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반회 사건

丁未泮會事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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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년(1787) 천주교 신자들이 반촌(泮村)에서 교회서적을 강습하다가 발각되어 반대파의 척사 운동(斥邪運動)을 조장하고 기호 남인의 분열을 가속화한 사건. 반회 사건' 이라고 줄여 말하기도 한다. 반촌은 성균관이 위치해 있던 마을.
1784년의 한국 천주교회 창설과 이듬해에 일어난 명례방 사건(明禮坊事件)으로 조선의 일부 지식인과 위정자들 안에서는 척사론이 점차 가열되어 갔다. 당시 척사의 공론을 조성하는 데 앞장선 인물은 안정복(安鼎福)이었고, 그 척사의 대상은 서학론자로 거명되던 권철신(權哲身)과 그의 제자들이었다. 이후 명례방 사건의 여파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둔화되어 갔으나, 서학 배척의 기운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던 중 1787년(정조 11) 겨울, 천주교 신자인 진사 이승훈(李承薰, 베드로)과 정약용(丁若鏞, 사도 요한)은 강이원(姜履元) 등과 함께 변려문(駢儷文)을 공부한다는 핑계로 반촌(현 혜화동)에 있는 김석태(金石太)의 집에 모여 천주교 서적을 강습하였다. 그런데 척사의 입장에서 있던 정약용의 지우 이기경(李基慶)이 그 사실을 알고는 강이원과 함께 소문을 퍼트렸고, 그와 같은 입장에 있던 홍낙안(洪樂安)도 소문을 전해 듣고는 이기경에게 편지를 보내 척사의 통문을 돌리고 상소를 올리자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또 홍낙안은 먼저 그 도를 공격하고' 〔先攻其道〕, 그래도 돌아오지 않으면 그 사람까지 공격해야 한다' 〔并其人而攻之〕는 강경한 척사론을 주장하였으며, 이듬해 정월 정조의 물음에 대책을 올릴 기회를 얻게 되자 척사의 책문을 올림으로써 3위로 합격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명례방 사건과 천주교 서적 전래를 언급함으로써 이승훈 · 정약용을 은근히 배척하고, 더 나아가 충청도 서부 일대에 천주교가 만연하고 있으므로 정학을 부식하고(扶植正學) 이단을 통렬히 막는〔痛闢異端〕 방책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홍낙안의 친책문(親策文)은 조정에서 척사의 여론을 일으키는 데 일조를 하였다. 또 기호 남인 안에서는 공서계(攻西系) 인물들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친서계(親西系) 인물들과 대립하게 되었으며, 척사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때 정약용은 이기경에게 편지를 보내 반회의 일을 발고한 것을 질책하였고, 남인 이경명(李景溟)은 척사소를 올려 남인의 척사 의지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정조와 남인의 영수 채제공(蔡濟恭)은 이를 더 이상 문제삼지 않았으며, 그해 2월에 채제공은 정조의 특지로 우의정에 임명되고, 서학론자로 지목을 받던 이가환(李家喚)은 승정원에 들어갔으며, 정약용은 1789년 대과에 합격한 뒤 초계문신(抄啓文臣)에 발탁되었고, 이승훈은 1790년 음서(蔭敍)로 의금부 도사(都事)가 되었다. 이후 척사 운동이 재개된 것은1791년의 진산 사건 (珍山事件) 때였다. (→ 남인과 천주교)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상 / 이기경 편, 《闢衛編》 이만채 편,《闢衛編》 丁若鏞, 《與猶堂全書》 《正祖 · 純祖實錄》 車基真, 《조선후기의 西學과 斥邪論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車基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