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박해(丁巳迫害) 때의 순교자. 세례명은 베드로. 충청도 덕산(德山)의 양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천주교를 믿기 전까지는 성격이 격렬하고 힘이 비상하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와 가까이하기를 꺼려하였다. 그가 언제, 어떤 계기로 천주교를 믿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덕산 지역에 천주교가 알려진 후 입교하여, 1795년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가 내포 지역을 방문했을 때 직접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았다. 세례 후 그는 겸손한 태도로 생활에 임하고, 전교 활동을 활발하게 펼치는 등 이전과는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또한 얼마 동안 주문모 신부를 자신의 집에 모셔와 생활하면서 주 신부의 활동을 돕기도 하였다. 그후 정산필은 주 신부에 의해 내포 지역의 회장으로 임명되어 기도와 독서를 통해 신앙심을 두텁게 하였고, 천주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열심히 교리를 가르쳐 믿게 만드는 등 자신에게 맡겨진 본분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한편, 당시 그는 원시보(元, 야고보) · 박취득(朴取得,라우렌시오) · 방(方) 프란치스코와 밀접한 교우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순교에 대한 열망이 커서 만일 자신들 중 누군가가 먼저 체포되면 서로를 고발하자고 약속하였다고 한다. 결국 정산필은 회장으로 활동하던 중 1798년 또는 1799년에 체포되어 덕산 읍내로 끌려가 여러 차례 문초와 심문을 받았는데. 그때마다 용감하게 하느님을 증거하면서 얼굴에 조금의 동요도 나타내지 않고 신앙을 지켰다. 그는 옥 안에서 함께 수감되어 있는 교우들을 격려하였으며, 사형 집행일에는 사형수들에게 주는 식사를 받아 동료들에게 같이 먹자고 권하며, "천주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창조하신 음식이니, 마지막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먹읍시다. 이제 우리는 천국에 가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이오" 라고 말하였다. 1799년 1월 21일(음 1798년 12월 16일) 덕산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며, 당시 나이는 50세 내지 60세 정도였다고 알려진다. 현재 추진되고 있는 시복 시성 대상자 126위에 이름이 올라 있다.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상, pp. 419~420/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한국 천주교 주교 회의 시복 시성주교 특별위원회, 2003, pp. 67~68. 〔洪延周〕
정산필 (?~1799)
鄭山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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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

덕산 읍내로 끌려가는 정산필 베드로(탁희성 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