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정숙(丁叔), 호는 호정(壺亭) · 풍악산인(楓嶽山人), 시호는 민충(敏忠). 1612년 생원이 되고 1616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23년 성천부사(成川府使)가 된 후 인조를 도와 반청 숭명(反淸崇明) 정책을 실천하는 데 앞장섰다. 1624년 관향사(管餉使)로 명나라 장군 모문룡(毛文龍)에게 군량을 조달하였고,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는 임진강의 군량 수송을 담당하였다. 1630년 2월에 진위사(陳慰使)로 선발되었고, 공조참판(工曹參判)과 무과시관(武科試官) 등을 거쳐, 7월에 서장관(書狀官) 이지천(李志賤)과 함께 한양을 출발, 요동(遼東)을 점령하고 있는 후금(後金) 군대를 피하여 해로를 통해 10월 명의 등주(登州)에 도착하였다. 1631년(인조9) 2월 북경(北京)으로 가서 사행의 임무를 수행한 후, 다시 등주에 들렀다가 예수회 선교사 로드리게스(J.Rod-riguez, 陸若漢) 신부를 만나 다수의 한역 서학서(漢譯西學書)와 진귀한 서양의 기물(器物) 등을 가지고 7월에 귀국하였다.
이때 그가 가지고 온 것들은 《치력연기》(治曆緣起) ,디아스(E. Diaz, 陽瑪諾) 신부의 《천문략》(天文略) 리치(M. Ricci, 利瑪竇) 신부의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 천문서(天文書) 및 원경서(遠鏡書) 천리경설(千里鏡說), 알레니(G. Aleni, 艾儒略) 신부의 《직방외기》(職方外紀), 《서양국 풍속기》(西洋國俗記) 등의 서적과 서양 화포(紅夷砲), 《홍이포 제본》(紅夷砲題本) , 화약(焰悄花〕, 자명종(自鳴鐘), , 천리경(千里鏡) 자목화(紫木花) 등 여러 종류에 이르렀으므로, 17세기 조선 사회에 있어서 양적 · 질적으로 서양 문물의 본격적인 재래(齎來)로 평가된다. 특히 천리경은 은화(銀貨)로 300~400냥에 이르는 것으로 100리 밖에 있는 적진(敵陣)의 미세한 물건까지 볼 수 있는 것이었으며, 홍이포는 화승(火繩)을 쓰지 않고 화석으로 불을 일으켜 구래(舊來)의 조총이 두 번 쏘는 사이에 4~5발을 쏠 수 있었다는 점에서, 1627년 정묘호란 이후 후금에 대항하기 위한 무력 증강에 부심하던 국왕 인조의 비상한 관심과 호응을 받았다.
이때 인조는 "정두원이 가지고 온 화기(火器)는 그 제도가 정밀하고 기묘하니 우리 나라 사람들이 배우면 반드시 그 위력에 힘입을 것이므로 그 수효의 다소를 논할 수는 없으며, 또한 바닷길에 고생이 심하였고 그만한 공적이 있으니 한번 위로하여 마땅하다"라고 하면서, "기이하기만 하고 실용성이 적다"는 주장을 내세운 승정원과 간관(諫官)들의 보름 이상에 걸친 거듭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두원에게 자급(資級)을 더하는 조치를 철회하지 않았다. 이후 정두원은 여러 차례 문무과의 시관을 거쳐 형조참판(刑曹參判) 부호군(副護軍), 호군(護軍) 부사맹(副司猛),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이천부사(利川府使) 개성유수(開城留守) 등의 중책을 맡으면서 인조의 대청 복수 설치(對清復讐雪恥) 의지를 충실히 구현하였다.
한편 정두원에게 다수의 서양 기물과 한역 서약서를 준 로드리게스 신부는 통역사 겸 역사학자로 잘 알려져 있는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원이다. 1630년 말 명나라 황제를 도와 후금과의 싸움에 포르투갈 군인들을 동원하는 등의 행적으로 조선 왕실에서도 긍정적인 인물로 호평받았다. 그는 1577년부터 약 46년간 일본 나가사키(長崎) 등에서 대장군을 비롯한 지방의 대명(大名)들과 친분 관계를 유지하면서 선교 활동을 펼치다가, 일본에서 천주교 박해가 일어나자 1623년 중국으로 건너와서 조선에 복음을 전파하려 하였다. 1631년 귀국하는 조선사신 정두원 일행에게 다수의 서양 서적과 진귀한 기물들을 선물하였던 것도 바로 이러한 마테오 리치식 왕실전교(王室傳敎)의 일종으로 행해진 것이었다.
1631년 정두원 일행이 로드리게스로부터 서양 천문학의 추산법(推算法)을 배우고 《천문략》이란 역법서를 들여와서, 1653년 마침내 조선 왕조가 시헌력(時憲曆)을 채용 · 실시하고 홍이포 등 화기를 개발하여 1650년대 두 차례의 나선 정벌(羅禪征伐 : 朝 · 淸 연합군의 흑룡강 러시아 선박 격퇴 사건)을 단행하기에 이르기까지, 세계지도, 역법, 병기 등 발달된 서양의 문물이 속속 조선 왕조에 도입되었다. 또한 인조, 효종 등 군왕들의 북벌 계획(北伐計劃)에 벨테브레(J.J. Weltevree, 朴淵, 朴燕), 하멜(H.Hamel) 등 서양인 기술자 집단의 활용이 적극 모색되는 등 서양 인식의 폭과 깊이를 확대, 심화하는 데 일정하게 기여하였다. (→ 로드리게스, 후안 ; 서학 사상 ;한역 서학서)
※ 참고문헌 《宣祖 · 仁祖 · 孝宗實錄》 《承政院 日 記》 《芝峰類說》 《增補文獻備考》 《同文彙考》 《天學初函》 《接待 事例》,奎9763 ; 奎16024/ 李元淳, 《朝鮮西學史研究》, 일지사, 1986/ 崔韶子, 《東西文化交流 史研究 - 明 · 清時代 西學受容 》, 삼영사,1987/ 메디나, 박철 역,《한국 천주교 전래의 기원(1566~1784)》, 서강대학교 출판부, 1989/ 원재연, <조선 후기 서양 인식의 변천과대외 개방론>, 서울대 국 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2000. 大學 〔元載淵〕
정두원 (1581~?)
鄭斗源
글자 크기
10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