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 순교 성인.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은 바오로. 본관은 나주(羅州, 즉 押海). 당색은 남인. 신유박해(辛酉迫害) 순교자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과 기해박해(己亥迫害) 순교자 유조이(柳召史, 체칠리아) 성녀의 아들이다. 또한 순교자 정철상(丁哲祥, 가롤로)의 아우이자 성녀 정정혜(丁情惠, 엘리사벳)의 오빠. 어려서부터 성가정의 신앙을 이어받아 누구보다 열심히 천주교교리를 실천하는 데 노력하였으며, 1801년의 신유 박해로 오랫동안 침체되어 온 교회를 재건하는 데 헌신하였다. 특히 1816년부터는 북경을 여러 차례 왕래하면서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하였고, 1831년 조선교구가 설정되는 데 중요한 공헌을 하였으며, 1833년이래 여러명의 성직자를 조선에 영입한 뒤 지도자요 복사로서 그들을 도와 활동하다가 1839년의 기해박해로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남은 글로는 <상재상서>(上宰相書, 1839)를 비롯하여 교우들과 함께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교황에게 올린 서한' 이 있다.
〔출생과 가문의 신앙〕 정하상은 1795년 경기도 양근 의 분원(현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본래 그의 부친 정약종은 경기도 광주땅 마재(현 남양주시 와부읍 능내리의 마현)에 있는 정씨 집안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1786년 무렵 중형 정약전(丁若銓)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는데, 당시 그 형제들 중에서는 정약전만이 아니라 넷째인 정약용(丁若鏞, 요한)도 천주교 신자였다. 또 정약종은 이 무렵같은 남인인 이수정(李秀廷)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정철 상을 두었으나 얼마 뒤 부인과 사별하였고, 이후로는 홀아비의 정(情)을 지키면서 살아가려 하였으나 가족들의 만류로 유조이를 두 번째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으니, 이가 곧 정하상의 친모이다.
정약종은 입교한 뒤부터 누구보다 열심히 교리를 연구 하고 실천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1787년에 일어난정미반회(丁未泮會事件)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고, 1791년의 진산 사건(珍山事件)으로 천주교 신자들의 제사 폐지 행위가 크나큰 사회 문제로 대두되면서 곤경에처하게 되었다. 이에 그는 조상 제사에 대한 집안의 강요를 피하기 위해 아내와 맏아들 정철상을 데리고 한강 너머에 있는 양근의 분원으로 이주하였으니, 정하상이 태어난 곳이 바로 여기다. 이후 정약종은 명도회(明道會) 회장을 역임하는 등 지도층 신자로 활동하다가 신유박해로 체포되어 순교하였으며, 그의 뒤를 이어 맏아들 정철 상도 순교하였다.
박해 당시 정하상의 나이는 만 여섯 살에 불과하였는 데, 모친 유조이와 함께 옥에 갇혔다가 석방되었다. 그러나 가산이 적몰되고 분원의 집도 파괴된 탓에 거처할 곳 조차 없게 되었으므로 모친 유조이는 정하상 · 정정혜 남매를 데리고 정철상의 가족들과 함께 선친의 고향인 마재로 가서 생활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의 가족들은 집안의 비난과 조소, 핍박과 멸시를 받으면서 살아가야 했지만, 결코 천주교 신앙만은 버리지 않았다. 특히 정하상은 이러한 과정에서 받아야만 했던 일상의 고통을 굳센 영혼으로 극복해 나갔고, 모친의 입에서 나오는 교리를 배우면서 충실한 하느님의 종으로 성장해 나갔다. 그리고 청년기에 들어서는 혼인 같은 세속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자기 구원에 노력하면서 교회 재건 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방도만을 강구하였으니, 당시 그가 생각했던 재건 방책은 무엇보다도 새 성직자를 조선에 영'입해 오는 일이었다.
