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전역을 사목 관할 구역으로 하는 주교구. 수호 성인은 성 정문호(鄭, 바르톨로메오) · 조화서(趙, 베드로) · 조윤호(趙, 요셉) · 손선지(孫, 베드로) · 한재권(韓在權, 요셉) · 이명서(李, 베드로), 정원지(鄭, 베드로). 1931년 5월 10일 대구 대목구 소속으로 전라남북도를 아우르는 전라도 감목 대리구(監牧代理區)로 설정되었다. 1934년 3월 8일 전라북도 감목 대리구로 분리되었으며, 1937년 4월 13일 전주 지목구로 설정되면서 한국인 성직자들이 교구 사목 · 운영을 관장하는 한국 최초의 자치 교구가 되었다. 1957년 1월 29일 전주 대목 구로 승격되었으며, 1962년 3월 10일 한국 교회에 교계제도가 설정됨에 따라 전구교구로 승격됨과 동시에 광주 관구에 속하게 되었다. 〔역대 교구장〕 초대 김양홍(金洋洪, 스테파노) 신부(1937.4. 13~1941. 11.21), 2대 주재용(朱在用, 바오로) 신부(1942. 1.5~1946. 1.15), 3대 김현배(金賢培, 바르톨로메오) 주교(1947. 7. 7~1960. 4. 30), 4대한공렬(韓珍烈, 베드로) 주교(1961. 1.3~1971.7. 14), 5대김재덕(金在德, 아우구스티노) 주교(1973. 2. 10~1981. 4.10), 6대 박정일(朴正一, 미카엘) 주교(1982. 6. 8~1988.12. 15), 7대 이병호(李炳浩, 빈천시오) 주교(1990.2.8~현재). 〔교 세〕 1883년 4,363명, 1900년 8,204명, 1910년 11,720명, 1937년 19,300명, 1957년 30,499명,1962년 40,883명, 1972년 51,808명, 1990년113,016명, 2002년 161,194명.
I. 천주교 수용과 박해
〔천주교 수용과 신앙 공동체의 형성〕 전라도 지방에 천주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1784년 겨울, 한국천주교회 설립 직후였다. 최초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은 전주 초남(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초남 부락)에 살던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과 그의 이종사촌으로 진산 장구동(현 충남 논산군 벌곡면 도산리 장고티)출신인 윤지충(尹持忠, 바오로)이었다. 1780년을 전후 하여 경기도 양근의 감호(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 사는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과 그 제자들이 신학문인 천주교를 연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유항검은, 권철신을 찾아가 천주교 서적과 성상(聖像)을 처음 접하였다. 권철신의 동생인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사베리오)에게서 교리를 배운 유항검은, 이승훈(李承薰,베드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유항검이 고향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여 초남리는 호남 지방 신앙 공동체의 요람이 되었다. 그는 가족과 친척 · 친지와 자기 집의 많은노비들 그리고 여러 지방에 산재해 있는 광활한 토지를 관리하는 마름, 작인(作人)들과 주민들을 입교시켰으며,전주 · 김제 · 금구 · 영광 등에 천주교를 전파하였다.윤지충의 입교는 고종 사촌인 정약전(丁若銓)의 영향 이 컸다. 그는 1784년 겨울 상경하여 갓 영세한 정약전에게서 《천주실의》(天主實義), 《칠극》(七克) 등의 책을 구하여 삼년 동안 공부하고, 1787년 정약전을 대부로
하여 이승훈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귀가하여 고종사촌 권상연(權尙然, 야고보)에게 자신이 읽은 두 권의 책을 공부하게 하여 세례를 주었다. 윤지충은 어머니와형제 그리고 그의 명성을 듣고 고산, 무장, 무안, 홍주(현홍성) 등지에서 찾아온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1786년 가을 조선 교회의 지도급 신자들은 교우들의 신앙 지도와 효율적인 선교를 위해 교회의 교계 제도를 본떠 이른바 가성직 제도(假聖職制度)를 만들었다. 이때유항검은 신부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교회 서적을 탐구하다가 가성직자들의 성사 집전이 독성죄(瀆聖罪) 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1787년 이승훈에게 성사 집전을 중단토록 촉구하였다. 그 후에도 가성직단은 얼마 동안 지속되다가 해체되었다. 조선 교회는 1789년 10월 북경 교회에 윤유일(尹有一, 바오로)을 밀사로 파견하였다. 그는 1790년 7월에 중국에 파견되어 10월에 귀국하면서 구베아(A. de Gouvea, 湯士選, 1751~1808) 주교가 조선교회에 보내는 사목 교서를 가져왔는데, 그 교서에는 유교식 조상 제사 금지령이 명시되어 있었다. 윤유일로부터 이 소식을 들은 유항검 · 윤지충 · 권상연은 신주를 폐기하였다. 하지만 보유론적(補儒論的) 입장에서 천주교 교리를 믿던 양반층 신자들은 교회를 떠나고, 유교 문화의 가치관과 윤리관에서 탈피한 신자들만 남았다.
〔박해와 순교〕 윤지충은 1791년 5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8월에 장례를 치르며, 교회의 명령과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유교의 제사 의례를 거부하였다. 조정은 윤지충과 그의 결정에 동조한 권상연의 행위를 조상 제사가 상징하는 양반 중심의 문화를 부정하고, 조선 사회가 으뜸 가치로 존중하며 강조하던 효(孝)를 반대한 패륜 행위로 단정하여 극악무도한 윤리 사범으로 처형하였다. 그들은 1791년 12월 8일(음 11월 13일) 오후 3시 전주남문 밖(현재 전동 성당 터)에서 참수형을 받아 한국 교회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두 순교자들의 목은 사형 판결문에 따라 장대 끝에 매달려 지나는 행인들이 볼 수 있도록 9일 동안 전시되었다.
