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생 애〕 1902년 5월 15일(음)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면 하계리 40번지에서 아버지 정태국(鄭泰國)과 어머니 정미하(鄭美河)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하였고, 1910년 4월 6일 충북 옥천공립보통학교(4년제)에 입학하였고, 1913년 충북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에 사는 송재숙(宋在淑)과 결혼하였다. 1914년 3월 25일 같은 학교를 졸업한 후, 1918년에 휘문고등보통학교(이하 휘문고보)에 입학하였고, 입학한 지 3개월 후부터 교내 장학금을 받는 등 우수한 성적을 보였다. 1922년에는 휘문고보의 학제 개편으로 인해 5학년으로 진급하였고, 1923년 3월 휘문고보를 졸업한 후, 5월 3일에 일본 교토 소재의 도시샤(同志社) 대학 예과에 입학하였다. 1926년 3월 예과를 수료하고 4월 1일 영문학과에 입학하였고, 1929년 6월 30일에 도시샤 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당시 그의졸업 논문은 <월리엄 블레이크의 시에 있어서의 창작력>(Imagination in the Poetry of William Blake)이었다. 그는 귀국하여 9월부터 모교인 휘문고보의 영어교사로 부임하였으며, 1930년 3월 《시문학》(詩文學) 동인에 참가함으로써 1930년대 시단의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1933년 6월 《가톨릭청년》의 편집 고문을 맡았고, 8월'구인회' (九人會)라는 문학 친목 단체를 결성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16년 동안 재임했던 휘문중학교를 떠나 이화여자전문학교(현 이화여자대학교)로 직장을 옮겼는데, 당시 그가 담당했던 과목은 한국어와 라틴어였다. 1946년 10월 경향 신문사의 주간으로 취임하였으나, 이듬해 8월 사임한 그는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복직하였으며, 더불어 서울대 문리과대학 강사로 출강하여 《시경》(詩經)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1948년 2월 이화여자대학교 교수직을 사임한 그는 녹번리(현 서울시 은평구 녹번동) 초당에서 서예를 하면서 소일하였다. 한국 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1950년 7월 그는 평소 알고 지내는 젊은 이들과 집을 나간 후 행방불명되었다. 이후 그의 행적에 대해 사람들은 정치보위부에 구금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정인택(鄭人澤), 김기림(金起林), 박영희(朴英熙) 등과 같이 수용되었다가 평양 감옥으로 이감되었고, 거기서 다시 이광수(李光洙), 계광순(桂珖淳) 등 33인이 같이 수감되었다가, 그 후 폭사 당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문학 활동〕 1918년 휘문고보에 입학한 그는 동인지 《요람》을 김화산(金華山), 박팔양(朴八陽), 박소경 등과 함께 주도하여 참여하였다. 1919년 12월에는 잡지 《서광》(曙光) 창간호에 그의 유일한 소설인 <삼인>(三人)이라는 소설을 발표하였다. 1922년 휘문고보 5학년 재학시 작품 〈풍랑몽〉(風浪夢)을 썼으며, 휘문고보 학예부의 문예 부장직을 맡아 《미문》(微文) 창간호의 편집 위원이 되었다. 1923년 3월 휘문고보를 졸업한 그는 작품 <향수〉(鄕愁)를 썼고, 교토로 유학 간 후인 1926년 6월 교토 유학생 회지인 《학조》(學潮) 창간호에 <카페 프란스>와 〈슬픈 기차>를 비롯하여 동시 및 시조를 연이어 발표함으로써 비로소 공적인 문단 활동을 펼치게 되었다.
