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암(鹿庵)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의 제자이자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과 정약용(丁若鏞, 요한)의 중형(仲兄). 자(字)는 천전(天全), 누호(樓號)는 일성재(一星齋), , 호(號)는 매심(每心) 또는 손암(巽庵)이다. 손암은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섬으로 귀양 가서 사용한 호이다. 뒤에 신앙을 버렸지만 초기 교회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양명학과 천주교 수용〕 성격이 어려서는 얽매이지 않으려고 하였고, 커서도 길들지 않은 사나운 말과 같았던 그는 부친 정재원(丁載遠) 밑에서 공부를 하다가 부친이 1776년에 호조좌랑(戶曹佐郞)이 되어 서울에서 살게 되자, 부친을 따라 서울에서 노닐면서 권철신의 문도들인 이윤하(李潤夏) · 이승훈(李承薰) · 김원성(金源星) 등을 통해 처음으로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학문을 접하고 이내 곧 권철신의 문하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학문을 닦았다. 그들은 돌같이 굳게 사귀면서 이익의 실학을 계승한 권철신의 학문을 이어받아 주자학(朱子學)을 거쳐서 공자학(孔子學)까지 거슬러 오르고자 노력하였다. 당시 권철신은 이미 양명학(陽明學)을 수용한 뒤였으므로 정약전은 권철신으로부터 양명학을 이어받았으며, 또한 이기양(李基讓)으로부터도 양명학을 계승하였다. 이와 같이 그가 계승한 성호학파의 양명학은 도덕학 이외의 다른 학문의 탐구를 적극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이론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즉 가치 세계와 사실 세계를 별개로 구분한 뒤 가치 세계의 이치는 선천적으로 누구나 다 알 수 있기 때문에 지(知)에 대한 공부는 할 필요가 없고 오직 실천 공부만 하면 된다고 본 반면에, 사실 세계의 이치는 처음에는 누구나 다 백지 상태로 지각과 감각을 통해 후천적으로 하나씩 알아 기억하고 추리하게 되므로 경험적인 지의 공부가 필요하다고 보고 그에 대한 공부를 중시하였다.
이와 같이 권철신이나 이기양으로부터 도덕학 이외의 경험적인 학문의 탐구를 적극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이론 체계를 갖춘 실학적 양명학을 계승한 그는 1784년 봄에 이승훈(베드로)이 북경(北京)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다음부터는 서학(西學)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1784년 6월 2일 마재에서 배를 타고 서울로 오는 도중에 이벽(李檗,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천지 조화의 시작과 육신과 영혼 및 삶과 죽음에 대한 이치를 듣고 크게 감명을 받은 그는 대과(大科) 공부를 등한히 한 채이벽을 따라 노닐면서 서학에 열중하였다. 그는 역법(曆法)에 관한 학문과 《기하원본》(幾何原本) 등을 연구하여 정통하였으며, 또한 천주교에 대해서도 깊이 빠져 1784년 겨울에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았고, 최창현(崔昌顯, 요한)의 대부를 섰으며, 1785년에는 김범우(金範禹,토마스) 집에서 거행되는 종교 집회에 참석하였다. 1786년 4월에는 동생 정약종에게 전도하였으며, 1787년에는 그의 외종 사촌 윤지충(尹持忠, 바오로)에게 교리를 가르쳐 주었다. 이처럼 그는 초기 교회에서 지도자로 활동하였으나, 1790년에 제사를 금지하는 구베아(Gouvea, 湯士選) 주교의 사목 서한이 밀사로 북경에 파견되었던 윤유일(尹有一, 바오로)에 의해 전해지고, 그의 부친뿐 아니라 나라에서도 천주교를 금함에 따라 그는 천주교를 버렸다. 그러나 서양의 과학 기술에 대해서 만은 배교 후에도 계속해서 탐구하였다.
〔관계 진출과 그 좌절〕 그는 천주교와 결별한 뒤 "과거에 합격하지 않으면 임금을 섬길 수가 없다"라고 말하고 대책 공부에 힘써, 1790년 여름에 실시하는 증광별시(增廣別試)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한 다음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이어 초계문신(抄啓文臣)에 선발되었는데, 서열이 더 높은 동생 정약용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각과(閣課)는 면제받았다. 그러나 1795년 가을에 박장설(朴長高)이 공서파(攻西派)인 목만중(睦萬中)의 사주를 받아 상소를 올려 정약전의 과거 시험 답안의 내용을 문제삼았다. 즉 '오행' (五行)이라는 제목에 대해 답안을 작성하면서 정약전이 서양의 학설을 전적으로 따라 5행으로써 4행이 되게 하였는데, 당시 시험관으로 참여하였던 이가환(李家煥)이 부당하게 그를 장원으로 뽑았다고 비판하였다. 이 문제는 정조(正祖)가 그의 답안을 가져다가 살펴본 뒤 무혐의 처리함으로써 일단락되었지만 이 일로 인하여 그의 벼슬길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그는 정조의 배려로 1797년 가을에 6품의 사관(史官)으로 승진하였고 또 성균관 전적(典籍)을 거쳐 병조좌랑(兵曹佐郎)이 되었으며, 1798년 겨울에는 정조의 명령으로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의 편찬에 참여하기도하였으나, 1798년 여름에 대사간(大司諫) 신헌조(申獻朝)가 그를 논함에 따라 파직을 당하였다. 그는 이후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였으며, 1801년 신유박해 때 연루되어 모진 형벌과 심문을 받은 뒤 신지도(薪智島)로 귀양 갔다가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의 〈백서〉(帛書)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심한 형벌과 심문을 받은 뒤 12월에 흑산도(黑山島)로 유배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내흑산 우이도(牛耳島)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1806년 말에서 1807년 초 사이에 흑산도로 들어가 생활하였는데, 이때 그는 상스러운 어부들이나 천한 사람들과 패거리가 되어친하게 지내며 다시는 귀한 신분으로 교만 같은 것을 부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섬사람들이 서로 그를 자기 집에 머물게 하려고 다투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그는 정약용이 곧 석방될 것으로 믿고 1813년에 흑산도 주민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우이도로 가서 정약용을 기다리며 살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1816년 7월 10일 그곳에서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현재 천진암 성지에 이장되어 있다.