1794년 구베아 주교는 조선 신자들의 요청에 따라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를 파견하여 1795년 1월 주 신부가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는 4월 5일 부활축일에 미사를 봉헌하였는데, 이는 조선 천주교 창설 이래 처음 거행된 미사였다. 주문모 신부는 4월(음)에 전라도를 방문하여 고산 저구리(현 전북 완주군 운주면 저구리)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의 집과 전주 유항검의 집을 방문하여 각각 며칠 동안 머물며 성사를 집전하였다. 1795년 5월 12일 윤유일 · 지황(池璜, 사바) · 최인길(崔仁吉, 야고보)이 체포되어 주 신부의 잠입을 주도하고, 숨겨 준 죄목으로 처형된 을묘박해(乙卯迫害)가 일어났다. 주 신부는 위기 의식을 느끼고 새로운 선교 방법을 모색하여 1795년 8월 이른바 '대박 청래 운동' (大舶請來運動)의 추진을 유항검이 맡도록 하였다. 전라도신앙 공동체는 1796년 겨울 황심(黃沁, 토마스)을 천거하여 북경에 파견하고, 이때 유항검 등이 은전 400냥을 경비로 내놓았다. '대박 청래 운동' 은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이전까지 꾸준히 계속되었고, 황심 · 김유산(金有山, 토마스) · 옥천희(玉千禧, 요한) 등이 밀사로 활약하였으나, 이 계획은 북경 주교의 거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1801년 1월 10일(음) 대왕대비 김 씨는 천주교 박해령을 내리고,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시행하여 천주교도를 색출 · 검거토록 하였다. 이 해 2월까지 서울 · 경기 · 충청 지방의 수많은 신자들이 처형되었고, 3월 12일(음) 주문모 신부가 자수하자 박해는 절정에 이르렀다. 3월부터는 박해의 손길이 전라도에 미쳐 전주 · 고산 ·금구 · 김제 · 무장(고창) · 흥덕 · 함평 · 무안 · 영광 등에서 200여 명의 신자들이 체포되어 전주 감영으로 끌려왔다. 이 박해로 전라도 신앙 공동체는 초토화되었다. 가장 먼저 전라도의 사도 유항검이 체포되어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3월 28일부터 유항검의 동생 유관검(柳觀儉)을 시작으로 문초가 시작되어 이우집(李宇集)을 심문하던 과정에서 유항검 · 유관검 · 윤지헌(尹持憲, 프란치스코), 김유산 등이 '대박 청래 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한 사실이 밝혀져 서울로 압송되었다. 또한 이 사건과 무관한 한정흠(韓正欽, 스타니슬라오) ,김천애(金千愛, 안드레아), 최여겸(崔汝謙, 마티아)도 서울로 압송되어, 8월 21일(음 7월 13일) 의금부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각자의 고향으로 이송되어 처형되었다. 이는 이들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들이 천주교를 믿지 못하도록 경각심을 주기 위한 전시 효과를 노린 것이다. 1801년 10월 19일(음 9월 12일) 의금부는 '대박 청래운동' 을 무력 개교(武力開敎)의 음모로 판정하고 역적죄로 몰아 유항검 · 유관검 · 윤지헌 · 이우집 · 김유산 등을 전주로 이송하여 처형토록 하였다. 그리고 유항검의 머리는 풍남문 누각에 매달려 성문을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전시되었다. 10월 22일에는 의금부의 명령에 따라 유항검의 가족이 연좌형(緣坐刑)으로 모두 전주 감옥에 갇혔고, 집은 헐어 없애고 연못을 파는 파가 저택(破家瀦宅)형이 내려졌다. 11월 14일에는 3월부터 전주 옥에 갇혀 있던 유항검의 큰아들 유중철(柳重哲, 요한)과 둘째 아들 유문석(柳文碩, 요한)이 전주 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리고 1802년 1월 31일에는 유항검의 처 신희(申喜), 유관검의 처 이육희(李六喜) 유항검의 형 유익검(柳益儉)의 아들 유중성(柳重誠, 마태오), 유중철(柳重哲, 요한)의 부인 이순이(李順伊, 루갈다) 등이 숲정이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유중철과 이순이는 5년 동안 동정 부부 생활을 하다가 순교하였는데, 후에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는 이들을 조선 순교자들의 보석이라고 극찬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들은 배교하여 석방되거나 귀양을 갔다. 신유박해 때 전라도에서는 20명이 순교하고 42명이 귀양을 갔으며, 그중 유항검의 어린 자녀 3남매와 윤지헌의 처와 6남매는 연좌형으로 귀양을 갔다. 유항검을 비롯한 그의 가족 7인 순교자들은 현재 전주 치명자산에 묻혀 있다.
신유박해 후 전라도는 전국의 피난지가 되어 깊은 산골마다 신자들이 숨어 살았다. 1827년 정해박해(丁亥迫害)가 곡성에서 시작되어 2~4월에 장성 · 임실 · 순창·용담 · 금산 · 고산 · 전주에서 240여 명이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혔는데, 이들 중 대부분은 배교하여 석방되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과거와 달리 끝까지 신앙을 지킨 신자들을 처형하지 않고 배교하거나 병들어 죽을 때까지 옥에 방치해 두었다. 이순이의 동생 이경언(李景彥, 바오로)은 사형 판결을 받았지만 6월 27일 옥중에서 병사하였으며, 1832~1835년에 옥고를 치르던 4명이 병으로 옥사하였다.
1839년 조정에서는 4월부터 오가작통법을 실시하여 천주교 신자 색출에 나섰다. 전라도는 8월까지 진산, 금산, 용담, 고산, 광주에서 100여 명이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혔다. 기해박해(己亥迫害)로 전주에서는 3차에 걸쳐 사형이 집행되었는데, 1차로는 1827년부터 13년간 옥살이를 하던 김대권(金大權, 베드로), 이태권(李太權,베드로), 이일언(李日彥, 욥), 신태보(申太甫, 베드로), 정태봉(鄭太奉, 바오로)은 5월 29일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2차로는 10월 12일 신 요한 · 신 이냐시오 형제와 임 베드로 · 박춘화 · 이독심이 매를 맞고 죽었고, 송인원(야고보)은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3차로는 6월 14일(음) 광주에서 체포된 홍재영(洪梓榮, 프로타시오), 이조이(막달레나) 최조이(바르바라) 오종례(吳宗禮, 야고보) 등이 1840년 1월 4일 참수되었다. 홍재영의 며느리 심조이(바르바라)는 두 살 된 아들과 함께 1839년 11월 11일 옥중 병사하였고, 김조이(아나스타시아)와 13세 된 딸 이봉금(아나스타시아)은 10월 혹은 11월경(음) 옥중 교살되었다. 이들 외에 이춘화(베드로)가 11월 나주 옥에서 순교하였고, 고산에서는 박 바르바라와 어린 세 자녀가 옥에서 화재가 일어나 불타 죽었다.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의 여파로 전라도에 천주교 신자 검거 열풍이 일어나 전주와 여산, 나주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정문호, 손선지, 한재권, 이명서, 조화서, 정원지, 조윤호 성인이 12월 5일 체포되어 그중 여섯 성인은 12월 13일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되었으며, 조윤호 성인은 12월 18일 전주 서천교 밑에서 장사(杖死)하였다. 이들 중 정문호 · 손선지 · 한재권 · 이명서 등 4명은 현재 천호 성지(전북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 천호동)에 묻혀 있다. 1867년 전주에서는 김사집(필립보)등 10명이 순교하였는데, 이때 남종삼(南鍾三, 요한) 성인의 15세 된 아들 남명희(南明熙)와 홍봉주의 아들은 전주 초록 바위에서 전주천(川)으로 밀어 넣어져 수장되었고 여산에서도 2명이 순교하였다.
1868년 5월 독일 상인인 오페르트(E.J. Oppert)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도굴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대원군은 어느 때보다 더 혹심하게 박해를 자행하여 고산 · 용담 · 금산에서 체포된 신자들이 여산 진영으로 끌려와 갇혔고, 이들 중 23명이 10~11월경(음) 처형되었다. 그중 15명은 고산 넓은 바위(현 전북 완주군 동상면 은천리) 공소 신자들이었는데, 6명은 김성첨(토마스)의 일가족이다. 순교자들은 대부분 참수 · 교수형으로 처형되었지만, '백지사형' (白紙死刑)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다음해에 정읍의 강영원(바오로)과 무장 암틔점(옹기점,현 전북 고창군 성송면 암치리) 교우촌의 유치성(안드레아), 장성의 유문보가 나주 포교에게 체포되어 나주로 끌려가옥에 갇혔는데 유문보는 옥사하고 유치성과 강영원은 백지사형으로 순교하였다. 1868년 여산에서 순교한 9명의 '무명 순교자' 들은 병인년 순교 성인 4명과 함께 천호 성지에 묻혀 있다.
