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지상주의
教皇至上主義
〔라〕ultramontanismus · 〔영〕ultramonta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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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회에서, 교회의 통치와 교의적인 가르침에 있어서 교황의 권위나 교회의 중앙 집권화를 강조하는 경향을 광범위하게 일컫는 말. 때로는 극단적인 로마 가 톨릭 교회 신앙을 가리키거나 가톨릭을 다른 그리스도교 도들과 구별하는 모든 경향을 뜻하기도 하고, 교황청과 는 전혀 정치적 연관성이 없는 벨기에와 독일의 가톨릭 계 정당들을 지칭하기도 한다. 특별히 이 말은 제1차 바 티칸 공의회 이전의 교황의 무류성(無謬性, infallibilitas) 을 옹호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데 쓰였다. '산을 넘은' (ultra-montanus)이란 이 말은 본래 11세기 이후 유럽에서 단순히 지리적인 의미로, 즉 영국, 프랑스, 독일 같은 북 부 유럽에서 '알프스 산맥 너머 남쪽인 로마로 향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교회 밖에서 민족주의 가 강하게 태동하고 교회 내에서 신학적 자유주의가 성 행하게 되자, 이에 반대하는 많은 가톨릭 교도들이 점차 국가의 부당한 간섭으로부터 교회의 자유를 옹호하려 하 였고, 이들이 모두 교황 지상주의자로 불리게 되었다. 〔역 사〕 교황 지상주의는 15세기 교황들과 공의회 간 의 우위권(優位權) 논쟁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그 러나 '울트라몬타니즘‘ 이란 말이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 미를 갖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프랑스에서 갈리아주의 (Gallicanism)가 성행하면서부터이다. 프랑스에서는 전제 군주 국가 체제가 확립되면서 국가의 자주성을 확보하기 위해 교황의 정치적 간섭을 배제하고, 또한 교황을 공의 회 권한 아래 종속시킴으로써 교황의 권한을 약화시키려 는 운동, 곧 갈리아주의가 나타나게 되었다. 예수회 신학 자인 페넬롱(Fénelon, 1651~1715)을 위시한 여러 사람들이 이 갈리아주의를 반대하고 나섰다. 따라서 이들을 첫 번 째 교황 지상주의자들이라 부르기도 한다. 18세기 들어 교회의 영향력이 급격히 쇠퇴하면서 갈 리아주의 같은 운동은 유럽의 다른 가톨릭 국가들에 도 유포되어, 독일에서는 페브로니우스주의(Febronianism), 합스부르크 왕가에서는 요셉주의(Josephinism)가 만연하였다. 그러나 1789년 프랑스 혁명의 발발로 부르봉 왕조의 몰락과 함께 갈리아주의의 온 상이었던 절대주의 왕정이 타파되면서 갈리아주의는 크게 쇠퇴하였다. 반면, 혁명으로 인한 불확실한 사회상 속에서 교황권이 시민들에게 유일한 권위의 원천으로 다시 부각됨으로써 교황 지상주의 운동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교황 지상주의를 주창한 대표적인 사람들은 메스트르(Joseph de Maistre, 1754~ 1821), 보날(Louis G.M. de Bonald, 1754~1840), 라므네 (F.R. de Lamennais, 1782 ~1854), 뵈이요(L. Veuillot, 1813~1883) 등이다. 메스트르는 《교황론》(Du Pape, 1819)에서 교회만이 혁명 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고 강조하였다. 따라서 교황의 절대적 최상권과 무류성을 인정해야 하며 교황의 권위 아래 국가와 교회는 전제주의적 통치 형태를 취해 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무류적 권위가 주어진 교황 직만이 그리스도교적인 서유럽의 질서를 보존하며 또한 교회가 정치권과 같이 혁명에 휘말리게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메스트르의 이러한 주장은 19세 기 중엽의 교황 지상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드 보 날은 프랑스 혁명과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인간 이성을 절대시하는 것에 반대하여, 인간의 이성 그 자체를 경시 하고 전통주의를 주장하였다. 