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 조약

政敎條約

〔라〕concordatum · 〔영〕concord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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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독일과 체결한 정교 조약의 참석자들.

1933년 독일과 체결한 정교 조약의 참석자들.

교황청과 국가의 종교적 문제들에 대한 공동 이익을 조정하기 위한 쌍무 조약(雙務條約). 1983년 이전에 교황청이 국가들과 맺은 조약은 1983년도 새 교회법전에 의해 폐지되거나 개정되지 않고 종전대로 존속된다.
〔조약의 주체들〕 국제법의 주체는 교황청과 국가의 사법적 · 통치적 최고권자이다. 정교 조약의 전제 조건은 보편 교회나 국가 교회가 아니라 보편 교회의 최고 권위인 교황좌의 명백한 언급이 있어야 한다. 이 점은 교황 비오 11세(1922~1939)가 라테란 조약(1929. 2. 11)을 체결하고 난 후인 1929년 5월 30일 가스파리(P. Gasparri, 1852~1934) 추기경에게 보낸 서신에서 명백하게 나타난다. 이 조약에서 교황청은 여러 국가의 사절들을 대사급 수준으로 받아들이며 교황청도 같은 성격의 대사들을 각국으로 파견할 수 있음을 언급하였다. 이러한 언급은 교황청이 국가로서의 사법적 성격이 충분히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오늘날 각국 주재 교황 대사들은 1815년 6월 9일 개최된 빈 회의에서 인정된 관습법과 라테란 조약의 12항에 의거해서 외교적 업무들을 관장한다. 국가적 측면에서 참된 조약의 주체는 국가 혹은 정부의 수장이 아니라, 국가의 합법적 대표자 자격을 지닌 사법적 혹은 통치적 인물이다. 절대주의 정부 시기에는 조약의 주체로 통치자의 이름을 전문에 기록하도록 하다가 절대주의 국가 말기에는 국가 자체의 이름을 명시했다. 예를 들면 1924년 3월 29일 바이에른(Bayem) 주와의 정교 조약에서는 "교황 비오 11세와 바이에른 사이의 정교 조약"이라고 명명하였다. 정교 조약은 현대로 오면서 정부보다 국가와 조약을 맺는 경향이 많아졌다. 왜냐하면 헌법을 지닌 국가들은 국회의 동의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역 사〕 고대의 황제들은 교회의 후원자로서 역할을 했으나 정교 조약의 고유한 의미로서의 조약이 체결되지는 않았다. 중세에 성직 서임권 논쟁이 있은 후 특권들의 양도를 통하여 평화가 다시 이루어졌는데, 이때부터 참된 의미의 협약을 맺게 되었다. 1107년 8월에 체결된 런던 정교 조약은 왕이 성직 임명권을 포기하는 대신, 선출된 주교는 성품(聖品)되기 전에 왕에게 봉건 영주로서 충성을 맹세하도록 했다. 1122년 9월 23일 교황 갈리스도 2세(1119~1124)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5세(1106~1125) 사이에 보름스 정교 조약(ConcordatumWormatiense)이 체결됨으로써, 이전의 교황 그레고리오 7세(1073~1085)와 황제 하인리히 4세(1056~1106) 사이에 있었던 성직 서임권 논쟁을 종식시켰다. 그리고 1418년 교황 마르티노 5세(1417~1431)는 서구 대이교(1378~1417)가 끝난 후 교황청의 권위를 재확인하기 위해 독일,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영국 등과 조약(Capitulaconcordata)을 체결하였다. 1447년 2월에는 공의회 우위설을 주장하며 교황과 대립하고 대립 교황을 선출한 바젤 공의회 문제를 종식시키기 위하여 교황 에우제니오 4 세(1431~1447)는 여러 제후들과 프랑크푸르트 정교 조약을 체결하였고, 교황 니콜라오 5세(1447~ 1455)는 1448년 새 독일 황제인 프리드리히 3세(1440~ 1493)와 빈 정교 조약을 체결하여 앞의 조약을 확고하게 하였다.
