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실학 사상을 집대성한 대표적인 학자. 자는 미용(美鏞). 호는 사암(俟菴), 다산(茶山), 여유당(與猶堂). 시호는 문도(文度). 본관은 압해(押海 : 羅州). 세례명은 요한.
〔생 애〕 정약용은 1762년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草阜面) 마재(馬峴, 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정재원(丁載遠) , 모친은 해남 윤씨(海南尹氏)이다. 그는 16세 때 성호(聖湖) 이익(星湖, 李灑)의 문집을 읽으면서 성호(星湖)학파에 참여하였는데, 이때 서학(西學)에 관한 지식을 처음 접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1784년 그는 큰형 정약현(丁若鉉)의 처남인 이벽(曠菴, 李檗)에게서 처음 천주교 교리를 들었는데, 자신이 천주교에 입교한 계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천지가 창조되는 시원이나 신체와 영혼 또는 삶과 죽음의 이치에 관하여 들으니 놀랍고 의아하여 마치 은하수가무한한 것과 같았다. 서울에 돌아오자 이벽을 따라가 《천주실의》와 <칠극> 등 몇 권의 책을 보고 비로소 기뻐하여 마음이 기울어졌다" (〈先仲氏墓銘〉)
정약용은 1784년 여름 정조(正祖)가 태학에 내린 《중용》(中庸)에 관한 의문점 70조목에 대해 이벽과의 토론을 거쳐 《중용강의》(中庸講義)를 완성하였다. 그는 그해에 자신의 매부인 이승훈(李承薰)이 북경의 북당(北堂)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신앙 집회를 열자 여기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봄 명례방(明禮坊)에서 이벽, 이승훈, 권일신(權日身)과 정약전(丁若銓) 정약종(丁若鍾) , 정약용의 3형제 등이 참석한 신앙 집회가 형조(刑曹)에 의해 적발되었다. 이후에도 이승훈, 정약용 등은 성균관 근처에 모여 교리 연구를 하다가 동료 태학생들에게 발각되어 논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791년 전라도 진산(珍山)에서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이 부모의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사른 사건이 일어나 정부에서 큰 물의가 일어나자, 정약용은 홍낙안(洪樂安) 이기경(李基慶) 등으로부터 천주교도라는 성토를 받았다. 정약용 자신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23세 때(1784) 이벽을 통해 천주교 교리를 듣고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였으며, 24세 때 신앙 집회에 참석한 것을 비롯하여 26세 때(1787)부터 30세 때(1791)까지 천주교 신앙에 심취되었다가 1791년 진산 사건을 계기로 신앙을 버렸다고한다.
정약용은 천주교 신앙을 믿는다는 이유로 반대파의 강한 비판과 견제를 받아야 했다. 1795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밀입국하여 선교하고 있음이 알려졌는데, 이로 인해 정약용은 금정 찰방(金井察訪)으로 좌천되었으며, 1797년 자신에 대한 비난에 대해 변명하는 <변방사동부승지소>(辨謗辭同副承旨職)를 올렸지만 다시 곡산 부사(谷山府使)로 좌천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나자 정약용은 배교한 증거를 확고하게 제시했지만, 겨우 죽음을 면하고 경상도 장기(長誓)로 유배되었다.
그해 황사영(黃嗣永)의 백서(帛書) 사건으로 다시 심문을 받았고, 결국 전라도 강진(康津)에 유배되어 40세부터 57세까지 18년간 유배 생활을 하였다.
달레(Ch. Dallet)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정약용이'요한' 이라는 세례명을 받았으며, 박해 중에 배교했다가 뉘우치고 다시 신앙을 회복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유배지에서 돌아온 후 죽을 때까지 열렬한 신앙인으로 살다가 중국인 유 파치피코 신부에게서 종부성사를 받은 후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달레는 정약용이 유배에서 풀린 다음 복음이 조선에 들어온 과정을 《조선복음전래사)(朝鮮福音傳來史)라는 수기(手記)로 남겼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달레의 서술은 정약용 자신의 저술이나 그 밖의 정부 문헌에서 보여 주는 배교 사실과 극단적으로 상반된다.
