타나 산헤립의 진중에서 185,000명의 군사를 전멸시킨다(2열왕 19,35). 이렇게 전투 중에 이스라엘을 위해 직접 싸우는 이는 야훼이다(여호 4, 42 ; 판관 20, 35).
전멸 행위 : 전쟁에서의 마지막 행위는 정복된 적들과 그 노획물에 대해 행해지는 전멸 행위인 '헤렘' (הרם)이다. 이 단어의 어원과 동사형의 용법에 의하면, '헤렘' 이란 어떤 것을 '분리하는' , 즉 어떤 것을 속된 사용에서 떼어 내어 거룩한 사용을 위해 보관하는 것을 의미한다. 때로 '헤렘' 은 이러한 방법으로 '분리된' 그 어떤 것(인간에게는 금지되어 있고 하느님에게 성별된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이 용어는 후대 일반적인 경신례적 용어로 사용되었지만(민수 18, 14 ; 레위 27, 21. 28 ; 에제 44, 29), 본래는 전쟁의 의식(意識)에 속했다. 즉 승리의 결실을 야훼께 드린다는 것이다.
'헤렘' 의 정확한 형식은 성서 본문들에 따라 다르다. 일반적으로 '헤렘' 은 야훼의 명령에 의한 것이다(신명 7,2 ; 20, 17 ; 여호 8, 2 ; 1사무 21, 2). 그런데 어떠한 예외도 용납하지 않는다. 즉 예리고에서 사람이나 짐승이나 살아 있는 것들은 죽여야 했으며, 도시와 그 가구들은 다불태우고, 금속 제품들은 야훼께 바쳐졌다(여호 6, 18-24). 가나안 도시들에서는 제의 도구(祭儀道具)들을 파괴하라고 지시하였다(신명 7, 5. 25). '헤렘' 은 야훼를 부인하고 다른 신을 섬기는 모든 이스라엘의 도시들에 엄격히 적용되었다(신명 13, 13-18). 아간은 '헤렘' 의 규칙을 깸으로써 백성들에게 저주를 초래했고, 따라서 그는 처벌받았으며 그가 훔친 물건들은 파괴되었다(여호 7장).사울이 아말렉족과 전투할 때에도(1사무 15장) 예외 없이 모든 것을 전멸시켜야 했는데, 그가 이 규칙을 엄격히 지키지 않아 처벌받았다(9절).
그런데 '헤렘' 은 일부 성서 본문들에서 다소간 제한되어 적용되었다. 즉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었으나, 가축이나 가재 도구들은 노획물로 헤렘에서 제외되었다(신명2, 34-35 ; 3, 6-7 : 20, 16 : 여호 8, 2. 27 : 11, 14 ; 10,28-29). 때때로 처녀인 여자들은 '헤렘' 에서 제외될 수 있었다(민수 31, 14-18 ; 판관 21, 11). 그로 인해 이방 도시들을 점령했을 때 남자들만이 처형되었다(신명 20,14) .
이러한 전쟁의 구성 요소들을 어느 특정 전쟁 기사(記事)에서 다 찾을 수는 없다. 여러 전쟁 기사들을 종합해 봄으로써 알 수 있다. 야훼의 전쟁은 제국주의적인 침략전쟁이 아니라, 항상 야훼가 이스라엘에 부여한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한 수비전이었다. 전쟁도 일종의 '거룩한 전쟁' 으로 규정할 수 있는데, 그것은 전쟁이 야훼가 이스라엘에 부여한 생존 장소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기때문이다.
다윗이 왕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싸운 것도 '야훼 전쟁' 으로 간주된다. '야훼 전쟁' 이란 전쟁 때 받은야훼의 도움을 '정당한 도움' 으로 이해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야훼의 구원 행위는 "야훼의 의로움" (판관 5, 11 ; 1사무12, 7)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야훼가 당신의 백성에게 권리를 주장하기 위한 하나의 '권리 행사' 이다.
