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소극적 상태(정적), 즉 인간의 노력을 억제하면 하느님의 활동이 온전하게 펼쳐질 수 있는 상태에 이름으로써 완전하게 된다는 주장. 구체적으로는 수행 생활(vita ascetica)의 잘못된 이론과 실천을 말한다. 이 이론은 1687년 8월 28일 교황청 검사성성(현 신앙 교리성)이 발표한 교령과 교황 인노첸시오 11세(1676~1689)가 반포한 헌장 <천상 목자>(Caelestis Pastor, 1687. 11. 20)에 의해 이단적인 사상으로 단죄되었다(D.2201~2269) . 정적주의의 요소는 그리스도교와 비그리스도교 등의 여러 종교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주장은 초대 교회 때부터 교회 안에서 문제가 되어 온 영성 이론이지만, 역사적으로 크게 문제로 대두된 것은 몰리노스(Miguel de Moli-nos, 1628~1696)가 제시한 영성 이론 때문이다. 프로테스탄트에서는 경건주의(pietsmus)와 퀘이커교의 일부 교리가 정적주의와 유사하다.
〔역사와 사상〕 정적주의는 정통 영성의 지나친 과장으로 볼 수 있다. 그 기초를 보면 교회 초기부터 교회에 피해를 주고 자극한 초자연주의(ultranaturalism)의 회귀이다. 또한 과거 교회 안에 있었던 조명주의(illuminism) 또는 열광주의(fanaticism)와 비슷하거나 완전히 다른 어떤형태이다.
정적주의와 유사한 이전 이단들 : 5~6세기 소아시아에서 발생한 메살리우스주의(Messalianism)는 지속적인 기도와 완전한 무관심(indifference)의 정신을 고취시켰다. 또한 13세기 아토스 산의 수도자들은 정적주의자(hesychast)로 불렸다. 이들은 동양적인 사고 방식, 특히 인도의 요가 수도자들처럼 몰아(沒我) 또는 망아(忘我)를 강조하였으며 이러한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고 가르쳤다. 서양에서는 13세기에 정적주의와 관련된 가르침이 일반에 알려졌다. 이상적인 범신론을 추종한 '자유로운 영의 형제들' (The Brethren of the Free Spirit)이 윤리 생활에 서 법을 반대하며 온전히 수동적인 태도를 견지하였다. 그리고 베가르회(Bégands)는 1312년 비엔 공의회에 의해 단죄를 받았다. 이들 주장의 핵심은 감성적인 영성에 있었다. 그들은 인간의 능력으로 그리스도를 닮을 수 있다는 과도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 후 14세기 네덜란드에서 시작되어 15세기에 독일에 보급된 새 신심 운동(Devotio Moderna)은 인간의 감성을 중시하여 신학과 신비주의를 구별하였다. 그 결과 인간의 가장 높은 염원들의 영역이 감성적 상승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에 의해 관상 기도의 소명을 느낀 감성주의자들에게 열려 있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무시하던 정적주의자들은 영적인 일에 있어서는 스스로가 전문가라고 주장하였다.
정적주의와 뚜렷한 유사성을 지닌 최초의 집단은 1575년 스페인 남부에서 시작된 알룸브라도스(Alumbrados)이며 1623년 이단 재판소에 의해 단죄를 받았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구원에 필요한 묵상 기도를 잘하기 위해서는 구송(口誦) 기도를 억제해야 한다. 또한 모든 감각적 위안을 없애는 것이 묵상 기도를 값지게 한다. 각 개인은 온갖 정신적 개념, 심지어 그리스도의 거룩한 인성의 표현까지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하느님에 대한 직접적인 관상은 영광의 빛(lumen gloriae)인 조명(ilumina-tion)에 의해 실현된다. 완덕에 도달한 이들은 덕행을 실천할 필요가 없으며, 특수한 은총으로 죄를 범하지 않지만 객관적으로 비윤리적인 행위를 할 수는 있다. 완전하게 된 이들은 세속적인 모든 일을 피하고 결혼과 그 행위를 경멸하게 된다. 그런데 몰리노스는 알룸브라도스의 많은 주장들이 자신의 주장과 비슷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신심 운동을 강하게 비난하였다. 하지만 이 운동은 창의력이 풍부한 바탕을 정적주의에 제공하였다.