1516년 교황 레오 10세(1513~1521)와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1517~1547) 사이에 체결된 조약으로 성직 서임권은 프랑스 국왕에게 귀속되었다. 이 조약은 프랑스 대혁명으로 파기될 때까지 존속되었다. 그후 1801년 교황 비오 7세(1800~1823)와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Napoléon1,1769~1821) 사이에 다시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성직 서임권, 교회 재산은 국가에 양보되고 프랑스 정부는 가톨릭을 국가적인 신앙으로 인정하였다. 이 조약은 1905년에 폐기되고 정교 분리가 확립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격렬한 정치적 변화를 반영하여 교황 비오 11세(1922~1939)는 폴란드(1925), 루마니아(1927), 이탈리아(1929) 바덴(1932), 오스트리아 및 독일(1933)등 다수의 국가들과 조약을 체결하였다. 특히 1929년 이탈리아와 체결한 라테란 조약을 통하여 로마 문제가 해결되었고 교황청은 주권 국가인 바티칸 시국으로 인정을 받았다.
〔성 격〕 정교 조약에 대한 중요한 세 가지 이론이 있다. 첫째, 정교 조약의 계약적 가치를 부정하거나 혹은 완전한 공공의 법으로 간주하고 실체를 지닌 법률적 이론으로 불려지는 것이다. 둘째, 조항의 항목 속에 담겨있는 특권들은 그 국가가 지닌 다른 법률의 특권들(특별한 해석을 통해 폐지될 수도 있기에)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주장한다. 셋째, 정교 조약은 정의의 차원에서(exjustitia)계약자 쌍방이 책임을 지는 상호 협약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들은 가톨릭 교회가 자체적인 조직을 지니고 외교적 사절들을 보내거나 받아들일 수 있는 권한을 소유하며, 영적 · 초자연적인 고유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완전하고 자유로운 입법적 · 사법적 · 행정적 · 강제적 권한을 가지면서 영위해 왔던 전통적 가르침과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다. 교황 베네딕도 15세(1914~1922)가 공포한 사도 헌장 <프로비덴티시마 마테르 에클레시아>(Provi-dentissima Mater Ecclesia, 1917. 5. 27)는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을 교회법의 다양한 조항들을 예로 들면서 명백하게 재확인하였다. 하지만 완고한 학자들은 정교 조약이 한정된 지역을 위한 교회의 특별법으로 교황의 명령을 통해 공포된 것이며 그 지역민들에게 최상의 권위를 지니고 영원히 준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Tarquini) . 반면 화해주의자들(Liberattoe. Wernz, Cappello)은 위의 세가지 요소들을 영적인 대상과 세속적인 대상으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먼저 영적인 대상으로는 교황청으로부터 지켜야 할 의무가 있으며 세속적인 대상으로는 정의의 책무가 있다. 이 같은 이론의 근거는 교황의 최상적 권위에 대한 양도 불가능성이란 사고와 영적인 보화들을 세속적 이점들로 대체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에게 예속된 하급민들과 함께 책무를 떠맡을 수 없는 교회의 우월권에서부터 유래하였다. 하지만 교회법 학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정교 조약은 최상의 권위를 양도하
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교황은 영적인 직무를 양도하는 것으로 조약에 대한 성실성과 실행의 적법성을 보장하는 것이며 사법적인 책무를 떠맡아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들은 정교 조약에 있어서 영적인 보화들을 세속적 이점들로 대체하는 경우는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서로의 동의를 통하여 교회의 자유를 더 보장 받을 수 있으며 그 사회에서 충실한 선교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교회의 우월권은 세속의 통치권을 약화시키지 않는다고 보는데, 이를 뒷받침해 주는 것은 다음의 성서 구절이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마태 22, 21). 