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업가. 세례명은 세례자 요한. 1886년 5월 14일 서울 옥인동에서 정창인(鄭昌寅, 요셉)과 최 바르바라 사이의 3남 2녀 중 2남으로 출생하여 1904년 3월 명동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1899년 9월 일본인 경영의 경성 학당(京城學堂) 한문과에 입학하여 1900년 3월에 마치고, 4월부터 경성학당 보통과에 진학하여 1901년 6월까지 수학하였다. 1906년 1월 탁지부(度支部) 측량강습생이 되어 그해 12월 탁지부 기수(技手)로 임용되었으며, 탁지부 임시 재원 조사국 양지과(量地課)에 소속되었다. 한일합방 이후 1910년부터 1920년까지 조선총독부 임시 토지 조사국 측량과 · 측지과 · 정리과 기수로 재임하였고, 1920년부터 1923년까지 경성부(현 서울특별시) 서기로 근무하였다. 1923년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권유로 교회 일을 맡고자 관직을 사직하고 재단 설정을 위한 조사 사업에 진력하여 1924년 10월 '경성구 천주교회 유지 재단'의 설립에 관여하였고, 명동 본당 총회장으로 20여 년 봉사하였다. 1924년 4월 자선을 목적으로 하는 '애긍회' (哀矜會)를 조직하여 명동 본당 구내에 오갈 데 없는 노인들을 수용하여 돌보기 시작하였고, 1926년 11월에는 을지로 1가에 양로원을 설치하였다가 수용 인원의 증가로 1930년 3월 하왕십리로 이전하였다. 1936년 11월에는 뚝섬에 건물을 신축하여 양로원을 옮겨 1950년 6월까지 연간 260명 이상을 수용하였다. 양로원 초기에는 교회 유지들의 보조가 있었으나, 점차 정남규 회장의 개인 사업이 되다시피 하였다. 또 그는 서예에도 일가를 이루어 뮈텔 주교가 1925년 79위 복자 시복을 위하여 황사영의 <백서> 원본을 로마교황청으로 보내게 되자, <백서>를 필사하였다. 현재 절두산 순교 박물관에 필사본이 보관되어 있다. 정 회장은 6 · 25 전쟁 중인 1950년 9월 16일 정치 보위부에 의하여 납북되어 행방 불명되었다.
※ 참고문헌 《大韓帝國官員 履歷書》, 국사편찬위원회, 19721 《朝鮮總督府及所屬官署職員錄》, 조선총독부, 1914~1935/ 韓龍煥 · 徐相堯 편, 《福音의 證 人》,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721 安喆球, <六二五 戰亂의 순교자들>, 《가톨릭 청년》 1965. 10/ '今世의 聖徒 : 鄭南奎 氏의 訪問記' <조선일보> 1939. 4월 23~28일자/ 尹善子, <정남규>, 《교회와 역사》 205호(1992. 6). 〔崔起榮〕
정남규 (1886~?)
鄭南奎
글자 크기
10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