17세기의 기도 방법과 영성 : 이 시기 유럽은 기도의실천, 특히 보다 수동적이고 정감적인 기도 유형에 비상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모든 이들이 습득 관상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 시대였으므로 이 기도에 도달하는 방법이 활발히 논의되었다. 그러자 형식적이고 체계적인 묵상을 정상적인 기도 형태로 여기고 기도하던 이들은 성덕을 닦는 데에 있어서 인간의 노력이 중요하다는 사상을 견지하였다. 대표적인 이들은 주로 예수회 학자들 이었다. 이들은 관상 기도를 소수에게만 있는 비상한 은사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정적주의자들은 예수회원들이 신비 생활의 적이며 보다 높은 단계의 기도를 이해하지못하는 이들이라고 비난하였다. 반면 얀센주의자들은 예수회원들이 너무 인간적이고 성덕을 추구함에 있어서 인간의 노력에 많은 비중을 둔다고 비판하였다. 하지만 얀센주의의 위기는 오히려 약해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냐시오식 묵상 방법을 따르던 자들과, 그 방법이 이전의 프랑스와 스페인의 신비가들이 채택한 관상을 부인한다고 본 사람들 사이에서 긴장과 대립이 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공인된 영성 이론들을 과장하고, 시성된 저자들의 상징들과 모습들을 자구화하며, 일반적으로 기도를 통한 하느님과의 접근을 당파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결국 모든 감각적 위안을 억제하고 단순 응시의 기도와 습득 관상에 대한 열성이 확산되어 정적주의를 발전시키게 되었다.
정적주의의 대표적 인물 : 첫 번째 인물은 스페인의 속량 회원 팔코니 (H. Falconi, 1596~1638)였다. 마드리드에서 성덕으로 뛰어난 인물이었던 그는 1622년 《그리스도안에서 지식을 읽기 위한 자습서》(Cartilla para saber leer inCristo)라는 책을 저술하여 발렌시아에서 출판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다른 덕성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관상 기도의 수동적 태도와 하느님의 현존하에 단 한 번의 신앙 행위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여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그는 그리스도교 완덕의 목적은 "깨어지지 않는 한 번의 완전한 관상 행위"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하느님과의 일치를 돈오돈수(頓悟頓修)처럼 이해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작품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전파되어 정적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두 번째로 관상 기도의 우위성을 변호하던 이들 중에는 프랑스 마르세유의 귀족 가문 출신인 은수자 말라발(F. Malaval, 1627~1719)과 뒤에 추기경이 된 페트루치(P.M. Petrucci)가 있다. 이들의 작품들은 모두 금서 목록에 포함되었다.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새로운 영성 이론을 제시하였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이 아마도 정통 교리를 참고하여 가톨릭 신비주의를 모방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말라발에 의하면 관상 기도는 "현존하는 하느님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의 응시"이다. 그는 《참된 신비 신학의 실천》(La Pratique de la vraie The-ologie Mystique, 1664)이란 저서를 통해서 하느님은 신앙에 의해 영혼의 깊은 곳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영혼이 어떻게 감각적이고 상상적인 온갖 이미지를 버리고 자신 안으로 물러남으로써 관상 기도를 준비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였다. 그는 사람들을 무분별하게 신비적 관상 기도로 인도하기 위하여 현존하는 하느님께 대한 단순 기도와 단순 응시 기도, 즉 관상 기도를 동일하게 보았다. 그의 이탈리아어판 저서는 1688년에 , 프랑스어판 책은 1695년에 단죄를 받았다. 말라발은 온갖 모욕을 감수하였으며 성덕이 뛰어난 인물이라는 평판을 받고 선종하였다.