유배에서 풀려난 정약용은 고향 마재로 돌아와 자신의 저술을 마무리하였다. 장년기 이후 천주교 신자라는 죄목으로 오랜 유배 생활의 고된 시련을 겪으면서도, 그는 우리 사상사에서 가장 방대하고 창조적인 업적을 남겨주었다. 그는 19세기 말 고종(高宗)의 관심과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 다시 세상에 빛을 내게 되었다. 20세기 초 박은식(朴殷植), 장지연(張志淵) 등 계몽 사상가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그의 사후 100년이 되는 1936년 그를 재평가하면서 실학 사상을 민족 사상과 근대 사상의 발단으로 재발견하게 되었다. 그의 묘는 고향 마재에 그가 살던 집 뒷동산 위에 있고, 그가 살던 집은 1925년 대홍수로 유실되었으나 그 후 복원되었으며, 그를 제향하는 사당 문도사(文度祠)가 세워졌다.
〔학문과 사상〕 정약용은 1792년 수원성을 쌓을 때 서양 과학 기술에 대한 지식을 토대로 기중기(起重機) · 인중기(引重機) 등을 제작하여 이용하였으며, 1797년 곡산 부사로 있으면서 《마과회통》(痲科會通)을 편찬하여 우두법(牛痘法)을 실제로 활용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청년기에 접한 서학의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며, 특히 천주교 신앙의 세계관은 그의 의식을 새로운 세계로 열어주는 데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그가 서양 과학과 천주교 교리에 심취하면서 받은 영향은 그의 경학 체계와 인간 이해에 생생한 자취를 남겼다. 그가 전통적 자연 철학인 오행설(五行說)을 거부하고 초월적 주재자인 하늘(天)을 재확인하였던 것은, 천주교의 세계관을 유교 경전의 재인식에 흡수함으로써 유교의 인간 이해와 신앙적 세계관을 심화하고 계발하였음을 말해 준다.
그의 학문은 유배지인 강진에서 체계화되었다. 그는 강진의 만덕산(萬德山)에 있던 윤단(尹傳)의 산정(山亭, 茶山草堂)에 머물면서 그의 학문에 중추가 되는 경전 주석과 경세론을 저술하였다. 그는 '육경 사서' (六經四書)에 대한 자신의 창의적 경전 주석에 대해 자기 수양〔修己〕을 위한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일표 이서' (一表二書) 즉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 《흠흠신서》(欽欽新書)로 이룬 치밀한 구상의 경세론에 대해 천하와 국가를 위한 것이라 하여, 서로 본말(本末)의 관계를 이루는 것으로 파악하였다.경전에 대한 주석과 재해석 : 정약용의 방대한 경전 주석 업적은 경학의 역사에 큰 획을 그었으며, 동시에 그 자신의 철학적 근본 입장을 확고하게 정립하는 기반을 제공하였다. 그는 한학(漢學, 訓詁學)이 고증〔考據〕을 방법으로 삼았으나 분석〔明辨〕이 부족하여 '생각하지 않는' 폐단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송학(宋學, 性理學)이 궁리를 주장하여 고증에 소홀함으로써 '배우지 않는' 허물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정약용이 지향하였던 것은 경전에 입각하여 한학의 훈고학적 방법과 송학의 심성론적 과제를 지양하고 종합하는 것이었다.
그는 성리학이 이기론(理氣論)의 관념적 논쟁에 빠지는 사실을 전적으로 거부하였다. 따라서 그는 성리학의 추종자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성인(聖人)이 될 수 없는 문제점으로, 주재자인 하늘〔天〕과 도덕적 성품의 '인'(仁)을 이치로 파악하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는 성인이 되기 위한 자신의 수양 방법으로 하늘이 내려다 보는 자리를 삼가하여 하늘을 섬기고, 자기 마음을 미루어 남의 마음을 이해함으로써 '인' 을 실천할 것 등을 제시하였다. 이를 통해 하늘을 두려워하는 신앙심과 인간에 대한 사랑의 도덕적 실천을 강조하였다.