Ⅱ. 신앙의 자유 획득과 본당 설정
〔전라도 신앙 공동체와 공소〕 1791년 12월 8일 진산의 윤지충이 처형된 후 그의 동생 윤지헌은 가문이 폐족되자 궁벽한 산골인 고산 저구리(현 전북 완주군 운주면 저구리)로 이사하였다. 그 후 충청도 내포 지방 사도인 이존창이 저구리로 이사해 오자 내포 지방 신자들이 그를 따라와 교우촌을 이루었다. 또한 충청도 신자들이 저구리와 인접한 금산 개직이, 용담 등으로 이주해 왔다. 이들은 1795년 4월(음) 주문모 신부가 저구리 이존창 집을 방문하여 며칠 동안 머물며 성사를 집전할 때 참석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박해가 시들해진 틈을 타서 전국에서 신자들이 전라도를 피난처로 삼아 모여들었는데, 이들이 맨 먼저 찾아온 곳은 고산(高山) 지방이다. 이곳은 다른 도에서 전라도로 들어오는 통문인데 험난한 산악 지대여서 숨어 지내기에 좋아 신유박해 이후부터 교우촌이 가장 많이 생긴 곳이었다.
전라도에 교우촌이 가장 많이 형성된 시기는 1860년 전후였다. 특히 병인박해 후에는 충청도가 텅 빌 정도로 그곳 신자들이 전라도로 피신해 왔다. 교우촌들은 모두 두메 산골이었으며, 해가 거듭될수록 그 수가 증가하였다. 신자들은 살 곳을 찾아 떠도는 유민(流民)이어서 공소의 부침(浮沈)이 심하였다. 박해 때부터 1910년까지 전라도에는 500여 개의 교우촌이 있었다. 이들 공소는 전라북도 전 지역에 산재되었는데 고부 지방 6, 고산 지방 56, 고창 지방 6, 금구 · 구이 · 봉남 지방 23, 용지 ·백산 지방 3, 장수 지방 45, 부안 지방 13, 무장 지방 1,순창 지방 36, 여산 · 함열 지방 9, 용담 지방 9, 용안 지방 12, 익산 지방 14, 임실 지방 12, 임피 지방 15, 완주의 소양 상관 · 삼례 · 구이 등 40, 이리 지방 3, 정읍지방 26, 진산 · 금산 지방 16, 진안 지방 40, 함열 지방11, 흥덕 지방 4개 등이었다. 신자들은 화전을 일구어 담배 농사를 주업으로 삼았고, 옹기점도 중요한 생계 수단이었다. 옹기점은 공생공존하던 신앙 공동체에 가장 알맞은 생활 수단이었으며, 여기에 종사하는 신자들은 거의가 무전(無田) 교우들이었다. 전라도 신앙 공동체에는 1900년대까지 30여 개의 옹기촌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박해 시기에 전라도를 담당하였던 사제들은 주문모,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다블뤼,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리델(Ridel, 李福明) 신부였으며, 병인박해를 끝으로 선교사들의 전라도 공소 방문도 끊겼다. 그러다가 1877년 11월경 블랑(Blanc, 白圭三) 신부가 전라도 지방담당 신부로 부임하였다. 그는 천호산(天壺山)에 있는 어름골(전북 완주군 비봉면 대치리) 공소에 정착하여 인접한 다리실(현재 천호 성지가 있는 천호동의 옛 지명) 공소를 오가며 거주하였다. 당시 한국에는 5명의 서양인 선교사가 있었는데, 리델 주교가 입국한 지 4개월 만에 체포되어 6월 4일 중국으로 추방되자 블랑 신부가 부주교로 임명되었다. 1879년 4월부터 두세(Doucet, 丁加彌) 신부는 고산 빼재〔秀峙〕에 머물렀다. 드게트(Deguette, 崔東鎮) 신부를 체포한 포도청에서 블랑 신부도 체포하기 위해 포교들을 전라도로 내려보내어 고산 지방을 수색하자, 블랑 신부와 두세 신부는 장수 큰골 뒷산 상여덤에 있는 굴 속에 한동안 숨어 지냈다. 1882년 블랑 신부는 교구장 직무를 대행하기 위해 상경하였다. 1886년 6월 4일 한불조약(韓例條約)이 체결되자, 프랑스 선교사들은 치외법권적인 보호를 받게 되었고, 자유로운 활동이 보장되었다.
〔교세의 발전과 시련〕 전라도 교회는 전국에서 교세가 가장 컸지만 1885년부터 전라도 전담 선교사는 1명뿐이었다. 그래서 경상도 지방에서 선교하던 로베르(Robert,金保祿) 신부와 보두네(Baudounet, 尹沙勿) 신부가 공소판공을 도와 주었다. 그러다가 1889년 봄 전주 본당이 설립되어 보두네 신부가 임시 거처인 소양 대성동(현 완주군 소양면 신원리)에 부임하고, 금구 배재 본당(현 완주군구이면 안덕리, 수류 본당의 전신)이 설립되어 베르모렐(Vermorel, 張若瑟) 신부가 부임하였다. 1891년 보두네 신부는 전주로 진출하여 6월 23일 현재의 전동 성당 터에 정착하였다. 라크루(Lacrouts, 具瑪瑟) 신부는 1895년 5월 6일 배재에 부임하였다가 1895년 10월 초 현재의 수류 본당 터를 매입하여 이사하였다.
1891년에는 고산 지역 본당이 설립되어 우도(Oudot,吳保祿) 신부가 차독배기〔白石〕 공소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1893년 4월 22일 우도 신부의 후임으로 비에모(Villemot, 禹一模) 신부가 부임하여 되재〔升峙〕에 성당신축 부지를 마련하고, 1894년 1월부터 성당 신축 공사를 시작하여 완공한 후 되재 본당으로 명명하였다.1897년에는 나바위[羅巖] 본당이 설립되었는데, 이곳은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가 사제 서품을 받고 1845년 10월 12일 입국하며 첫발을 디딘 곳이었다. 또한 1900년에는 진안 어은동 본당이 설립되어 김양홍 신부가 부임하였다. 1903년에는 정읍 신성리 본당이 설립되어 김원영(金元永,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1910년에는 함열 안대동 본당이 설립되어 서병익(徐丙翼, 바오로) 신부가 부임하였다. 성당 건축은 되재 본당이 제일 먼저 시작하였는데, 거의 완공 단계에 이르렀을 때 본당 신부가 동학 농민 전쟁으로 피신하게 되어 끝을 맺지 못하고, 피난에서 돌아온 1895년 여름에 완공되었다. 나바위 성당은 1906년, 수류 성당은 1907년, 진안 어은동 성당은 1904년, 정읍 신성리 성당은 1909년에 건축되고, 전주 성당은 1908년에 신축 공사를 시작하여 1914년에 완공되었다. 전주 성당을 제외한 시골 성당들은 한국인의 정서와 환경 친화적인 입장에서 주변 생활 문화와 이질감을 주지 않기 위해 전통 양식인 기와 지붕의 한옥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성당 내부 중앙에는 조선의 풍습을 지켜 남녀석을 구분하는 칸막이가 있었다.