그 다음으로 이어진 중심 인물은 바로 미구엘 데 몰리노스였다. 그는 스페인의 발렌시아에서 공부한 후 1652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같은 교구 사제인 프란치스코 시몬의 시복 작업을 위해 1663년 로마에 파견되었다.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이 임무에서 해임되었으나, 스페인의 자기 교구로 돌아가지 않고 로마에 머물면서 영성 지도자로 높은 명성을 얻었다. 몰리노스가 최초로 출판한 저서는 소책자였는데, 여기서 그는 영성체에 관한 엄격한 조건을 제시한 안센주의자들에게 상세한 답변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영적 지도서》(Guida Spirituale, 1675)라는 작품을 발표하였는데, 이 책은 6년 동안 20판을 거듭하면서 여러 언어로 출판되었다. 이 책의 핵심은 관상으로 이끄는 쉬운 길' 이다. 또한 완전한 그리스도인(The perfect Christian)은 활동적이고 묵상 기도만 하는 불완전한 그리스도인(The imperfect Christian)과는 궁극적으로 구별된다고 하였다. 이 책의 주제는 영혼의 완전한 무관심이다. 즉 영혼은 단순 응시 기도를 실천함으로써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맡기고 온갖 다른 신심과 실천을 거부하며, 어떤 것이든 비록 그것이 하느님이나 악마나 사람으로부터 온다 해도 그것을 전적으로 거부하여 완전히 무관심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특징 있는 관상 기도란 영혼 안에 있는 하느님의 의지와 작용에 자신을 온전히 맡김으로써 성취된다고 하였다. 이것은 '순수한 신앙' 을 전제하는데, 이 신앙은 덕성스럽게 행동하는 모든 노력이나 생각 또는 욕망을 가지거나 심지어는 유혹들을 적극적으로 물리치려는 노력들을 제거해 준다. 주장과 폐해 : 정적주의자들은 참된 내적 생활은 인간의 자연적 힘을 없애는 데 있다고 하였다. 즉 자연적 힘으로 하는 것은 죄이다. 오직 하느님이 인간 안에서 하기를 원하는 것이 있으므로, 정적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말고 오직 하느님의 은총이 인간 안에서 작용하도록(gratiaoperans) 수동적 자세로 관상(contemplatio)에 임할 때 영혼은 자기의 근원인 하느님께로 돌아가 그분과 함께 일치된다는 주장을 폈다. 정적주의자들은 아빌라의 데레사(1515~1582)와 십자가의 요한(1542~1591)의 용어들을 사용하여 조명주의를 도입하였다. 인간의 지적 활동은 하느님을 영과 진리 안에서 흠숭하는 것을 거절하므로, 오직 하느님이 영혼 안에서 활동하도록 수동적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묵상을 통해 일어날 수 있는 정신적 심상(mental image)을 제거하려고 노력하였다. 심지어는 주님의 거룩한 인성까지도 분심을 일으키므로 거절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말라발은 이런 기도를 드렸다. "나의 구세주여, 주님의 인간성은 유대인들을 속였고 사도들을 유혹했으며 참 신심을 가진 사람들을 매일 완덕으로부터 떠나게 하므로 당신의 인성을 중히 여기지 않나이다." 결국 이러한 관상이 참된 신비주의의 유일한 척도가 되었고, 정적주의자에게는 잠을자는 중에도 깨뜨릴 수 없는 행위가 되었다.
