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봉 (1796~1839)

鄭太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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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박해(己亥迫害) 순교자. 세례명은 바오로. 충청도 덕산(德山) 양인의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1799년경 덕산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한 정산필(鄭山弼, 베드로)회장의 사촌으로, 관명(冠名)이 '만보' 였으나 '태봉' 이라는 아명으로 더 잘 알려졌다. 그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오촌 당숙 집에서 자라면서 갖은 천대와 괄시를 다 받았지만, 온순하고 친철한 천성으로 수없이 많은 시련을 인내하며 잘 견디었다. 자립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1824년경에 전라도 용담(龍潭) 고을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이미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해 오고 있던 그는 항상 교우로서의 본분을 충실히 지키고자노력하였으며, 교회 서적을 펴면 끝까지 읽은 다음에야덮을 정도로 교리를 배우려는 열망이 강하였다. 그러한 사이에 그의 마음에는 점차 순교하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게 되었고, 가끔 도마를 턱 밑에 갖다 대고 처형 장면을 연상하면서 자신의 영혼을 구하고자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무모함을 피하기 위해 1827년에 정해박해(丁亥迫害)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몸을 숨겼다. 그러나 그가 자주 집에 들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한 밀고자가 관아에 고발하였고, 이내 포졸들이 그의 집으로 출동하여 그를 만나게 되었다. 당시 포졸들이 가지고 온 영장에는 다른 사람의 이름이 들어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이용하여 체포를 모면할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포졸들을 따라 용담 관아로 가서 형벌과 심문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전주(全州)로 압송되어 두 차례에 걸쳐 심한 형벌과 심문을 받았지만, 교우들을 밀고하거나 배교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관장은 그를 옥에 가두게 하였고, 이로부터 13년 동안 그는 이일언(李日彥, 욥), 김대권(金大權, 베드로) 등과 함께 전주 옥에서 생활하였다. 그동안 그는 세 번이나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면서 한결같이 배교하기를 거부하였다.
그와 그의 동료들에 대한 사형 판결이 최종적으로 확정된 것은 1839년의 기해박해 때였다. 조정에서 사형판결이 내려왔다는 소식을 듣자 그들은 기뻐하면서 천주님께 감사를 드렸다. 이때 정태봉은 자신의 마음이 약해질 것을 우려하여 아내와 아이들이 처형장에 오지 않도록 해 달라고 옥졸들에게 부탁하기까지 하였다. 마침내 그는 동료들과 함께 1839년 5월 29일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받아 4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정태봉은 현재 추진되고 있는 시복 · 시성 대상자 126위 가운데 한 사람으로 올라 있다. (→ 기해박해 ; 김대권 ; 정해박해)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중1 《承政院日記》 김진소, 《천주교전주교구사》, 천주교 전주교구, 1998. 〔徐鍾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