개항 이후 전라도 교회는 무수한 시련을 딛고 성장하였다. 동학 농민 전쟁의 진원지와 인접한 금구 배재에 거주하고 있던 조조(Jozeau, 趙得夏) 신부는 전라도 교회가 처한 위급한 상황을 주교에게 보고하기 위해 상경하던 중 일본군에 패하여 도망치던 청군에게 잡혀 7월 29일 공주 장깃대 나루터에서 살해되었다. 전주 본당의 보두네 신부와 되재 본당의 비에모 신부는 7월 중순부터 성불 공소(현 전북 완주군 동상면 수만리) 큰 바위 굴 속에서 6주간을 숨어 지내다가 구사일생으로 전라도를 탈출하여 9월 6일 서울 주교관에 도착하였다. 동학 농민 전쟁으로 3개 공소가 전소하고, 많은 공소에서 신자들의 재산이 약탈당하거나 구타당하여 죽은 사람이 여럿이었다. 1886년 한불조약 이후 천주교 교세가 확대되면서1888~1905년 사이에 천주교 측과 천주교에 적대감을 가진 지방관, 지방 관리, 지방 지배 세력, 지방 주민들간의 충돌로 20건의 '교안' (敎案)이 발생하였다. 또한 1896~1900년 사이에는 선교사와 신자들이 월권을 행사하여 관(官)과 민인(民人)들에게 폐해를 끼친 '교폐' (敎幣) 사건이 일어났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지방군(軍)까지 진압에 나선 나바위 베르모렐 신부의 '강경포(江景浦) 사건' 이다. 한편, 프로테스탄트와의 알력도 만만치 않았다. 전라도는 1893년부터 프로테스탄트의 선교 활동이 왕성하였는데, 1905년 수류 본당 구역에서 네 차례나 천주교 신자와 프로테스탄트 신도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수류 본당 페네(Peynet, 裵嘉祿) 신부가 발포(發砲)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908년에는 친일 단체인 일진회(一進會)와 자위단(自衛團)에 대해 비판적이던 전주 본당 보두네 신부가 진안 주둔 일본군에게 폭행당하고, 진안 어은동 김양홍 신부가 구금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하지만 교회는 당시 천주교에 대한 부정적인 사회적 인식을 괘념하지 않고 사회 발전에 노력하였다. 전라도 교회는 1889년부터 기초적인 교육을 위해 본당과 공소에 서당식 학교를 세워 신자와 비신자를 가리지 않고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1890년부터 보두네 신부는 학교 설립을 추진하여 1891년 개교하기로 하고, 이 학교에서 가르칠 한문, 양문(洋文), 산법(算法), 격치(格致) , 화학(畵學) 등 교과목들까지 정하였다. 그러나 학교 설립 기금과 운영비를 남에게 맡겼다가 횡령당하여 수포로 돌아갔다. 1905년부터는 애국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전국에 소학교를 세우는 일이 유행처럼 번졌는데, 전라도 교회는 본당마다 학교를 세우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1906년 되재 본당은 신성학교(晨星學校)를 세웠고, 1908년에는 태극계명학교(太極啓明學校)로 개명하였다. 또한 1908년에는 '태극계명 측량강습소' 를 설립하였다. 나바위 본당은 1908년 계명학교를, 수류 본당은 1909년 인명학교(人明學校)를, 진안 어은동 본당은 영신학교(永信學校)와 1932년에 부안 등룡리 간이학교를 세우고 1935년에는 등룡리 본당을 부안읍으로 옮겨 부안 본당을 설립하고 부안학교(扶安學校)를 설립하였다. 1936년 한들 본당은 해성학교(海星學校)를 세웠다. 교회는 교육 사업만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기초로 한 사회 복지 활동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 일환으로 1884년경부터 1915년경까지 적게는 4명에서 많게는 43명의 고아들을 고아원 또는 신자 가정에 위탁하여 양육하였다. 교회는 무엇보다 구원 사업에 열중하여 성의회, 매괴회, 성모 신심회, 전교회, 성가회, 예수 성심회, 연령회, 성체회 등 신심 활동을 강조하였다.
1910년 전북 지방에는 프랑스 신부 5, 한국인 신부 2등 7명의 본당 신부가 사목하였다. 또한 1882년 45개로 출발한 공소가 1910년에는 188개로 증가하였고, 1884년 4,363명이던 신자수도 14,794명으로 증가하였다.
Ⅲ. 일제 탄압과 교회 조직의 발전
〔자치 교구 설정과 교회 조직의 발전〕 1911년 6월 11일 교황 비오 10세(1903~1914)는 조선 대목구를 분할하여 남쪽에 대구 대목구를 설립하고, 드망즈(F. Demange,安世華) 주교를 대구 대목구장에 임명하였다. 그리하여 전라도 신앙 공동체는 대구 대목구 소속이 되었다. 당시 전라북도 교세는 전주 수류 · 되재 · 나바위 · 정읍 신성리 · 안대동 · 진안 어은동 등 7개본당, 169개 공소와 교우 13,583명이었다.
일제 시대에 전라도 신앙 공동체의 발전은 부진하여 가난한 신자들은 생활고에 시달려 생계를 찾아 떠도는 일이 많았다. 신자들은 교우촌이 아닌 곳에 섞여 살며 어려움을 겪었고, 신앙 생활 또한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것으로 흘렀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으로 프랑스 선교사들이 본국으로부터 징집 영장을 받고 귀국하는 사례가 빈번하여 사제의 수가 모자라 본당이 폐쇄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1914년 안대동 본당이 신부의 공석으로 폐쇄되어 나바위 본당에 합병되었다가 1938년에 복원되었다. 1921년에는 나바위 본당에서 충남 논산 본당이 분리되었고, 이 본당이 1922년 서울 대목구로 편입되면서 전북 신자 1,115명(나바위 공소 836, 되재 공소 467)이 감소하였으며 또 깊은 산골에 사는 신자들은 사제와 멀리떨어져 성사를 자주 받을 수 없었다. 일제는 1915년 포교 규칙' 을 공포하고 선교 활동을 규제하였다.
전북 지역의 선교를 담당하였던 파리 외방전교회의 첫째 목적은 선교 지역에 완전한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다. 드망즈 주교는 부임 후 신학교 교육에 모든 힘을 기울였는데, 이는 한국인 사제를 양성하여 이들이 주관하는 자립 · 자치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였다. 드망즈 주교는 1914년 10월 대구에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세웠고, 1919년 11월 23일 제2회 졸업생인 되재 성불 공소 출신인 이약슬(李若瑟, 요셉) 신부가 서품을 받았다. 1922년에는 되재 출신 이종필(李鍾弼, 마티아), 1926년 석종관(石鍾寬, 바오로) · 김후상(金厚相, 바오로), 1929년 송남호(宋南浩, 타대오) · 김창현(金昌鉉, 바오로) · 허일록(許日錄, 타대오) · 김영구(金榮九, 베드로), 1930년 민정호(閔正鎬, 마르코)가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11~1930년까지 전라북도에서는 8명이 사제 서품을 받았는데 사제수의 증가는 교세 발전과 직결되었다. 어은동 본당은 1921년 진안으로 본당을 이전하고 다시1922년에는 다시 한들로 이전하였다. 1926년 장수 수 분리, 부안 등룡리 본당이 설립되었고, 1927년에는 진안 한들 본당, 1929년에는 태인 능교리, 진산 지방리 본당이 설립되었으나 지방리 본당은 1931년 5월 폐쇄되어 되재 본당으로 환원되었다. 또한 1931년 1월에는 군산 둔율동 본당이 설립되었으며 1935년 등용리 본당은 부안읍으로 옮기면서 폐쇄되고 부안 본당이 설립되었다.
