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교구 소속 침묵의 본당. 평안북도 정주읍 성외동소재. 1936년 7월 안주(安州) 본당에서 분리 · 설립되었으나, 1944년 11월 비현(枇峴) 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다. 관할 구역은 선천군, 정주군, 구성군 일대. 〔교 세〕1937년 57명, 1939년 200여 명. 〔역대 신부〕 초대 페티프렌(R. Petipren, 邊聖行) 로이(1936. 7~1940), 2대 보렐(W. Borer, 玉) 월리암(1940~1941. 12), 3대 강영걸(康永杰) 바오로(1944. 4~1944. 11).
정주 지방에 천주교가 전해지기 시작한 것은 1928년 3월 서울에서 이사 온 임기수(林基樹, 가누도)를 비롯한 몇몇 신자들에 의해서였다. 임기수는 선교뿐만 아니라 교회 사업에 부단한 노력을 경주하여 배타적인 지방민 교화의 어려움 속에서 공소 설립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안주 본당 초대 주임인 바론(E. Barron, 潘) 신부에게 세례성사를 받은 박천(博川)의 민 요세피나 역시 정주로 이사온 후 일가 친척은 물론 이웃들을 찾아다니며 선교활동을 하였다. 또한 바론 신부가 1934년 이 지방에 전교사로 파견한 김 모니카도 풍부한 교리 지식을 발휘하여 정주 지방에 본당 설정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들의 활약으로 1936년 7월 정주 공소는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초대 주임으로 페티프렌 신부가 부임하였다. 적은 수의 교세로 출발한 정주 본당은 본당 설정 후 교회 기초확립과 교세 신장에 주력하였다. 이에 1937년 여름에 신자수는 57명으로 늘어났고, 예비 신자도 45명이 되었다. 페티프렌 신부는 본당의 장래를 위해 주일 학교 운영에 주력함과 동시에 야간 학교를 개설하여 70명의 문맹아동을 수용하는 등 문맹 퇴치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1937년 5월 6일부터 5일간 실시된 농기구 전람회 때성화전(聖展)을 열어 프로테스탄트측의 가두 선전에 지친 지역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가톨릭에 대한 인식과 관심을 가지게 하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지방 공소 개척에 힘쓰기 시작하여 프로테스탄트 세력이 강한 선천읍에 진출하여 읍내의 천남동에 야학을 개설하고 전교사를 겸한 남녀 지도 선생을 파견하였다. 이에 대한 반응이 좋아 예비 신자 수십 명과 학생 120여 명을 확보하였으며,'예수의 행적' 영화 감상회를 열어 일반 지방민들에게 가톨릭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한편 본당의 부녀자들은 성모회를 조직하여 철저한 교리 학습과 포교 활동에 실력있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본당설립 후 역 앞에 소재한 개인 집을 세로 얻어 성당으로 사용하였으나, 1938년에 페티프렌 신부는 2년 전에 구입해 두었던 읍내 높은 지대의 성외동에 성당을 신축하였다. 또한 1939년 2월 26일부터 3월 3일까지 남녀 전교사 및 교우 묵상회를 개최하여 신앙을 돈독하게 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와 더불어 전국적으로 전개한 순교비 건립 기금 모금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본당으로의 구실을 착실하게 해 나갔다. 2대 주임 보렐 신부는 부임 후 공소를 연이어 신설하는 등 활발한 사목 활동을 하였지만,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 발발로 인해 평양교구 내의 모든 메리놀회 성직자들이 일제에 의해 체포 구금되자 정주 본당은 비현 본당의 공소로 되었다. 이후 1944년 4월 강영걸 신부가 주임으로 부임하여 다시 본당이 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강영걸 신부가 마산(馬山) 본당으로 전임된 후 주임 신부를 받지 못하여 재차 비현 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고, 1950년 6월 27일 비현 본당과 함께 북한 공산 정권에 의해 폐쇄되었다. (→ 침묵의 교회 ; 평양교구)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천주교 평 양교구사 편찬위원회편 , 《천주교 평양교구사》, 분도출판사, 1981. 〔白秉根〕
정주 본당
定州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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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