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 (1804~1866)

鄭溵

글자 크기
10
병인박해(丙寅迫害) 때의 순교자. 자(字)는 성재(盛哉). 세례명은 바오로. 1804년 경기도 이천 단내에서 아버지 정언겸(鄭彥謙)과 어머니 허 마리아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 가계도를 살펴보면 1785년 을사추조적발(乙巳秋曹摘發) 사건 때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사베리오)과 함께 형조 판서에게 가서 성상(聖像)을 돌려달라고 항의하고, 신유박해 때 광양으로 유배된 정섭(鄭涉)이 있다. 또한 기해박해 때 순교한 이문우(李文祐, 요한)와 이호영(李鎬永, 베드로) · 이조이(李召史, 아가다) 남매도 모두 이천 출신이었다. 이로써 보아단내〔丹川〕의 인근 마을은 뿌리깊은 교우촌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정은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데에는 이러한 주변의 직 · 간접적인 영향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은이 언제부터 천주교 신앙을 받아 들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후손인 정규량(鄭圭良, 레오) 신부가 지은 《정씨가사》(鄭氏家史)에 따르면 그가 등창으로 고생하고 있을 때 양지 은이에 사는 조사옥(성진)이 그를 치료하기 위해 왔다가 조사옥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하고 이후 온 집안 식구들이 입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은은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비신자인 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성사를 받으며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다. 1866년 1월 병인박해가 발발하자 그해 12월 2일 광주(廣州) 포교들이 그를 체포하기 위해 날이 저물기를 기다리며 집 인근 주막에 있었다. 정은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는데 주막 주인이 몰래 와서 이러한 사실을 이야기해 주자 그의 아들 정일동(鄭-東, 프란치스코)과 정수동(鄭秀東, 필립보)은 그에게 피신할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피할 기력도 없고 신발도 없을 뿐더러 피할 이유가 없다며 체포되어 순교할 것을 다짐하였다. 결국 정은은 그날 밤 포교들에게 체포되어 광주 유수가 있는 남한산성으로 끌려갔다. 한편, 정은이 체포될 때 그의 재종손 정 베드로도 자수하여 함께 끌려갔다.
이후 포졸들은 정은의 아들들을 체포하여 이 집안의 재산을 빼앗아 차지하고자 날마다 동네를 뒤졌다. 이 때문에 정일동과 수동은 다른 곳으로 피신을 가고 부인들만 남아 있었는데 포졸들의 횡포가 심해지자 결국 이들에게 모든 재산을 내주었다. 한편 남한산성으로 끌려간 정은과 정 베드로는 25일간 갇혀있다가 12월 27일(음12월 8일) 백지사(白紙死 : 얼굴에 물을 뿌리고 그 위에 백지를 발라 숨이 막혀 죽게 하는 방법)로 순교하였다. 그의 시신은 남한산성 동문 밖 개울창에 버려졌는데 그의 가족들은 시신을 찾기 위해 매부 박 서방의 8촌 박선여를 찾아가 정은의 시신을 찾아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박선여가 개울창에 가서 시신을 찾아 표시해두고 날이 저물자 그의 아들들이 그곳에 가서 시신을 거두어와 현재 안장되어 있는 단내 성지(현 경기도 이천시 호법면 단천1리357번지)에 묻었다.
그의 후손으로는 우리 나라 세 번째 신부인 정규하(鄭圭夏, 아우구스티노) 신부를 비롯하여 정규량 · 정원진(鄭元鎮, 루가) · 정운택(鄭雲澤, 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있다.
※ 참고문헌  《치명일기》/ 《병인치명사적》/ 하성래, 《윤유일 · 정은 평전》, 성 황석두 루가서원, 1988/ 《박순집 증언록》, 성 황석두 루가서원, 2001 , pp. 115~1 16. 〔洪延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