특히 정약용의 《중용강의》는 당시 천주교 신앙 운동을 이끌었던 이벽의 영향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으며, 이 저술에서 유학과 서학의 이념이 만나는 융화적 해석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신령스럽고 밝으며 만물을 주재하는 초월적 존재로서 인격신적 '천' (天) 개념을 제시하였다. 이 '천' 개념은 리치(MatteoRicci, 利瑪竇)가 《천주실의》에서 제시한 '천주' 개념과 상통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의 품성을 신령스럽고 밝은 영명(靈明)이라 하여, 천주교 교리에서 제시된 '영혼' 개념을 담고 있다. 여기서 정약용은 인간이 도덕성을 실현할 수 있는 근원적 조건으로 초월적 주재자〔天 · 上帝 · 鬼神〕에 대해 삼가고 두려워하는 신앙적 태도를 강조하였다.
정약용은 '덕' (德)이 인간의 성품으로서 선천적으로 부여되어 있다는 성리학적 주장을 거부하고, 실천을 통해 얻은 결과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욕망을 인간이 행동하게 하고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라 보아, 욕망의 적극적 의미를 발견하였다. 동시에 마음 속에서 도덕적 가치를 따르는 '도심' (道心)과 욕망을 따르는 '인심' (人心)이 갈등하는 현실에 주목하였다. 이처럼 정약용은 인간삶에서 주체적 결단의 책임과 실천을 통해 이루는 공적이나 허물을 평가하는 것을 중시하는 인간 이해의 입장을 지니고 있다. 그는 성품〔性〕을 마음이 선을 '좋아하는 것' 〔嗜好〕이라 정의하며, 마음은 선을 할 수도 악을 할 수도 있는 열린 존재로서 하늘로부터 '자주권' 을 받았다는 의지의 자율성을 설명하였다. 따라서 선행이 자신의 공이 되고 악행이 자신의 죄가 된다고 하였다.
그는 도(道)를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는 길"이라 하여, 구체적 실천의 규범으로서 제시하였다. 따라서 인도(人道)는 인간과 인간의 만남의 방법이요, 인간 관계 속에 작용하는 인륜(人倫)으로 파악하며, 자기 마음을 미루어 남의 마음과 일치시켜 가는 '서' (恕)의 원리로 일관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인' 을 '인간을 향한 사랑' 이라고 규정하여, 인륜을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 '인' 을 자식이 부모에 대한 효도(孝)와 형제간의 우애〔悌〕와 부모가 자식에 대한 자애(慈)라는 가족 관계의 규범으로 파악하며, 사랑으로 맺어지는 인간관계의 근본 규범으로 제시하고 있다. 나아가 가족적 인간 관계의 규범〔孝 · 悌 · 慈〕은 사회적 인간 관계의 규범〔事君 事長 · 事衆〕으로 확산된다고 하였다.
사회 정치 사상 : 정약용의 사회 사상을 보여 주는 경세론은 그의 인간 이해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는 자신을 수양하는 수기(修己)와 남을 다스리는 치인(治人)의 관계에서, '치인' 이란 권력을 가진 자의 지배 행위가 아니라 자아 실현이라 보았다. 곧 《중용》에서 말한 "사람으로써 사람을 다스린다" 〔以人治人〕라는 구절을 "인도(人道)로써 사람을 섬긴다" 라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곧'치' (治)는 다스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도리와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에, 부모를 섬기는 일도 '치인' (治人)의 일이라 하였다.
