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구 (?~1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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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박해(丙寅迫害) 순교자. 세례명은 야고보. 일명덕오. 용인 더우골에서 태어나 용인 삼배일 점촌으로 이주하여 성장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발발하자 11월 26일(음 10월 20일) 광주(廣州) 포교 세 패가 몰려와 정덕구의 삼촌인 정여삼(바오로)을 비롯한 전 식구와 예비 교우였던 이화실을 체포하여 이들 집의 방에 가두었다. 이들은 심한 매질을 당하며 심문을 받던 중 포졸들이 술에 취해 이들을 묶고 있던 쇠고랑을 풀어주고 감시를 느슨히 하자 이 틈을 타서 도주하였다. 하지만 정여삼과 이화실만은 탈출하지 못하고 광주로 끌려가 며칠 후 순교하였다. 집에서 빠져 나온 정덕구는 식구들을 데리고 용인 국수봉으로 올라가 숨어 지낼 곳을 마련하기 위하여 최 서방이라는 사람에게 연장을 빌려 움을 팠다. 그들은 보름 동안 이 움에서 숨어 지내다가 다시 포졸들이 천주교인들을 체포하러 다닌다는 소문을 듣고 굴암 절골로 피신하였다. 이곳에서도 역시 움을 파서 몸을 숨기고자 했으나, 다시 포졸들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온 식구가 뿔뿔이 흩어져 도망을 가 서로 찾을 길이 막막하게 되었다. 그러다 그전에 연장을 빌렸던 최 서방의 집에 가 보니 그곳에 헤어졌던 다른 가족들이 있었다. 정덕구 일가는 다시 절골로 올라가 열흘 정도 생활을 하다 충청도 공주 국실 점촌으로 가기로 계획하였다. 하지만 그는 국실 점촌 역시 이미 병인박해의 여파로 많은 교우들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자 절골에 거주지를 마련하고 정착하였다. 그러던 중 1867년 12월 5일(음 11월 10일) 죽산(竹山) 포졸들이 와서 정덕구를 체포해 갔다. 정덕구는 체포 당시 가족들에게 "죽을 때까지 내 눈앞에 하나도 뵈지 말라. 만약에 하나라도 보이면 내 마음이 육정(肉情)에 이끌려 순교를 잘 못할 듯하니, 부디 보이지 말라" 고 말하며 순교의 의지를 굳건히 하였다. 결국 그는 심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체포된 지 20여 일 만에 옥중에서 순교하였다. 그의 순교일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순교 당시 나이는 23세 혹은 25세로 알려지고 있다.
※ 참고문헌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洪延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