특히 교황 레오 13세(1878~1903)가 발표한 회칙 <임모르탈레 데이>(Immortale Dei, 1885. 11. 1)에서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서 신앙과 윤리에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교회의 변할 수 없는 권한을 확언하고 있기에, 정의와 공동선의 원리에 따르는 국가의 통치권을 약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세 번째의 쌍방 책임에 대한 정교 조약 이론은 많은 교회법 학자들과 일반 법률학자들이 지지하는 이론이다(Ca-vagnis, Fink, Ottaviani, Palmieri, Van Hove, Wagnon, Anzilo-tti, Jemolo, Le Fur, V.E. Orlando 등). 이 학자들에 의하면 정교 조약은 정의의 차원에서 전체적이고 개별적인 조항들을 공동으로 준수해야 할 의무를 지니는 교회와 국가가 서명한 협약이다. 이러한 협약의 고유한 목적은 쌍무계약의 성격을 변경시키지 않으며 시민인 가톨릭 신자들이 국가에 소속됨에 있어서 어떤 어려움이나 모순들이 발생하지도 않는다. 즉 가톨릭 신자들은 초자연적 문제들에 있어서 교회에 의지하거나 교회의 고유한 목적을 위해 관여하게 된다. 그리고 국가와 교회는 자체의 고유한 개별적 권한을 지니면서 어떤 분쟁의 가능성도 피하기 위해 이 협약에 동의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은 많은 정교 조약들 사이에서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
면 교황 레오 10세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 사이의 정교 조약(1516)과 교황 베네딕도 14세(1740~1758)와 스페인의 페르난도 6세(1746~1759) 사이의 정교 조약(1753) 등이다.
한편 교황 레오 13세는 회칙 <노빌리시마 갈로룸 젠스>(Nobilissima Gallorum gens, 1884. 2. 8)에서,그리고 교황 비오 10세(1903~1914)는 회칙<베헤멘테르 노스〉(Vehementer nos, 1906. 2. 11)에서 1801년에 맺은 나폴레옹과의 정교 조약에 대한 폐기를 언급하면서, 정교 조약은 교황청과 국가 간에 맺는 국제 협약으로서의 의무를 지닌다고 단언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정교 조약의 마지막 부분에는 그 조약이 성실하고 영속적인 합의를 실현하도록 국제 협약의 결론 부분에서 사용되는 형식이 도입되었다. 즉 결론 부분에 최고 권력자의 서명, 전권 대사들을 서로 교환하는 일, 조약 항목들에 대한 토의 내용, 합의 서약, 교황청과 국가의 비준 등을 추가하였다. 그러나 정교 조약은 일반 국가 공동체들 간에 맺는 동맹과는 다르다. 즉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국가들이 국제적 동맹을 맺고 이에 소속된다고 할 때, 이 동맹들은 국가 간의 협약으로 간주될 수 없다. 하지만 정교 조약의 성격은 교황청과 국가가 정의의 차원에서 책임지는 협약이며 국제법의 원리에 따른다.
〔대 상〕 정교 조약의 대상인 사항들은 영적 권한의 자유로운 수행, 즉 법을 제정하고 재판을 하며 행정에 있어서 교회의 법적 권한과 경신례를 자유롭게 공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권한, 교황청과 그 지역의 주교들, 성직자들 그리고 평신도들 사이의 모든 사목적 문제들에 대하여 자유로운 통교를 할 수 있는 권한들이다. 또한 성직자들은 그 직무에 있어서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한다. 성직으로 부름을 받은 이들이나 수도 생활을 하는 젊은 이들은 군복무가 면제되며 성직자 신분과 양립될 수 없는 공무로부터도 면제된다. 만일 전쟁시에는 성직자들이 군인들의 영적 문제나 간호하는 일에 근무하도록 한다. 또한 정부의 동의하에 교황청은 한 명의 군종 주교를 임명하고 그에게 영적 관리를 위한 특별한 권한을 부여할 수 있다. 그리고 국가는 교회의 축일들을 인정하고 이날은 성당에서 국가 원수의 안녕과 온 나라를 위해서 기도를 바칠 수 있도록 인정해야 한다. 교구와 본당의 경계는 국가 행정상의 경계와는 무관하며 이는 교회 장상들이나 주교들의 권한에 속한다. 교회가 주교를 임명하려 할 때 교황청은 임명될 인물이 어떤 정치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사전에 그 국가의 정부에 그의 이름을 알려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그 새 주교에게 정교 조약의 내용에 따라 행동하겠다는 선서를 시켜야 한다.
