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성사로 거룩하게 된 하느님의 백성들이 거룩한 사람으로 살 수 있도록 꾸준히 잘못과 죄를 극복하려는 노력. 정화는 기도와 정결의 실천, 의향과 시선의 순수함을 필요로 한다. 살아 있는 동안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죽은 다음 연옥에서 정화되는 기간을 거쳐야 한다. 종교적인 의미에서는 제의 또는 의례에서 부정을 없애기 위한 적극적인 행위나 방법을 뜻한다.
I. 영성 신학에서의 정화
〔의 미〕 '정화' 는 라틴어 '푸리피카시오' (purificatio)를 번역한 것으로, '깨끗이 하다, 청소하다, 말끔히 씻다' 라는 뜻의 라틴어 동사 '푸르가레' (purgare)가 어원이다. '정화' 라는 개념은 원시 문화에서부터 나타나며 신과의 통교를 위한 것이다. 악의 세력이나 방해하는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하여 깨끗한 상태를 추구할 때이 개념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인간이 초자연적 힘과의관계를 위한 금기(taboo)를 피하지 못했을 때, 해결(해독)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러 형태의 정화 예식을 하였다. 다양한 문화 안에서 출생, 결혼, 죽음과 같이 엄숙하고 신성하며 순수한 인간의 영역을 초월하는 중요한 순간에는 신체적이고 영적인 정화 예식이 치러져 왔다. 이렇게 정화는 모든 문화와 종교 안에서 물질적이든 영적이든 전반적인 인간 삶의 더럽고, 부정하고, 정결치 못한 것을 깨끗이 해야 할 때 광범위하게 추구되었다. 나아가 가톨릭은 '영성의 길' 의 첫 단계로서 조명과 일치의 관계 안에서 정화를 가르쳐 왔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정화되어 야 할 세부적인 죄들로 칠죄종(七罪宗 : 인색, 음욕, 탐욕,질투, 분노, 나태, 교만)을 언급하였다. 정화는 완전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목적인,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위한 기본으로서 계속 연구되고 있다. 따라서 정화라는 말은 거룩하신 하느님과 사랑 안에 일치해야 하고 바르게 살아야 할 인간의 천명을 암시함과 동시에, 죄와 무질서한 집착으로 기우는, 필연적으로 극복되어야 할 인간의 한계를 암시하고 있다.
〔구약성서에서의 정화〕 거룩하신 야훼 하느님은 이스라엘에 거룩함을 요구하신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소유가 되기 위하여 거룩해야 하므로(출애 19, 5-6 ; 레위 19,3 ; 20, 26) 모든 불결함에서 정화되어야 한다(에제 36,22-27). 인간 안에는 하느님만이 정화시킬 수 있는 본질적인 불결함이 있다(이사 6, 5-7). 하느님만이 순수함을주는 분이기에, 마음이 정화되기 위해서는 그분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저의 죄에서 저를 말끔히 씻으시고 저의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하소서"(시편 51, 4). "우슬초로 제죄를 없애 주소서. 제가 깨끗해지리이다. 저를 씻어 주소서. 눈보다 더 희어지리이다"(시편 51, 9). "저의 허물에서 당신 얼굴을 감추시고 저의 모든 죄를 지워 주소서.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굳건한 영을 제 안에 새롭게 하소서"(시편 51, 11-12). 하느님의 소유가 되기 위한 이 거룩함은 예식적 정결함뿐만 아니라 종교적 · 윤리적 정결함도 포함된다(레위 11, 43-44 ; 20,25-26 ; 신명 14, 1-2 ; 시편 15 ; 24, 3-6). 예언자들과 시편 작가들은 윤리적이고 영성적인 순결을 법적인 예식보다 더 높은 가치로 여기고 있으며, 이 정화는 결코 사라
지지 않을 의무로 생각하였다(이사 1, 15-17 ; 29, 12 ;35, 8 : 52, 11 ; 예레 31, 31-34 ; 에제 36, 17-18. 25-31 ;시편 24, 4 : 51, 12 등). 구약의 많은 주인공들, 특히 욥기(7, 20 ; 16, 13-17), 이사야(26, 9), 예레미야, 다윗(시편38, 9 ; 73, 22 ; 77, 3-6)은 정화의 고통을 체험하였다. 정화 예식들은 정화의 법으로 알려진 제관계 법전에서 주로 발견된다(레위 11-16장). 정화된 사람은 법적인 부정함을 제거함으로써 사회 안에서도 정상적인 활동을 되찾게 되며, 정화된 물건들 역시 본래의 기능을 되찾게 된다. 구약성서에서 정화 예식은 상이한 형태와 등급이 있다. 무엇보다도 단순한 목욕 재계(洗淨式)와 일시적인
격리가 있다(레위 11, 25 ; 신명 23, 12). 그리고 특별히 준비된 물로 세정식을 하는 정화들이 있다(민수 19, 1-22; 31, 23). 이 정화하는 물의 준비 그 자체(민수 19, 1-10)는 아라비아에 존재했다고 알려진 고대의 관습과 관계가있다. 마지막으로 일정한 기간의 시간 경과와 규정된 희생 제물의 봉헌으로 이루어지는 정화(레위 12, 6-7)와 목욕 재계, 단순한 시간 경과, 희생물 봉헌으로 이루어지는 정화가 있다(레위 15, 13-15).이런 예식들로 제거해야 할 법적 부정은 몇 개의 범주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 것은 출산 또는 성적 활동과 관련이 있다. 성관계 그 자체가 상대에게 부정을 야기시키고 단순한 세정식과 시간 경과의 정화를 요구하는데 (레위 15, 18), 출애굽기 19장 15절에서 그 전통이 증명된다. 몽정이나 자연적이지 않은 어떤 정자 방출도 목욕재계나 시간 경과의 정화를 요구하는 부정의 원인이다 (레위 15, 2-12 ; 신명 13, 10). 여자의 월경이나 비정상인월경 또는 하혈도 마찬가지이다(레위 15, 19-27). 출산은 법적인 부정을 초래하며 시간의 경과와 희생 제물을 봉헌함으로써 정화된다(레위 12, 2-5).법적 부정의 또 다른 범주는 동물의 것이든 인간의 것이든 시체와 접촉하는 것이다(레위 11, 24-25, 39-40 ; 민수 19, 11-20). 민수기 전통에서 정화는 특별히 준비된 정화하는 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눈에 뜬다. 시체에서 오는 부정은 다른 부정한 물건들로부터 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전염될 수 있으므로이런 시체와 접촉한 물건, 옷, 나무, 진흙으로 만든 항아리 등도 정화하거나 깨어 버려야 한다(레위 15, 12). 문둥병이나 다양한 형태의 피부병은 부정의 원천이므로 이것과 접촉하면 정화해야 한다. 병이 나아도 이 같은 질병의 희생자는 적당한 정화 예식 후에야 정상적인 사회 활동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레위 13-14장).
