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

帝國主義

〔라〕Imperialismus · 〔영〕Imperi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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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정책을 추구한 나폴레옹 3세에 대한 풍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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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정책을 추구한 나폴레옹 3세에 대한 풍자화.

한 국가가 다른 한 국가나 여러 국가에 대해 정치적 ·군사적 · 문화적 권력과 지배를 행사하는, 그리고 착취와 불평등한 교환과 종속을 통하여 잉여 가치, 원료, 노동력등을 수취하는 국가 간의 팽창주의적 정책의 한 형태.
〔개 념〕 제국주의는 적어도 19세기 중엽 이후 독점 자본주의의 형성 · 발전과 연관되어 있는 현상이다. 즉 제국주의는 독점 자본주의 단계에 들어선 서구 열강들이 자본 투자처를 찾아 해외 식민지 쟁탈에 뛰어들고, 결국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라는 파국에서 정점에 이른 상황과 연관되어 있다. 물론 '제국주의적' 외적 형태, 즉 강대국에 의한 약소국의 점령과 지배 그리고 대외적 팽창이라는 권력 정치적 현상은 훨씬 오래 전부터 존재해 왔다.
첫째로, 공물과 군사적 정복에 의해 유지되었던 고대 세계의 제국들이 있었다. 단명했던 아테네 해상제국의 토대는 대내적인 민주주의와 대외적인 제국주의의 결합에 있었다. 또한 알렉산더 대왕(기원전 336~323)의 제국과 로마 제국이 있었다. 로마는 고대에 광대한 제국을 이루었으며, 후대 세계에 식민 제국의 전형으로 간주되었다. 또한 고대 제국에는 몽골 제국, 페르시아 제국, 중국 등이 포함될 것이다.
둘째로, 지리상의 발견을 계기로 서구 세계의 식민 정책 추구와 관련된 식민주의(colonialism) 시기가 있었다. 대략 15~18세기의 이 시기에 서구 열강들은 비서구 지역에 군인과 관료, 상인, 성직자 등 자국민을 보내 식민지를 개척하도록 하였다. 이 식민주의의 초기 단계에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지배하였고, 이어 17세기에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가 주도권을 잡게 된다. 이들 국가들은 아프리카, 중남미, 인도 등지에 교역소를 설치하여 노예, 황금, 광물, 향료 등과 노예 노동을 통한 생산물을 본국으로 가져갔다. 이 시기가 이후의 제국주의 시대와 구별되는 것은, 이 시기는 중상주의 시대로서 노예와 사치품 중심의 상업적 교환 체제였다는 점이다. 1800년을 전후한 수십 년간은 자본주의의 발전 시대와 중상주의 시대를 구분 짓는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이 시기에 자유로운 임금 노동자가 시장에 판매하기 위한 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사적으로 소유된 기업에 고용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가 확립되어 갔다. 그러나 그 이후 19세기 말경에 나타난 대외 팽창의 현상에 대해 제국주의라는 명칭을 부여했을 때, 그 의미는 앞선시기의 '제국주의적' 현상들과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그리고 그 질적인 차이는 자본주의와의 관련성과 제국주의 범위의 전세계적 포괄성에 있었다.
넓은 의미에서 산업 혁명은 자본주의의 주요 중심부에서 지속적인 자본 축적과 발전이 이루어졌던 19세기 대부분을 통해 진행되었다. 영국을 중심으로 새로운 공업방식이 각 산업으로 연달아 도입되고, 그와 동시에 유럽과 북미의 다른 지역으로 파급되었다. 19세기 중반에 독일과 미국이 영국에 대한 중요한 산업상의 경쟁자로 등장하였고, 일본도 산업화를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세계가 명백하게 '선진' 지역과 '저발전' 지역으로 나누어지고, 새로운 교역 방식이 등장하여 중상주의 시대의 특징이었던 사치품 교역을 대체해 버렸다. 발전된 자본주의 중심부 국가들은 공업 생산품을 수출하고, 그 대신 곡물과 원료를 수입하였다. 19세기 말에 이르면 자본의 경쟁을 통한 이합 집산과 독점화 경향이 나타나고, 막대하게 투자된 자본의 투자처를 찾아 해외 영토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경기의 불황과 열강 간의 경쟁은 해외 영토를 향한 쟁탈전을 가속화시켰다. '제국주의' 라는 용어가 광범위하게 유포되고 논쟁의 중심으로 부상하게 된 것은 바로 이때였다.