〔이스라엘 역사 초기의 전쟁〕 앞에서 살펴본 전쟁의 개념들은, 다음의 세 가지 경우에 잘 나타나 있다. 첫째는 시스라에 대한 드보라와 바락의 전투(판관 4, 6-7. 14-16 ; 5, 2. 4. 8. 9. 13. 20. 23)이다. 판관기 4-5장의 운문이나 산문은 모두 실제 사건과 아주 가까워 전투 참가자들이 이 전투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상세히 전해 준다. 즉 그들에게 있어서 전투는 거룩한 행위였다. 둘째는 미디안족들에 대한 기드온의 전투(판관 6, 34. 36-40 ; 7, 2.3. 7. 9-10. 14-15. 20-21 ; 8, 3. 7)이고, 마지막은 요나단과 불레셋 사람들의 전투(1사무 14, 6-7. 10. 12. 15. 18-23)이다.
중요한 사실은 야훼가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 싸우는 것이지,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거룩한 전쟁은 '종교 전쟁' 이 아니었다. 여호수아와 판관 시대의 전쟁은, 이슬람을 퍼뜨리기 위한 '지하드' (jihad, 聖戰)와 같이 야훼 신앙을 전파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이방 종교에 대해 자신의 종교를 보호하려는 것도 목적은 아니었다. 여호수아서의 정복 설화들은 가나안의 신들과 예배 의식에 대해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에 주목해야한다. 마찬가지로 판관기에서 이스라엘은 종교적인 자유를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으로서의 생존을 위해서 싸우고있다. 드보라의 노래에는 야훼와 그 백성은 시스라와 그 병거(兵車)와 대조를 이루고 있지, 시스라와 그 신들과 대조되어 있지는 않다. 기드온은 바알의 제단을 부수지만, 이 행위는 미디안족에 대한 그의 전쟁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종교적인 관심은 후대에 편집된 본문들에서만 나타나고 있다. 그 예로 '해렘' 에 관한 신명기의 규정(7, 2-5.25 ; 20, 17-18), 판관기의 신명기적 편집 부분(2, 2-3),그리고 모세와 미디안족과의 싸움에 대해 후대에 편집된 부분(민수 25, 17-18 : 31, 15-16)을 들 수 있다. 잔인하게 여겨지는 '헤렘' 에 관한 규정은, 후대에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이 가나안 종교로부터 자신의 종교적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하나의 소극적인 방편으로 신명기 학파에서 후대에 강조한 것이다. 이방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함께 살면 이스라엘도 이방 종교에 물들게 된다는 점이 후대에 '헤렘' 을 강조하게 된 것이었다.
비록 전쟁은 종교 전쟁이 아니라 할지라도 본질적으로는 종교적이다. 즉 이 전쟁들에서 야훼는 당신 백성의 생명을 위해 싸우고, 그들은 신앙의 행위와 일정한 제의를 지킴으로써 야훼의 행위에 스스로 참여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인간의 역할〕 그렇다면 야훼가 이스라엘을 위한 전쟁에 관여했을 때, 인간이 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우선 이스라엘의 신앙은 인간의 역할을 결코 완전히 배제시키지않는다. 드보라의 노래에는 인간의 여러 가지 역할이 승리에 작용했음을 묘사하고 있다. 또한, 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메로즈를 저주하는 말이 기록되어 있다. "용사되어주님을 도우러 오지 않았다"(판관 5, 23)라는 것이다. 그러나 영광은 항상 야훼께만 돌렸다. 구약은 위대한 전쟁용사를 찬양하면서도 그러한 용사를 '숭배' 하는 사상은가지고 있지 않다. 승리는 어디까지나 야훼가 주는 것이다. 인간의 '승리' 를 항상 '도움을 받았다' 는 수동형으
로 표현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야훼가 직접 전쟁에 참여한다는 사상의 영향 때문에 승리에 가담한 인간을 가능한 한 보잘것없게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기드온의 경우, 그 가문은 므나세 지파 중에서 제일 약하며, 그는 자기 아버지 집안에서 가장 보잘 것없다고 묘사되어 있다(판관 6, 15). 그가 처음 모집한 군대의 수는 삼만 이천 명이지만 차차 줄어 삼백 명이 된다(7, 2). 또 불레셋을 쳐부술 사명을 맡은 사울은 짐짝들 틈에 숨어 있는 상태에서 택함을 받았다(1사무 10,22). 다윗도 그 형제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자로 나타나 있다(1사무 16, 1-13). 요나단은 불레셋 진지를 용감하게 습격할 때 다음과 같은 야훼 신앙을 겸손하게 고백하였다. "주님께서 승리하시는 데에는 수가 많든 적든 아무 상관이 없다"(1사무 14, 6). 이러한 사상으로부터 인간의 무장(武裝)을 불신하는 풍조가 후대에 생겨나게 되었다(1사무 17, 45).