구약 시대의 마지막 시기에 존재했던 강화된 죄책감과 정화에 대한 강한 필요성은 신약 시대로 넘어왔고, 정화예식에 대한 바리사이파의 맹목적인 열성은 예수의 비난 대상이 되었다(마르 7, 6 ; 루가 11, 38).
〔신약성서에서의 정화〕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깨끗함은 내면의 깨끗함(마태 7, 14-23)이고, 마음의 깨끗함(마태 5, 8)이라고 선포하였다. 희생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인간을 근본적으로 정화시킨다(히브 9, 10). 이 정화는 그리스도와 그의 죽음과 부활에 결합되는 세례(에페5, 26)로 신비롭게 실행되고 적용된다. 따라서 신약의 정화는 인간 내면의 정화, 즉 동기의 정화에 집중된다. 신약 시대가 시작되자 세례자 요한은 임박한 하늘나라를 위한 준비로 모든 사람들이 회개해야 된다고 외친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한 분이신 하느님의 자녀들로서 서로 사랑하기위해서는 우리 안에 정화해야 할 것들이 무수히 많다는 것을 그의 모든 편지를 통해서 명백히 말하였다.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그것들이 성령의 열매와 반대되는 육정의 열매로서 필연적으로 정화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육의 행실들이란 뻔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음행, 부정,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원한, 싸움, 시새움, 분노, 모략, 불목, 질투, 술주정, 폭음 폭식, 그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이런 짓을 행하는 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갈라 5, 19-21). 그는 또한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 안의 분열된 두 자아를 직시하면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한 근원적이고 지속적인 정화의 필요성을 고백하고 있다(로마 7-8장).
정화는 사랑의 계명을 준 예수의 모든 말씀에 담겨 있는 기본적인 가르침이다. 예수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자신의 정화 없이 사실상 그 시작도 불가능함을 반복해서 강조하였다. 즉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 "아무도 두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 "위선자들···." 등이다. 예수는 인간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며 외적인 선마저 허용치 않고 그 동기를 정화해야 한다고 강도 높게 경고하였다.
〔전통적인 가톨릭 영성에서의 정화〕 영성 신학에서는 윤리적인 분야와 영성적인 분야를 새롭게 하는 인간학적 요소에 많은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정결하지 못하다는 것' 은 넓은 의미를 가지며, 그리스도인의 완덕과 양립할 수 없는 모든 의미와 동일하게 사용되는 표현이다. 감각의 정화 혹은 영의 정화는 원칙적으로 인간의 감각적 혹은 영성적 분야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개념 : 교부들은 영적 성장은 진보로 묘사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특히 니사의 그레고리오(335?~395?)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 나타나야 할 끊임없이 지속되는 진보를 강조하였다. 아우구스티노(354430)는 진보하지않는 사람은 퇴보할 뿐만 아니라 넘어질 위험까지 있다고 말한다. 4세기 말엽부터 이런 영성 진보의 중요한 단계들을 규정하는 일에 많은 사람들이 몰두하였는데,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Evagrius Fonticus, 345?~398?)에 의해 최초로 확고한 구별이 정립되면서 즉시 대부분의 저술가들에게 전해졌다. 후에 아레오파지타의 디오니시오(Dio-nysius Areopagita)에 의해 변형된 형태로 채택되면서 신플라톤주의의 용어를 빌려 정화(purification) 조명(illumi-nation), 일치(perfection)의 길에 대해 설명하게 되었다. 가톨릭 전통 안에서 영혼의 정화에 대한 연구는 십자가의 요한(1542~1591)이 최상의 분석과 종합을 제시하였다. 사랑의 다른 모습인 정화 : 십자가의 요한이 제시한 가 르침에서 '정화' 라는 주제는 늘 잘못된 해석과 왜곡의 위험성을 가장 많이 안고 있었다. 그 이유는 성인의 가르침 에 대해 있었을 다른 편견들을 제외한다면, 성인의 가르침과 교의의 균형 잡힌 '전체' 로부터 정화라는 주제를 격리시키고 단절시킨 '총체적인 전망의 결여' 때문이었다. 십자가의 요한이 말하는 정화는 사랑보다 앞서거나 선행하는 어떤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대신덕적(對神德的) 사랑의 한 '차원' 이다. 따라서 '어두운 밤' 은 인간에 대한 혹은 진정으로 인간적인 것에 대한 부정이나 파괴의 한 과정으로 해석될 수 없다. 초자연적 소명을 받은 소수의 사람들이나 인간의 더할 수 없는 존엄성을 역설하는 소수의 사람들처럼 '가수' (歌手)였던 십자가의 요한의 전망으로부터, 이런 잘못된 해석들은 멀리 떨어져 있다. 십가가의 요한의 가르침에 따른 밤의 정화는, '부정' 보다는 인간에 대한 '긍정' 의 한 과정이다. 인간에 대한 긍정들 중에서도 아마 가장 절대적이고 가장 원천적인 긍정일 것이다.
하느님 위격의 신비 앞에서, 또 하느님 선물의 무상성 (無償性)으로 실천되어 온 어떤 사랑 앞에서, 진정한 사랑과 해방과 가장 인간적인 능력들의 계발을 향해 인간을 점점 더 이끌어 가는 단계적인 훈련이, 힘들고 어려운 그 과정이 염두에 두고 있는 본래의 목적이다. 사실상 이부분은 인간의 마음 속에 더 온전한 대신덕적 사랑을 점진적으로 준비시키는 길, 다시 말해서 사랑 안에서 사랑을 향해서 성숙해 가는 과정을 훑어보게 하는 부분이다. 따라서 이런 작업을 해 내기 위한 합당한 수단은 결국 동일한 사랑, 즉 대신덕적 역동성을 집약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인간을 다 끌어안는 것이며, 인간을 개방시키고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친교' 라는 체험으로 이끄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우리의 생각이 다음의 두 가지 중요성 안에 연계되는 것이 합당하다는 점을 인정해 준다. 첫째는 대신덕들의 역동성의 중심에서 볼 때, 일치시키고 정화시키는 두 가지 기능을 가진 대신덕들이 정화의 과정을 이끌어 가는 주체이고, 이 주체는 확실히 긍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둘째는 정화 자체가 지닌 인간학적인 부유함인데, 이는 사람의 업적으로서 그 자체를 통해 인간적인 현실을 확장시키고 변모시킨다. 대신덕적 역동성 : 십자가의 요한의 가르침에서 대신덕이 차지하는 중요성과 그 중심적 위치를 분석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인간에 의해 실천되는 대신덕들이 지닌 상호간의 연관성과 역동적인 일치를 지적하는 것이다. 이는, 십자가의 요한이"이 세 가지 대신덕들은 함께 움직이는 것이다"라고 한 것처럼, 대신덕들은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당신자신을 내어 주는 하느님의 위격에 대한 유일하고 총체적인 응답의 세 가지 측면들' 이기 때문이다. 비록 요한이 세 가지 대신덕들을 영혼의 세 가지 능력과 짝지우기는 하지만(지성-신덕, 기억-망덕, 의지-애덕), 엄격히 말해 대신덕들은, 요한 자신도 이런 도식을 극복했듯이, 이 공식에 얽매이지 않는다.