정약용에 의하면, 다른 인간과의 관계는 '사랑의 실현' 〔仁〕을 추구하는 것이므로, 인간 사이에 가로 놓인 사회적 신분의 차이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해소되어야할 장애 요소로 보았다. 여기서 그는 "나의 소망은 온 나라 안을 모두 양반이 되게 하는 것이다" 라고 언급하여,신분 계급의 차별성을 타파하고자 하였다. 또한 당시 국가에서 인재를 활용하는 데 있어서 서인(庶人)과 중인(中人)을 버리고, 서얼(庶孼)을 버리고, 당파(黨派)가 다른 자를 버리는 것과 같은 차별화의 편파적 폐단을 통박하면서, 지역에 구애되거나 신분의 귀천(貴賤)을 가리지 말며 오직 능력에 따라 인재를 써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는 "하늘은 그 신분이 관리인가 백성인가 묻지 않는다" 라고 하면서 하늘 앞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인간관을 주장한 것이다.
그는 사회 질서의 구현을 위한 제도 연구를 정밀하게 체계화하였다. 그 대표작의 하나로 《경세유표》에서 행정의 운용 제도를 논하였다. 동시에, 법의 본래 정신이 '예' (禮)에 있으며, '예' 란 보편적 법칙(天理)과 인간적 정감〔人情〕에 합당한 것이라 하여, 법률의 공정성과 인간성을 강조하였다. 형률(刑律)을 다룬 《흠흠신서》에서는 옥사(獄事)를 결단하는 재판의 근본이 하늘을 공경하고 인간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 있으며, 일을 엄숙히 다루되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수령〔牧〕이 백성〔民〕을 위해 있는 것이지 백성이 수령을 위해 생긴 것이 아니다"라고 하여 민본(民本) 원리를 재확인하며, 《목민심서》도 이러한 민본 원리를 기초로 하였다. 그는 천자(天子)도 본래 백성 중에서 백성에 의해 추천된 존재임을 강조하여 민권 의식을 함축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는 백성의 생존이 정치의 근본 과제임을 지적하여 "재산을 고르게 마련하여 다 함께 살리는 자는 임금과 수령 노릇을 제대로 하는 자이다" 라고 하였다. 또한 경제적 정의를 분배의 균형에서 찾아 "부지런히 서둘러서 부자의 것을 덜어 내어 가난한 자에게 보태 주어 그 살림을 고르게 할 것"을 역설하였다. 따라서 정약용의 정치 사상에서는 인륜의 실현으로서 정치 〔治民〕를 지향하고 있으며, 법과 제도가 언제나 백성을 보호하고 백성을 위해 봉사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는 당시의 사회에서 탐학한 관리의 착취로 도탄에 빠진 백성의 참혹한 현실을 예리하게 통찰하였다. 그리고 타오르는 울분과 눈물어린 연민으로 많은 사회시(社會詩)를 통해 당시의 참담한 현실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통렬하게 고발하였다. 나아가 백성을 살리기 위해 사회 기강의 수립과 제도 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방책을 구체적으로 강구하였다.
〔평 가〕 정약용의 실학 사상은 부패하고 불합리한 사회제도를 예리하게 통찰하고 구체적인 개혁 방책을 제시하였다. 동시에 경학(經學)을 통한 실학의 철학적 기반을 새로운 지평으로 열어 주었다. 또한 그는 역사 · 지리 ·의례 · 교육 · 풍속 · 의학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 마재 ; <목민심서> ; 《조선복음전래사》)
※ 참고문헌 홍이섭,《한국사의 방법》, 탐구당, 1970/ 김옥희, 曠菴 李檗의 西學思想》, 가톨릭출판사, 1979/ Ch. Dallet, 안응렬 · 최석우 역, 《한국 천주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금장태, 《다산실학탐구》, 소학사, 2001/ 최석우, <달레가 인용한 정약용의 韓國福音傳來史〉, 《李海南 回甲紀念論叢》, 1970. 〔琴章泰〕
정약용 (1762~ 1836)
丁若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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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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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의 친필(왼쪽)과 초상화 (장의순 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