그들의 가르침은 윤리 생활로 드러났다. 이들은 윤리생활에서 이상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즉 영적인 위로나완전한 행복에 대한 열망은 관심 밖이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뜻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에 대한 어떠한 성찰도 무시하였다. 왜냐하면 그런 행위는 은총에 성실하지 않은 태도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수행(修行)에 대한 관심이나 기회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청원 기도, 양심성찰, 고해성사 등도 영혼에게 불가능한 것이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이런 요소들은 필연적으로 영혼의 의식적인 활동이므로 수동성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하느님께로 올라가는 영혼은 유혹에 저항하지 말고 오직 수동적으로 쉬어야 한다. 성인들과 그리스도의 인성을 사랑하는 것은 육감적이다. 외적인 제약은 무익하다. 하느님은 사람들을 단련시키기 위하여 옛날에는 박해를 하셨으나 지금은 악마를 통해 한다. 악마는 사람을 유혹하여 몸을 더럽히고 남들과 추잡한 행동을 하게 한다. 이는 분명히 굴욕이지만 승인이 아니므로 죄는 아니라고 주장하였는데, 이 가르침이 문제가 되었다. 그리스도교 완덕은 죄를 끊고 그 기회를 피하며 수행에 힘쓰고 기도, 은총, 성사, 지성, 수행, 성덕, 완덕, 영생 등을 중요시하는데, 이런 과정과 행위들을 무시하였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결국 윤리적 탈선이 극에 달하였다. 몰리노스도 이를 함축적으로 인정하였고, 공적으로 자신의 가르침을 취소할 때 이를 시인하였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죄스런 외적 행위는 관상의 상태와 시종 일치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를 체포하여 형벌을 가한 이유는 그가 실제로 가르친 대로 어느 정도 실천하였다는 결론이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몰리노스의 영성 가르침은 그 당시 인기가 있어 여러 말로 번역되어 읽혀졌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인심이 각박해졌고 풍기가 문란해졌다. 그러므로 전통 영성을 주장한 사람들의 반대가 심하였다. 로마에서 가장 심하게 반대한 이는 예수회 신학자이자 설교가였던 세네리(P. Segneri, 1624~1694)였다. 그는 《기도에 있어 노력과 평정의 조화》(Concordia tra la Fatica e la Quiete nell'or-zione, 1680)를 발표하여 정적주의를 반대하였다. 결국몰리노스와 페트루치는 1685년 이단 재판에 소환되었다. 2년간의 조사 결과, 1687년 수많은 귀족들과 일부 성직자들을 포함하여 약 200명의 사람들이 체포되고 투옥당하였다. 수도회에서 정적주의 실태를 조사한 위원회는 많은 수사들과 수녀들이 교회가 정한 기도를 정적주의의 기도로 바꾸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교회 내에서는 큰 혼란이 일어났다. 몰리노스는 263개 명제 중 68개 명제와 교리상의 중대한 잘못 및 전례와 도덕에 대한 심각한 위반 사항을 근거로 공식적으로 고소를 당하였으며 재판을 통해 단죄를 받았다. 1687년 몰리노스는로마의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에서 자신의 잘못을 승복하고 공식적으로 철회하였다. 그리고 자기 개인의 윤리에 대한 고발을 받아들여 유죄를 고백하였고, 단죄되어 남은 여생을 감옥에서 보내다가 그곳에서 1696년 사망하였다.
프랑스에서의 정적주의 논쟁 : 몰리노스가 단죄된 후그의 사상은 프랑스에서 일어났다. 그 중심 인물은 기용부인(Madame Guyon)으로 알려진 잔느 마리아 부비에 드라 모트 기용(J.-M. Bouvier de La Motte Guyon, 1648~1717)이었다. 28세에 미망인이 된 이 여성은 내적 생활을 충실히 하면서 단순 응시 기도를 하고 있었다. 약 12년 동안 세 사람의 영성 지도를 거치면서 풍문을 남겼고, 그녀의 지도 신부 중 하나인 라콩브(F. Lacombe, +1715) 신부가 1687년 정적주의를 가르쳤다는 이유로 체포되자 그와의 관계를 단절하였다. 기용 부인은 여행과 많은 활동에서 얻은 체험을 35권의 책으로 출판하였다. 이 중에서 크게 문제가 된 책은 자서전인 《영적 급류》(Les TorrentsSpirituels)인데, 그녀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을 받아 영혼의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기록했다고 주장하였다.그녀는 35세에 중병을 앓을 때 영적 체험을 하였으며, 이때부터 하느님이 그녀 안에서 그녀를 통해 모든 일을 하였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고 하느님의 능력으로 활동한다고 말하였다. 1688년 그녀는 파리의 성모 방문회 수녀원에 감금되어 조사를 받았으나, 특별한 문제는 발견되지 않았다. 1693년까지 그녀는 상류 사회에서 큰 인기를 누리며 영향을 미쳤으나, 그해에 샤르트르 교구의 주교가 그녀의 글을 읽고 경악하여 고발하였다. 전통적 사상을 지닌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그녀의 윤리적 가르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영적 급류》에는 이런 표현이 있다. "나는 내 행위에 대한 어떤 이유도 제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에게 행위란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오류를 범하지 않는 자를 모시고 있는 한 나는 실수하지 않는다." "하느님과 일치한 어떤 영혼이 하느님을 모욕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과 부정한 행위를 할 수 있다." 이런 주장을 한 그녀가 15년간 고해성사를 받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자기의 단죄를 예견한 그녀는 캉브레의 주교인 페늘롱(F. Fénelon, 1651~1715)의 권고를 받아들여 보쉬에(J.B.Bossuet, 1627~1704)에게 자신의 글을 보내어 조사하게 하였다. 보쉬에를 중심으로 세 사람(Bossuet, Noailles,Tronson)의 조사 위원회가 1694년에 구성되어 심의한 결과 34개 항의 오류가 지적되자, 기용 부인도 이를 시인하고 더이상 정적주의를 가르치지 않기로 서명하였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것처럼 보였으나, 페늘롱과 보쉬에가 정적주의를 놓고 논쟁을 일으켜 문제는 복잡하게전개되었다.