〔왕정 시대의 전쟁〕 전쟁의 거룩한 성격은 왕조(王朝)의 출현과 직업 군대의 설립으로 사라졌다. 야훼의 전쟁을 수행하러 백성들의 앞에 선 것은, 더 이상 야훼가 아니라 자신의 백성을 이끌고 자신의 전쟁을 수행하는 왕이었다(1사무 8, 20). 전사들은 더 이상 지원한 사람들이 아니라, 왕에게서 급료를 받는 직업 군인들이거나 혹은 장교들이 뽑은 징집병들이다. 이러한 변형은 위기를 초래하였다. 사울이 성전 제의(聖戰祭儀)를 위반함으로써 변형의 터전이 마련되었으며, 그 변형은 다윗 시대에 실제로 일어났다. 그는 상당한 수의 외인 부대를 고용했으며, 군사적인 목적으로 자기 백성의 수를 조사하도록 명령했다(2사무 24, 1-9). 이것은 야훼께 대한 불신앙의 행위였으며, 이에 대한 벌로써 '일곱 해 동안 기근을 당하든지, 원수들에게 석 달 동안 쫓겨 다니든지,영토 안에 사흘 동안 흑사병이 만연하든지' 이 중 한 가지를 골라야만 하였다(2사무 24, 13).
이렇게 후대에 전쟁은 필연적으로 국가의 것이 되어 버렸다. 즉 '속화(俗化)되었다' . 처음에는 거룩한 전쟁의 일부 요소들이 유지되기는 했다. 암몬족과의 전투에서 계약의 궤가 군대 앞에서 행진했고, 우리아(그는 헷 사람으로 외인부대에 속한다)는 엄격한 금욕을 지켰다(2사무 11, 11). 다윗은 자신이 정복한 금과 은을 야훼께 "바쳤다"(2사무 8, 11). 그러나 이들 제의(祭儀)들은 겉치레 혹은 장식적인 행사였다. 비록 "야훼께서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그를 도와 주었다" (2사무 8, 6. 14)라는 말을 여전히 하지만, 인간적인 방법으로 승리를 확인해 준 것은 다윗이었다. 또한 승리의 결과인 영광을 받은 이도 다윗이었다(2사무 12, 28).