1928년에는 《근대풍경》(近代風景),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조선지광》(朝鮮之光) 등에 작품을 발표하였다. 특히 그는 1929년 도시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일본 문예지 《근대풍경》에 일본어로 된 시들도 많이 투고하였는데, 일본의 대표적인 시인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가 그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였다. 귀국한 후인 1930년 3월 시문학 동인으로 참가하여 《시문학》에 작품을 발표하였으며, 1935년 10월 시문학사에서 그의 첫번째 시집인 《정지용시집》이 간행되었는데, 여기에는 <바다 1> 등 총 89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1937년 <수수어>(愁誰語)를 위시하여 산문과 기행문을 많이 썼으며, 1939년 8월에 창간된 《문장》의 시 부문 추천 위원이 되어, 조지훈(趙芝薰) · 박두진(朴斗鎭) · 박목월(朴木月) · 김종한(金鍾漢) · 이한직(李漢稷) · 박남수(朴南秀)등을 등단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1941년 1월 《문장》에 정지용 신작 특집으로 10편의 시 작품이 한꺼번에 발표되었으며, 9월 문장사에서 두 번째 시집인 《백록담》이 출간되었다. 《백록담》에는 그의 첫 시집 이후에 발표한 시 총 33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1946년 6월 을유문화사에서 《지용시선》(芝溶詩選)이 출간되었는데, 이 시집은 박두진이 《정지용시집》과 《백록담》에서 25편을 뽑아 만든 것이었다. 한편 정지용은 1948년 1월 도시샤 대학 후배인 윤동주의 유고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문에서 그의 시를 높이 평가하였고,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였다. 같은 해 2월 박문출판사에서 그의 산문을 엮은 《지용문학독본》(芝容文學讀本)이, 1949년 1월 동지사에서 그의 평문과 수필 및 번역시 등을 묶은 《산문》(散文)이 각각 출간되었다. 그는 해방 후 상해 임시 정부 요인들의 귀국을 찬양한 <그대들 돌아오시니>(1945. 12)와 <애국의 노래>(1946. 1)를 발표한 후 5년 동안 일단 시 쓰는 일을 그쳤다. 하지만 그는 1950년 2월 《문예》(文藝)에 〈곡마단〉(曲馬團)이라는 시와 <늙은 범>을 포함한 '4 · 4조 5수' 라는 다섯 편의 정형시들을 발표하였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가톨릭 문학 활동〕 정지용은 자기의 본명과 세례명인 프란치스코, 그리고 이것의 한자식 표기인 방제각(方濟各)과 방제각의 중국식 발음인 방지거란 이름으로 가톨릭 문헌에 글을 발표하였다. 특히 1933년 6월에 창간된 《가톨릭청년》의 편집 고문을 맡았던 그는 신앙시(信仰詩) 대부분을 이 잡지를 통해 발표하였다. 《가톨릭청년》에서 그의 글은 1933년 6월부터 1948년 5월까지 볼 수 있는데, 글의 성격에 따라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1933년 6월부터 1934년 7월까지 총 18장으로 연재하였던 올바른 영적 생활의 지침에 해당되는 <그리스도를 본받음>이란 제목의 글을 볼 수 있다. 다음으로 5편에 걸쳐 연재했던 <소묘>라는 제목의 산문을 포함한 15편의 시와 10편의 번역시인 문학 작품을 볼 수 있으며, 마지막으로 2편의 논설문 형식의 글을 볼 수 있다. 그가 《가톨릭청년》을 통해 발표하였던 15편의 시들은 <해협의 오전 2시> · <비로봉>(1933. 6), <임종> · <별> · <은혜> · <갈릴레아 바다>(1933. 9), <시계를 죽임> · <귀로>(1993. 10), <다른 한울> · <또 하나 다른 태양>(1934. 2)<불사조> · <나무>(1934. 3), <승리자 김 안드레아>(1934.9), <홍역> · <비극>(1935.3) 등이다.
정지용은 시인으로서 수많은 작품을 발표했으며, 특히 신앙에 대한 고민과 깨달음을 시로 형상화하여 표현했던 시인이었다. 한때 월북 작가로 인정받아 한동안 그의 작품을 볼 수 없었으며, 나아가 그의 가톨릭적 삶 역시 부정되었지만 1988년 1월 몇 사람을 제외한 납 · 월북 작가의 작품이 해금됨으로써 현재는 매년 지용제(芝溶祭)의 개최와 함께, 지용 문학상을 수여하고 있다. 특히 2002년에는 교회 문학계에서 그의 탄생 100돌을 맞아그의 문학 세계를 재조명하는 자리를 갖기도 하였다.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가톨릭청년》/ 《경향잡지》/ <평화신문>/ <가톨릭신문>/ 鄭義泓, <鄭芝溶 詩의 信仰觀〉, 《韓南語文學》 13輯, 1987/ 임영천, <鄭芝溶의 신앙시와 傳記的 의문점>, 《기독교사상》, 대한기독교서회, 1990. 51 김윤식, 《청 춘의 감각, 조국의 사상》, 솔, 1999/ 편집부, <정지용 연보>, 《시와 시학》 여 름호,시와 시학사, 2002. 〔白秉根〕
정지용 (1902~ 1950?)
鄭芝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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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

정지용과 그의 가족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