대신덕들에 영적 성장 과정의 두 가지 본질적인 과제가 맡겨지는데, 이는 '정화시키는 것' 혹은 '준비시키는 것' 과 '일치시키는 것' 이다. 요한이 대신덕적 삶의 길에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 부분은 정화적이고 일치적인 두 가지 기능에 대해서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요한은 이를 '자유롭게 하고 일치시키는 대신덕적 역동성' 이라고정확히 부른 것이다.
① 일치시키는 기능 : 십자가의 요한에게 있어서 대신덕은 일치를 완성시키기 위한 합당한 '수단들' 이다. 그러나 단순히 어떤 선행하는 수단이기보다는 하느님과의 일치가 이미 그 안에서 실현되어 가는 방법들, 방식들이다. 영혼은 이 지상의 삶 동안 '이해' 나 '즐김' , '상상' ,다른 어떤 감각을 통해서든 하느님과의 일치를 누리지 못한다. 오로지 지성 안에서는 신덕(信德)을 통해서, 기억 안에서는 망덕(望德)을 통해서, 의지 안에서는 애덕(愛德)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일치를 누릴 수 있다.
② 정화시키는 기능 : 이것은 대신덕적 역동성의 또 다른 측면, 즉 보충적인 측면이다. 대신덕들은 영혼을 하느님으로 조금씩 채우면서, 동시에 하느님이 아닌 모든 것들로부터 깨끗이 비어 있게 한다. 왜냐하면 한 주체 안에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세 가지 대신덕들은 우리 능력 안에서 '비움' 의 작용을 한다. 신덕은 지성 안에서 아는 것을 비우고 어둡게 하고, 망덕은 기억 안의 모든 것을 비우게 하고, 애덕은 의지 안에서 하느님 아닌 모든 것들에대한 애정과 즐거움들을 비우고 벗어던지게 한다. 십자가의 요한은 대신덕적 삶과 그 삶을 이끌어 가는 역동성을 항상 이 두 가지 작용에 비추어 생각하였다. "이렇게이 세 가지 덕들은 영혼을 하느님 아닌 모든 것들로부터떼어 내어 결국 하느님과 일치시키는 것을 그 직무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정화의 밤 : 십자가의 요한의 가르침에는 다른 정화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갖게 하고 이를 올바르게 해석할수 있게 해 주는, 아주 훌륭한 '독서의 열쇠' 가 있다. 요한에 따르면, 정화의 과정은 두 가지 요소, 즉 능동적인요소와 수동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이는 주도권이 인간에게 있는지, 아니면 하느님께 있는지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즉 능동적인 요소와 수동적인 요소는 둘 다 중요하다. 정화는 우선 인간의 영적 진보에 책임이 있는 주체인 인간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무엇인가를 요구한다. 그러나 정화는 인간의 가장 내면적인 곳까지, 죄와 그 결과들로 인해 더러워진 그곳에까지 도달해야만 한다. 인간이 더이상 헤쳐나갈 수 없고 어떤 활동을 해 낼 수도 없는 곳, 오직 하느님의 인격적인 개입만이 온전한 '내적 쇄신' 을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능동적인 밤과 수동적인 밤!' 십자가의 요한은 이렇게 '능동성' 과 '수동성' , 모든 것을 인간 자신이나 혹은 하느님의 주도권에 맡기고 현실적인 무엇의 객관성은 떨쳐 버리는 힘차고 극적인 능동성과 수동성의 사이에서 아주 현실적인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그가 말한 것처럼, 인간이 그 깊이와 그 안에 함축된 모든 것을 철저히 체험하고 살아가게 되는 이 '밤' 은 인간의 활동과 하느님의 활동이 도달하게 되는 '상호 보완성' 에 대한 가장 감동적인 표현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따라서 능동적 밤과 수동적 밤이란 '하느님과 인간을 일치시키는 유일한 현실'의 양면이고, 정화라는 유일한 과정을 보충 설명하는 두가지 표현이다. 또한 근본적으로는 '대신덕적 사랑' 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차원이다. 이 '밤' 이 바로 '하느님과의 합일의 수단' 이므로, "하 느님은 불완전함들로부터 정화되기를 원하는 영혼들을 더 나아가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이 어두운 밤 안에 두신다", "왜냐하면 영혼이 도움을 받는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이 밤의 정화를 통해 수동적으로' 그를 정화시키면서 그의 손을 잡아 주고 그렇게 정화시켜 주지 않으시는 한, 그 영혼이 제 편에서 능동적으로 자신을 정화시켜조금이나마 사랑의 환성인 하느님과의 합일에 도달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이 정화는 인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업적인 한에서 전 인간을 포괄하게 된다. 즉 '감각적인 부분' , '능력들' 과 '영' 또 이 '영적 실체' 의 가장 깊은내면까지, 오직 하느님만이 활동하고 인간을 쇄신시킬 수 있는 인간 존재의 차원까지도 다 포괄하게 되는 것이다. 이 정화시키는 관상(觀想)은 영혼을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 그를 단련시켜 새롭게 하려고, 그가 엉겨붙어 하나가 된 채 매여 있던 '묵은 인간' 의 정들과 습관적인 기질들로부터 그를 발가벗기고, 그를 풀어 주고 그의 영적실체를 되찾아 내고, 깊고도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끌어들인다. 영혼은 영이 처참하게 죽음을 당하듯이, 자신의 비참함들을 대면하면서 자신이 부서지고 녹아 버리는 고통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영혼은 맹수에게 삼켜져 깜깜한 맹수 뱃속에서 자신이 삭아 버리는 듯한 지독한 고통을 겪게 된다. 이는 요나가 바다 괴물의 뱃속에 있었던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어두운 죽음의 무덤 속에 머무르는 것은 그가 희망하는 그 영적 부활을 위해서 유익한 것이다.