〔어원과 전개〕 '제국주의' 라는 용어는 19세기 이전에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제국 건설을 꿈꾸었던 나폴레옹 3세(1850~187)의 정책을 묘사하는 용어로 '제국주의'(imperialisme)라는 프랑스어가 최초로 등장한 이래, 1860년대에 '제국주의' 는 프랑스 제국과 동의어로 인식되었다. 또한 나폴레옹 3세의 전제정치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마르크스(K. Marx, 1818~1883) 역시 '제국주의' 라는 용어를 현대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나폴레옹 3세의 개인 통치를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하였다. 그가 후진 지역에 대한 선진 국가들의 지배를 묘사하는 용어로 사용한 것은 '식민주의' 였다.
당시 영국에서 '제국' (empire)은 인기가 없는 용어로서, 제대로 회자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특히 자유주의자들은 1870년 프랑스 제국의 붕괴,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의 억압적이고 후진적인 성격 등에 비추어 제국이란 용어에 부정적 의미를 부여하였기 때문이다. 1876년 영국의 총리인 디즈레일리(B. Disraeli, 1804~1881)의 정책을 비난하려는 의도로 <스펙테이터>(The Spectator)라는 주간지에 '영국 제국주의' 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으며, 이후 '제국주의' 는 점차 정치적 논쟁의 화두로 부상하였다. 그런데 19세기 말 서구 각국에 제국주의를 추구하는 열망이 퍼졌다. 1890년대 초 당시의 경제적 불황, 각국에서 취해진 보호 관세, 유럽 각국 간의 식민지 쟁탈 경쟁의 심화, 이러한 상황에서 강화된 민족주의 정서 등이상승 작용을 일으켜 제국주의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되었다. 자유주의자 가운데서도 영국의 식민지 지배를 긍정적인 것으로 찬미하고, 미개인을 교화하는 것이 영국인의 의무로 정당하다는 제국주의의 옹호자들이 나타나기시작하였다. 이러한 지적 세계의 변화는 당시의 상황과관련이 있으며, '제국주의' 는 당시의 변화된 자본주의현실과 관련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았다.
19세기 후반은 레닌(V.I. Lenin, 1870~1924)이 '자본주의의 제국주의 단계' 라고 불렀던 시기로 돌입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후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 이 '제국주의' 라는 용어를 20세기의 자본주의를 지칭하는 것으로 제한하였으며, 그 이전 시기의 팽창주의를 기술하는 데에는 다른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 당시 기업의 규모는 급속히 확대되고 카르텔(cartel)이나 트러스트(trust) 및 그외 여러 형태로 독점이 급속하게 파급되었다. 게다가 자본 수출이 대규모로 증대되었는데, 이는 상품 무역을 대신하기보다는 그에 부가되는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아직 식민지로 장악되지 않은 얼마 안 남은 지역(특히 아프리카)을 장악하려는 쟁탈전이 벌어졌으며, 이는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파국적 결말로 귀결되었다.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영국의 경제학자이자 언론인 이었던 홉슨(J.A. Hobson, 1858~1940)이 1902년에 《제국주의에 관한 연구》(Imperialism : A Study)를 출간한 이래, 20세기 초에 특히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제국주의에 관한 많은 연구 성과가 쏟아졌다.