〔성직자 영입 운동과 조선교구 설정〕 정하상은 언제부터인가 마재를 떠나 교우들의 집으로 피해 다니면서 생활하였다. 집안에서의 박해가 심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우들이 모두 가난하였으므로 그는 극도로 궁핍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던 중 좀 더 깊이 있는 교리와 한문을 배울 요량으로 신유박해 때 함경도 무산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살고 있던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을 찾아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돌아온 뒤로는 신자들과 접촉하면서 북경 왕래와 성직자 영입 운동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정하상이 처음 북경으로 떠난 것은 그의 나이 만 21세 때인 1816년 겨울이었다. 당시 그가 북경 천주당을 찾았을 때, 그곳에 있던 선교사들은 용감하고 젊은 조선의 밀사를 보고 다시 한 번 조선 교우들의 열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1811년과 1813년경 이여진(요한)이 북경을 다녀간 뒤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기 때문이다. 당시 북경 대목구의 총대리는 라자로회 선교 수도회의 리베이로 누네스(J. Ribeiro-Nunes, 李拱震) 신부였다. 왜냐하면 1808년 북경 대목구장을 승계한 수자 사라이바(J. deSouza-Saraiva) 주교가 마카오에서 북경에 올 수 없었기때문이다. 그러므로 리베이로 신부는 정하상을 만나 성 사를 준 다음, 그 소식을 사라이바 주교에게 전하였고,사라이바 주교는 1817년 초에 남경(南京)의 두 선교사를 선발하여 조선에 파견하였으나 모두 조선 땅을 밟지는 못하였다.
당시 조선 안에서 정하상을 도와 주던 신자들 중에는 동정 부부로 유명한 조숙(趙淑, 베드로)과 권(權) 데레사(권일신의 딸)가 있었다. 그들은 정하상을 자신의 집에 거처하도록 하였고, 북경에 가는 데 필요한 모든 준비를 도말아 하였다. 그리고 정하상이 북경에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중, 그 기별이 오기 하루 전날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1819년에 순교하였다. 이때 정하상은 예정보다 하루 늦게 도착한 탓에 체포되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이 무렵 조선에는 교회를 이끌어 갈 만한 지도자가 없었으므로 젊은 정하상이 모든 일을 도맡다시피 하였는 데, 순교자의 후손인 이경언(李景彥, 바오로), 현석문(玄錫文, 가롤로) 등이 그를 도와 활동하였다.
1824년, 나이 29세 때 정하상은 북경 왕래에 훌륭한 동행자를 만나게 된다. 역관 출신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티노)이 바로 그 사람으로, 그는 한 해 전에 영세 입교한 신자였다. 이 해 정하상과 유진길은 함께 북경 선교 사들을 만나고 귀국한 뒤 교황에게 올리는 서한(1824~1825년경)을 작성하였으니, 이는 조선 교우들이 1811년에 이어 두 번째로 교황에게 올린 서한이다. 여기에는 조선 교회의 비참한 상황은 물론, 이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신자들의 영신적 구원을 위해 성직자를 파견해 주도록 요청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당시 북경에 있던 총대리리베이로 신부는 다시 한 번 선교사를 조선에 들여보내 기 위해 1826년에 조선 신자들과 접촉을 시도하였으나실패하였다. 바로 이 해에 정하상과 유진길은 유능한 동료 한 명을 얻게 되었으니, 그가 바로 하급 마부 출신인조신철(趙信喆, 가롤로)이었다.
정하상과 유진길이 조선 교우들의 이름으로 교황에게 올린 서한은 마카오를 거쳐 라틴어로 번역된 후, 1827년 교황청(재위 교황 레오 12세) 포교성성(布敎聖省, 현 인류 복음화성)에 전달되었다. 그리고 포교성성 장관 카펠라리(B.A.Cappellan) 추기경의 마음을 움직였으며, 카펠라리 추기경이 교황 그레고리오 16세(1831~1846)로 선출된 직후인 1831년 9월 9일, 마침내 조선 포교지가 조선교구(즉 대목구)로 설정됨과 동시에 파리 외방전교회의브뤼기에르(B. Bruguière, 蘇) 주교가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기에 이른다. 정하상과 동료들은 그동안에도 여러차례 북경을 왕래하였으며, 1830년 10월에는 북경 주교에게 서한을 보내어 선교사가 입국할 수 있는 경로를 자세히 설명하기도 하였다.