교회 건물들과 교회 기관들은 윤리적 실체로서 간주되며 그들의 재산들과 기타 소유권들은 보호된다. 만일 국가로부터 교회의 재산권이 침해당할 경우에는 적절한 조정이 있어야 한다. 즉 국가는 침해당한 교회의 재산에 해당하는 비용을 교회에 지불해야 한다. 교회의 성직자들 앞에서 거행되는 혼인식은 시민법적 효력을 지니는 것으로 여러 정교 조약에서 인정하고 있다. 또한 종교 교육은 공립학교에서도 의무적으로 실시되어야 하며 적어도 교회 재단 학교에서는 반드시 그래야 한다. 아울러 종교 교육의 학업점수도 적절한 수준에서 일반 과목들과 같은 효과를 지닌다고 인정된다. 끝으로 정교 조약의 해석에 있어서 발생 가능한 어려움이나 애매함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국가와 교회 양측이 우호적인 태도로 서로 양보하는 모습이 필요하다.
〔폐 지〕 교회와 국가 사이의 협약들이 체결되어도 국제법의 규범에 따라서 이 협약들이 소멸될 수도 있다. 즉 협약의 소멸은 계약 당사자 간의 상호 동의를 통하여 소멸조항을 명기하고 이를 적용함으로써 계약 당사자 중 한 법인체의 소멸로 이루어진다. 일반적으로 정교 조약의 기간은 무기한으로 체결되지만 근래에 들어와서는 계약 당사국들 간에 적절한 기간을 설정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1922년 레토니아와 체결한 정교 조약의 경우 조약의 20항에서 3년간 체결하도록 설정했으며 이를 연장하려면 소멸 시한 6개월 전에 표명하도록 했다. 이와 유사한 형태의 정교 조약을 1929년 루마니아와도 체결했다. 또한 1928년 교황청과 포르투갈 사이에 체결된 정교 조약은 시간이 지나고 시대 상황의 변화에 따라 조약 내용을 수정하였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교황청과 포르투갈 정부는 1886년에 체결한 정교 조약을 실행하는 데 있어서, 특히 전쟁 이후 포르투갈에서나 인도의 종교 생활에서 발생한 심각한 변화를 인정하면서 교구의 분할이나 주교의 임명 등에 관하여 조정을 하는 데 동의하였다" .
정교 조약의 폐지나 변경에 대한 또 다른 경우는 조약에 대한 항구한 준수, 즉 어떤 조항들을 계속 준수하면 할수록 계약 쌍방 중의 한 측이 지속적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될 경우이다. 이것은 법률 조항의 효력에 있어서 어떤 조항들이나 정교 조약 전체를 폐기할 수 있는 권한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신뢰를 가지고 정확하게 판단되어야 하며, 어떤 적의를 가지고 맡은 의무들을 회피하려는 구실을 찾으려 한다면 이는 조약에 대한 확실한 위반이 될 것이다.
정부의 형태가 변화될 경우에도 정교 조약의 효력은 그대로 유지된다. 이는 이탈리아가 군주제에서 공화제로 변화될 때에도 우호적인 관계가 지속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 라테란 조약 ; 바티칸 시국 ; 보름스 정교 조약 ; 비오 7세)
※ 참고문헌  A. Mercati, Raccolta di Concordato su materie ecclesiastiche tra la S. Sede e la autorità civili, Roma, 1919/ A. Perugini, Concordata vigentia notis historicis et iuridicis declarata, Roma, 1934/J.M. Restrepo, Concordata regnante anctissimo demino Pio PP. XI inita latine et gallice reddita et notis illustrata, Roma, 1934/ A. Giannini, Iconcordati postbellici, vol. 2, Milano, 1936/ A. Van Hove, Prolegomena ad Codicem iuris canonici, Malines, Roma, 1928, pp. 59~79/ C.Jannacone, La natura giuridica del Concordato, Il diritto ecclesiastico 39, 1928, pp. 284~312/ M. Bierbaum, Das Konkordat in Kultur, Politik und Recht, Friburgo in Br., 1928. 〔全壽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