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박해(辛酉迫害) 순교자. 세례명은 칸디다. 양인(良人) 출신으로 동대문 밖 전농동(典農洞)에서 태어나 살다가 산림동(山林洞)으로 출가하였으며, 1790년에 이합규(李鴿逵)를 만나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칸디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이후 그녀는 교회 일에 열심히 참여하면서 친정 오빠 정명복(鄭命福)과 아들 윤석춘(尹碩春) 등에게 전도하였고, 양반 집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수많은 부녀자들에게 선교하였는데, 참판 이기양(李基讓)의 집에도 그녀의 며느리가 유모로 들어가 있어 자주 왕래하였다. 그녀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아버지 제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들에게 천주교를 믿으라고 권하면서 "천주교를 믿으면 평소 알지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친부모 자식같이 서로 도와 준다. 너는 형제가 없어 고독한 사람이니 믿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정복혜는 남편이 전염병으로 죽은 뒤에는 한신애(韓新愛, 아가타), 윤운혜(尹雲惠, 마르타) 등과 함께 신자들 사이의 연락을 도맡았으며, 덕산(德山)에 사는 송(宋)가의 권유로 한글로 필사한 교리서들을 팔고 다녔다. 또 한신애가 자기 집 노비들에게 교리를 가르칠 좋은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하자 이합규와 정광수(鄭光受, 바르나바)를 그 집에 데리고 가 소개해 주었으며, 최설애(崔雪愛)에게 전도한 다음 이합규에게 교리를 배워 신앙을 갖게 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정복혜는 상민 집은 포졸들의 수색을 받기가 쉬우므로 자기 집에 있는 성물과 교회 서적들은 물론 다른 신자들 집에 있는 성물과 교회 서적들까지 한데 모아 한신애의 집으로 가져다 숨겨 두고, 교우들이 체포되지 않도록 보호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그동안의 활동으로 인해 그녀의 이름이 박해자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해 2월 포졸들이 마침내 그녀를 찾아내어 형조로 압송하였다. 이때 형조에서는 일단 그녀를 포도청으로 옮겨 문초를 하도록 하였다. 그런 다음 다시 형조로 데려와 문초와 형벌을 가하면서 그동안의 행적을 추궁하고 배교를 강요하였다. 이때 그녀는 잠시 마음이 약해졌으나, 곧 이를 뉘우치고 자신이 한 일을 떳떳하게 고백하였다. 그리고 1801년 5월 14일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아들 윤석춘과 오빠 정명복은 배교하고 각각 기장(機張)과 장성(長城)으로 유배되었다. 정복혜는 현재 추진되고 있는 시복 · 시성 대상자 126위 가운데 한 사람으로 올라있다. (→ 신유박해 ; 윤운혜 ; 한신애)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상/ 《邪學懲義》 조광 편저, 변주승역, 《신유박해 자료집》, 한국순교자현 양위원회 , 1999. 〔徐鍾泰〕
정복혜 (?~1801)
鄭福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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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

문초를 받고 있는 정복혜 칸디다(탁희성 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