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두산 순교 성지

切頭山 殉敎聖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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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 성지 지하실에 마련된 성해실(왼쪽). 순교 정신의 상징성과 한국적인 고유미를 나타내고 있는 순교 기념관과 성당(이희태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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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 성지 지하실에 마련된 성해실(왼쪽). 순교 정신의 상징성과 한국적인 고유미를 나타내고 있는 순교 기념관과 성당(이희태 작).

한국 천주교회의 순교 사적지. 절두산은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한강변에 우뚝 솟은 작은 암벽 봉우리로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이후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절두산의 유래〕 절두산은 조선 시대 교통의 요지이자병선의 훈련장이며 처형 · 제사 · 진휼을 하던 곳이던 양화진의 동쪽에 있는 봉우리로 원래 가을두(加乙頭), 혹은 잠두봉(蠶頭峰)이라 불렸다. 중국 사신들이 칭송할 만큼 주변 경관이 뛰어난 이곳이 수많은 천주교인이 참수형으로 목잘려 죽은 곳이라는 의미의 '절두산' 으로 불리게 된 것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이곳에서 많은 신자들을 처형한 것과 관련이 있다.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은 천주교에 대한 박해령을 내렸는데 이때 살아남은 프랑스 선교사 리델(Ridel, 李福明) 신부가 조선을 탈출하여 청나라로 건너가 조선 교회의 상황을 알린 후 로즈(P. Roze, 魯勢) 제독의 함대가 1866년 9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입하였다. 조선 정부는 프랑스 함대와의 교전 후 1866년 10월 23일(음 9월 15일)부터 천주교 신자들을 새남터나 서소문 밖이 아닌 절두산에서 주로 처형하였는데 그 이유는 9월에 프랑스 함대가 침략하여 양화진까지 거슬러 올라온 것이나 10월에 다시 강화도를 침략한 것은 박해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한 천주교신자들이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원군을 비롯한 당국자들은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여 심문하면서 그들의 도움으로 프랑스 함대가 침략해 올 수 있었음을 분명하게 확인하였다. 따라서 프랑스 함대가 정박했던 양화진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함으로써 천주교 신자들의 책임을 확실히 묻고 본보기를 보임으로써 백성들이 프랑스 함대와 내통하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이렇듯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를 절두산으로 옮긴 이유가 프랑스 함대의 침략에 대한 책임을 천주교 신자들에게 묻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절두산에서는 프랑스 함대를 불러들인 혐의가 있는 신자들만을 골라서 처형하였다. 그 결과 병인박해 당시 김한여(베드로), , 최경원(야고보), 이의송(李義松, 프란치스코), 김이쁜(마리아), 이붕익(李鵬翼, 베드로), 김중은(金重殷, 베드로), 박영래(朴永來), 김진구(金鎭九, 안드레아), 최수(崔燧, 베드로) , 김인길(金仁吉, 요셉), 김진(金振, 베드로), 김큰아기(金大阿只, 마리아), 강명흠(姜命欽, 베드로), 이기주(李基柱, 바오로), 황기원(黃基元, 안드레아), 이용래(李龍來,아우구스티노), 원후정(元厚正) , 박성운(朴聖云, 바오로), 성연순(成連順) 원윤철(元允哲, 사도 요한), 박내호(朴來浩, 사도 요한), 유 바오로, 강 요한, 조 타대오와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순교자 5명을 합하여 29명이 처형되었다. 절두산 처형자들 중에서 단지 이름만 알려진 최경원과 박영래를 제외한 나머지 22명은 이름과 행적을 알 수 있다. 이 22명 가운데 최수, 김인길, 김진, 원후정, 성연순은 심문 과정에서 배교하였지만 나머지 19명은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 순교하였다.