제1차 세계대전까지, 나아가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후 대부분의 비서구 국가들이 독립을 얻기까지 제국주의는 당시 국제 정치의 핵심 화두였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를 '고전적 제국주의' 라 칭하기도 하는데, 이는 이 시기를 이후의 '신제국주의' 혹은 '신식민주의' (neo-coloniaism) 시기와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거쳐 대다수의 식민지가 독립을 획득한 이후, 제국주의 시대는 독립된 민족 국가의 시대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그렇다면 제2차 세계대전 후 식민지들이 독립한 상황에서 제국주의는 종식된 것인가? 가나의 초대 총리와 대통령을 역임한 은크루마(K. Nkrumah, 1909~1972)를 위시한 일군의 이론가들은, 제3 세계의 많은 탈식민지 국가들이 독립 후에도 지속되는 경제적 낙후성에 직면해 있으며, 과거와는 다른 간접적 방식으로 제국주의적 지배가 지속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은크루마는 탈식민주의 이후에도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이 경제 원조의 확대, 서구적인 소비와 교육, 문화 양식의 전파와 같은 간접적 수단을 통해 정치적으로 독립한 제3 세계 국가들에게 여전히 영향력을 지속시키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의 배경은 무엇인가?
식민지에서 해방된 국가들은 민족적 잠재력으로 저발전과 후진성에서 탈피하여 발전과 근대화를 향해 나아갈것이라고 기대했었다. 그러나 많은 탈식민지 국가들은 부족한 자본과 낮은 교육 수준 및 훈련 제도, 낮은 기술 수준으로 자립적 발전의 기반을 갖추기 어려웠으며, 외채는 더 많은 외채로 이어졌다. 이러한 탈식민지 국가들의 재앙은 점차 일탈이나 예외가 아닌 것으로 생각되었고, 서구 국가의 발전 경로를 모범으로 삼는 '근대화론'
과는 다른 설명을 필요로 하였다. 이러한 탈식민지의 경제 상황과 문제 의식은 세계 경제 체제가 구조화시킨 경제적 종속의 상황에 주목하는 신제국주의적 관점을 낳았다. 이러한 관점의 대표적인 것이 라틴 아메리카를 중심으로 발전된 '종속 이론' (dependency theory)이었다. 이 이론은 저개발 주변부 국가인 제3 세계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 의해서 '저발전의 발전' 을 지속하는 상황에 있음을 주목하였다. 즉 선진 자본주의 국가인 '중심부' 의 경제가 저개발 국가들인 '주변부' 경제로부터 불평등 교환에 의해 잉여 가치를 수탈하는 상황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경제 과정을 통한 제국주의적 착취와 지배는 지속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제국주의라는 용어는 약소국에 대한 억압과 착취라는 말과 동의어가 되었다. 그리고 제국주의의 의미는 강대국이 약소국에 행사하는 통제와 영향력을 지칭하는 것으로 확장되었다.