〔성직자 영입과 순교〕 조선 신자들이 교구 설정 소식 을 들은 것은 이보다 훨씬 뒤였다. 한편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2년에 교구장 임명 소식을 듣고는 조선에 입국하기 위해 마카오에 도착한 뒤 중국 대륙을 가로질러 북상하였고, 포교성성에서는 이에 앞서 중국인 유 파치피코(余恒德) 신부를 조선에 파견하여 주교 영입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1834년 1월 4일 유진길과 조신철은 국경에서 유 파치피코 신부를 맞이하여 서울 정하상의 집으로 인도하였다. 그러나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5년 10월 20일 만주땅 마가자(馬架子, 일명 펠리구)에서 병사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프랑스 선교사 모방(P. Maubant, 羅) 신부가1836년 1월 12일 봉황성 책문(柵門)에서 정하상과 유진길 · 조신철 · 이광렬(李光烈, 요한) 등을 만나 이튿날밤 조선에 입국하였다. 이에 앞서 정하상은 브뤼기에르주교에게서 받은 비용으로 서울 후동(后洞, 현재의 주교동, 즉 樂善坊의 후동인 듯)에 거처를 마련하고, 모친과 여동생을 비롯하여 남이관(南履灌, 세바스티아노) 부부, 권진이(權珍伊, 아가다)와 다른 과부 신자들을 그곳에서함께 살도록 주선하였다. 또 유 파치피코 신부와 모방 신부의 명에 따라 교우촌을 돌면서 신학생들을 선발하기도 하였으며, 김대건 신부의 부친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을 권면하여 다시 교회로 돌아오게 하였다.
정하상과 동료 밀사들은 1836년 12월 3일에 조선 신학생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등과 함께 서울을 떠나 중국으로 출발하였다. 그리고 12월 28일에는 책문에서 샤스탕(J. Chastant, 鄭) 신부를 만나 조선으로 인도하였으며, 1837년 12월에는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L. Imbert, 范) 주교를 모셔 와 후동의 집으로 안내하였다. 이후 정하상은 주교의 복사로 활동하면서 교우촌을 순방하거나 신자들을 돌보는 데 힘을 쏟았고,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라틴어와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이때까지 정하상은 21년간을 교회의 밀사로 활약하면 서 수없이 북경을 왕래하였으며, 교회 재건과 성직자 영입 운동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그 결과 1831년에는 조선교구가 설정되고, 1834년 이래 네 명의 성직자가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하상의 활동은 1839년 초 기해박해가 시작되면서 중단되어야만 하였다. 당시 그는 후동의 주교댁을 지키고 있다가 박해 소식을 접하게 되었고, 이후 체포와 순교를 예상하고는 몇몇 교우들과 협의하여 박해자들에게 제출할 호교론(護敎論)을 직접 작성하였으니 이것이 그 유명한 <상재상서>이다.
정하상은 1839년 7월 11일(음력 6월 1일) 가족과 동료들과 함께 후동에서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그런 다음 <상재상서>를 박해자들에게 제출하고, 사흘 뒤부터는 동료들과 함께 문초를 받기 시작하였다. 이어8월 11일에는 앵베르 주교가 체포되었으며, 모방과 샤스탕 신부도 9월 6일에 체포되었다. 정하상은 이후 의금부로 이송되어 9월 15일부터 여러 차례 추국(推鞫)을 당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동요하거나 나약한 신심을 보이지 않았고, 주교 · 신부들과 대질 신문을 받는 중에도 교회나 신자들에게 해가 되는 말은 전혀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리고 세 명의 선교사가 새남터에서 순교한 다음날인 1839년 9월 22일(음력 8월 15일), 유진길과 함께 의금부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서소문 밖 형장으로 끌려 나가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 만 44세였다.
