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

情緒

〔라〕affectivitas, emotio · 〔영〕affectivity, emo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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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인 감정의 상태와 그에 수반되는 생리적 변화. 주관적 경험, 표출된 행동, 신경 화학적 활동이 종합된 극도로 복잡한 현상. 이 단어의 의미는 학자들 또는 시대에 따라 변하였고, 현재는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단어가 되었다. 그러나 정서가 한 개인의 환경 또는 상황에 대한 인식, 신체적 반응, 그리고 접근 혹은 회피 행동을 다양하게 수반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학자들의 견해〕 고대 철학자들의 정서에 대한 입장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스토아 학파에 속하는 플라톤(기원전 428/427-348/347)과 신플라톤주의자 그리고 후에 등장하는 오리제네스(185~253) 등은 인간안에서 정서를 완전히 제거해야 욕구의 지배를 받지 않는 '아파테이아' (apatheia)에 이른다고 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83~322/321)를 비롯하여 아우구스티노(354~430) 토마스 아퀴나스(1224/1225~1274) 등은 욕구를 우리 안에서 제거해서는 안 되고 조절해야 한다고 하였다.
완덕에 이르기 위하여 정서에 대해서 취할 수 있는 태도도 두 가지가 있다. 먼저 플라톤과 비교해 볼 때, 동기가 좀 다르긴 해도 관상 기도를 하기 위하여 자기를 버리듯이 욕구를 버리는 것이 있다. 그 이유는 욕구란 본질적으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성품(dispositio)인데 원죄로 인하여 욕구가 의지와 이성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또 거슬러 행동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욕구를 제거하려는 것은 아니다. 두 번째는 욕구의 가치를 인정하고 이성과 의지로 통제하고 조절하며 완덕에 나아가는 것이다.
플라톤 : 플라톤에게 있어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영혼이다. 육체는 사람에게 붙어 다니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영혼과 육체의 결합은 비본질적이고 부수적인 관계를 맺고 있을 뿐이다. 영혼은 육체에 생명을 주며, 육체를 지배하는 운동의 근원(arche)이다. 또한 비물질적이고 정신적이며 세상을 초월하고,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였고, 그 본성상 불변하고 영원하다. 반면 육체는 악의 근원이며, 영혼을 가두어 놓는 감옥과 같이 영혼에게 무거운 짐이다. 또한 육체의 한계에서 오는 수천 가지의 근심 걱정으로 영혼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사물의 본질을 보지 못하게 한다. 그는 인간을 순수 이성적인 존재라고 부르지만, 현실적으로 육체의 감각적인 지각과 인간의 모든 욕구들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어서 다른 종류의 영혼, 즉 죽어 없어질 감각적인 영혼이 있다면서 정서의 문제를 풀어 나갔다. 즉 그는 영혼이 세 개의 서로 다른 영혼으로 구성되었다고 하면서, 순수한 사고와 비감각적인 직관에서 오는 욕구에 작용하는 '이성적 영혼' (혹은 정신적 영혼, ★),분노 · 명예 · 용기 · 희망과 같은 욕구에 작용하는 '도전적 영혼' (★) , 그리고 식욕 · 성욕 · 쾌락과 불쾌 등의 욕구에 작용하는 '욕정적 영혼' (★)으로 구분하였다. 또한 그는 이러한 세 영혼이 서로 다른 기관에 자리하여 서로 다른 작용을 한다고 하였다. 즉 '이성적 영혼' 은 머리에 있고, '도전적 영혼' 은 가슴에 있으며, '욕정적 영혼' 은 횡경막에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인간의 욕구들은 덕을 쌓아 조화를 이룸으로써 윤리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성적 욕구는 지혜의 덕(sophia)으로 조화를 이루고, 도전적 욕구는 용기의 덕(thymoeides)으로, 욕정적 욕구는 절제의 덕(soph-rosyne)으로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끝으로 정의의 덕(dlkaiosyne)은 모든 덕이 알맞게 그 기능을 발휘할 때의 상태라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모든 욕구는 기쁨과 고통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 속해 있는데, 기쁨은 기관이 조화를 이루며 성장할 때 생기고 고통은 조직 기관의 조화가 깨지면서 오는 것이라고 하였다. 플라톤은 영혼에 욕구가 생기는 것은 영혼이 육체에 걸려 넘어졌기 때문이라고 보아 육체가 모든 욕구의 뿌리라고 하였다. 모든 욕구는 모든 거짓된 의견에서 발생되기에 쓸모 없고 우발적이며, 본성에 반대되고 이성을 거역하는 충동이라하였다. 결과적으로 모든 욕구는 영혼의 병처럼 나쁜 것이라는 그릇된 결론에 도달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 : 그에게 있어서 욕구는 영혼의 한 능력이다. 욕구에 의해서 여러 가지 다양한 심리 작용이 일어나는데, 이런 심리 작용 중에는 단순히 영혼만의 심리작용도 있고,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 심리 작용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욕구를 '정서' 라고도 부르고, '변화' 혹은 '주체의 변화' 라고도 하였다. 이 욕구는 영혼의 하부 구조인 육체와 결합되어 있는 한 기관에 자극을 주고, 혼란을 일으키고, 간접적으로 우리의 이성을 흐리게 하기도 한다.