1931년 5월 10일 드망즈 주교는 전라도 감목 대리구를 설정하고 김양홍 신부를 책임자로 임명하여, 한국인 자치 교구를 준비토록 하였다. 당시 전라도의 신자수는 18,008명(전북 16,210, 전남 1,373, 제주 425), 본당수는 전북 11개(전주, 나바위, 되재, 장수 수분리, 진안, 수류, 태인능다리, 정읍 신성리, 부안 등룡리, 군산, 진산 지방리), 전남 2개(목포, 나주), 제주 2개(제주읍, 홍로)였으며, 성당 또는 경당이 36개, 공소가 199개였다. 그러나 전라도 교회는 교구 운영의 재정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무엇보다 신부가 부족하였고 전라남도는 섬과 오지가 많아 전교 활동비가 많이 필요하였다. 드망즈 주교는 전라남북도를 나누어 전라남도를 골롬반 외방선교회에 맡기기로 하였다. 1932년과 1935년에 총 8명이 사제가 서품을 받자, 1935년 금산, 이리, 남원, 김제 본당이 신설되었다. 이후 금산 본당은 1963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충청남도로 편입되어, 1980년 8월 대전교구로 이관되었다. 전라도 신앙 공동체는 한국 교회가 그렇듯이 공소에의해 살아왔다. 1911년 대구 대목구에는 본당수가 18개였지만 공소는 392개였다. 드망즈 주교가 취임 후 가장강조한 역점 사업 중 하나가 공소 회장의 자질 향상이었다. 그래서 회장의 직분을 강화하며, 그 임무에 관한 회칙으로서 회장 직무를 활성화하고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해설해 준 《회장직분》을 1913년 10월 14일 각 본당에 발송하였다. 또한 선교 활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고 활성화하기 위해 남 · 녀 전교 회장 제도가 교회 조직 안에 정착되도록 유급 전교 회장 제도를 시행하였다. 그리고 공소 신축을 장려하여, 공소를 신축할 경우 방 두개가 딸린 강당이어야 한다고 적정 규모를 정해 주었다. 이는 장차 사제 수급이 원활해지면 신부가 정주(定住)하는 본당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1931년 9월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으며 한국주교들은 첫 전 조선 공의회' 를 열고, 《조선 교회 공동 지도서》를 간행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평신도들이 교회의 사도직에 참여하도록 가톨릭 운동을 강조하였다. 이 시기 신자들의 조직 활동으로는 청년회, 평의회, 회장단, 천주교 협회, 회장 피정회, 자모회(부인회), 소년회, 소녀회, 미사회, 경신회, 경애회(혹 仁愛會), 구역장회 등이 있었다. 전주 본당에서는 1920년부터 청년회가 조직되었고, 1929년부터는 모든 본당에 조직되어 본당의 중추적인 기관으로 교회 운영을 사실상 이끌어 왔다. 또한 평의 회가 조직되어 본당 유지 · 운영에 관한 모든 중요 사항을 결정하였다. 회장단은 본당 회장단과 구역 · 공소 회장들로 구성되어 본당 운영을 일선에서 맡아 왔다. 또한각 공소 회장과 각 단체 대표들의 연합체인 '천주교 협회' 가 1911년 수류 본당에서 시작되어 1931년부터는모든 본당으로 확대되었다.
전라북도 신앙 공동체는 자신들의 힘으로 교회 운영을책임져야 한다는 의식이 높아졌다. 전라북도 신자들은 순교자의 가족 · 후손 그리고 박해를 겪은 신자 가족 또는 후손들이 대부분이며, 이들은 오랫동안 유민 생활을 해왔다. 그래서 선교사들에게 전라북도 신앙 공동체는 가난의 대명사였다. 1931년 감목대리구가 설정되고 프랑스 선교사들이 모두 떠나자 신자들은 가난한 본당과 교구 살림을 책임져야 하였다. 그래서 신자들은 자신들의 매 끼니 양식에서 하느님 몫으로 쌀 한 주먹을 덜어모았다가 본당에 바쳤다. 이른바 '좀도리 쌀' 모으기 운 동을 전개한 것이다. 1932년 《한국 교회 지도서》가 반포되자 대구 대목구는 9월 9일 공문을 통해 교무금 제도를시작하였다. 교무금 제도가 생기기 전에는 흔히 '명하전' (名下錢)이라 부르는 공소전(公所錢)으로 공소를 유지하였었다. 드망즈 주교는 전라북도 사제들에게 특별히"신자들에게 독립할 교구에 대한 중대한 책임을 이해시켜, 재정적 협력을 더 많이 하도록 해야 한다" 라고 당부하였다. 교무금의 5/10는 본당 운영비로, 2/10는 선교사들 수당으로, 3/10은 교구 운영 분담금으로 사용하였는데, 1934~1935년 전라북도 교무금은 10개 본당17,726명의 57만 8천 26엔이었다.
1937년 4월 13일 드망즈 주교는 전주 감목 대리구를 지목구로 설정하고 김양홍 신부를 지목구장에 임명하였다. 그로 인해 전주교구는 드망즈 주교의 계획대로 한국교구 중 최초의 자치 교구로 출발하였다. 당시 전주교구의 교세는 한국인 사제 15명, 본당 14개, 교우수18,737명, 공소 190개, 성당 36개, 경당 44개, 전교회장 35명, 상주(常住) 회장 201명, 신학생 5명, 전주 무료 진료소 1개 등이었다. 전주교구는 1938년 6월 22일'전주교구 천주교회 유지 재단' 을 설립하고, 감목 대리구 시절부터 계획하여 오던 수녀원을 설립하였다. 1938년 설립된 해성학교에서 근무할 수녀와 본당 전교 수녀를 청하여 1938년 10월 수녀들이 부임함으로써 샬트르성 바오로회 분원이 설립되었다. 전주 지목구는 교회에 필요한 모든 조직을 갖추었다.
〔일제하 시련과 교구장의 사표〕 일제하 한국 교회는 정교 분리 원칙, 정치 불간섭주의, 선교 우선주의를 선교방침으로 내세워 민족 독립의 문제를 정치적인 문제로 단정하고 신자들의 민족 운동을 단죄하였다. 교회를 지킨다는 이유로 일제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일제는 천황 숭배 신앙의 표현인 신사 참배를 정책적으로강요하였다. 뮈텔 주교는 1922년 9월 21일 《서울교구지도서》를 통하여 신사 참배는 미신 행위이므로 참배할 수 없다고 공포하였다. 1924년 10월 11일 강경공립보통학교 학생들 중 나바위 본당과 논산 본당 천주교 신자 학생들이 신사 참배를 거부하거나 결석을 하자, 교장은 20명이 넘는 천주교 신자 학생들을 퇴학 처분하였다. 총독부는 나바위 본당 카닥스(Cadars, 姜達淳) 신부와 논산본당 공베르(J. Gombert, 孔安世) 신부의 항의를 받고 신사 참배는 종교적인 의미가 없는 시민적인 의식이라고 변명하였다. 천주교는 1925년 6월 《천주 요리》를 간행하며 신사 참배는 미신 행위이므로 금한다고 규정하였다(2권, p.45). 1925년 10월 15일 일제는 교회가 운영하는 학교까지 신사 참배를 강요하여 1926년 나바위 본당계명학교는 폐교하고 말았다. 주일 교황 대사인 마렐라(P. Marella) 대주교는 1935년 이 문제를 교황청에 질문한 결과, 교황 비오 11세(1922~1939)는 이들의 제사 의식은 종교 의식이 아닌 국민 의례와 관습으로 인식하여 허락하였다. 마렐라 대주교는 8월 10일 자신의 관할 주교들에게 통보하고, 드망즈 주교는 9월 27일 공문 제 112호로 모든 신부들에게 통보하며, 천주교 신자는 충실한 국민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한국 교회는 1936년 4월 《경향잡지》를 통하여, 그리고 포교성성은 5월 26일 '조국에 대한 신자의 본분' 이라는 지침을 통하여 신사 참배를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지침에도 불구하고 전주 신앙 공동체의 민족 의식은 달랐다. 전주 본당에서는 일제의 한글 말살 정책에 저항하여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한글 보급 운동에 앞장섰고, 1935년 서정수(徐廷壽, 알렉시오) 신부는 조선어학회에서 간행한 <한글> 잡지 보급에 힘썼다. 1941년 초여름 나바위 본당 김영호(金永浩, 멜키올) 신부는 일제가 신사 참배를 강요하며 교회의 성체 감실을 철거하고 가미다나(神朋)를 설치하도록 강요하자, 이를 거부하고 강론 시간에 일제의 패망을 공공연하게 말하였다. 이 일로 김영호 신부와 나바위 본당 청년들은 일제에 연행되어 몇 달 동안 옥고를 치렀고, 김영호 신부는 해방이 되고서야 석방되었다. 1941년 초겨울에는 전주교구장 김양홍 신부와 부주교 등 6명의 신부와 주교 복사가 연행되어 옥고를 치렀다. 일제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후 학교를 황국 신민 양성소로 만들고자 하는 발악으로 본당에서 경영하던 학교들을 폐쇄하거나 징발하였다. 그중 대표적인 예가 전주 본당의 해성국민학교(海星國民學 校)이다. 이 학교는 1938년 5월 '조선교육령' 에 따라해성심상소학교(海星尋常小學校)로 인가되었다가 1941년 해성국민학교로 바뀌었다. 그러나 1945년 5월 22일'전시교육령' 이 반포되면서 강제 폐교되고 '저금 관리소' 로 징발되었다.