이런 정화시키는 일의 넓이와 강도는 주로 다음 두 가지 요소에 의해서 결정된다. 즉 하느님이 그 영혼을 이끌어 가기 원하는 합일의 정도와 그 영혼 안에서 발견되는 더러움과 저항의 정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풀어 주고 되찾아 낸다" 라고 십자가의 요한은 말하였다. 철저하게 이런 일을 행하는 주체인 하느님의 지혜는 영혼 안에서 두 가지 중요한 효과를 만들어 내는데, 이는 하느님과의 사랑의 합일을 위해서 그 영혼을 정화시키고비추어 주는 것이다. 하느님과의 사랑의 합일을 준비하 는 것, 인간의 정화는 오로지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서만합당하고 효과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 존재를 조금씩 침범하면서 점점 더 강렬해지는 것이다. 십자가의 요한은 하느님의 사랑을 '불' 〔火〕이라고부르는데, 하느님과의 합일을 위해 영혼을 준비시키려고 필요한 만큼 인간을 '태우고 정화시켜야 하는' 주체는 바로 '하느님의 사랑의 불' 이다. 십자가의 요한은 이를 '맹렬히 태워 버리는 불' 이라고도 부르지만, 동시에 '사랑이 넘치는 불 , '사랑의 불 이라고도 부른다. 여기에서 요한이 좋아하고 친숙하게 여겼던 '나무에붙은 불' 이라는 유명한 표상이 나오는데, 이 표상은 그 의 작품들 전체에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이 표상은 인간이 사랑 안에서 정화되고 변형되는 과정이 내포하고 있는 여러 측면들과 요소들에 대한 다양한 풍요로움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미 언급한 것과 또 언급되어야 할 것들을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다음의 사실을 여기서 지적함이 좋을 것이다. 이 '정화시키고 사랑에 넘치는' 지식이나 혹은 여기서 우리가 언급하는 그 신적빛은, 영혼을 정화시키고 하느님과 결합시키기 위해 영혼을 준비시키면서, 마치 불이 나무를 제 자신과 같은 모습으로 변형시키기 위해서 행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렇게 영혼 안에서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물리적인 불이 나무에 작용할 때 맨 먼저 하는 일은 나무를 말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때 불은 나무로부터 수분을 몰아내고 나무가 자신 안에 가지고 있던 물을 다 뽑아 낸다. 그 다음에는 검고 어둡고 추한 꼴이 되게 할 뿐 아니라 고약한 냄새까지 풍기게 하고, 나무를 점점 말리고 제 모습을 드러내게 하면서, 나무가 가지고 있던 불과 반대되는 더럽고 어두운 모든 속성들을 몰아낸다. 그리고는 마침내 겉부분부터 불이 붙게 하고 더 뜨겁게 태워서 나무를 완전히 변형시키고 불 그 자체와도 같이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다. 이 상태에서는, 나무 편에서 본다면 오로 지 중량과 부피만 불보다 좀 더 나갈 뿐 아무런 능동도 수동도 없는 것이니 불이 가진 속성과 활동을 나무 자신안에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고, 마르고 뜨겁고 밝아져서 다른 것들을 비추기 때문이다. 나무는 이전보다 훨씬 더 가벼워졌는데, 이는 나무 안에 이런 속성과 결과를 불이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사랑의 산 불꽃》(Flama de amor viva)에서 요한은 '불' 과 '나무' 의 표상을 다시 사용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는또 다른 외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사용하는데, '불' 을 명 백하게 성령과 동일시하였다. 즉 인간 안에 작용하는 하느님의 '사랑' 을 성령과 연관시켜 특징 지우는 것이다.여기서는 결론적으로 인간의 정화를 실현시키는 주체가 '대신덕적 사랑' 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또한 대신덕적 사랑이 추구하는 목표는 단순히 인간 안에 동일한 사랑을 유발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사랑의 불' 을 놓음으로써" 인간을 동일한 사랑 안에서 온전히 변모시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현대적 의미〕 영육의 합일체인 인간의 구성 조건상정화 없이는 진정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불가능하다. 정화는 하느님 중심적 사랑을 위한 비움, 통합 또는 자아 초월로 표현할 수 있으며,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로운 협조로 이루어진다.
교회 전통 안에서 영성가들이 지적했듯이, 진정한 의미의 정화는 의식 차원의 일시적이고 피상적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가능한 한 무의식의 의식화를 통한 전인적차원의 정화가 필연적으로 요청된다. 위대한 성인들은 깊은 양심 성찰을 통해 심연의 죄의 뿌리를 직면하였고인정하였다. 전인적 차원의 정화는 본질적으로 하느님중심적 사랑을 위한 자아 초월을 방해하는 힘들을 방향전환 또는 통합한다. 그리스도처럼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사랑으로 일치하고 이웃을 위해 자신을 기쁘게 소모할 수 있는 자유가 여기서 증가된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에게 묶여 있으며 또한 이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다. 토마스 아퀴나스(1224/1225-1274)도 인간 행위에 대해서 말할 때, 인간의 자유가 무의식의 무질서한 집착으로 제한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성과 의지가 개입되기 이전에 감각적인 지각은 감각적인 기억, 상상 등과 결합하여 어떤 판단을 내릴 수있기 때문에, 이성과 의지가 진정한 선을 선택하려고 할때에도 외면적인 선을 선택하게 된다. 소수의 사람만이자신의 깊은 내면적 흐름을 감지하고 저항할 수 있으며,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식하지 못한 채 순수한 이성과 의지만의 결정이라고 믿는다. 정화의 중요성과 필연성, 긴박함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의 성소와 관련하여인간에 대한 전인적이고 심층적인 이해가 불가피하다.