그래서 욕구는 무엇을 선택하고 판단하고 분별하는 이성의 활동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어 이성적인 선택과 판단에 따르지 않고 욕구에 따르는 행동을 하게 만든다. 또한 이성적인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뒤로 미루게 하는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준다. 그렇지만 욕구 그 자체는 악습도 덕도 아닌, 우리 영혼의 한 성품이다. 중립적인 위치에 있으면서 대상에 따라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달리 욕구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욕구도 이성의 지배를 받으면 덕이 될 수 있다. 그는 온유한 사람은 욕구를 느끼지 않는 사람이고, 자제력이 있는 사람은 욕구를 느끼지않을 뿐만 아니라 지배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견해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욕구 혹은 정서 이론에 대부분 반영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 : 토마스 아퀴나스는 정서에 대한 그리스어와 라틴어, 그리스도교의 고전적인 가르침을 총망라하여 정서 문제를 체계적으로 다루었다. 《베드로 롬바르두스 명제집 주해》(Scriptum super LibrosSententiarum, 1252~1256)에서 그는 정서를 '본질적인 정서' 와 '우유적인 정서' 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본질적인 정서를 '욕정적인 정서' , '도전적인 정서' , '이성적인 정서' (의지)로 세분하였다. 사랑 · 미움 · 욕망 · 도피(적대감) · 기쁨 · 슬픔 등의 여섯 가지가 욕정적인 정서에 속하며, 희망 · 절망 · 대담성 · 두려움 · 분노 등의 다섯 가지는 도전적인 정서에 속한다. 우유적인 정서' 에는 열성 · 혐오 · 큰 즐거움 · 명랑함 · 쾌활 · 태만 · 과묵 · 오만 · 경솔(격정) 등의 아홉 가지가 있고, 이 정서의 대상도 역시 아홉 가지로 자비 · 시기 · 인과응보 · 수치심 ·부끄러움 · 느림 · 감탄 · 경악 · 불안이라고 하였다. 《진리론》(De Veritate, 1256~1259)에서는 정서를 세 가지로 세분하였는데, 먼저 그 대상의 좋고 나쁨에 따라 분류하고,두 번째는 극복할 수 있는 대상인가 아닌가를 기준으로 나누고, 세 번째는 현존하는 대상인가 아닌가에 따라 구분하였다. '욕정적인 정서' 를 선하거나 악한 대상에 따라 구분하면 선한 대상에는 사랑 · 욕망 · 기쁨이 있고, 악한 대상에는 미움(사랑과 반대되는 정서) · 도피(욕망과 반대되는 정서) · 슬픔(기쁨과 반대되는 정서)이 있다. 《니코마쿠스 윤리학 주해서》(Sententia Libri Ethicorum Aristotelis,1271)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영혼의 모든 정서는 감각적인 본욕(appetitus)에 의한 행위에서 생겨나며 육체적인 변화를 동반한다고 하였다. '감각적인 정서' 에서 '욕정적인 정서' 와 '도전적인 정서' 가 생겨난다. 반면 지적인 본욕은 아무런 육체적인 변화를 동반하지 않으므로 고유한 의미에서의 정서는 없다. 그러므로 의지적인 사람은 정서의 지배를 받기보다 정서를 지배한다.