〔이 론〕 많은 제국주의 이론가들은 제국주의가 자본주의 발전과 관련되어 있다는 명제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어떻게 그리고 왜 자본주의 발전이 제국주의를 낳는가,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성숙의 표현인가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이로부터 도출되는 정치적 대안은 무엇인가 등의 문제에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차이를 낳게 하는 중요한 구분선은 제국주의의 원인이나 본질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받아들이느냐 배척하느냐와 관계가 있다. 또한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관련성을 인정하면서도 경제적 차원만이 아니라 경제 · 정치 · 사회의 상호 작용 속에서 제국주의를 설명하려는 보다 총체적인 관점도 있다. 아울러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의 관련성, 즉 제국주의의 이념적 측면에 주목하는 관점은 제국주의의 대중 동원의 기제를 해명해 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사회적 제국주의(social imperialism) : 일차적으로 객관적인 경제적 사실에서 제국주의의 원인을 찾지 않고 경제 · 사회 · 정치적 요인들의 상호 작용에서 찾는 이론이 다. 이는 제국주의의 추진 동학에 초점을 맞춘 관점이다.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제국주의는 대내적 · 사회적 압력을 희석시키고 국가를 통합하고 국내적 긴장의 뇌관을 제거하기 위해, 정치 엘리트에 의해 추구되는 대외 팽창정책으로 설명된다. 즉 제국주의는 사회 · 경제적 변화의 결과로 자신들 권력의 사회적 기반이 수축되거나 위협받았을 때, 그 우월한 지위를 지키기 위해 무엇인가를 하도록 강요받은 정치 엘리트들의 반작용이라고 제시될 수 있는, 제국 팽창의 모든 사례로 규정된다.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 많은 학자들은 현대의 제국주의를 19세기 민족주의적 대중 운동의 본질적인 산물로 설명한다. 리히트하임(George Lichtheim)은 제국주의를 극단적인 민족주의의 산물로 해석하였다. 즉 "민족주의는 기회가 주어지는 어떤 경우에든지 제국주의로 그 형태를 바꾸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아렌트(Hannah Aren- dt, 1906~1975)는 《전체주의의 기원》(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1951)이라는 저서의 <제국주의>라는 긴 논문에서, 제국주의의 종족 이념과 제국주의 정책의 반자유주의적 구조가 파시즘 등장의 서곡이었다고 주장하였다.특히 제국주의와 파시즘적인 사고 방식 간의 이념적 유사성을 강조하였다. "히틀러주의(Hitlerism)는 1930년대에 국제적으로 그리고 유럽 전역에서 강력한 호소력을 행사하였다. 그것은 당시 인종주의가, 비록 국가 교의로 채택된 곳은 독일뿐이었지만, 세계 도처에서 여론의 강력한 조류였기 때문이었다. ··· 나치는 자신들의 최선의 선전이 종족 정책이라고 확신하였다. ··· 18세기에 그 뿌리를 갖는 인종적 사고(race-thinking)는 19세기 동안 모든 서구 국가들에서 동시적으로 나타났다. 인종주의는19세기와 20세기 전환기 이래로 제국주의 정책의 강력한 이데올로기였다."
유럽에서의 인종주의 기원은 매우 오랜 역사를 지니고있다. 이는 유대인에 대한 오랜 차별과 편견의 역사를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유대인에 대한 인종주의적 편견은 히틀러(A. Hitler, 1889~1945)의 유대인 박해에서 비극적인 정점을 이룬다. 유럽에서 인종주의적 인식이 퍼지게 된 중요한 계기는 식민지 발견과 여행을 통해 접하게 된 '야만적 사회' 에 대한 관심이었다. "19세기보다 훨씬 이전에 비유럽 세계에 대한 광범위한 소식들이 일반 시민들에게도 전해질 수 있었다." 그 후 유럽에서 인종주의는 점차 영향력을 넓혀 갔다. 즉 '상속' (inheri-tance)의 개념을 기초로 시민권 개념을 보편적 인간의 권리가 아니라 영국민의 권리로 옹호한 보수주의 사상가버크(E. Burke, 1729~1797)의 관점, 영국민의 우월성과 팽창의 불가피성을 강조한 디즈레일리 등의 정치가들, 적자생존' 을 중심으로 한 다원주의, 이를 사회 현상과 인종적 우열에 적용한 사회적 다원주의(Social Darwinism)등이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쳤다. 이러한 지적 분위기 속에서 대중의 여론은 서구 문명에 대한 우월주의, 비서구문명에 대한 편견과 멸시, 팽창과 정복의 정당화를 내포한 인종주의에 감염되어 갔다.