한편 정하상의 모친 유조이는 고령에 230대의 곤장을 맞으면서도 끝내 신앙을 버리지 않고 옥중에서 신음하다 가 순교하였다. 또 여동생 정정혜는 320대의 곤장을 맞으면서도 평온을 잃지 않고 교우들을 격려하면서 옥에 갇혀 있다가 12월 29일(음력 11월 24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당하였다. 이로부터 86년이 지난 1925년 7월 5일 이 순교자 가족 세 명은 복자품에 올랐고, 1984년 5월6일 함께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정하상 성인의 시신은 이후 고향 인근인 배알미리(拜謁尾里, 현 하남시 배알미동)에 묻혔다가 1981년 10월 파묘되는 과정에서 남은 유해가 거두어져 신장 성당에 안치되었고, 그해 12월31일 다시 천진암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천주 신앙과 <상재상서>〕 정하상의 천주 신앙은 그의 생애에 대한 기록이나 문초 과정에서의 진술, 그가 지은<상재상서>에 잘 나타나 있다. 우선 그는 실천하는 신앙인으로서 다양한 육화론적(肉化論的) 영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를 위해 그는 교리를 연구하거나 학문을 쌓으려하였으며, 교리의 가르침에 충실하려고 노력하였다. 가난 속에서도 나눔(애긍)과 청빈의 삶을 지향하였고, 열심히 대재(大齋)를 지키는 등 고신극기에도 힘썼다. 이러한 그의 신심은 애주애인(愛主愛人)의 신앙으로 승화되었으며, 평생 정결의 덕을 지키면서 살도록 이끌어 주었고, 교회 재건과 성직자 영입 운동에 적극 뛰어드는 용덕을 지닐 수 있게 해 주었다.
다음으로 정하상은 전통의 신분 질서를 뛰어넘는 평등사상과 조선 민족의 구원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문초 과정에서 "천주교도는 사회 윤리를 파괴하는 범죄자요 반역죄인"이라는 추관의 말에 저항할 수 있었고, <상재상서>를 통해 자신의 정당한 호교론은 물론토착화된 교리를 전개해 나갈 수 있었다.
<상재상서>는 비록 3,644자로 이루어진 짧은 내용이지만, 정하상이 지니고 있던 천주 신앙을 잘 이해하게 해준다. 그는 이를 통해 창조주요 주재자이신 하느님을 확고하게 믿으면서 조선의 전통 지식인과 박해자들의 비판에 정면으로 대응하였다. 또 상제론(上帝論)이나 양지설(良知說) 등을 인용하면서 보유론(補儒論)의 입장을 견지하려 하였으며, 천주교의 효론(孝論)을 바탕으로 제사폐지 문제를 극복하면서도 동양의 윤리관을 존중하려고 고심하였다. 적응주의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러한 점은전통 사상과의 합일 또는 교리의 토착화로 설명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상재상서>의 내용은 부친 정약종이 지은 《주교요지》의 주요 교리에 바탕을 둔 것으로, 훗날 구한말의 애국자요 신앙인이었던 안중근(安重根, 토마스)의교리 이해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정하상의 천주 신앙과 육화론적 영성은 종말론적 영성인 순교의 용덕으로 귀결되었다. 그는 일상의 신앙 생활에서 이미 순교를 각오하고 있었으며,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한 성사 생활과 영신 구원 생활에 철저하였다. 이러한 영성은 <상재상서>에도 잘 드러나 있는데, 그는 정결 · 순명 · 청빈을 바탕으로 한 복음 삼덕은 물론 신 · 망 · 애의 실천을 통한 완덕을 추구해 나가는 과정에서 확고하게 내세 구원을 믿으며 순교를 지향해 나가고 있었다. 그는 실천하는 신앙이자 박해 시대의 참다운 영성가였다. (→ 기해박해 ; <상재상서> ; 성직자 영입 운동 ; 유 세실리아 ;유진길 ; 정약종 ; 정정혜 ; 정철상 ; 조신철)
※ 참고문헌 <상재상서> 1 《기 일기》 St. A. Daveluy, vol. 5,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ée( 1858년 필사 정리),ME.P. 소장1 -, vol. 4, Notes pour I'Historie des Martyrs de Corée( 860년 필사 정리), M.E.P. 소장/ <달레 교회사》 중1 《推案及鞫案》 《承政院 日 記》《日 省錄》 金益鎮 역, 〈上宰相書〉, 《가톨릭청년》 1958. 6~8/ 崔鍾萬,〈丁夏祥의 上宰相書 研究〉, 《神學展望》 44, 1979 1 尹敏求, <정 하상성인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연구>, 《국역 상재상서》, 성황석두루가서원, 1999. 〔車基眞〕
정하상 (1795~1839)
丁夏祥
글자 크기
10권

북경을 오가는 정하상 바오로(탁희성 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