《신학 대전》(Summa Theologiae, 1268~1272)에서 토마스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과 육신에 관한 이론을 대부분 수용하였다. 그는 인간을 영혼과 육신의 합성체라고 하였고, 인간에게는 이성적인 영혼이 있는데, 인간은 이 영혼으로 생장 능력과 감각 능력을 발휘하는 동시에 인간의 고유 능력인 지적 능력도 발휘한다고 하였다. 그는 《신학 대전》에서 27개의 문제(Ⅰ-Ⅱ, 22-48)와 132항으로 광범위하면서도 심도 있게 정서 이론을 체계화하였다. 그러나 다른 작품에서 이미 다른 내용들을 집대성하고 체계화한 이론들도 많다. 따라서 일목요연하게 살펴보기 위하여 도표를 그리면 다음과 같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정서가 육체적 기관이 변화하는 데 따른 감각적인 본욕의 작용이라고 하였다. 그는 정서를 일반적인 의미와 고유한 의미, 은유적인 의미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일반적인 의미의 정서는 유익한 것이든 무익한 것이든 받을 수 있는 단순한 성품 혹은 능력이다. 따라서 정서는 모든 창조물이 지닌 잠재된 감수성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즉 정서를 느낄 수 있는 가능태(poten-tia)가 정서의 형상이나 속성(quality)을 받아들여 정서를 현실화하여 느끼게 되는 것(actus)을 의미한다.
고유한 의미의 정서는 변화를 통하여 받아들이는 것이다. 변화되는 길은 두 가지 방법으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받아들여 긍정적으로 변화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해로운 것을 받아들여 부정적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은유적 의미의 정서는 본성적인 성향에 끌려 우리의 행위가 지배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살펴보는 진정한 의미의 정서가 바로 이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비로소 영혼의 정서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 즉 정서는 감각적인 본욕의 작용이라고 할 수 있고, 이에 따른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정서는 감각적인 본욕이 어떤 자극을 받아 현실화된 것인데, 이때 우리에게는 심리적인 변화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변화도 생긴다. 그러나 의지적인 본욕이 현실화될 때는 육체적 기관의 변화가 발생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감각적인 정서의 지배를 받으며 살고 있지만, 이성의 작용에 의해 의지적인 정서가 생길 경우 강렬한 감각적 정서를 지배할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플라톤이 구분한 '욕정적인 정서'와 '도전적인 정서' 를 받아들여 그것을 기초로 사랑 · 미움 · 욕망(혹은 욕정) · 도피(혹은 적대감) · 기쁨(혹은 쾌락,즐거움) · 고통(혹은 슬픔) · 희망 · 절망 · 두려움 · 대담성 · 분노 등의 열한 가지 정서로 세분하였다. 그에 따르면 이 정서들은 서로 독립하여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생기는 것이다.
여섯 가지 욕정적 정서 : ① 사랑 : '사랑' (amor)은 모든 욕정적인 정서들의 뿌리이며, 다른 모든 정서들에 활력을 주고 유지시키는 제1 원동력이다. 사랑은 자연적 사랑, 감각적 사랑, 이성적 사랑으로 구분할 수 있다. 여기서의 사랑은 감각적 정서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지, 초자연적 사랑인 애덕(caritas)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먼저 선한 것을 알고 그래서 그것을 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될 경우 탐욕적 사랑이 되고, 다른 사람을 위한 사랑일 경우 우정적 사랑으로 발전한다. 우정적 사랑이 더욱 성숙하면 사랑하는 사람 안에 사랑 받는 사람이 있고, 사랑 받는 사람 안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게 되어 서로 일치를 이루게 된다. 이것이 사랑의 속성이다. 감각적 정서의 사랑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정화되고 더욱 강렬하게 되면 하느님과 서로 하나되는 황홀경, 즉 탈혼(extasis)에 이르게 된다.