가난한 신자들과 한국인 사제들로 구성된 전주 지목구는 드망즈 주교가 우려했던 대로 재정난에 부딪혔다. 게다가 일제의 교회에 대한 사찰이 심하여 고해소까지 들어와서 감시하는 등 갈수록 탄압이 심해졌다. 전주교구장 김양홍 신부는 70세의 고령인데다가 교구의 재정난과 일제의 탄압에, 자신의 행정 능력으로는 교구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1941년 11월 21일 교구장직을 사임하였다. 그리하여 1942년 1월 5일 제2대 교구장에 주재용 신부가 임명되었다.
IV. 전주교구와 현대 사회
〔대목구 설정과 교회의 재건〕 전주 지목구는 해방을 맞아 한국 역사 교육과 한글 보급 운동에 나섰다. 역사가인 주재용 신부는 역사 강의를 요청하는 본당을 다니며 신자, 일반인, 교사, 면(面) 건국위원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였다. 전동 본당 청년회에서는 본당 소유인 전주 해성초등학교 강당에서 초 · 중등학교, 도청 학무과 직원을 대상으로 한국 역사와 한글 강습회를 열어 대성황을 이루었다. 《뜻글과 쓰임》이라는 한글 교재를 만들어 무상으로 나누어 주었고, 1945년 11월 조선어학회에서 《한글 첫걸음》을 펴내자 청년회에서 직접 서울에서 사다가공급하였다. 1946년 1월 7일 대구 대목구장 일본인 하야사카 구베에(早坂久兵衛) 주교가 사망하자 그 후임에 전주 지목구장 주재용 신부가 임명되었다. 1월 22일 김현배 신부가 지목구장 서리에 임명되었고, 1947년 7월 7일 제3대 교구장에 임명되었다. 교구의 재정난으로 1939년부터 중단되었던 신학생 양성이 1945년부터 재개되었다. 또한 1946년 8월 1일 성심여학원을 설립하고 이를 발전시켜, 1948년 7월 29일 성심여자중학교 설립인가를 받고 9월 26일 개교하였다. 1947년 전주에 비석거리 본당(중앙 본당 전신)이 신설되었고, 전주본당은 전동 본당으로 명칭을 바꾸었으며, 전동 본당 청년회가 중심이 되어 해성국민학교를 폐교하였고, 여중학교 설립기금을 모아 교구에 전달하였다. 마침내 1952년 4월 13일 성심여자고등학교 설립 인가를 받고 4월 30일 개교하였다. 1948년 3월에는 전주 본당에 성심유치원이 설립되었고 1949년 5월 1일에는 전주 성모병원을 개원하였으며, 1951년에는 나바위 본당에 진료소를 설립하였다가 1971년 폐쇄하였다.
이 시기부터는 순교자 현양 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신유박해 때 유항검과 그의 가족이 순교한 후 폐족되자 노복들과 친지들은 그들의 시체를 거두어 고향에서 1km가량 떨어진 김제군 용지면 제남리 바우백이에 가매장하였다. 그러나 1914년 그 땅 소유주의 요청으로 유항검가족 묘를 이장할 수밖에 없어서, 전주 본당 보두네 신부와 회장단은 사순 시기 때 파묘하여 4월 19일 치명자산정상에 안장하고, 1949년 7월 17일 전동 본당 자모회가 주축이 되어 14척 높이의 십자가를 세웠다. 그보다 앞서 되재 본당은 1939년 기해박해 100주년을 맞이하여 천호 성지에 있는 순교자들의 무덤 앞에 대리석 십자가 비를 세우고 축복식을 가졌다. 1949년 9월에는 평신도의 신앙 재무장과 평신도 사도직의 조직적 활동을 활성화하기 위해 18개 본당의 대의원들이 모여 '가톨릭 연맹' 을 조직하고 평신도 역할과 사명을 다짐하였다. 군산 본당에서는 가톨릭 연맹, 청년회, 성모성심회 등이 신자 배가운동을 벌여 예비 신자 180명을 인도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8월 4일 교구장 김현배, 이약슬, 김영구, 김재덕, 김종택 신부와 이대권 부제등 6명이 전주 교도소에 갇혔고, 성직자들은 자신들을 보호해 줄 만한 산골 교우촌으로 피신하였다. 교도소에 갇혀 있던 교구장 등 6명은 9월 27일 극적으로 탈출하였으나, 9월 20일 전주에 도착하여 머물고 있던 광주교구 신학생 전기수(全基洙, 그레고리오)와 고광규(高光奎, 베드로)는 26일 정치 보위부에 끌려가서 무참히 살해되었다. 한국 전쟁으로 전주 지목구에서는 1950년 7월부터 1952년 4월 사이 70명이 희생되었는데, 이들은 현대 순교자 215명 명단에 수록되었다. 한국 전쟁으로 다수의 성당과 공소들이 전화(戰火)되거나 파괴되었다.