절두산에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하였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절두산에서 신자들을 처형한 일은 병인박해 내내 계속된 것은 아니었다. 1867년 음력 8월 2일 이후의 기록에서는 절두산에서 참수당한 신자들의 예를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고, 1868년 음력 윤 4월 7일부터는 다시 서소문 밖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되었던 것으로 보아서 절두산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기간은 1866년 10월 23일부터 1867년 7월 30일까지 한시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순교 장소 또한 절두산 꼭대기가 아닌 양화 나루터의 평지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이나 《치명일기》 등의 자료에 순교 장소가 '절두산 꼭대기' 라는 언급이 없고, 대신 신자들의 처형지가 '양화진진터' , '양화진두' 등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대대로 절두산 근처 동리에 살아온 노인들의 증언과 절두산 꼭대기가 사형을 집행하기에는 너무 협소하다는 점 등을 통해서 추론해 볼 때 병인박해 당시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 장소는 양화 나루터의 약간 언덕진 평지로 오늘날 절두산과 꾸르실료 건물 사이의 한 지점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성지 조성〕 1956년 천주교계 일각에서 초기 한국 천주교 순교자들의 넋이 서려 있는 절두산 지역을 성지로 조성하자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한국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이하 '현양회' )는 "절두산 치명터를 확보하자" 라는 호소문을 발표하여 각계 각층의 협조를 이끌어낸 끝에 1956년 12월 7일 잠두봉 일대의 치명 터를 매입하였다. 현양회에서는 병인박해 100주년을 앞둔 1962년 20평내외의 좁은 평지를 조영하고, 그곳에 '가톨릭 순교 성지' 라는 글이 새겨진 높이 12m의 순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이와 함께 돌로 작은 야외 제대를 마련하여 미사를 집전할 수 있게 하였고, 기념탑 위에 십자가를 높이 세웠는데 1965년 낙뢰로 인해 십자가가 훼손된 후 기념관을 건립할 때 야외 제대와 함께 철거하였다.
병인박해 100주년을 맞이하여 순교자들의 신앙을 현양하고, 병인박해를 되새기기 위해 절두산 일원에 기념관의 건립을 결정하고, 1966년 3월 건립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10월 병인순교 100주년 기념 성당과 기념관이 완공되었다. 기념관은 병인박해 당시 신앙을 지켰던 순교자들의 숨결을 오늘날 더욱 생생히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절두산의 원형을 변형하지 않도록 건설되었다. 또한 기념관과 성당은 전체적으로 순교 정신의 상징과 한국적인 토착성, 전통적인 고유미를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기념관은 총 459평으로 본 건물 3층, 종탑과 기념 성당으로 구성되었다. 기념관 내부에는 사료실을 만들었는데 김상기(金庠基, 세례자 요한) 박사가 기증한 김대건 신부와 안중근(安重根, 토마스) 의사와 관련된 유물 등이 보관되었다. 기념 성당 지하실에는 서양식 유해 안치소인 성해실이 있는데 처음 이곳에는 병인박해(丙寅迫害) 당시의 순교자 11명과 기해박해(己亥迫害) 당시의 순교자 5명 등 총 16위의 유해가 모셔졌다가 현재는 27위 순교 성인들과 무명 순교자 1명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27위 순교 성인들의 유해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 모방(Maubant, 羅伯多祿) · 샤스탕(Chastant, 鄭牙各伯) 신부의 유해,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베르뇌(Bermeux,張敬一) · 다블뤼(Daveluy, 安敦伊)주교, 볼리외(Beau-lieu, 徐沒禮) ·도리(Dorie, 金) · 브르트니에르(Breteni-ères, 白) · 오메트르(Aumaîre, 吳) · 위앵(Huin, 闕)신부의 유해, 1846년 병오박해(丙午迫害) 때 순교한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 기해박해 때 순교한 허계임(許季任, 막달레나), 이영희(李榮喜, 막달레나), 이정희(李貞喜, 바르바라),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 , 이호영(李 ㅡ, 베드로),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의 유해, 병인박해 때 순교한 남종삼(南鍾三, 요한), 최형(崔炯, 베드로), 장주기(張周基, 요셉), 우세영(禹世英, 알렉시오), 손선지(孫 ㅡ, 베드로) 이명서(李 ㅡ , 베드로), , 한재권(韓 - , 요셉), 정문호(鄭 ㅡ , 바르톨로메오) 황석두(黃錫斗, 루가), 이윤일(李尹一, 요한)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1970년 9월 20일까지 기념관에서는 순교자 유품 현상 수집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수집 품목은 순교자와 교우, 박해자와 관련된 것으로 교회와 직간접으로 관련있는 서적, 성물, 성화, 의상, 생활 기구, 재판기록 등이었다. 기념관에서는 절두산 종합 개발 계획에 따라 성지 조성 작업을 활발하게 진척시키는 한편 김대건 신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71년 3월 김 신부의 유해 조사를 실시하였으며, 1972년 5월 김대건 신부의 동상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1971년에는 순교자들의 유해를 찾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순교자들의 행적을 증언하였던 박순집(朴順集, 베드로)의 묘를 기념관에 안장했다. 1973년에는 절두산 입구에 성모 동산을 마련하여 성모상을 세웠는데 이는 천주교 박해 때 순교자들이 성모께 자신을 의탁하고, 성모의 보호하심으로 혹독한 시련을 참고 순교하기까지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을 높이 기리기 위해서였다. 이 성모상은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문을 준비하면서 서쪽 후원으로 옮겨지고, 그 대신 새로운 성모상을 현재의 위치에 설치하였다. 1973년 4월에는 다블뤼 주교 등 병인박해 순교자들이 충청도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될 때 잠시 쉬었다 간 바위인 '복자 바위' (현 五聖 바위)를 성지로 이전하였고, 11월에는 한역 서학서(漢譯西學書)를 통해 천주교 교리 연구가 이루어졌던 주어사(走魚寺) 터에 남아 있는 비석을 절두산으로 옮겨왔다. 1974년에는 조선 후기 순교자인 남상교(南尚敎, 아우구스티노) 청덕비를 기념관으로 옮겨왔고, 병인박해 때 형구(刑具)로 사용했던 돌을 이전하였다.