그는, 인간 이성은 근본적 으로 형이상학적이고 도덕적인 본성에 관한 주요 진리들 이나, 사고(思考)와 행동의 본질적인 원리를 스스로 발 견하는 능력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런 능력은 이 성을 초월하는 것으로서 신의 계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진리에 도달하는 필수적인 방법 은 개인의 이성이 아니라 전통이라고 주장하였다. 라므네는 보날의 이러한 전통주의를 메스트르의 교황 지상주의와 결합시켜 프랑스 혁명 기간 중 상실한 교회 의 자신감을 회복하고 프랑스 사회에 종교적 토대를 재 구축하려고 노력하였다. 이 같은 그의 시도는 그의 유명 한 수상집 《Essai sur l'indifférence en matière de religion》(4권, 1817~1823)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라므네는 이 수상집에 서 교황의 말은 진리의 궁극적 기준인 '일반 이성' (raison générale)이며 따라서 개인 이성을 위한 규범이 된다고 주 장하였다. 그는 <미래>(L' Avenir) 신문을 창간하였다. 19 세기 초기 단계에서 가장 탁월하게 교황 지상주의를 옹 호한 것으로 평가받는 이 신문에서, 라므네는 교회와 국 가의 완전한 분리를 주장하며 완전한 종교 자유, 교회의 교육에 관한 자유, 언론 및 결사의 자유, 보통 선거권 등 을 주장하였다. 그는 이렇게 교황 지상주의의 배경하에 서 가톨릭 자유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라므네의 주장 은 교황에 의해 배척되었고(1832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 의 회칙 <미라리 보스>), 라므네는 교회를 떠났다. 그러나 그가 불러일으킨 운동은 그의 제자들(Monatelembet, Lacordaire, de Ravignan 등)에 의해 지속되었다. 드 라므네 이후 프랑스의 저명한 교황 지상주의자는 루이 뵈이요이다. 1843년 신문 <우주>(L' Univers)의 편집 인이 된 뵈이요는 교회와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는 모든 세력과의 타협을 거부하면서 교황 지상주의를 옹호하였 다. 또한 교황 지상주의의 산물인 가톨릭 자유주의를 배 격하고 더 나아가 국가와 학문 분야의 모든 자유주의를 반대하였다. 교황 비오 9세(1846~1878)는 재위 초기에는 자유주의 사상에 어느 정도 공감했으나 미구에 자유주의 를 결사 반대하게 되었다. 따라서 뵈이요의 교황 지상주 의는 비오 9세 교황의 자유주의 반대 정책과 일치하게 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바티칸의 정기 간행물 《가톨릭 도시》 (Civiltà Cattolica)를 발행한 예수회 회원들이 교황 지상주 의를 주장했다. 영국에서는 와드(W.G. Ward)와 맨닝(H.E.Manning), 아일랜드에서는 컬렌(P. Cullen) 등이 대표적인 교황 지상주의자들이었으며, 독일에서는 케틀러(W.E. Ketteler) 주교가 이끄는 마인츠 학파가 보다 온건한 의미 에서 교황권 옹호주의자가 되었다. 1864년 비오 9세가 단죄한 오류 목록(Syllabus of Errors)과 1870년 제1차 바 티칸 공의회가 선포한 교황의 무류성은 교황 지상주의의 절정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 공의회 우위설 ; 수 위권 ; → 울트라몬타니즘) ※ 참고문헌 A. Franzen 저, 최석우 역, 《교회사》, 분도출판사, 1982/ F.F. Urquhart, 《ERE》/ Josef L. Altholz, 《ER》 15/ M. O'Callaghan, 《NCE》 14/ R. Baumann, Fels der Welt, Kirche des Evangeliums und Papsttum, Tübingen, 1957/ J. Friedrich, Geschichte des Vaticanischen Conzils 1, Vorgeschichte, Bonn, 1877/ H. Küng, Die Kirche, München, R. Piper u. Co., 1980. 〔李官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