결국 1870년대 이후부터 유럽의 민족 국가에서 점점강하게 발전된 현대 민족주의는 제국주의 이념의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다. 제국주의적 팽창과 군중(mob)과의 결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어떻게 대중들은 비이성적 민족주의와 팽창주의에 동원되고 지지를 보냈던 것인가?사회 운동에 거대하게 동원된 대중은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제국주의 시대의 새로운 현상은 두 잉여(superfluous) 세력, 즉 잉여 자본과 잉여 노동력이 함께 모국을 떠났다는 점이다. 무제한적 팽창을 향한 제국주의의 이념은 이지속적인 해악에 대한 항구적인 치유책인 듯 보였다. 이에 대중들은 제국주의적 팽창을 지지하고 이에 동원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자본과 대중의 동맹은 매우 납득하기 힘든 것이다. 인류를 주인과 노예 종족으로, 우등 종족과열등 종족으로, 유색인과 백인으로 분리하는 제국주의 시도를 대중이 지지하였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제국주의에 대한 대중적 저항이 약했다는 역사적 사실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 원인은 민족주의적인 비합리적 정서의 기묘한 호소력과 이를 조장한 당시의 정치 세력과 언론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제국주의시대의 대중은 계급 의식을 지닌 구성원으로서가 아니라 무의식적이고 비이성적이며 집단적 정서에 길들여진 집합적 군중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의 진전은 합리주의적 정신과 참여 의식으로 훈련되지 못한, 자본주의 경기 순환이 노출되어 사회적 불만은 증대하였으나 배출구를 발견하지 못한 거대한 집단을 낳았다. 이들은 제국주의적 정치가들에 의해 이용되고 종족 이념에 고무되면서, 민족주의의 제국주의로의 퇴화, 자유 민주주의의 전체주의 로의 퇴화 과정의 토양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경제적 제국주의(economic imperialism) : 이상의 이념적 설명은 제국주의의 해악과 이념에 대해 풍부한 시사를 제공하지만 보다 본질적인 측면은 설명해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설득과 설득에 의한 여론의 확산은 경험이나 필요에 대한, 곧 직접적인 정치적 필요에 대한 호소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의식과 여론, 이념에는 물질적 · 정치적 필요가 존재하는 것이다. 실상 제국주의의 중심적 측면은 제국주의 추진의 근본적 · 현실적 동인과 관련된 경제적 이해라 할 것이다. 제국 건설의 근본적인 추진력을 서구의 자본주의 발전과 보다 확대된 세계 경제에서 찾으려는 관점이 '제국주의 경제 이론' 이라 할수 있다.
① 자유주의적 관점 : 20세기 초에 홉슨, 슘페터(J.A.Schumpeter, 1883~1950), 레닌 등의 저자들은 자본주의의 발전 양상과 연관지어 제국주의를 정의 내리려고 하였다. 홉슨은 20세기 초에 현대 제국주의 이론을 수립하였는데, 이는 이 분야의 고전이 되었고 커다란 영향력을 미쳤다. 그는 영국 자유당 좌파에 속하는 정치 평론가로서 제국주의의 철저한 반대자였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가 모든 경우에 반드시 제국주의 정책을 발생하게 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주장하였으며, 제국주의를 발생시킨 것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영국 사회의 금권 정치적인 구조와 불평등한 분배라고 보았다. 슘페터는 자본주의를 유익한 것으로 본 홉슨의 견해에 공감하면서 그의 견해를 따라 제국주의를 '무제한이고 강압적으로 팽창하려는, 어느 한 국가 일부의 무목적적인 경향' 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러나 슘페터가 홉슨과 다른 점은, 제국주의의 무목적적인 경향이 팽창을 통해 이익을 얻는 소수 자본가들의 이해가 작용한 것이 아니라 독재적이고 군사적 가치 기준에 의해 좌우되는, 보다 오래된 전기적(前期的) 집단들이 정부와 사회에 끊임없이 영향력을 행사한 탓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슘페터는 현대 제국주의를 절대 군주 시대부터 유래한 잔존 정치 구조의 존속 탓으로 돌렸다. 반면 경쟁과 자유 시장에 기초한 순수한 형태의 자본주의는 귀족 정치적인 사회 형태에 수반되는 모든 무력적이고 무분별한 팽창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고, '전투적 본능 은 과거의 유물로 사라지게 될 것으로 보았다.