② 미움 : '미움' (odium)은 사랑에서 나온 정서이다. 그러나 서로 반대되어 사랑의 대상은 선하고 미움의 대상은 악하다. 미움은 본성적 반감, 혐오감, 적대감으로 표현되며, 어떤 방법으로든 사랑의 관계에 근본적인 해를 입힌다. 미움은 근원이 사랑이기에 아무리 강해도 사랑보다 강할 수 없다. 인간은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아름다움과 진리를 사랑하지만 그릇된 판단 때문에 미워할 수 있다.
③ 욕망 : '욕망' (concupiscentia)은 감각적이든 이성적이든 본욕이 없는 선한 대상에 끌리는 성향이다. 이러한 욕망에는 먹고 마시는 음식 등과 같은 대상에 자연스럽게 끌리는 자연적인 욕망이 있고, 먼저 무엇인가 알고 나서 끌리는 지적 욕망이 있다. 자연적인 욕망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사라지지만, 지적 욕망은 끝없는 욕망으로 열려 있다. 욕망은 그 자체로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중립적인 정서이지만, 자연적으로든 지적으로든 지나치면 욕심이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욕구 (desiderium)와 '욕망' 의 차이를 설명하였는데, '욕구' 는 어떤 바라는 것을 향한 단순한 본욕의 움직임이고, '욕망' 은 바라는 대상에 직접 관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④ 도피 : 토마스 아퀴나스는 '도피' (fuga)에 대하여욕망과 반대되는 정서라고 간단히 다루었다. 즉 감각적이든 이성적이든 본욕이 현재 없는 악한 대상으로부터 멀어지려는 성향이다.
⑤ 기쁨 : '기쁨' (delectatio)은 감각적이거나 이성적 혹은 영적으로 어떤 인식과 연관된 정서이다. 따라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쁨을 촉각이나 육체에 의한 감각적 쾌락과 이성적 기쁨, 영적 기쁨으로 구분하였다. 그에 의하면 기쁨은 정신 내면에서 발생하므로 시간에 묶여 있지 않는 이성적 기능에 속하기 때문에, 촉각과 육체에는 기쁨이 있을 수 없고 즐거움과 쾌락만이 있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이성이 없는 동물에게는 기쁨이 아닌 쾌락만이 있을 뿐이다.
그는 육체적 작용에 의한 쾌락이 아주 강하고 격렬하게 느껴지지만, 이성적 · 영적 작용에 의한 기쁨이 그보다 더 강하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이성적 · 영적 기쁨은 더욱 감미롭고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영적 기쁨은 이성의 활동을 촉진하여 보다 강한 기쁨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하고, 이성적 기쁨은 육체적 기쁨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최고의 기쁨은 최고의 선을 행하는 데서 온다. 기쁨은 다른 이들에게 은혜를 베풀거나 선행을 할 때 생기는데, 그 행위 자체가 기쁨이 될 수도 있고 행한 결과가 기쁨이 될 수도 있다. 같은 기쁨이 계속되면 지루하기에 다양성이 요구되지만, 항상 선과 결합될 때 기쁨이 되며 기쁨은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넓혀 준다.
⑥ 고통 : '고통' (dolor, tristitia)은 원인이 육체에 있지만, 육체에 생명을 주고 육체가 고통을 느끼게 하는 것은 영혼이기에 정서라고 할 수 있다. 고통은 기쁨과 반대되는 정서이기에 그 대상이 악하다. 따라서 고통을 느끼는 것은 가지지 못한 선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현존하는 악에서 더 강하게 고통을 느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지적 고통이나 깨달음에서 오는 고통을 '슬픔' 이라고 부르며, 고통과 슬픔은 자비 · 질투 · 걱정 · 게으름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고통도 감각적 고통, 이성적 고통, 영적 고통으로 구분된다. 고통은 욕망이 좌절되었을 때 또는 지나친 욕망을 가졌을 때 생기며, 너무 큰 고통은 영혼의 기능을 약하게 하여 이해력을 마비시키고 육체를 해친다. 고통은 사랑하는 자와 함께 있거나 친구들의 위로로 가벼워질 수 있고, 진리를 탐구하는 경우에도 가벼워질 수 있다.
