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 사상

淨土思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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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에 있다는 아미타불.

정토에 있다는 아미타불.

대승 불교의 내세관으로 죽은 후의 이상 세계를 정토(淨土)로 상정하고, 죽은 후 그곳에 가려는 수행 의지.정토는 '극락 정토' (極樂淨土)를 줄인 말이다.
〔의미와 형성〕 방대한 대승 불교 문헌 중에서 극락 세계, 아미타불, 정토, 염불 등을 언급한 불전은 200여 권에 이른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정토 경전은 《무량수경》(無量壽經)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아미타경》(阿彌陀經) 등이며 이 셋을 정토 삼부경(淨土三部經)이라고 한다.
근본 불교 당시에는 불교의 내세관이 확고하지 않았다. '죽음→전생(轉生) →환생(還生)' 의 윤회관이 주류를 이루었고 막연하게 행복한 하늘나라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그러나 대승 불교가 대두하면서 불교의 내세관은 확고하게 형성되었다. 대승 불교에서는 죽어서 가는 세계를 서방 정토(西方淨土)라고 확신하였고 그곳에는 한량없는 목숨을 지닌 아미타불(Amitabha, 혹은 무량수불)이 상주한다고 믿었다. 이 극락에 가려면 정업(淨業)을 닦아야 하는데,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 염불이다. 즉 아미타불을 염(念)함으로써 임종과 함께 그곳에 간다는 믿음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정토 사상은 민간 신앙으로서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고 가장 보편적인 불교 사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극락 세계의 교주인 아미타불은 법장(法藏)이라는 이름의 비구였다. 그는 중생을 고통에서 구제한다는 사십팔대원(四十八大願)을 품었는데, 그 완성으로 아미타불로 화현(化現)하였다. 아미타불의 본원에 의해서 모든 중생들은 행복한 내세를 기약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후에 선종(禪宗)이 등장하면서 정토 사상은 비판을 받았다. 즉 선종에서는 정토를 실제적으로 본다면 그것도 또 다른 의미의 집착이라고 비판하였다. 이때 등장한 것이 '마음이 불국토' 라는 유심(唯心) 사상이다. "마음이 맑으면 불토가 맑다”(心淨即佛土淨)는 법구는 《화엄경》(華嚴經), 《유마경》(維摩經) 등에서 언급되었다. 즉 정토와 예토(穢土)라는 이분법 대신에 예토를 정토로 가꾸려는 의지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와 같은 선종의 입장은 육조 혜능(六祖 慧能, 638~713) 이래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서 정토를 염원하는 신앙 자체를 열등시하는 경향마저 생겼다.
〔한국의 정토 사상가〕 한국의 경우에는 원효(元曉,617~686) · 의상(義湘, 625~702) · 경흥(憬興) 등 대부분의 신라 사상가들이 정토 사상에 젖어 있었다. 특히 원효는 염불이 관불(觀佛)과 칭념(稱念)을 합한 의미여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에 따르면 염불의 마음은 순정심(淳淨心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하는데, 그럴 경우에도 대상에 따라 차별이 있을 수 있다고 하였다. 즉 근기(根機)가 낮은 부정종성(不定種性)의 경우에는 수사발심(隨事發心)을 하여야 하며 근기가 뛰어난 보살정성(菩薩定性)의 경우에는 순리발심(順理發心)도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신라 사회에는 각자의 직업과 지적 수준에 따라 각기 다른 염불 수행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정토 사상을 국민 단결의 이념으로 승화시킨 인물은 문무왕(文武王, 661~681)이었다. 끝없는 전란과 불안한 민심을 바로잡으려면 확고한 내세관이 필요했다. 따라서 서민 대중의 불안을 달래고 이상 세계인 정토를 동경토록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왕생은 발원(發願)과 십념(十念)만으로 가능하였기 때문에 높은 학문과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정토 왕생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에 문무왕은 불교의 대중화를 통하여 이와 같은 정토 사상을 자연스럽게 전파시켰다. 문무왕 시기에 유달리 정토 사상가가 많았다는 점과 염불 수행이 일반화되었다는 것은 이를 뒷받침한다. 정토 사상은 극한 상황이나 위기 의식을 극복하는 묘수였으며 당시의 사회 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나 조선에 이르기까지 정토 사상은 꾸준히 이어졌다. 조선 중기의 명승 휴정(休靜, 1520~1604)은 염불과 참선의 부조화를 타파하고, 염불이 곧 참선이라는 새로운 사상을 정착시켰다. 그는 염불은 지주한 마음으로 수행하는 것이지 송불(誦佛)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즉 반드시 마음과 입이 일치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염불에도 네 가지 종류가 있는데, 즉 구송(口誦), 사상(思像), 관상(觀想), 실상(實相) 등이다. 실제로 신라 때의 염불 수행은 십육관법(十六觀法)에 의하여 진행되었는데, 그것은 극락 세계의 장엄을 마음 속으로 그리고 또 현전화시키는 독특한 관법이었다. 이 네 종류의 염불은 각자의 근기에 따라 적절히 수련해 나갈 수 있다고 하였다. 또 정토는 서쪽으로 한없는 국토를 지나 있는 곳이라고만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오히려 정토는 마음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내 마음 속의 삼독을 소멸할 때 정토는 바로 눈앞에 나타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염불이 참선이며 참선이 염불이다. 이와 같은 휴정의 입장을 염불선(念佛禪)이라고 한다. 또 그는 타방에 정토가 있다는 믿음을 전적으로 부인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낮은 근기의 중생들을 위해 배려한 방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휴정의 정토 사상은 조선 후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성총(性聰, 1631~1700) · 도안(道安, 1638~1715) 등 후기의 고승들은 거의 휴정의 정토관을 답습하고 있다.
〔의 의〕 대승 불교의 대표적 국가였던 한국, 중국, 일본에서는 이 정토 사상이 각기 상이하게 수용 · 발전되었다. 한국에서는 전술한 대로 '심정즉 불토정' (心淨即佛土淨)의 입장이 강력하게 나타났다. 중국에서는 말세 신앙과 밀접한 관련을 지녀 사회의 불안기, 정치적 혼란기, 전란의 와중에 급속도로 정토 사상이 펼쳐졌다. 당나라 말엽에는 삼계교(三階敎)라는 종파를 형성하여 혹세 무민(惑世誣民)하는 수단으로 전락한 적도 있었다. 일본에서는 정토 사상을 현실 긍정으로 정착시켜 왕생은 타력이 아니라 자력이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염불을 하는 주체는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실의 여건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염불이며 왕생의 조건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불교를 생활 속에 밀착시켜 다도(茶道), 검도 등 현실적 응용을 도모하였다. 이들 세 나라는 각기 다른 국민성으로 정토 사상을 수용하며 독자적인 발전을 도모한 것으로 보인다. (→ 도솔천 ; 불교)
※ 참고문헌  《淨土三部經》 정병조, 《한국 불교 철학의 어제와 오늘》,대원정사, 1995. 〔鄭柄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