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박해(辛酉迫害)때의 순교자, 초대 명도회(明道會)회장.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 본관은 나주(羅州, 즉 押海). 당색은 남인. 순교자 정철상(丁哲祥, 가롤로)과 성정하상(丁夏祥, 바오로), 성녀 정정혜(丁情惠, 엘리사벳)의 부친이며, 성녀 유조이(柳召史, 체칠리아)의 남편. 1786년경 중형 정약전(丁若銓)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열심히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고 이를 실천해 나가는 데 열중하였으며,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에 의해 명도회 회장에 임명된 후로는 신앙 공동체의 유지와 교리 교육, 전교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참수되었다. 저서로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主敎要旨)가 있다.
〔천주교 수용과 분원 이주〕 정약종은 1760년(영조36) 경기도 광주의 마재(현 남양주시 와부읍 능내리의 마현)에서 진주 목사를 지낸 정재원(丁載遠)과 해남 윤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형제로는 이복 맏형인 정약현(丁若鉉)과 중형 정약전, 아우 정약용(丁若鏞, 요한) 등이 있었는데, 정약전과 정약용은 일찍부터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을 스승으로 받들고 이익(李瀷)의 학문을 따르면서과거 공부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정약종은 과거를 위한 학문을 비판하고 불로장생을 위한 도교에 탐닉하였다. 그러던 중 16세가 되던 1786년 3월(음) 정약전으로부터 천주교 교리에 관해 들은 뒤로는 장생의 도를 비판하면서 도교를 청산하고 천주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정약종이 같은 남인 집안인 이수정(李秀廷)의 딸과 혼인한 것도 이 무렵이었던 것 같다. 한편 그의 형제들도 남인집안과 인척 관계를 맺었으니, 이벽(李檗, 세례자 요한)은 맏형 정약현의 처남이 되며, 이승훈(李承薰, 베드로)은 정약전의 매부가 된다. 또 1791년의 순교자 윤지충(尹持忠, 바오로)은 정씨 형제들의 외사촌이고, 정약현의 딸 정명련(丁命連, 마리아)은 훗날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과 혼인하였다.
중형에게서 교리를 배운 정약종은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을 대부로 삼아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 시기는 정약종이 천주교를 접한 지 4~5년 뒤였다는 기록도 있으나, 1786년 3월(음)에서 그리 멀지 않았던 것 같다. 이후 그는 오로지 교리를 연구하고 실천해 나가는 데만 열중하였다. 또 이듬해에 발생한 정미반회 사건(丁未泮會事件) 이후 부친이 천주교를 금하였고, 1791년에 발생한 진산 사건(珍山事件)으로 사촌 윤지충이 순교한 데다가 천주교 신자들의 제사 폐지 행위가 크나큰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천주 신앙을 진리로 생각하는 정약종의 생각은 조금도 바뀌지않았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A. de Gouvea, 湯士選) 주교가 사목 서한을 통해 조선 교회에 내린 조상 제사 폐지령과 그 실천 행위는 조선의 전통 윤리나 성리학적인 사회 질서에 배치되는 것이었다. 실제로 교회 안에서도 특히 양반 출신의 지도층 신자들이 크게 흔들렸고, 정씨 형제들도 마찬가지였다. 정약전은 교회와의 단절을 결심하고, 정약용 또한 신앙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비록 정약종은 신앙을 고수하고 있었지만, 언제까지나 집안에서의 제사를 피할 수만은 없었다. 당시 정약종은 첫 부인 이씨와 사별한 뒤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홀아비의 정(情)을 간직하며 살 생각이었지만, 가족들의 간청에 못 이겨 유조이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제사 문제와 관련하여 더이상 마재에 살 수 없게 되자, 아내와 맏아들 철상을 데리고 한강 너머에 있는 양근 분원(현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으로 이주하였다.