다섯 가지 도전적 정서 : ① 희망 : '희망' (spes)은 그 대상이 선이다(두려움과 구별). 그런데 그 선은 미래에 있을 선이고(기쁨과 구별), 단순한 미래의 선이 아니라 아주 힘든 미래의 선이며(욕망과 구별), 겨우 가능성이 있는 미래의 선이다(절망과 구별). 희망은 우리의 경험으로 인하여 생기고, 희망하는 대상을 사랑하면서 생기기도 한다. 희망은 우리의 활동을 지속시킨다. 여기서 말하는 희망은 감각적 정서의 희망을 의미하는 것이지, 세례 때 초자연적 은총으로 받는 대신덕(對神德) 중 하나인 희망〔望德〕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감각적 정서의 희망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정화되면 하느님만 바라게 되어 하느님과 하나되는 초자연적인 힘이 된다.
② 절망 : '절망' (desperatio)의 대상은 미래에 있을 선이지만, 이것은 힘들고 불가능한 선이다. 이 정서는 단순히 희망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도달할 수 없는 것을 알고 체념하여 물러서는 것이다. 따라서 체념하고 물러서는 의미에서 희망과 반대되는 정서이다. 모든 정서처럼 절망도 중립 상태의 성품이므로 덕으로 발전될 수 있는 정서이다.
③ 두려움 : '두려움' (timor)은 피하기 어려운 미래의 어떤 악의 대상으로부터 오는 정서이다. 두려움 때문에 망설이고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타는 행동을 하고, 의식적으로 놀라고 공포에 떨며 고민하게 될 수 있다. 선의 결핍은 두려움의 간접적인 대상이지만, 악은 직접적인 대상이다. 선을 사랑하는 데에서 두려움이 생기는데, 죄는 노력하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기 때문에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두려움은 우리의 가슴을 조이게 하고, 호흡을 곤란하게 하며, 우리를 떨게 하면서 행동을 위축시키어 육체적인 힘을 빼앗는다. 그래서 분노를 감추고 아무 일도 없는 듯이 냉정하게 있는 사람이 분노를 겉으로 드러낸 사람보다 더 큰 두려움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두려움은 우리의 영혼을 자극하여 반성하게 하는 긍정적인 역할도 한다.
④ 대담성 : '대담성' (audacia)은 두려움과 같은 대상이지만 서로 반대되는 정서이다. 이 정서는 피하기 어려운 미래의 어떤 악 앞에서 선을 추구하려는 희망에서 온다. 이 정서로 인하여 어려움 앞에서 성급하게 판단하여 신중하지 않은 행동을 하고, 자극을 받아 처음에만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 정서가 성숙하면 피하기 어려운 미래의 악 앞에서 신중하게 판단하여 행동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정성과 힘을 다하게 된다.
⑤ 분노 : '분노' (ira)는 여러 정서들의 복합적 원인에서 오기 때문에 반대되는 정서가 없는 일반적인 정서이다. 분노의 대상은 해로운 반대자이며, 이 해로운 반대자에게 복수하려는 것이 분노이다. 분노의 원인은 항상 자기에게 행해진 어떤 악이다. 흔히 미움이 분노보다 나쁘다고 본다. 그 이유는 미움은 악을 악으로 갚으려는 정서이고, 분노는 정당한 복수로 갚으려는 정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분노는 불의보다 정의에 더 가깝고, 그 강도에 따라 역정, 분노, 격노로 구분할 수 있다. 분노는 부당한 모멸감에서 가장 크게 발생하는데, 이성의 활동을 저해하고 심하면 언어 장애를 가져온다.