수류 성당은 인민군에 의해, 고산 석장리 공소는 빨치산에 의해 전소되었고, 되재 성당과 고산 차독백이 공소와 순창 오룡촌 공소는 국군에 의해 전소되었다. 또한 전동성당은 전라북도 인민 위원회 · 차량 정비소 · 보급 창고로 사용되어 성당 외벽만 남고 내부는 거의 파괴되었다. 전주교구는 1954~1959년까지 전쟁으로 소실되거나파괴된 성당을 재건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1957년 1월 21일 전주 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되었고, 1월 26일 김현배 신부가 주교로 임명되었다. 1957년 5월 21일 중앙 본당에서 주교로 서품된 김현배 주교는 중앙 본당을 '주교좌 본당' 으로 정하였다. 김 주교의 첫째 사목 목표는 1군(郡) 1본당 설립이었다. 1954년 전주 대목구의 본당은 전동 · 남원 · 나바위 · 삼례 · 김제 · 안대동(함열) · 이리 · 금산 · 군산 · 부안 · 진안 · 태인 · 전주 대동 등 13개였다. 1889년 설립되었던 수류본당은 성당 소실로 김제 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고, 장수수분리 본당 역시 신부의 공석으로 남원 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다. 1955년 장계 본당이 신설되었고, 정읍 본당이 복원되었으며, 1956년 임실 본당과 대야 본당이 신설되어 17개 본당이 되었다. 1957년 무주 본당 신설,1958년 고산 본당 복원, 1959년 여산 본당 신설 등으로 20개가 되었으며, 1960년 3월에는 황등 · 순창 · 고창에 본당을 신설하여 '1군 1본당' 계획을 성취하여 24개 본당을 갖게 되었다. 1960년대까지 성당 신축 붐이 일어났는데 각 본당으로 구호 물자가 나오자 신자들은 어차피 자신들 힘으로 성당을 지을 것이므로 구호 물자 일부를 매각하여 성당 건립에 사용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리하여 1955년 삼례 · 이리 · 김제 · 군산 둔율동, 1956년 진안, 1957년 중앙 · 금산 · 정읍 · 무주, 1958년 고산 · 남원 · 여산 · 장계, 1959년 임실 · 함열 · 수류 신태인, 1960년 황등 · 부안 · 순창 등 총 20개의 성당이 건축되었다. 그리고 전주교구청이 1960년 6월 21일 신축되었다. 그러나 한공렬 주교가 1966년 2월 25일 서울교구 소속 인보 성체 수도회를 전주교구 소속 수도회로 받아들이며 주교관 건물을 수녀원에 넘겨주었다. 그리고 1970년 3월 1일 가톨릭센터를 증축하여 10월 30일 입주하였으며, 1975년 11월 1일 가톨릭센터와 연계하여 교구청을 신축하였다.
한국 전쟁 이후 외국 선교회 · 수도회 · 사도직 단체 ·각종 신심 단체들의 한국 진출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955년 5월 5일 '레지오 마리애' 가 도입되었고, 1960년 1월 19일 재속 프란치스코회가 도입되었으며, 1969년 1월에는 꾸르실료 운동이 도입되었다. 1959년 12월에는 '전교 협조회(S.A.M)' 가 진출하여 전주교구 소속신부가 되어 교구의 힘이 미치지 못했던 분야의 사목을 도왔다. 1961년에는 '국제 농촌 지역 사회 개발 협조처'(CIRD)가 진출하여 전주 성모병원과 고창, 함열, 김제,삼례 등에 있는 나환우촌을 순회하며 진료 활동을 하였 으며, 1962년 6월 10일에는 '가톨릭 노동 청년회' 가 설립되었다. 1950~1960년대 한국 교회의 특성은 교회 운영과 모든 사업이 외국의 원조에 철저히 의존하였다는 점이다. 전주교구는 외국의 원조를 받아 진안 성모의원을 1959년 3월 20일 개원하였으나 운영난으로 인하여 1977년 폐쇄하였고, 장계 성모병원은 1959년 12월 15일 개원하였다가 1990년 말 폐쇄되었으며, 전주 성모병원은 1981년 7월 31일 폐쇄되었다. 가톨릭 여학생관이 1965년 3월 설립되었다가 1983년 2월 28일 폐관하였다. 1960년 2월 19일 숲정이 순교터에 성심여자중 · 고등학교와 남매격인 해성중학교가 설립되었고, 해성고등학교는 1962년 12월 31일 설립 인가를 받아 1963년 3월 9일 개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교구의 쇄신과 발전〕 1960년 4월 30일 김현배 주교가 사망하고, 1961년 2월 13일 제4대 교구장에 한공렬주교가 임명되었다. 그리고 1962년 3월 10일 한국 교회에 정식 교계 제도가 설립되어 전주교구도 정식 주교구가 되었다. 1962년 10월부터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려 교회 개혁이 시작되었고, 1964년 7월 15일 한국 교회는 라틴어로 거행되던 미사와 전례를 우리말로 바칠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교회 의식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교회 운영의 민주화가 시작되어 평신도들이 주인 의식을 가지고 교구와 본당 사목과 재정에 참여하기 시작
하였다. 교구는 성직자 중심의 사목 조직을 탈피하고 평신도의 참여를 강력하게 권장하여, 1966년 8월 전국에서 최초로 '본당 운영 위원회' 를 조직하였고, 10월 6일이를 '사도회' 로 개칭하였다. 사도회는 1986년 1월 12일 새로 반포된 교회법에 따라 '사목 협의회' 로 체제를 개편하였다. 1971년 7월 14일 한공렬 주교가 대주교로 승품됨과 동시에 제6대 광주 대교구장에 임명되자, 1973년 2월 10일 김재덕 신부가 주교로 서품되어 제5대 전주 교구장이 되었다. 이 당시 교세는 31개 본당, 신자수 51,808명으로 교구 설정 당시보다 3배로 성장하여있었다.
전주교구의 1970년대는 평신도 활동이 가장 활성화된 시기였다. <교회 헌장>과 <평신도 교령>을 바탕으로 평신도 사도직을 강조하여 그들이 교회 운영과 사목에 관여하였다. 또한 사회 정의 구현을 위한 투쟁의 시대라 할 수 있다. 1970년대 유신 독재에 대한 저항 운동의 1차적인 근거가 된 교리는 <사목 헌장>이었다. 전주교구는 교구장을 구심점으로 모든 사제단이 일치하여 교회의 예언자직 사명에 모든 힘을 기울여 반독재 · 민주화 · 사회 정의 구현 운동에 앞장섰다. 1976년 문정현(文正鉉, 바르톨로메오) 신부가 3 · 1절 명동 기도회 사건으로 8월 1일 징역 5년 자격 정지 5년을 선고 받고, 1978년 12월 31일 석방되었다가 1979년 7월 26일 재수감되었다. 1978년 7월 6일에는 경찰이 박종상(朴鍾祥, 가브리엘) 신부를 구타하고 유기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1979년 9월 11일 박정희 정권은 전주교구장 김재덕 주교를 구속하기로 결정하는 사태까지 갔다가 철회하였다. 1980년 5 · 18 광주 민중 항쟁이 발생하자 5월 23일 교구 정의 평화위원회는 긴급 회의를 소집하고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 광주 시민의 학살 만행을 알리는 유인물을 보내고, 모든 도민에게 광주 학살 만행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폭로하였다. 전주교구는 1970년대에 상관, 숲정이, 용안, 장수, 원평, 효자동, 오룡동, 금마 본당을 신설하여 39개 본당에 이르렀다.
〔교구의 성장과 변모〕 1981년 4월 10일 김재덕 주교가 사임하고, 1982년 6월 8일 박정일 주교가 제 6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한국 교회는 200주년을 맞으며 1984년 5월 6일 103위 시성식을 갖게 되었는데, 전주교구는 7위 성인의 시성식을 앞두고 1983년 5월 천호 성지에서 열두 분 순교자 유해 발굴 작업을 가졌다. 이때 유해의 행방을 모르던 정문호 · 한재권 두 성인의 유해를 찾았다. 박정일 주교는 교황청 전례 성사성의 허락을 받아 1984년 5월에 시성된 손선지 · 정문호 · 한재권 · 이명서 · 조화서 · 조윤호 · 정원지 등 일곱 명을 교구 수호자로, 9월 26일을 수호자 축일로 정하고 1983년 9월 7일 선포하였다. 박정일 주교는 한국 교회 설립 200주년을 맞으며 한국 최초의 자치 교구인 전주교구가 한국 교회의 맏형답게 세계 교회에 이바지하는 교회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래서 1957년 교황 비오 12세(1939~1958)가 발표한 <피데이 도눔>(Fidei donum)의 정신을 계승한 <선교 교령>에 따라 사제가 부족한 나라에 선교사를 파견키로 하고, 1984년 11월 3명의 사제를 페루에 파견하였다. 이에 앞서 1980년 1월 5일 이수현(李守鉉, 보나벤투라) 신부가 교구 설립 이래 처음으로 독일 마인츠 한인 본당으로 교포 사목을 떠났으며, 이어서 1983년 8월 24일 필리핀 한인 본당의 교포 사목을 위해 사제들을 파견하였다.