페늘롱은 처음에는 기용 부인의 주장에 관심이 없었으나 후에는 그것을 변호하고 전파하는 자가 되었고, 신비사상에 별로 공감하지 않던 보쉬에는 이를 근절하려 하였다. 문제의 핵심은 '사심 없는 사랑' 과 '수동적 기도'였다. 1697년 이후 2년 동안 파리와 로마에서 논쟁이 거듭된 후 페늘롱이 쓴 《내적 생활에 관한 성인들의 격언 해설》(L'explication des Maximes des Saints sur la vieinterieur, 1697)에서 23가지 조항이 문제가 되자, 1699년 3월 12일 이를 부드러운 말로 단죄한 교황 인노첸시오12세(1691~1700)의 결정으로 이 논쟁은 끝났다. 페늘롱의 오류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영혼은 영원한 구원에 대한 열망을 더이상 체험하지 않는 순수한 사랑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둘째, 영혼이 내적 생활의 극단적 시련을 겪는 동안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는다
는 확신을 가질 수 있으며, 이 상태에서 영혼은 자기 자신의 영원한 행복을 완전히 희생할 수 있다. 셋째, 영혼이 순수한 사랑의 상태에 있을 때 자기 자신의 완성과 덕의 실천에 무관심하다. 넷째, 관상적 영혼은 어떤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하고 감각적이며 적극적으로 보지 못한다.
페늘롱 주교는 겸손되이 교황의 단죄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주장을 공식적으로 철회한다고 발표하였다. 이리하여 정적주의는 1699년에 치명상을 입게 되었고, 신비주의는 건전하지 않다는 평판을 받아 18세기 프랑스에서는 소수의 작가들을 제외하고 완전히 실패한 것으로 끝났다.
〔평 가〕 "정적주의는 신비주의라는 건강한 육체에 나타난 병적 증식이었고, 정통 신비가들은 이 병균을 지니고 있었으나 그 증세는 진전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 교리의 어떤 특별한 점이나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어떤 측면을 강조하면서 합당한 정도를 넘어 과장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거룩하고 헌신적인 이들조차 이단적 가르침을 무의식 중에 전할 수 있다. 결국 어떤 교리나 실천에 대한 과잉 반발과 자제되지 않은 열성은 쉽게 왜곡되고 궁극적으로 신앙을 잃게 만든다. 정적주의도 이런 현상 중 하나였다. 정적주의가 프랑스에서 단죄된 이후 신비주의에 대한 평판은 나빠졌다. 그로 인해 소수의 노력을 제외하고 18세기 프랑스에서 가톨릭 신비주의는 거의 완전히 실패하였다. 이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성 생활의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은 여러 가지 덕행 및 성사의 통상적 방법뿐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신비가들의 방법은 희귀하고 '비상하게' 생각되었고 또 대개 의심스럽게 여겨졌다. 그 결과 가톨릭 신비주의 가 다시 회복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보쉬에 ; 세네리 ; 페늘롱)
※ 참고문헌 T.K. Connolly, 《NCE》 11, 2003, pp. 866~867/ J.Aumann, O.P. Christian Spirituality in the Catholic Tradition, London,Sheed & Ward Ltd., 1985/ P. Pourrat, Christian Spirituality, vol. 4, pp.101~260/ R.A. Knox, Enthusiasm, Oxford, 1950, pp. 231~355. 〔田達秀〕
정적주의
靜寂主義
〔라〕quietismus · 〔영〕quiet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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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