이렇게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버리고 자신의 군사적인힘을 키우고 다른 나라들과 동맹을 맺어 전쟁에 임하였다(이사 30, 1-2 : 31, 1-3 ; 호세 7, 11). 그럼으로써 거룩한 전쟁의 규칙을 어겼고, 이방 국가들의 우상 숭배 풍습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하느님 백성의 독특성을 잃게 되었고, 거룩한 전쟁의 원칙을 위해서 싸우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전쟁 동반자였던 야훼는 아시리아로 하여금 북부 이스라엘을 치게 하였다. 남부 유다도 예언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자 야훼는 바빌론으로 하여금 유다를 완전히 망하게 하고 유배가도록 하였다. 구약성서에 전쟁이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지만, 예언자들은 전쟁이 이스라엘 역사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오히려 전쟁은 완전히 종식되고 온갖 무기들은 평화로운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그러한 날이 올것임을 예고하고 있다(이사 2, 4 ; 미가 4, 3). 그것은 평화의 왕이신 메시아가 가져다 줄 시대이다(이사 9, 6-7 ; 즈가 9, 9-10)
※ 참고문헌  G. von Rad, Der Heilige Krieg im alten Testament, Zürich, Zwingli Verlag, 1951/ 一, Deuteronomy and the Holy War, Studies in Deuteronomy, 1953/ Gwilym H. Jones, Holy War or Yahweh War?, 《VT》 25, 1975, pp. 642~658/ L.E. Toombs, War, Ideas of, 《IDB》 Ⅴ,pp. 796~801/ Abraham Malamat, Conquest of Canaan : Israelite Conduct of War According to Biblical Tradition, Encyclopaedia Judaica Year Book 1975~1976, Jerusalem, Macmillan, 1977, pp. 166~182/ George Emeyy Mendenhall, The Hebrew Conquest of Palestine, Biblical Archaeology 25,1962, pp. 66~87/ Patrick D. Miller Jr., The Divine Warrior in Early Israel,Harvard Semitic monographs 5, Harvard University Press, 1973/ N.Gottwald, War, Holy, 《IDB》 Supplementary Volume, Nashville, AbingdonPress, 1976, pp. 942~944. 〔朴光鎬〕
Ⅱ. 윤리 신학에서의 전쟁
〔성서적 이해〕 구약성서에서 전쟁은 윤리적 문제를 야기시키는 인간의 일에 그치지 않는다. 성서는 전쟁을 통해 하나의 계시를 드러내고 있다. 즉 전쟁이라는 보편적 체험을 출발점으로 하여, 모든 인류가 그것에 연루되고 또한 그들의 구원이 거기에 달려 있는 전쟁의 본질적 측면을 제시하고 있다. 하느님의 계획은 평화의 달성이기는 하지만, 이 평화는 투쟁의 대가를 치르고 획득되는 승리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래서 구약성서는 전쟁을 선택된 백성을 보호하고 그 신앙을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수단으로 여긴다. 따라서 구약의 관점에서 보면 전쟁은 정당한 전쟁이었고, 성전(聖戰)이었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전쟁은 야훼의 전쟁이 되었으며, 전쟁은 일종의 성스러운 성격을 지녔다. 이러한 의미에서 구약성서에서의 전쟁은 야훼가 당신의 백성을 위해 싸우는 전쟁이며(판관 5, 4. 20 : 여호 5, 13-14 : 10, 10-14 ; 2사무 5,24), 또한 하느님이 죄인에 대항하여 싸우는 전쟁이다.
한편 신약성서는 군인이나 전쟁을 단죄하지 않는다. 세례자 요한은 병사들에게 한 훈계에서 그들의 생활 신분을 비난하지 않는다(루가 3, 14). 그리고 예수는 군복무를 전혀 반대하지 않고 당연하게 여긴다(마태 8, 5-13).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이 세상을 위한 지상의 전쟁이 아니라 사탄과 세상, 그리고 악에 대항하는 영적인 전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인간적 폭력의 사용을 원하지 않는다(마태 26,52 ; 요한 18, 38). 그러므로 예수와 제자들의 명백한 폭력 거부와 욕구의 자제는, 폭력과 곤궁이 사라질 미래의 선취를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비폭력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 즉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지 말라는 요구는 비폭력에 대한 가르침이다. 폭력을 버리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마태오 복음의 산상설교와 루가 복음의 평지 설교(6, 29-36)에 나타난다. 두 복음사가의 경우 폭력에 의한 응징이나 보복보다는 '원수 사랑' 이라는 테두리 안에 비폭력에 관한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약성서는 전쟁보다 비폭력에 의한 평화를 강조하고있다.