〔유배지에서의 학문 연구〕 그는 흑산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에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던 동생 정약용과 자주 편지를 교환하며 학문에 대해 깊이 토론하였다. 이때 그가 주로 관심을 기울인 것 가운데 하나는 당시의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우선 그는《송정사의》(松政私議) 1편을 저술하여 안민(安民)의 입장에서 당시 송정의 폐단을 비판하고 그 개혁을 주장하였으며, 사대부들도 《병학지남》(兵學指南)과 같은 병서(兵書)를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문(文)보다 질(質)을 중시하는 고례(古禮)의 회복을 통해 문을 승상하고 무(武)를 천시하는 풍속을 개혁함으로써 사회의 여러 모순을 바로잡고 국력을 신장시키고자 하였다. 아울러 그는 봉건제(封建制)를 비판하고 군현제(郡縣制)를 지지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주장은 개인의 자질보다 문벌을 중시하여 관직을 독점하고 당쟁을 유발하는 노론(老論) 벌열(閥閱) 중심의 체제를 개혁하여 문벌보다 개인의 자질을 중시하는 왕권 중심의 관료 체제를 강화하자는 취지에서 나왔다.
또한 그는 빛의 굴절과 관련된 여러 자연 현상을 과학적으로 탐구하였고, 곡식 비가 내리는 현상이나 혜성의 이동 현상을 재이적(災異的) 관점에서 벗어나 과학적으로 구명(究明)하고자 진지하게 노력하였으며, 조석(潮汐)에 대해서도 깊이 탐구하였다. 특히 조석에 대한 탐구는 달과 어패류의 관계로 발전하고 다시 흑산도 근해에 서식하는 거의 모든 바다 생물로 확대되어, 마침내 흑산도 근해 해양 생물 총 55류 226종을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연구한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저술하게 되었다.《자산어보》는 정약전 자신이 현지 사람인 장덕순(창대)의 도움을 받아 직접 조사하여 수집한 자료와 56종의 관련 문헌을 활용하여 1807년부터 1814년까지 8년간에 걸쳐 완성한 것이다. 그는 먼저 그림 위주의 자료집인《해족도설》(海族圖說)을 편찬하고, 뒤에 그것을 토대로 내용을 보충하여 문자 위주의 《자산어보》를 저술하였다. 그의 저서는 《자산어보》 외에도 <손암서독>(巽庵書牘) · <자산역간>(玆山易柬) · <손암예의>(巽庵禮疑) · <주역사해서>(周易四解序) . <매씨서평서 > ( 梅氏書評序) · <시의>(尸義) 등이 《여유당집》(與猶堂集, 규장각 소장)과 《여유당전서》(與猶堂書)에 전해지고 있다. 이밖에도 그의 저서로 《표해록》(漂海錄) · 《송정사의》 · 《논어난》(論語難) · 《몽학의회》(蒙學義彙) 등이 있었으나오늘날 전해지지 않고 있다. (→ 권철신 ; 이벽 ; 이승훈; 정약종)
※ 참고문헌 趙珖, 《朝鮮後期 天主教史 研究》,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8/ 鄭杜熙, <천주교 신앙과 유배의 삶, 다산의 형 정약전>, 《역사비평》 11호(1990)/ 徐鍾泰, <巽庵 丁若銓의 實學思想>,《亞研究》 24,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1992/ 一, 《星湖學派의 陽明學과 西學》, 서강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 학위 논문, 1996/ ㅡㅡ, <星湖學派의 陽明學과 實學> , 《朝鮮時代史學報》 7호(1998. 5)/ 정명현, <丁若銓의 《玆山魚譜》에 담긴 해양 박물학의 성격>, 서울대학교 대학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 과정 석사 학위 논문, 2002. 〔徐鍾泰〕
정약전 (1758~1816)
丁若銓
글자 크기
10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