② 마르크스주의적 관점 : 이 관점은 제국주의를 자본주의 발전의 결과이자 자본주의의 '마지막' 혹은 '성숙한' 단계의 표현이라고 보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마르크스는 산업 자본주의의 세계적 팽창을 불가피하고 객관적인 진보로 보았다. 그는 특히 아일랜드, 인도, 중국에서 의 열강들의 지배를 상세히 다루었고, 이들 식민지에서 선진 열강이 가져온 비참과 착취를 명백히 인식하였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역사적인 견지에서 영국의 인도 정복을 객관적으로 진보적인 것이라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정복에 의해 동양적 전제에 관련한 지배와 생산 양식이 근절되고, 근대 공업 사회의 기초가 놓여졌기 때문이었다. 또한 마르크스는 아일랜드 노동자와 영국 노동자 간의 분열이 줄어들고 영국에서의 귀족 지배 기반을 무너지게 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영국 귀족에 대항하는 아일랜드에서의 민족주의적 혁명을 옹호하였다. 즉 "우리의 첫 번째 목표는 영국에서의 사회 혁명을 고무하는 것이다. ··· 영국 노동자 계급의 해방을 위한 전제 조건은, 현재 아일랜드의 강요된 영국과의 통합(아일랜드의 노예 상태)을 가능하다면 평등하고 자유로운 연방적 상태(confederation)로, 필요하다면 완전한 분리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아일랜드의 해방도 궁극
적으로 영국 노동자 계급의 해방과 나아가 세계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수단이라는 관점에서 고려된 것이었다. 즉 마르크스 관점에서 결정적인 것은 주변부가 아니라 중심부의 자본주의 발전과 그 영향이었다.
제국주의를 전세계적 규모의 자본 운동과 연결 지은 것은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1871~1919)였다. 그녀는 제국주의를 이렇게 정의하였다. "자본 축적의 역사적 과정은 비자본주의적 사회 계층의 존재에 의존한다. ···제국주의는 아직도 세계의 비자본주의 지역으로 남아 있는 지역을 얻기 위해 경합적으로 투쟁하는 자본 축적의 정치적 표현이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자본주의가 전체 경제 구조를 지배하고 모든 사회 계층이 생산과 소비망으로 들어오게 되었을 때, 자본가들은 전체 시스템의 붕괴냐 아니면 아직 자본주의에 종속되지 않은, 따라서 새로운 비자본주의 공급과 수요를 제공할 새로운 나라들로 침투할 것이냐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제 시장 창출을 위한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경쟁은 적대와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 군국주의적 제국주의는 식민지 국가와 노동자들에게는 억압과 야만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국가와 비자본주의 지역 간의 필연적 연관에 관한 그녀의 주장은 놀라운 것이었으며, 오늘날 국제적 불평등과 억압이 존속되는 상황에도 여전히 적실성(適實性)을 지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레닌은 독일 사회 민주주의 내의 맹목적 애국주의(chau-vinism)적인 경향에 반대하는 동시에, 가장 발전된 산업국가들에서 왜 아직도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가라는 의문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다. 레닌은 제국주의를 혁명의 일시적인 지연이며, 사멸하는 자본주의의 단계라고 하였다. 그러나 종국에는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으로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경쟁이 격화되며, 이는 결국 제국주의 전쟁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식민지 민족 해방 운동에 의한 제국주의의 약한 고리가 분쇄되는 사회주의 혁명의 전야(前夜)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특히 레닌은 제3 세계 민족 해방 운동과의 동맹 가능성을 중시하였으며, 민족 해방 운동을 통한 식민지 체제의 붕괴를 사회주의 혁명으로 인도하는 최상의 길로 보았다. 물론 레닌의 제국주의 이론은 중심국과 식민지 사이의 관계에 강조점을 두기보다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변화에 더 비중을 두고 있지만, 레닌의 전략은 스탈린(J.Stalin, 1879~1953), 모택동(毛澤東, 마오쩌둥, 1893~1976) ,파농(F. Fanon, 1925~1961), 체 게바라(Che Guevara, 1928~1967) 등 후대의 혁명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들에게는 자연히 주변부로부터 자본주의를 전복시킨다는 강조점의 이동이 있었다. 이러한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제국주의 개념의 변용은 오늘날까지 반제국주의 운동에 중대한 영향을 끼쳐 왔다.