〔정당한 전쟁 이론〕 '정당한 전쟁' 이란 표현을 만들어낸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83~322/321)는, 그 주요 목적을 헬레니즘 국가들 사이의 평화에 두었다. 초기 교부들은 '정당한 전쟁' 이론에 어느정도 적응을 하면서도 평화주의를 수도자와 성직자에게 절대적으로 적용되는 규칙으로 여겼다. 그로 인해 사생활에 있어서도 비폭력적 행동에 관한 엄격한 규범을 작성하였다. 하지만 콘스탄틴 대제(306~337) 이후 교회와 국가가 밀접한 일치를 이룬 결과, 부분적으로는 야만족들의 침범 위협 때문에, 4~5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정의를 수호하고 평화를 확립하기 위한 목적의 정당한 전쟁 이론을 받아들였다. 그로 인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국가들까지 전쟁과 폭력으로 가득 찼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354-430)가 정당한 전쟁의 기본 조건을 제시하였다. 그 내용은 첫째, 지향은 언제나 평화의 재건이어야 하고 둘째, 전쟁은 합법적 권위에 의해 시행되어야 하고, 마지막으로 전쟁 중에 적에게 한 약속, 즉 복수, 잔학 행위, 보복은 절대 피해야한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그라시아노 법령집》(Decre-tum Gratiani, 1140)에 수록되었으며, 이후 토마스 아퀴나스(1224/1225~1274)가 새로운 체계를 만들었다. 첫째, 전쟁을 명령할 군주의 권위가 필요하고, 둘째는 정당한 이유, 즉 상대국이 어떤 죄책에 의해서 마땅히 공격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분명해야 한다. 그리고 셋째로, 전쟁의 의도가 옳아야 한다. 즉 선을 조성하고 악을 저지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18~19세기에 전쟁 개념이 급격하고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 특히 새로운 무기들과 전술들의 발전, 대군의 등장, 보편적 병역 의무의 도입 등의 변화를 겪었다. 하지만 전쟁에 대한 윤리적 판단의 형성을 바꾸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윤리 신학은 정당한 전쟁 이론의 변형된 형식만을 반복하였다. 따라서 20세기까지 군사 체제의 변화는 어느 면에서 윤리 신학 자체에 커다란 부담으로 자리잡았다. 1997년 라틴어 표준판으로 출판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는 무력을 통한 정당 방위에 대한 조건으로 다음의 네 가지를 제시하였다. "첫째, 공격자가 국가나 국제 공동체에 가한 피해가 계속적이고 심각하며 확실해야 한다. 둘째, 이를 제지할 다른 모든 방법들이 실행 불가능하거나 효력이 없다는 것이 드러나야 한다. 셋째, 성공의 조건들이 수립되어야 한다. 넷째, 제거되어야 할 악보다 더 큰 악과 폐해가 무력 사용으로 초래되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상황 판단에서 현대 무기의 파괴력을 신중하게 고려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 같은 도덕적 정당성의 조건들에 대한 평가는 공동선의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의 신중한 판단에 달렸다" (2309항). 이러한 교회의 가르침에 따른다면, 새로운 세기인 21세기에 미국 주도로 이루어진 전쟁 중에서 '정당한 전쟁' 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교회의 가르침〕 십계명의 다섯째 계명은 인간의 생명을 일부러 파괴하는 것을 금지한다. 모든 전쟁이 초래하는 불행과 불의 때문에, 교회는 하느님이 오랜 전쟁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주시도록 모든 이가 기도하고 행동할 것을 촉구한다(사목 81항). 또한, 모든 시민과 모든 위정자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진력할 의무가 있다고 천명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308항). 그러나 "전쟁의 위험이 있고 적절한 힘을 지닌 국제 권위가 없는 동안에는, 참으로 평화 협상의 모든 방법을 다 써 본 정부들의 정당 방위권은 부정할 수 없다"(사목 79항)라고 하였다. 교회는 전쟁의 원인에 대해 언급하면서, 무기의 비축이나 군비경쟁, 과잉 군비가 평화를 보장하지 못하며, 오히려 전쟁을 증대시킬 위험이 있다고 여긴다(《가톨릭 교회 교리서》2315항). 또한, "개인들과 국가들 사이에 만연한 불의와, 경제 사회 분야의 지나친 불공정과 불평등, 시기, 불신과 교만은 끊임없이 평화를 위협하며 전쟁의 원인이 된다"(2317항)라고 하였다. 나아가 교회는 "무력 충돌 중에도 도덕률은 영구히 유효하다는 것을 선언" (2312항)하였다."전쟁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전쟁 그 자체로 적대 편의 모든 행동이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사목 79항)라는 것이다. 전쟁에 관한 교회의 이해를 요약하면, 먼저 평화는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는 질서, 즉 항상 보다 완전한 정의를 추구함으로써 인간이 실현해야 할 질서의 결실이다.