〔교회 지도층으로의 성장과 명도회〕 분원으로 이주한 뒤 정약종은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해 나가는 한편 하층민 출신의 신자들을 자신의 집에 불러들여 교리를 가르치면서 함께 생활하였으며, 인근에 사는 신자들과 열심히 교류하였다. 충청도 출신의 머슴 임대인(任大仁, 토마스), 김한빈(金漢彬, 베드로), 천민 출신 최기인(崔起仁)여주의 최해두(崔海斗), 충주의 남필용(南必容) 등이 그들이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그와 교류한 신자들은 모두 34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정약종은 1794년 무렵부터 교회 지도층 신자들과 왕래하면서 교리 연구를 위한 소공동체 모임을 갖기 시작하였고, 1797~1798년 이후에는 서울을 자주 왕래하면서 지도층 신자들과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이 시기는 1794년 말 조선에 입국한 주문모 신부가 다음해에 일어난 을묘박해(乙卯迫害)로 쫓기는 신분이 되었지만, 꾸준히 서울과 지방을 오가면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와 일치한다. 한편 정약종은 이 박해 때 별다른 화를 입지 않았지만, 그의 아우 정약용은 충청도의 금정 찰방으로 좌천되면서 교회에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
정약종은 이제 지도층의 일원이 되어 다른 신자들과의 교류를 넓혀 나갔다. 그리고 1799년에는 주문모 신부의 명에 따라 천안 옥중에 있던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과 연락한 뒤 북경에 보내는 서한을 작성하였고, 그해 말에는 김유산(金有山, 토마스) 편에 이를 북경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여기에는 주 신부와 조선 신자들이 추진해 오던 신앙의 자유를 위한 서양 선박(洋舶)과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후 정약종은 1800년 4~5월경(음) 여주와 양근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자 양근 분원을 떠나 서울로 이주하였다. 그가 처음 정착한 곳은 청석동(靑石洞)에 있던 문영인(文榮仁, 비비안나)의 집이었는데, 두 달 후에는 아우 정약용의 도움을 받아 남대문 안으로 다시 이주하게 된다.
이에 앞서 정약종은 주문모 신부가 1799년 초에 설립한 '명도회' 의 초대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명도회는 주 신부가 자신이 체포된 후를 생각해서 만든 평신도 단체로, 이전부터 존재해 왔던 소공동체 모임들을 조직화 · 체계화하려는 데도 목적이 있었는데, 그 중심지는 서울 아현에 있던 정약종의 조카 황사영의 집이었던 것 같다. 이후 주 신부와 정약종은 서울 각처에 있는 지도층 신자 집을 선택하여 그 지역의 집회 장소로 설정해 나갔으며, 이것이 명도회의 하부 조직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러한 집회 장소는 그 후 여섯 곳으로 증가하였고, 신자들은 이를 '육회' (六會)라 불렀다. 정약종은 명도회 회장으로서 교리 연구 모임을 주도하거나 회원들의 전교 활동을 관리하고, 회원들의 신공(神工) 성과 등을 주 신부에게 보고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신유박해와 순교〕 정약종의 활동은 1801년의 신유박해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이 박해는 그 해 1월 10일 조정에서 박해 윤음(倫音)을 반포함과 동시에 공식적으로 시작되었으나, 이미 그 전해 말에 최필공(崔必恭, 토마스)과 사촌 동생 최필제(崔必悌, 베드로)가, 1801년 1월 9일(음)에는 총회장 최창현(崔昌顯, 요한)이 체포되었다. 박해가 시작되자 주문모 신부는 지방으로 피신하 였다가 훗날 자수하여 순교의 길을 택하였다.
공식적인 박해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1월 19일(음)에는 정약종의 책롱 사건(冊籠事件)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임대인이 포천에 사는 홍교만(洪敎萬,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의 집에 숨겨 두었던 정약종의 책 상자를 박해 직후에 서울 우물골(井洞) 송재기(宋載紀)의 집을 거쳐 황사영의 집으로 옮기려다 발각된 것으로, 여기에는 천주교 서적과 성물, 북경 주교와 주문모 신부의 서한, 정 약종 · 정약용 등 정씨 집안의 서한, 황사영의 서한 그리고 《정약종 일기》 등이 들어 있었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노론 벽파에서는 남인 친서계(親西系)에 대한 공격으로 이를 이용하려 하였고, 조정에서는 공서계(攻西系) 인물들의 정치적 공세와 남인의 영수였던 채제공(蔡濟恭)에 대한 추탈 상소가 이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2월 10일(음) 이가환(李家煥)을 비롯하여 이승훈, 정약용 등이 체포되면서 추국(推鞫)이 열렸다.