신식민주의 이론 : 국가를 기초로 하는 정치적 지배의 전통적 형태는 사라져 가고 있지만, 이를 거대 독점과 다국적 기업에 의한 경제적 지배가 대체하고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이에 따라 제국주의는 특히 미국에 기반을 둔국제적이고 금융 자본주의적인 기업에 의한 비공식적 지배를 의미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선진 제국 기업의 경제 지배는 이의 반대 측면인 '저발전의 발전' 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탈식민화는 단지 자본주의 전술상의 변화를 의미하지 전략상의 변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식민지 기간은 중심국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종속 국가의 사회 · 경제적 제도를 적합하게 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이렇게 되면 '식민 관계' 는 공식적인 정치적 독립의 확립 이후에도 지속되며, 비공식적 경제 · 금융 · 사회 제도를 통하여 지속된다. 이 이론은 제국주의는 저발전의 악순환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보는 이론과 비슷하다. 이는 흔히 '종속 이론' 이라 불리는 이론에 의해 주장되는 관점으로서, 제3 세계는 식민 제국이 붕괴된 이후 독점 자본주의에 의해 철저하게 착취되고 있다는 것이다. 은크루마, 바란(Paul A.Baran), 프랑크(André Gunder Frank), 엠마누엘(A. Emma-nuel), 아민(S. Amin) 등이 이러한 관점을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종속된 상황에서 저발전 상황이 영구적인 것이고, 그래서 사회주의혁명이 불가피한가 아니면 제한적 '발전' 이 가능한가의 물음에 대한 인식 차이에 따라 정치적 입장이 다르고 이론적 내용에도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주변부에 '저발전' 을 구조화시키고 있다고 보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이들의 견해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자들의 관점과 철저하게 다르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전세계의 생산 방식과 전세계인구 대다수의 생활 수준이 점점 더 일치되리라고 생각하였다. 레닌 등이 이 과정의 불균등성을 강조하고 예상했다 할지라도, 선진 지역과 후진 지역 간 격차의 심화 현상은 예기치 못하였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특징은 중심부-주변부 구조(metropolis-satellite structure)이며, 이 구조에 편입된 주변부 지역은 발전이 아니라 '저발전의 발전' 이 이루어진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변부가 종속 상태로 되어 저발전의 영구화에 이해 관계가 있는 특정 형태의 현지 지배 계급을 창출한다는 점이다.