또한 정의가 수행하려고 하는 것을 지향하는 사랑의 결실이기에, 진정한 평화는 군사적 승리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평화는 전쟁의 원인 제거와 민족들 간의 진정한 화해에서 오기에, 전쟁은 국가 간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유효 적절한 수단으로 인정할 수 없다. 나아가 강국의 위신이나 국민의 명예도 정당한 전쟁의 이유가 될 수 없기에 전쟁은 범죄일 뿐만 아니라 불합리 그 자체이다.
둘째, 어떠한 종류의 부정에 대한 방위도 정당한 전쟁이유가 될 수 없다. 부정을 인내하는 것보다도 전쟁에서 수반되는 해악이 비교가 안 될 만큼 크다면, 그 부정을 감내하는 것이 사람들의 의무이다. 특히 현대 전쟁이 초래하는 결과를 볼 때, 영토에 관한 요구 등은 비록 그것이 정당하다고 할지라도 정당한 전쟁의 이유로 볼 수 없다. 하지만 매우 중대하게 공동체에 가해진 부정에 대한 방위의 절대적 필요성, 즉 비전투적인 다른 모든 수단을 다 사용한 후에도 이를 저지하지 못할 경우 정당한 전쟁의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최후 수단으로서의 방위권을 의미한다.
셋째, 현대 과학에 따른 무기 전쟁은 정당 방위의 한계를 초월하는 대량 살상을 초래한다. 이러한 전쟁으로 감당할 수 없는 광범위한 재해를 초래한다면, 그 수단 방법의 적용은 부도덕한 것으로 비난 받지 않으면 안 된다.
넷째, 인류 공통의 가장 위험스러운 덫인 군비 경쟁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무력 증강과 군비 경쟁은 인류에게 매우 중대한 위험이며, 군비 경쟁에 소요되는 엄청난 비용을 볼 때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견딜 수 없도록 해치는 일이다.
다섯째,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인간 자신에 의한 인간들의 살해로 끝나기에 전쟁을 근본적으로 피해야 한다. 아울러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하며, 무죄한 사람들의 생명을 파괴하고 죽이는 방법을 가르치고 증오와 지속적 원한을 남기는 전쟁은 다시 일어나면 안 된다. (⇦ 정당한 전쟁 ; → 살인 ; 생명권)
※ 참고문헌  K.H. Peschke, Christian Ethics. Moral Theology in the Light of Vatican II, vol. Ⅱ, C. Goodliffe Neale, Alcester · Dublin, 1986(유봉준 역,《그리스도교 윤리학》, 분도출판사, 1992)/ B. Häring, Free and Faithful in Christ, The Crossroad Publishing Company, New York, 1981(소병욱 역, 《자유와 충실》, 바오로딸, 1996)/ Hans Rot-ter · Günter Virt, Neues Lexikon der Christlichen Moral, Tyrolia, Innsbruck · Wien, 1990/ 주교 회의 교리교육위원회, 《가톨릭 교회교리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3/ 김정우, <가톨릭 교회의 전쟁에 관한 이해>, <사목> 277호, 2002, pp. 8~20/ 김정우, <정당한 전쟁에 관한 윤리 신학적 고찰>, <현대 가톨릭 사상》 23호, 2000, pp.277~316. 〔金政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