그리스도인 성소 : 인간의 존재론적 성소는 자아 초월적 가치를 향하여 끊임없이 자신을 초월하는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고 더 나은 선, 더 완전한 사랑을 추구하는 인간에게 주어진 거룩한 계시는 인간 심연의 갈망에 대한 절대적인 답이다. 한편 그리스도인 성소는 섭리적인 방식으로 인간 의식의 지향성 (intentionaliy)과 하느님의 자기계시가 만나는 접점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안에서 계시되고 객관적인 그리스도의 자아 초월적 가치들을 내면화하여 그리스도화 되도록 불림을 받았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자아 초월적 가치들을 내면화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예수의 '씨뿌리는 자의 비유' 에 언급된 메시지의 확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정화가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깊은 인간의 현실을 지적하고 있다. 정화는 사랑할 자유와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변증법적인 인간 천성 :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변증법적이다. 인간은 하느님 중심적 사랑을 위한 자아 초월성을 타고나지만, 불완전한 자유로 인도하는 많은 한계들도 타고난다. 그래서 예수는 "누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마태 17, 24)라고 하였다. 인간 동기의 정화에 대한 근본적인 가르침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 헌장> 10항에서도 인간 내면의 분열이 사회악의 근원이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은 '나에게 중요한 것' (important for me) 때문에 행동하거나, '그것 자체로 중요한 것' (important in itself) 때문에 행동한다. '나에게 중요한 것' 은 주관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본성적인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이것은 좋고 싫음을 판가름하는 감정적이고 직관적인 평가와 연관되어 있으며, 정서적 기억과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근간은 욕구들이다. 무의식적인 감정과 욕구는 인간의 자유를 심각하게 감소시킨다. '그것 자체로 중요한 것' 은 나를 떠나서도 본질적으로 중요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예를들면 '용서' 같은 것이다. 이성적 또는 숙고적 평가, 그리고 가치들과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감정과 이성은 동기 안의 역동적(dynamic) 요소들이고, 욕구와 가치는 지시적(directive) 요소들이다. 결국 정화해야 할 대상들의 윤곽이 드러난다. 정화는 비움 또는 하느님 중심적 자아초월, 나아가 '통합' 이라는 표현 등과 통용된다. 정서적 기억과 감정의 정화 : 인간은 반드시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 의식하지 못하는 과거의 경험은 현재의 보는 방식, 느끼는 방식, 사는 방식을 어느 정도 결정하여현실을 왜곡시킬 수 있다. 인간 관계의 많은 국면들과 현재 상황에 대한 판단과 평가가 정확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은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 하지 못하게 방해할 수 있으며, 나아가 자비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품안으로 뛰어들어 안기는 것 또한 방해할 수 있다. 정서적 기억은 현실적 원리를 따르거나 상징적 유사성을 따른다. 현실적 원리를 따른다 함은, 예를 들어 촛불에 손가락을 덴 경험이 있는 어린이가 촛불을 다시 보게 될 때 '미리 느껴지는 불안' 을 체험하는 것이다. 상징적 유사성을 따르는 예는, 힘을 가진 아버지에 대해 무섭고 억눌리는 경 험을 한 사람이 권위를 부여받은 인물에 대해 부자유스럽고 부담스럽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하느님의 사랑을믿고 사랑하려 할 때마저 심연으로부터 마음이 열리지않는 체험을 할 수 있는데, 무서운 아버지의 이미지로 하느님을 보기 때문이다. 정서적 기억은 사람, 사건, 상황, 대상들을 일반화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미미한 유사성에도 자극되어 현재의 지각을 왜곡시키고 싫고 좋은 감정을 강하게 유발시킨다. 정화의 대상이 되는 부정적인 정서적 기억은 그 자체로 자신에게 얽매여 자기 중심적이 되게 하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한 개방을제한한다. 부정적인 정서적 기억의 통제와 함께 심리적 상처의 치유도 정화의 일부분이다. 감정은 우리 안에 주어진 하느님의 창조 요소이다. 감정의 정화는 모든 감정이 하느님의 창조 목적대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에너지로 방향 전환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감정을 정직하게 직면하면서 가치를 선택해야 하는 긴장감을 견디는 수고로움이 전제된다. 인간다운 행위를 위해서는 긴장 해소가 아니라 건강한 긴장을 보유해야 한다고 토마스 아퀴나스도 언급하였다. 행동화나 억압 또는 다른 방어 기제의 사용은 하느님 나라를 위한 에너지의 손실 또는 사장으로 이해되며 영적 성장을 방해하는 것이다.
외면적인 선과 정화 : 자신을 직면한다는 것과 정화한다는 것은 은총이 전제되고 하느님이 완성하시는 것이다. 인간이 외면적인 선을 진정한 선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식별은 은총의 힘으로 가능하다. 인간 동기의 복합성 즉 의식, 전의식, 무의식의 상반되는 여러 동기들의 혼합작용으로 인하여, 선한 의지를 가진 많은 그리스도인들 마저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면서 자신을 추구하고 있다. 예를 들면 '받기 위해 주는 것' 등이다. 이미 성인들은 깊은 성찰로 이것을 극복해 왔다.
죄와 외면적인 선의 근간인 욕구들 : 인간은 많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어떤 심리적 욕구들은 그 자체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과 부조화하거나 양립할 수 없음을, 성직자와 수도자 또는 그리스도인 양성과 영성지도를 통한 오랜 연구를 바탕으로 교회의 연구가들은 명시하고 있다. 이것은 계속적으로 확인되고 있는 것들로서 정화의 근원적인 대상들이다. 욕구들은 하느님이 우리를 정화시키고자 허락하신 이유를 모르는 시련의 때에 더욱 좌절될 수 있는데, 이 좌절에 임하는 태도로 우리의 절대적인 중요성이 무엇인가가 밝혀질 수 있다. 은총의 힘으로 욕구 충족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허무를 절감하고 욕구의 위력에서 벗어나려는 결단을 하는 그만큼우리 삶은 하느님에게로 향하게 된다.
① 굴종(abasement)의 욕구 : 통계를 보면 이 욕구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는데, 이 욕구는 깊은 무의식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욕구의 특성은 굽히고 낮추고 자기를 비하하고 평가 절하하는 성격의 굴종적이고 굴복적인 경향으로 나타나고, 굴욕감, 수치심, 열등감, 비굴함 등을 불러 일으키며, 주눅들고 움츠려 들고 졸아들게 한다. 이것은 자신의 초라함, 보잘것없음의 느낌으로도 나타나는 존재론적 빈곤감, 존재 가치감 결여 내지 자기 확신 결여로서 자기 불신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에게서 드러나는 것은 이것을 숨기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의 성향인 우월감, 당당함, 딱딱함, 완고함, 완벽주의 등으로 포장되는 경우가 많다. 명예욕, 권력욕, 물욕 등은 굴종의 욕구를 은폐하기 위해 파생되는 욕구들이다. 이 굴종의 욕구는 상대적인 빈곤감을 가지게 하므로 슬퍼하는 사람과는 함께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기뻐하는 사람과는 함께 기뻐하기가 무척 어려울 수 있다. 진정한 겸손은 굴종의 욕구 수용과 관계가 있다.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굴종의 욕구를 기초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부조화하는, ②~⑦의 욕구들이 상호 관계 안에서 형성된다.