1980년대는 순교자 현양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84년 한국 교회 설립 200주년 행사에 이어 1987년 자치 교구 설정 50주년을 맞아 전주교구는 순교 정신현양 사업에 온 힘을 기울였다. 1987년 8월 30일에는 순교 정신의 생활화를 위한 교육장으로 천호 성지에 피정의 집을 건립하였으며, 부부 동정 순교자 유 요한 · 이루갈다와 그 가족이 묻힌 치명자산을 개발하여 1988년3월 5일 기공식을 가졌다. 또한 교구에서는 설정 50주년을 마무리하며 교구의 숙원인 한국 초대 교회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 시성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1987년 12월 4일 시복 준비위원회를 결성, 1988년 1월 9일 모임에서 1차 시복 추진 대상자로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 · 권상연, 호남의 사도 유항검, 부부 동정 순교자 유요한 이 루갈다 등 5명을 선발하였다. 시복 시성 위원회는 '5인 순교자 시복 시성 청원서' 를 작성하고, 1989년 2월 13일 박정일 주교가 마산교구로 떠나기 전인 2월 10일 교황청에 청원서를 발송, 1989년 4월 2일 교황청 시성성 장관으로부터 시복 시성 청원을 해도 좋다는 '5인 순교자 시복 시성 청원에 대한 교황청 회신' 을 받았다. 1980년대 전주교구는 전주 · 익산 · 군산 · 남원 ·김제 · 정읍 등 6개 시(市)를 중심으로 본당 신설을 중점적으로 추진하여 18개 본당을 신설하였으며, 재단 부동산을 정리하여 신설 본당 부지 마련에 심혈을 기울였다. 1980년대에는 교회의 신앙 유산들이 사적(史蹟) ·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전동 성당은 사적 제288호(1981.9. 28) , 나바위 성당은 사적 제318호(1987.7.25) , 숲정이 천주교 순교 성지는 지방 기념물 제71호(1984.9.20), 치명자산 천주교 고묘(古墓)는 지방 기념물 제69호(1984.9.20)로 지정되었다. 또한 정의 구현 활동도 중단이 없었는데, 의식화 운동의 장(場)인 전동 본당이 1988년 10월 10일에, 오룡동 본당은 1989년 1월 5일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하였다. 문규현 신부는 1989년 7월 25일 방북하여 8월 15일 판문점을 통하여 귀환하다가 체포되어 8년 실형을 선고받았다. '정의 구현과 자선 활동은 사회복지를 향한 두 발(足)이다' 라는 생각으로 전주교구는 사회 복지 기관 중 구라 사업 기관으로 함열 상지원을 1950년 3월 25일에, 고창 동혜원은 1952년에, 김제 신암 농원은 1961년 12월 31일에, 익산 농장은 1974년 4월 4일에 설립하였다. 나환우를 돕는 의료 기관으로는 익산 성모병원이 1972년 6월 1일에 설립되었다. 장애인복지 시설로는 1984년 7월 20일 무지개 가족과 1985 년 4월 16일 작은 자매의 집이 설립되었다. 노인 복지 시설로는 1979년 7월 26일 성언 복지원, 1988년 9월 15일에는 영보 은혜의 집, 1991년에는 인보 노인 종합복지관, 1996년에는 성모 노인 돌봄 집, 1996년 11월 2일에는 야고보의 집, 1997년 9월 1일에는 성 요셉 동산 양로원이 설립되었다. 노동 복지관으로는 1983년 1월 1일 성 요셉 익산 노동자의 집, 1986년 4월에는 성요셉 군산 노동자의 집이 설립되었다. 사회 복지 후원회로는 1986년 6월 사라의 다리가 설립되었다.
1988년 12월 15일 박정일 주교가 마산교구장으로 전보 발령되어 1990년 2월 8일 이병호 신부가 제7대 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었다. 전주교구는 1990년대부터 교구의 내실을 기하는 데 힘썼다. 전주교구 사제단은 1990년 7월 사제 총회에서 교구 운영 전반에 걸쳐 평신도들의 전문적이고 폭넓은 자문을 수렴하고, 교구 제반 행정을 공개하여 민주적으로 교구 행정을 운영키로 결의하였다. 1994년에는 교구 내 각 본당 사무 전산화 통일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시스템을 구축하였으며, 1995년에는 교구 행정 체제를 정비하여 직제를 개편하고 7월에는 직원 인사 법규를 제정 공포하였다. 또한 신설 본당 보조 규정을 정하고 1996년부터 이를 실시하여 각 본당에서 '본당 설립 기금' 을 분담하게 하였다. 1997년 교구 설정60주년을 마무리하며 교리 교육과 성서 교육을 체계적 이고 지속적으로 교육하여 교구민의 자질을 향상시키고, 선교 활동의 전위대로 일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1997년 12월 1일 '전주 가톨릭 신학원' 을 설립하였다. 한편, 전주교구는 1964년 《천주교 호남발전사》를 간행하였으나 이 책을 보충할 새로운 역사서가 필요하여, 교구 설정60주년을 맞아 1998년 7월 30일 《전주교구사》 1권 (1,318쪽)과 2권(1,757쪽)의 방대한 교구사를 간행하였다. 이병호 주교는 선교는 교회의 본질이라는 의식에서 1997년 8월 18일 교구 내에 일종의 개척 교회인 '선교본당' 제도를 도입하여 익산 팔봉, 오수, 만경, 줄포 등 에 선교 본당을 신설하였다. 2001년 신유박해 200주년을 맞아 이해 9월에 조직된 '시복 시성 추진 대상자 선정위원' 은 2002년 1월 15일 기존의 전주교구 시복 시성 추진 대상자 5명 이외에 신유박해 6명, 기해박해 13명 등 19명을 추가 선정하여 모두 24명을 추진키로 하였다.
현재 전주교구는 동전주 지구, 서전주 지구, 남전주 지구, 북전주 지구, 군산 지구, 익산남 지구, 익산북 지구,김제 · 정읍 · 고창 · 부안 지구, 임순남무진장(임실 · 순창 · 남원 · 무주 · 진안 · 장수) 지구, 특수 지구의 10개 지구로 구성되어 있고, 평신도 사도직 단체 34개와 수도 단체 24개가 활동하고 있다. 교구 주보(週報)는 <숲정이>이며, 공소용 <주님의 날>과 어린이용 <어린 양>을, 그리고 2003년에는 계간지로 《쌍백합》을 발간하고 있다.2003년 현재 본당 84개, 교우수 161,194명, 사제 166명, 공소 108개이다. (→ 강경포 사건 ; 권상연 ; 신사참배 ; 신해 박해 ; 유항검 ; 윤지충)
※ 참고문헌 김진소,《전주교구사》 Ⅰ·Ⅱ, 천주교 전주교구/ 이종흥 역, 《안세화 주교 공문》, 2003. 〔金真召〕
전주교구
全州敎區
Ⅰ. 천주교 수용과 박해 · Ⅱ. 신앙의 자유 획득과 본당 설정 · Ⅲ. 일제 탄압과 교회 조직의 발전 · Ⅳ. 전주교구와 현대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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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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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전동 성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