정약종은 2월 11일(음)에 체포되어 이튿날부터 추국을 받게 되었다. 이때 추관들은 그의 책통에서 발견된 서한과 《정약종 일기》 내용에 담긴 사실들을 모두 파헤치려고 하였으나, 정약종은 교회에 관련된 사실을 조금도 누설하지 않았으며, "특별히 교주나 도당이 없다" 라고 하면서 동료 신자들에게 해가 되는 말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의 진술 내용에서 나타나는 신자들의 이름은 임의로 지어낸 것이거나 이미 그 행적이 소상히 밝혀진 경우, 이승훈 · 홍낙민과 같이 교회를 멀리한 경우, 권일신과 같이 이미 사망한 경우뿐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정약종의 신심이 어느 누구보다 굳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추국이 계속되는 동안 정약종은 여러 차례 형문(刑問)을 받고 신장(訊杖)을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앙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자 추관들은 "아무리 신문해도 입을 굳게 다물고 있으므로 무엇을 물어도 소용이 없다" 라고 보고하였고, 조정에서는 "범상부도의 죄인 정약종은 한없이 흉악하고 지극한 패륜아이므로 하루라도 하늘과 땅 사이에 그대로 놓아둘 수 없다" 라는 미명 아래 1801년 2월 26일(양력 4월 8일) 정형(正刑)을 선고하였다. 이에 따라 정약종은 판결 당일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이후 그의 가산은 적몰되었으며, 노비는 국가에 귀속되었다. 그의 시신은 고향 인근의 배알미리(拜謁尾里, 현 하남시 배알미동)에 안장되었다가 1959년 4월 반월의 사사리(沙士里)로 이장되었고, 1973년 5월 근처의 가족 묘지로 다시 이장되었다가 1981년 11월 1일 그 유해가 현지에서 발굴되어 천진암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천주 신앙과 주교요지〕 정약종이 생전에 보여 준 신앙 생활과 관련하여 황사영은, 첫째 교리에 대한 진지한 연구와 지적인 태도, 둘째 이를 바탕으로 한 교우들과의 강론과 교리 전파 활동, 셋째 끊임없는 묵상 공부 등 세 가지를 지적하면서 특히 그의 교리 지식을 높게 평가하였다. 한편 추관들은 《정약종 일기》와 문서 안에서 '망칙하고 부도한 말' 이 있음을 발견하였는데, 공서계의 이기경(李基慶)은 이를 "나라의 큰 원수는 임금이고, 집안의 큰 원수는 부친이다"(國有大仇君也 家有大仇父也)라는 12자의 흉언이라고 기록하였다. 아마도 이러한 내용은 정약종이 삼구(三仇 : 육신 세속 마귀)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내린 오해거나, 아니면 충효를 바탕으로 한 조선의 전통 질서를 거부하려 했던 그의 의도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이후 12자 흉언은 위정자들에게 박해의 정당성을 부여해 주는 요소로 이용되었다.
정약종이 이해한 교리 내용과 천주 신앙은 그가 저술한 《주교요지》에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이 책을 저술한 뒤, 천주의 여러 가지 덕과 도리를 한데 모은 총론서 《성교전서》(聖敎全書)를 추가로 저술하다가 박해로 체포되고 만다. 그가 <주교요지>를 저술한 시기는 하층민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거나 지도층으로 부각되는 1797~1798년 이후 혹은 1799년 초 명도회장으로 임명된 후인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주문모 신부는 이 책을 보고는 중국 선교사 마이야(Mailla, 馮秉正) 신부가 저술한 교리서 《성세추요》(盛世芻蕘, 1733)보다 낫다고 칭찬하기까지 하였다. 이후 《주교요지》는 널리 필사되어 읽혀졌고, 1885년에는 목판본이, 1897년에는 활판본이 간행되면서 약 1세기 동안 일반 신자들의 교리 이해에 큰 영향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정하상의 <상재상서>(上宰相書)는 물론, 구한말의 애국자요 신앙인이었던 안중근(安重根, 토마스)의 교리 이해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주교요지》는 우선 최초의 대중 교리서로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서술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또 신자들에게 확고한 신앙 태도를 갖도록 해 주는 일종의 신학서였고, 그릇된 천주교 인식을 불식시켜 줄 수 있는 호교서(護敎書)이기도 하였다. 