② 구원(succorance)의 욕구 : 자신의 실추된 존재 가치감을 보상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에게서 애정 의존, 인정받기, 지지받기 등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 욕구의 정화가 쉽지 않은 것은 사랑이라는 탈을 쓰고 일방적이거나쌍방적인 충족을 추구하며, 이 충족이 내적 힘의 원천이되기 때문이다.
③ 자기 과시(exhibition)의 욕구 : 자기 현시, 자기 선전의 태도가 정화될 때 그리스도처럼 남을 섬기면서 행복할 수 있게 된다.
④ 상해 회피(ham avoidance)의 욕구 : 신체적인 도사림이다. 이 욕구가 정화되지 않고서는 다를 이를 위하여피땀 흘리고 수난받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통에 동참할 수 없다.
⑤ 비난 실패 회피(avoiding censure or failure)의 욕구 :정신적인 도사림이다. 이 욕구가 정화되지 않으면 실패와 비난 속에서도 끝까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게 된다.
⑥ 성 충족(sexual gratification)의 욕구 : 부름 받은 신분 상태에 맞게 정결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애정의 욕구와 함께 이 욕구의 에너지를 인격의 영적 차원에 통합해야한다. 이 욕구는 다른 욕구들의 미성숙함이 표출되는 출구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⑦ 공격(aggression)의 욕구 : 다른 심리적 욕구들이 자극되거나 좌절되거나 위협받을 때 파괴적인 에너지를 분출하며, 다른 사람들과 때로는 자신에게 상처 입힌다. 순명, 화해, 용서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 욕구가 방향 전환되어 복음적 에너지로 변화되어야 한다. 따라서 자기욕구를 보호하기 위한 분노의 수용과 통합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살았던 것처럼 하느님 나라를 보호하기 위한 현실 도전의 힘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욕구들의 정화는, 욕구가 가치와 조화 안에 있고 하느 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사는 에너지원으로 전향되고 통합됨을 의미한다. 정화의 실현으로 하느님을 향하여 자신을 초월할 때 자유는 성장하며, 정화가 더욱 근원적일 수록 우리의 자유도 더욱 성장하게 된다. 중립적인 욕구로서 성취의 욕구, 지식의 욕구, 질서의 욕구, 만회의 욕구, 지배의 욕구, 친화의 욕구, 양육의 욕구들은 가치와 조화를 이루기 쉽지만, 이것들 역시 많은 경우에 위에 열거한 욕구들을 섬기는 수단으로 은밀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깊이 성찰되고 정화되어야 할 것들이다.
〔전 망〕 정화는 인간의 그리스도화를 방해하는 모든 요소들의 비움과 통합인데, 그 근간인 욕구들의 정화가 근원적으로 이루어져야 된다. 무의식적 뿌리를 가진 그리스도인의 삶에 양립할 수 없는 욕구들은 칠죄종의 근간으로 특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식별되지 않은 무의식의 욕구들은 인간에게 엄청난 위력을 행사하고, 외면적선을 통한 은밀한 충족 추구를 한다. 궁극적으로 이 외면적 선은 하느님을 이용하여 자기 왕국을 확장하는 것이다. 한 개인 안에서 욕구들이 그리스도의 자아 초월적 가치에 통합될 때, 이 세상에는 '제2의 그리스도' 의 수가 많아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의식적 욕구들의 의식화와 통합 그리고 그리스도의 자아 초월적 가치들의 내면화를 위한 근원적인 양성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시급하고 신중하게 주어져야 한다. 인간은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울수록 하느님의 은총에 더 깊은 전 존재로 응답 할 수 있게 되며, 하느님은 상례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고 인간을 자유롭게 허락하는 만큼 인간 안에서 더 깊이 활동한다. (→ 무, 영성 신학의 ; 죄종)
※ 참고문헌 Adolphe Tanquerey, Precis de Theologie Ascetique et Mystique, 1923(정대식 역,《수덕 신비 신학 3, 정화의 길》, 가톨릭 크리스천 2000)/ Louis Bouyer, Introduction a la vie Spirituelle, 1960(정대식 역, 《영성 생활 입문》, 가톨릭출판사, 1992)/ Alfonso Baldeon, ElHombre : una Pasion de Amor, Monte Carmelo, Burgos, 1991/ R.Arbesmann, 《NCE》 11 pp. 830-831/S.M. Polan, Purification(in the Bible),《NCE》 11, pp. 831~832/ K. Kavanaugh, Purification, spiritual, 《NCE》 11,pp. 832~834/ I. Rodriguez, Dizionario Enciclopedico di Spiritualita, 1992/L.M. Rulla, S.J., Anthropology of the Christian Vocation, vol. Ⅰ, Interdisciplinary Bases, Rome, Gregorian University Press, 1986/ L.M.Rulla et al, Anthropology ofthe Christian Vocation vol. II, Existential Confirmation, Rome, Gregorian University Press, 1989/ K. Baumann, The Concept of Human Acts Revisited-St. Thomas and the Unconscious in Freedom, Gregorianum 80, 1999, pp. 147~171. . 〔金福順〕
Ⅱ. 민간 신앙에서의 정화
〔상징적 의미〕 종교적인 의례에서 부정을 씻기 위한 적극적인 행위나 방법이 정화이다. 흔히 '부정탔다' 고하는 것을 깨끗하게 하거나 부정이 타지 않도록 미리 예 방하는 의식으로 행해진다. 즉 민간 신앙의 의례 현장에서 부정이나 불결한 것을 제거하기 위해 행하는 의식을 정화라고 하며, 세속적이거나 일상적인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행해지는 것도 정화의 개념에 포함된다. 한국 민간 신앙에서 부정은 동티가 나거나 살이 끼는 원인이 되는 것이며, '부정을 탄다' 라는 말은 액(厄)이 생긴다는 의미로서 이렇게 되면 '신령의 노여움을 산다' 고 믿었다. 더러운 것, 추잡한 것은 재앙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옛부터 부정을 겁냈다. 그러므로 어느 의례에서든 부정과 불결을 제거하기 위한 정화 의례가 선행되었다.
