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광수 (?~1802)

鄭光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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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모 신부의 편지를 전하는 정광수 바르나바(탁희성 작).

주문모 신부의 편지를 전하는 정광수 바르나바(탁희성 작).

신유박해(辛酉迫害) 때의 순교자. 세례명은 바르나바.자(字)는 여해(與偕). 윤운혜(尹雲惠, 마르타)의 남편이며, 정순매(鄭順每, 바르바라)의 오빠.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도곡리 가마실에서 태어나 1791년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으로부터 천주교 서적에 대하여 배우기 시작하여 세례를 받았다. 정광수는 1797년 서울 홍필주(洪弼周, 필립보)의 집에 머물며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로부터 교리를 배웠는데, 어느날 신부로부터 김건순(金建淳, 요사팟)에게 쓴 편지를 전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당시에는 비신자였던 여주 김건순의 집을 방문하여 천주교를 소개하였다.
그는 천주교 신자가 아닌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웃 마을에 사는 신자 윤운혜와 천주교 교리에 따라 혼서(婚書) 없이 결혼을 하였다. 이들 부부는 제사에 참석하지 않는 등 천주교 교리에 따르는 생활을 함으로써 집안 식구들과 갈등을 빚었다. 그러자 자유롭게 계명을 지키며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하여 서울로 이사를 가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정광수는 교우 홍시호(洪時浩), 처형 윤점혜(尹點惠, 아가타) 등에게 돈을 빌려 1799년 서울 벽동(碧洞, 현 종로구 송현동)으로 이사를 하여 집안 공터에 교리 공부를 위한 작은 방을 지었다. 그는 최해두(崔海斗), 조섭(趙燮, 예로니모)의 집과 담을 터놓고 한 집처럼 지내며 함께 천주교 교리를 학습하였다. 같은 해 가을과 겨울에는 주문모 신부를 집에 맞아들여 홍시호, 홍필주, 홍익만(洪翼萬, 안토니오), 윤점혜, 이용겸(李用謙)등의 신자들과 함께 수일 동안 미사도 드리고 교리 공부도 하였다. 또한 아들이 태어나자 주문모 신부를 모셔와 유아 세례를 받게 하였다.
정광수는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상당한 학식을 지니고 있었으며, 비록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았으나 고향인 여주의 선비들과 친분이 두터웠으므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고향에 내려가 전교 활동을 벌였다. 또한 아내 윤운혜와 함께 예수님과 마리아의 성상 · 성화, 교리서 등을 제작하여 보급하면서 복음을 전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활동은 조선 초기 교회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후에 이들 집에서는 첨례(瞻禮) 때 사용하는 《첨례단》 · 《성경광익》 · 《성경직해》, 개인 신심서인 《성경일과》, 영세와 고해성사 준비를 위한 《요리문답》 · 《고해요리》, 묵상집인 《묵상지장》, 호교서(護敎書)인 《성세추요》 · 《주교요지》 등 다양한 종류의 책들이 발견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정광수는 사학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즉시 체포령이 내려졌다. 그는 자신을 잡으려는 포졸들을 피해 여러 곳으로 돌아다니면서 생활하다가 더이상 피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9월 포도청에 자수하였다. 그는 포도청에서 몇 차례의 형벌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하였으나, "만 번 죽어도 아쉽지 않다" 라고 신앙을 고백한 후 사형 판결을 받고 1802년 1월 31일(음 1801년 12월 26일) 고향인 경기도 여주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어농리 성지(경기도 이천군 모가면 어농리 풍덕 마을)에 부인 윤운혜와 함께 가묘가 세워져 있으며, 현재 수원교구에서 시복(諡福)이 청원된 상태이다.
※ 참고문헌  《邪學懲義》 《달레 교회사》상/ 윤민구 역, 《윤유일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시복 자료집》 2집, 천주교 수원 교구 시복 시성 추진위원회, 1997/ 김진소 외,《순교는 믿음의 씨앗이 되고》, 한국교회사연구소, 2001. 〔洪延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