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배 (1795~ 1866)

丁義培

글자 크기
10
성영회를 맡아 고아들을 돌본 정의배 마르코(탁희성 작).

성영회를 맡아 고아들을 돌본 정의배 마르코(탁희성 작).

성인. 병인박해(丙寅迫害) 때의 순교자. 세례명은 마르코. 축일은 9월 20일.
서울 창동(創洞)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유학을 가르치며 생활하였다. 그는 평소 유학자로서 천주교의 제사금지 교리 등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천주교가 박해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프랑스 선교사들이 순교하는 것을 보고 감동을받아 스스로 천주교 관련 서적을 구하여 공부를 하고 입교하였다. 그 후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1845년 페레올(Fereol, 高) 주교가 입국하자 회장으로 임명되어 순교할 때까지 자신의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였다. 또한 1854년 고아 구호 단체인 성영회(聖嬰會)가 조직되자 이를 맡아 고아들을 돌보았다.
그는 1860년경 자암(紫岩)으로 이주하여 아현(阿峴)에 거주하는 황 베드로와 김 말두옴에게 교리를 들었다. 또한 대평동(大平洞)에 사는 홍봉주(洪鳳周, 토마스)와도 왕래를 했으며, 김 말두옴으로부터 베르뇌(Berneux,張敬一) 주교를 소개받았다. 1864년경에는 우연히 베르뇌 주교의 집에서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를 만나 보기도 하였으며, 수철리(水鐵里)에 사는 배치서(裴致西)와 공덕리(孔德里)에 사는 정복길(鄭福吉) · 이득삼(李得三)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정의배는 1865년 5월에 입국한 브르트니에르(Bretenières, 白) 신부를 7월부터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였으며, 볼리외(Beaulieu, 徐沒禮) ·위앵(Huin, 闕) · 도리(Dorie, 金) 신부도 그의 집을 왕래하였다. 이처럼 그는 당시 조선에서 활동하던 신부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자신의 높은 학식을 바탕으로 주위의 많은 교우들에게 복음을 가르치는 일을 도맡아 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시작되자, 정의배는 2월 대평동에서 베르뇌 주교가 체포될 때 함께 체포되었던 주교의 하인 이선이(李先伊)의 밀고로 2월 25일 새벽 집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포도청에서 2회의 심문을 받은 후 3월 2일 의금부로 옮겨져 4회의 심문과 함께 신장 16도를 맞았다. 그는 심문 당시 동료 교우들을 대라는 요구에 이미 죽은 신자들의 이름만을 진술하며 순교의 의지를 분명히하였다. 의금부에서는 3월 6일 4명의 신부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고, 정의배에 대해서는 심문 과정에서 미진한 부분이 있다며 다시 포도청으로 이송하여 조사할 것을 명하였다. 정의배는 3월 10일 의금부에서 두 차례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만 번을 죽어도 배교는 할 수 없다고 하며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결국 정의배는 사형 선고를 받고 다음 날인 3월 11일(음 1월 25일) 푸르티에(Pour-thié, 申妖案) · 프티니콜라(Petinicolas, 朴) 신부, 제자 우세영(禹世英, 알렉시오)과 함께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을 받고 72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그의 시신은 처형된지 며칠 후 그의 아내가 돈을 주고 거두어 갔다.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 참고문헌  《치명일기》/ 《推案及鞫安》/ 《捕盜廳謄錄》/ 《달레교회사》하/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洪延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