아울러 여기에는 정약종의 신론과 그리스도론이 함축되어 있으며, 구원론(속죄론)과 십자가로 설명되는 구원관도 들어 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완덕(完德)을 지향해 나갔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모방, 순교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추구하고자 하였다. 그가 홀아비로 살아가려고 하였던 것이나, 재혼한 아내와 금욕을 지키면서 살아가고자 하였던 사실도 이러한 완덕의 추구 내지는 자신의 신앙에 엄격하였던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정약종은 전근대적인 신분제를 천주 신앙으로 타파하려는 평등 사상을 지니고 있었으며,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창조주요 절대자로 믿으면서 스스로 그 신앙의 요소들을 일생 안에서 용해시켜 나갔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정약종이 문초 과정에서 한 진술 내용에서도 웅변적인 호교론은 물론 인유론(引儒論) 내지는 보유론(補儒論)에 입각한 상제천(上帝天) 사상을 찾아 볼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추관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올바로 이해시키려 하였다. 뿐만 아니라 천주를 대군대부(大君大父)로 표현함으로써 천주교 신자들이 군부(君父) 이상의 충효 사상을 실천하고 있음을 이해시키려고 하였으니,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개진된 이와 같은 호교론은 전통 유학에 대한 이해와 신앙에 대한 믿음, 순교에 대한 열정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정약종의 신앙은 순교 장면에서 더욱 돋보인다. 그는 형장으로 갈 때에도 군중들을 향해 교리를 설명하면서 천주를 위해 죽는 것이 두렵지 않다는 용자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또 칼날을 받기 위해 나무토막에 목을 드리웠다가 몸을 돌려 하늘을 보고는 "땅을 내려다보면서 죽는 것보다 하늘을 쳐다보며 죽는 것이 낫다" 라고 한 뒤 칼을 받았다. 이처럼 그는 확고한 구원 사상을 지니고 있었으며, 순교의 용덕을 통해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구체적으로 실현하였다. 그것은 자부적인 사랑의 극치를 보여 주신 대군대부 하느님께 인간이 드릴 수 있는 대효(大孝)를 보여 준 것이었다. (→ 명도회 ; 신유박해 ; 유 세실리아; 정정혜 ; 정철상 ; 정하상 ; <주교요지> ; 주문모)
※ 참고문헌 徐鍾泰 편,《주교요지》 상 · 하, 국학자료원, 2003/ St.A. Daveluy, vol. 5, Notices des Principauc martyrs de Corée(1858년 필사정리), M.E.P. 소장 1 一, vol. 4, Notes pour I'Histoire des Martyrs deCorée( 필사 정리), M.E.P. 소장/ 《달레 교회사》 상1 《推案及鞫案》 《邪學懲義》 《純祖實錄》 이기경 편 《闢衛編》 이만채 편, 《闢衛編》 金徹, <丁若鍾의 《류교요지》에 대한 연구>, 가톨릭대학교, 1979/ 朱明俊, 〈丁若鏞 형제들의 天主教 信仰活動〉, , 《全州史學》 창간호,1984/ 安秉先, <殉教者 丁若鍾의 思想과 靈性一《쥬교요지》를 중심으로>, 수원 가톨릭대학교, 1992/ 하창호, <丁若鍾의 護教論的 神論과 그리스도論 ㅡ《쥬교요지》를 중심으로>, 대구 가톨릭 대 학교, 1992/ 웬헥톨, 《한국 신학 : 정약종의 주교요지를 중심으로》, 원흥문화사, 1998/ 차기진, <정약종의 교회 활동과 신앙>, 《교회사 연구》 15집 , 2000/ 趙珖, <丁若鍾과 初期 天主敎會>, 《韓國思想史學》 18, 2002/주명준, 〈丁若鍾家門 天主教信仰實薦〉, 같은 책/ 송석준, <정 약종과 유학 사상>, 같은 책/ 韓健, <丁若鍾의 神學思想>, 같은 책/ 元載淵, 〈丁若鍾 《主敎要旨》와 漢文西學書의 비교 연구>, 같은 책/ 徐鍾泰,<丁若鍾의 <주교요지>에 대한 문헌학적 연구> 같은 책. 〔車基眞〕
정약종 (1760~1801)
丁若鍾
글자 크기
10권

명도회 초대 회장 정약종 아우구스티노(탁회성 작)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