1978년 기념관에서는 복자 성월(현 순교자 성월)을 맞아 한국 교회사 연구소와 공동으로 '한국 순교자 유품종합 사료 전시회' 를 개최하였다. 전시회장은 천주교 박해를 기록했던 사료를 전시된 제1 전시실과 순교 시대의 생활상을 보여 주는 의상 및 장신구 등을 갖춘 제2 전시장으로 구분되어 일반인들에게 선보였다. 1978년에는 성모 동산 남쪽에 성모 동굴(마사비엘)을 꾸몄고, 1980년 6월에는 남종삼의 순교비가 건립되었으며 9월 7일부터 13일까지 순교자들의 순교 정신을 묵상하는 특별 강론과 유해 친구를 겸한 '순교자를 위한 미사' 를 봉헌하였다. 1984년 5월 한국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을 특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절두산 성지를 찾아 한국 순교자들에게 뜨거운 경의를 표하였다.같은 해 '절두산 성지 후원회' 가 조직되었고, 11월 후원회가 발행하는 《절두산》 창간호가 발간되었다. 1989년 1월에는 교황 비오 10세의 유해가 기념관에 안치되었고, 3월에는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 추모비가 건립되었으며 8월에는 '절두산 성지 후원회' 의 명칭이 '절두산 순교 성지 후원회' 로 변경되었다.
절두산 순교 성지는 한국 천주교회사를 대표하는 성지로 매년 국내외에서 수많은 순례객들이 방문하고 있다. 그러나 절두산 인근 지역이 개발의 논리에 따라 빠르게 변화하여 절두산 성지의 주변 환경이 급속도로 훼손되었다. 이에 1995년 기념관에서는 절두산 순교 성지 후원회와 함께 '절두산 순교 성지 및 주변 지역 장기 발전 계획' 을 발표하였다. 1997년 11월 문화 체육부(현 문화 관광부)는 절두산 순교 성지 일원을 '양화나루 · 잠두봉 유적' 의 명칭으로 사적 제399호로 지정했다. 지방 문화재로 지정된 성지는 있으나,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것은 오직 이곳뿐이다. 2000년 10월부터 11월까지 순교 박물관에서 '거룩한 만남, 전례' 라는 주제로 특별 전시회가 마련되었다. 이 전시회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전례 물품 등 귀중한 물품들이 전시되었다. 2003년 2월 20일 서울대교구는 절두산 순교 기념관, 절두산 순교 성지, 절두산 순교 박물관의 대외 명칭을 절두산 순교 성지로 통합 변경했다. 그리고 현재 서울시 마포구는 절두산 순교 성지와 인근의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을 하나로 묶어 테마 파크로 조성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 박희봉 ; 서교동 본당)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가톨릭 신문》 윤선자, 《한국 가톨릭 문화 유산과 순교 기념관》, 절두산 순교 기념관, 1999/ 절두산 순교 성지 · 한국교회사연구소, 《양화나루 · 잠두봉 유적의 종합적 고찰》(사적지 제399호 지정 5주년 기념 심포지엄 발표 자료집), 2003 / 《절두산 순교 성지 이야기》, 절두산 순교 성지 , 2003.〔梁仁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