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기해박해(己亥迫害) 때의 순교자. 세례명은 안드레아. 축일은 9월 20일.
충청도 정산(定山)의 가세가 넉넉한 교우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교리를 배웠다. 성장하면서 주위에 비신자들이 많자 신앙 생활을 하기에 불편함을 느껴 고향을 떠나 수원 양간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이사를 하며 고향에 있는 자기 소유의 토지를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에게 바쳤다. 그는 양간에서 회장으로 임명되자 공소를 세우고 주위 신자들의 신앙 생활을 도왔으며, 종종 서울을 왕래하며 교회의 사정을 연락하는 일 등을 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발발하자 정화경은 날마다 교우집을 돌아다니며 신자들을 격려하고 순교를 준비시켰다. 또한 6월 3일 앵베르 주교가 박해를 피해 수원 지역으로 오자, 동료 교우 손경서(孫, 안드레아)와 함께 수원 상귀(현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 송교리)에 은신처를 마련해 주었다. 한편, 주교를 찾고 있던 배교자 김순성(金順性, 요한, 일명 여상)은 정화경이 주교의 은신처를 알고 있을 거라는 주변 신자들의 말을 듣고 그를 찾아왔다. 김순성은 "이제 조정에서도 주교님과 신부님이 나타나면 천주교를 받아들일 것이며, 정하상(丁夏祥, 바오로)이 주교님께 드리는 편지를 가지고 왔다" 라고 정화경을 꾀이며 주교의 은신 처로 안내할 것을 요구하였다. 정화경은 하룻밤 동안 고민을 하다가 결국 이튿날 김순성을 데리고 주교의 은신처로 갔다. 이때 포졸들은 주교 은신처 부근의 돌담거리 주막에 두고 김순성만을 데리고 상귀로 들어갔다. 정화경이 주교에게 들어가 이러한 사실을 이야기하자, 앵베르 주교는 "네가 마귀의 속임을 입었다"라고 하며 더 이상 도망갈 수 없음을 깨닫고 자수를 결심하였다. 앵베르주교는 다음날인 8월 11일 아침 마지막으로 미사를 드리고 포졸들이 머물던 돌담거리 주막으로 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정화경은 이때 주교와 함께 체포되고자 하였으나 앵베르 주교는 그에게 "돌아가라" 고 하였고, 포졸들도 그를 체포하지 않아 집으로 돌아갔다.
얼마 후, 서울에서는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와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신부를 체포하기 위해 포졸들을 내려보냈다. 한편, 두 신부의 복사(服事)였던 이재의 (李在誼, 토마스)와 최 베드로(최방제의 형)가 서울의 박해 사정을 신부들에게 보고하러 길을 가던 중 정화경을 만났다. 이들은 정화경의 예전 소행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가까이 하지 않으려 했으나 정화경의 요청으로 함께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서울에서 파견된 포졸들을 주막에서 만났다. 이들은 정화경을 알아보고 반가워하며 그에게 다가가 두 신부가 서울로 가는 즉시 종교의 자유가 선포될 것이라며 또다시 그를 꾀였다. 그러면서 함께 있던 이재의와 최 베드로 역시 신자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그들을 불렀으나 이들은 포졸들을 무시하고 길을 계속 떠났다. 정화경은 결국 이번에도 포졸들에게 속아 앞에 지나간 두 행인이 신부가 있는 곳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그러자 포졸들은 신부를 찾아 오라고 정화경을 풀어 주니, 이제서야 그는 포졸들의 계략을 눈치채고 피신하여 신부를 찾아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고해성사를 본 후 신부를 피신시켰다. 결국 정화경은 9월에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치도곤 100대를 맞는 등 심한 고문을 받은 뒤, 이듬해 1월 23일(음1839년 12월 19일) 포도청 옥에서 교수형을 받고 33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정화경은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으며,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 참고문헌 《기해일기》/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 증언록》/<달레 교회사》 중. 〔洪延周〕
정화경 (1807~1840)
鄭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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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

꼬임에 빠져 성 앵베르 주교의 거처를 가르쳐 주는 정화경 안드레아(탁희성 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