〔정서의 정화〕 정서는 거의 항상 여러 정서가 혼합하여 발생하며, 어느 한 가지 정서만 명확하고 순수하게 발생하지는 않는다. 어느 때는 한 정서가 생겼다가 곧 사라지기도 하고, 어느 때는 한 가지 정서가 생겼다가 여러다른 정서가 바뀌어 가며 생기기도 한다. 예를 들면 사랑은 모든 정서의 기본이고 모든 정서가 사랑으로 시작되기에, 사랑을 제외한 다른 정서들은 모두 혼합된 정서들이다. 즉 분노는 대담성과 슬픔과 희망이 복합된 정서로써 생긴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정서를 명확하고 분명하게 열한 개로 나눌 수는 없다. 그는 이렇게 정서가 혼합하여 생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발전시키지는 않았다. 또한 그는 모든 정서가 인식에서 시작한다고 보았는데, 프로이트(S. Freud, 1856~1939) 같은 현대의 심리학자는 무의식에서도 정서가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 내었다.
그렇다면 정서가 정화되면 어떻게 될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고, 내가 사랑하고 싶은 것을 사랑하고 미워하고 싶은 것을 미워하며 살아도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의지가 하느님의 의지와 같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를 영성적으로 표현하면, 하느님 때문에 기쁘고 하느님 때문에 즐겁고, 하느님 때문에 슬프고 고통스럽고 화를 내며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그 많은 정서를 일일이 정화할 수 있을까? 토마스 아퀴나스가 정리한 열한 개의 정서가 서로 얽히고 설키면 11의 11제곱이 되어 2,853억 개 이상의 정서들이 생성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들이 대학에 합격하여 좋고 대견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집을 떠나보내야 하는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등 수많은 감정이 복합되어 하루에도 수백 번씩 교차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면 이렇게 복잡하게 서로 얽힌 수많은 정서들을 어떻게 정화할 수 있을까? 십자가의 요한(Joannes aCruce,1542~1591)은 이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방법을 우리에게 제시하였다. 즉 정서를 하나하나 분석하며 정화한 다면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의 정서만 하느님께 향하면 다른 모든 정서들은 자연히 하느님을 향하게 된다. 하느님으로 인하여 내가 기쁨을 느끼거나 슬픔을 느끼게 되면 다른 모든 정서는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마치 해바라기의 씨앗 하나가 해를 바라보면 다른 모든 씨앗들도 해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 이 씨앗들이 모든 욕구를 의미한다고 가정하면, 하나의 욕구가 하느님께로 향하면 다른 모든 욕구도 하느님께로 자연히 향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질서하고 타락한 한 가지 정서를 어떻게 정화시켜 질서 있게 하고 거룩한 욕구로 성숙하게 할 수 있을까? 먼저 나의 정서들을 모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여 내 안에 있도록 허락하고, 내 안에서 표현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정서대로, 느끼는 대로 행동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인간의 모습을 잃고 동물처럼 행동하게 될 것이다. 내적으로 내 안에 있도록 허락하고, 내 안에서 표현하는 것이다. 특히 나를 괴롭히고 불편하게 하는 부정적인 정서들이 내 안에 있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나를 힘들게 하는 부정적인 정서들을 억압하거나 없애려고 자기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말라는 것이다. 화가 나서 힘들지만 화가 나 있는 나를 인정하고 화가 난 상태에 머물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화가 가라앉고 점점 사라지는 것을 체험할 것이다. 그리고 외적으로 표현할 때는 복음 정신에 맞게 행동해야지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안 된다. 예를 들어 기쁘면 기쁘도록 허락하고, 좋으면 좋은 대로, 싫으면 싫은 대로, 화나면 화난 대로 있는 그대로의 정서를 인정하고 허락하며 정서들이 내 안에서 마음껏 표현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서 나를 위해 기뻐하지 않고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 기뻐하고, 무엇을 사랑하고 미워하고 화를 내는 이유가 나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바꾸어 나가야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기적인 기쁨을 추구하고 미워하고 화를 내면서 사는데, 이 그릇된 습관을 복음적으로 바꾸어 덕을 쌓아야 한다. 곧 나를 버리고 나의 십자가를 지며 어두운 밤의 길에 들어서야 한다. 십자가의 요한의 가르침대로 모든 이기적인 정서들을 부정하면서, 다시말해 하느님께 나의 모든 정서들을 매일 봉헌하고 다시받아 하느님께서 직접 정화시켜 주시도록 청하고, 개인 적인 노력으로 그릇된 습관을 바꾸어 능동적으로 덕을 쌓으며 정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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