〔수 단〕 한국의 민간 신앙에서 정화의 가장 흔한 수단은 물과 불이다. 물과 불은 가장 큰 '종교적인 정화력' 을 갖기 때문에, 의례의 현장에서 부정을 막고 의례 현장을 정화하는 차원에서 상징적으로 사용된다. 이렇듯 물과 불은 부정을 맑게 하는 힘을 지니며, 물과 불 자체가 지닌 특성이 부정을 물리치는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므로 물과 불은 부정과 불결을 제거하는 정화의 수단으로 사용된다. 특히 물은 무엇보다도 큰 정화력, 곧 부정을 막게 하는 힘을 지닌다고 믿어져 왔다. 즉 물 자체가 지닌 맑음에 부정을 물리치는 힘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또한 물은 정화력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새 생명 탄생의 원천이 되는 재생력을 지닌다고 생각되어 왔다. 그래서 물은 민간 신앙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제의 공간을 정화시키는 기능을 수행한다.
각종 제례나 고사를 지낼 때 먼저 행하는 것 중의 하나가 '정화수(井華水) 떠놓기' 인데, 우리 민족은 각종 의례의 현장에서 정화수를 떠다 놓고 손빔(비손 또는 손빌이)을 하는 풍습이 있었다. 부엌에서는 조왕신께 정화수를 올리며, 장독간에서는 칠성신께 정화수를 올린다. 그리고 기자 의례(祈子儀禮)에서 삼신에게 비손을 할 때도 주부들은 으레 정화수를 떠놓고 손빔을 하였다. 또한 무교에서도 신에게 정화수를 바친다. 무당은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즉시 몸주신을 모신 자기 집의 신단(神壇)에 정화수를 바치고 문안드리며, 집안이 잘되고 자신이 영험해서 무업(巫業)이 잘되게 해 달라고 빈다. 무당들이 정화수를 바치는 것은 강신 체험(降神體驗) 과정에 서부터 신께 정화수를 바치고 절을 하고 싶은 충동에서시작하여 무당이 된 후에도 일생 동안 계속된다. 무교에서 이렇게 신께 정화수를 바치는 것은 강신무(降神巫) 전반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사례들을 볼 때 의례의 현장에서는 정화수를 기본적인 공물로 바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정화수가 부정이나 객귀를 쫓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편 정화수는 발음부터 정화를 연상시킬 뿐만 아니라 의미상으로도 이를 상징한다. 이러한 정화수는 정화력을 발휘하는 주술물 구실을 한다. 이는 물 자체가 지닌 맑음으로 인해서, 환경이나 사람, 물건 등의 부정을 물리치거나 막는 힘이 있다고 믿은 까닭이다. 이 정화수를 바치는 그릇으로 중발(中鉢)이 가장 많이 사용되며, 사발을 쓰기도하고 옹투가리를 사용하기도 한다. 정화수를 떠놓고 비는 행위는 대체로 이른 아침에 이루어지는데, 남들이 다잠든 한밤중에 혹은 낮과 밤을 잊고 빌기도 한다. 이러한 정화수 관념은 우물 숭배 이외에 크게는 물 숭배, 작게는 약수 숭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부엌에서 모시는 조왕신은 부정을 정화하는 신으로 알려져 있는데, 화신(火神)으로서 삼신과 더불어 육아를 담당하는 신이다. 조왕은 불의 신이기 때문에 조왕신의 성격을 불이 지닌 정화력에 두기도 하며, 조왕신의 신체(神體)인 조왕 중발에 물을 담는다는 점도 이와 유관하다고 볼 수 있다. 먼 여행에서 돌아오거나 초상집에 다녀온 사람은 먼저 부엌에 들러 외부에서 따라왔을지도 모르는 오예(汚穢)와 부정을 불의 영능(靈能)으로 정화한다. 조왕은 선달 그몸 무렵 하늘의 옥황상제를 찾아가서 지난 1년간의 일을 고한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이때 각별히 말조심을 해야 하고 때론 부뚜막에 엿을 붙여 두기도 한다. 이것은 혹 하늘에 갔더라도 고자질을 할 수 없도록 미리 입을 막는 것이다. 조왕신의 자리는 부뚜막이며, 조왕의 신체로는 '조왕 중발' 이라 하여 사기 종지에 정화수를 떠올리기도 한다. 대개 부뚜막 중앙 정면의 벽에 흙으로 조그만 단을 만들어 중발을 놓는다. 주부는 매일 새벽 이곳에 정화수를 떠놓고 소망을 축원하였다. 우리 민족은 집안 곳곳에 가신(家神)을 섬겼다. 가신은 집안에 존재하는 신을 말하는데, 집안 곳곳에 신을 모셔 놓고 민속 신앙 의례를 하였다. 가족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주부는 가신에게 고사를 지내는데, 이때 주부는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다음 정화수 · 시루떡 · 과실 · 청주 등을 준비하고 기원을 한다. 음력 2월초하룻날은 '영등날' 이라 하여 영등 할머니에게 고사를 지낸다. 영등 할머니는 바람을 관장하는 여신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뱃일을 하는 어부들에 의해 성대하게 모셔지기도 한다. 영등 할머니는 2월 초하룻날 하늘에서 내려와 보름을 전후한 시기에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고하는데, 이 기간 동안 주부들은 정화수를 집 밖에 떠다 놓는다. 한국인의 심성에서 큰 의의를 지니는 이 정화수 떠놓기는 정화된 영혼과 마음을 상징하는 것이며, 주부의 신심이 드러나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불은 생명력을 가진 신성한 존재로 상징되며, 잡귀나 재앙을 물리친다는 '소각' 의 의미를 지닌다. 즉 불은 무엇이나 태워 없앨 수 있기 때문에 부정한 것을 태워 없애고 새롭고 정화된 것을 얻고자 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신성관은 결국 불이 세상의 모든 더러운 것을 깨끗이 태워 없앨 수 있는 정화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느끼게 하였다. 사람이 죽어 방에서 관이 나가면 곧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것이나, 시체가 있던 방을 쓸어 모든 더러운 것을 불로 태우는 것은 모두 불의 정화력으로 더렵혀진 현실을 정화하고자 하는 뜻에서 행해진 것이다. 전통 혼례에서 신부가 가마를 타고 시댁으로 들어올 때 불을 지펴 가마가 그 불을 건너도록 하는 것도 혹시나 있을 잡귀를 정화하여 쫓는 의식이다. 세시 풍속에서도 불에 태워 부정을 거두고 액땜을 하는 풍습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정초 풍속인 액막이와 원일 소발(元日燒髮), 달집 태우기 등이 있다. 연초에는 머리카락을 태우는 원일 소발을 행하며 새끼 태우기, 동정깃이나 옷고름 태우기, 불에 태운 솔방울을 병아리에게 뿌려 시커떻게 하기 등의 액땜을 한다. 이를테면 소액(燒厄)을 하는 것이다. 달집 태우기는 정월 보름날 달이 떠오를 때달집에 불을 붙이는 것으로, 짚과 대나무, 소나무 등을 세워 달집을 만든다. 불길이 치솟으면 사람들은 저마다의 소원을 빌었는데, 개인적인 소망은 물론 한 해의 풍년을 빌기도 하였다. 또한 일상의 부정한 것을 모두 태워 버림으로써 새해에 좋은 일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달집을 태우는 것에 투영되었다. 섣달 그믐날 밤에는 1년간의 액운을 소멸시키기 위해 집안을 깨끗이 청소한 뒤마당에 검불을 모아 태우거나 청죽을 태우기도 한다. 잡귀를 쫓고 집안을 정화한다는 의미이다. 불의 정화력으로 부정을 씻으려는 방법 중 대표적인 것은 '배의 부정 쓸기' 이다. 고깃배를 타고 처음 출항할 때, 고기가 잡히지 않을 때, 또는 어느 선원의 부인이 아기를 낳았을 때 흔히 '부정 쓸기' 를 한다. 주로 나이가 가장 많은 선원 두 사람이 고춧대로 만든 홰에 불을 붙여 들고 배의 선두에서 좌우로 나뉘어 횃불로 배 안의 여기저기를 쓸어 내는 시능을 하면서 선미(船尾)로 간다. 두 사람이 선미에 닿으면 각각 들고 있던 홰를 한데 모아 바닷물 위에 가만히 띄워 놓는다. 그렇게 하면 배 안의 모든 부정이 가셔져 고기가 많이 잡힌다고 한다. 또 뱃고사를 지내기 위해 제물(祭物)을 지고 배를 향해 갈 때는 대낮인데도 횃불을 들고 가는 일이 있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불의 정화력을 이용하여 부정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이다.
〔정화 의례〕 정화 의례란 어떠한 의식에 의해 시 · 공간적인 정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민간 신앙 및 무교 의례의 현장에서 부정을 물리치고 정화를 하기 위해 부정거리 혹은 부정치기가 행해지는데, 이는 대표적인 정화 의례라 할 수 있다.
무당들은 무슨 굿을 하든지 맨 처음에 '부정거리' 부터한다. 즉 철저한 금기를 마친 본 제의에서도 제의 공간을 물로 정화시키거나 제상에 정화수를 바치고 술을 올려정화시키는 것이다. 굿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모든 부정한 것이나 제당(祭堂)의 불결한 것을 가셔 내어신이 좌정할 수 있는 깨끗하고 신성한 공간으로 정화시킨다. 그런 다음 무당은 부정을 물리는 무가(巫歌)를 암송한다. 무가의 내용은 외부에서 들어온 부정과 인간 생활에 관계된 부정, 제물에 묻은 부정 등을 물린 뒤 무교에서 믿는 신들을 청하는 것이다. 이어 무당은 굿상에 정화수를 떠놓고 그 정화수를 들고 굿판을 한 바퀴 돌며 그물을 찍어 사방에 뿌리고, 또 짚 한 단에 불을 붙여 들고굿판 주위를 돌며 태워 불로써 부정을 가셔 낸다. 마지막으로 신칼을 던져 칼끝이 밖으로 나갔는가를 보아 부정을 물린 것을 확인한다. 이러한 무당의 행위는 세속적인 제의 공간을 불로 태우고 물로 씻겨서 소거시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데, 이로 인해 제의 공간은 세속의 일상적인 공간에서 신성한 공간으로 전이된다. 이러한 부정거리는 주로 불행한 죽음을 한 영신 · 잡귀 등을 위안하거나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중요한 목적이 있다. 굿터에 물과 함께 소금을 뿌리기도 하는데, 소금은 실제로 도 소독의 효과가 있지만 종교적인 정화의 의미도 있다.마을의 동제 기간을 전후한 시기에는 엄격한 금기가 지켜진다. 상(喪)을 당한 사람이나 출산을 한 집안, 피를 본 사람 등 불순한 사람들이 금기의 대상이 된다. 만약 금기를 지키지 않으면 부정을 타게 되어 동티가 나거나 살이 끼는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제관으로 선출된 자는 동제 기간 동안 금기를 철저하게 지키며, 목욕 재계를 함으로써 더럽고 부정한 몸을 씻어 낸다. 이는 제의 기간동안 정화된 육신의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의미이다. 이때 목욕 재계는 물의 정화력을 빌려서 신과 교응(交應)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목욕 재계는 조상의 제사나 집안 고사, 마을 동제를 지내기 전에 필수적으로 행해지는 정화 의례이며, 일상의 부정한 것을 씻어 없애는 정화의 구실을 한다.
예전에는 동제를 앞두고 제관으로 선정된 사람은 아무리 추워도 얼음을 깬 찬물에 목욕을 하였다. 또 목욕은 많이 할수록 좋다. 찬물은 있는 그대로의 '순수함' 을 뜻하고, 순수한 물은 정화력을 강화시킨다는 믿음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화수는 모두 깨끗한 찬물이다. 설날 아침에 마시는 술은 봄을 신선하게 맞이한다는 의미가 있는데 역시 찬 술이다. 술은 물과도 통한다. 제관이 찬물로 전신을 씻는다는 것은 그만큼 깨끗하게 정화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물에서는 모든 것이 용해되고, 모든 형태는 없어지며, 현상으로 일어난 모든 것들은 존재를 상실한다는 상징성이 있다. 그래서 제관은 목욕 재계를 통해 세속적인 사람에서 신성한 존재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는 제의 공간에 물을 뿌려 세속의 일상적인 공간을 신성한 공간으로 바꾸는 것과 마찬가지다. (→ 금기 ; 동제; 목욕 재계 ; 무교)
※ 참고문헌 金泰坤, <물의 祭儀的 原義象徵〉, 《月山 任東權博士頌壽紀念 論文集》, 民俗學篇, 集文堂, 1996/ 金明子, 《岳砂의 洞祭와家神信仰〉, 《安東文化》 8집, 安東大 安東文化研究所, 1987/ 박계홍,<불의 민속>, 《우리 민속의 맥락과 현실 의식》, 민속원, 1998. 〔金明子〕
정화
淨化
Ⅰ. 영성 신학에서의 정화 · Ⅱ. 민간 신앙에서의 정화 · 〔라〕purificatio · 〔영〕purifi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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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

정화 예식을 위한 쿰란의 저수 시설 유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