주변부 국가들은 절대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상대적으로 빈곤해지는 데다가 철저히 예속된다고 가정할 수 있을까? 선진 국가들의 오늘날의 '발전' 은 제3 세계 국가들의 빈곤의 결과인가? 주변부의 '저발전의 발전' 이 중심부 발전에 얼마나 기여했는가 하는 점은 불분명하다. 또한 중심부가 남미의 근대화를 고의적으로 방해했다는 증거는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절대적 빈곤의 증대가 아니라 상대적 빈곤의 증대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제국주의 시대 이후 지난 100여 년 동안 생산력과 생산 수준, 소비 수준에 있어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과 나머지 국가들 간의 격차가 엄청나게 벌어졌다는 것은 지나친 지적이 아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저발전은 단순히 양적 성장의 결여나 장애를 넘어서, 발전 과정의 질적인 파행성-종속적이고 왜곡된 재생산 체제의 고착화, 시장의 협소, 국제 수지 압박, 기술적 종속-을 수반하고 있다는점이다. 따라서 현대의 '신제국주의' 아래에서 '노동자계급의 빈곤을 수반한 서로 상이한 지역들 간의 불균등한 발전' 이 이루어지고 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가톨릭 교회의 입장〕 가톨릭 교회는 사회 회칙을 통해 제3 세계가 처한 상황에 대해 자주 언급하였다. 물론 이들이 겪고 있는 상황이 제국주의적 입장에 기인한 것으로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모든 민족과 국가의 균형적인 발전에 대해서는 명확히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교회는 자유 경쟁이 자멸을 저질렀으며, 경제 권력이 자유 시장을 뒤엎고, 이윤 추구의 욕망은 지배의 야망으로 이어져 전반적인 경제 생활은 어렵고 잔인하고 불안정하게 되었다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국가 간의 관계에서 두 가지 제국주의 형태가 생겨났다고 평가하였다. "하나는 경제적 '민족주의' 또는 더 나아가면 경제적 '제국주의' 이며, 다른 하나는 조금도 덜 유해하거나 덜 혐오스럽지 않은 금융상의 '국제주의' 또는 '국제적 제국주의' 로서 후자는 이익이 있는 곳에 조국이 있다고 주장한다" (<사십 주년> 42항). 이러한 언급을 인용하면서 교황 바오로 6세(1963~1978)는 무제한의 자유주의가 그 원인이며, 폭군같은 독점 상태로 길을 닦아 놓았다고 하였다. 이러한 견해들은 제국주의를 경제적 입장에서만 본 것이다. 그런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사회적관심>(Sollicitudo Rei Socialis, 1987. 12. 30)에서 탁월하게 현대 세계에 대해 진단하면서 국제 정치를 분석하였다. 교황은 과거 40년 동안의 동서 대립이 제3 세계에 해를 끼쳐 왔다고 언급하였다. 그러면서 "세계의 현재와 같은 분열은 개발 도상국 또는 저개발국에서 저개발의 조건을 실제로 변혁하는 데 있어서 직접적인 장애물"이라고 하였다. 또한 "두 블록 다 자체 안에 보통으로 말하는 제국주의, 아니면 일종의 신식민주의 형태로의 상황을 내포하고 있다" (22항)라고 평가하였다. "그러므로 다음 사실을 감지함은 매우 중요하다.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유지 되는 두 블록으로 나누어진 세계, 상호 의존과 연대 의식 대신에 갖가지 제국주의가 휩쓰는 세계는 죄의 구조에 종속된 세계가 될 수밖에 없다" (36항). 이러한 평가를 통해 교황은 다음과 같이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온갖 유형의 제국주의와 자기네 패권을 존속시키려는 결의를 극복하고서 더욱 강하고 부유한 국가들은 다른 국가들에 대해서 윤리적인 책임감을 느껴야 마땅하며, 그렇게 함으로써만 진정한 국제 체제가 건설될 것이니 그런 체제는 모든 민족들의 평등을 기반으로 하고 동시에 그들의 합법적인 차이성에 대해 필요한 존중을 하는 것이 될 것이다"(39항). 이러한 입장은, 교회가 여러 가지 형태의 제국주의를 반대하며, 상호 간의 연대성을 통해 진정한 국가 체제의 건설을 요청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 국가주의 ; 식민주의)
※ 참고문헌  몸젠, 이강희 역, <현대 제국주의론》, 종로서적, 1984/ 앤드류 포터, 석화정 역, 《유럽 제국주의 연구의 현황과 과제》, 한양대학교 출판부, 2001/H. Arendt, The Origins ofTotalitarianism, NY, Harvest, 1951/ A. Brewer, Marxist Theories of Imperialism, A CriticalSurvey, London, 1990/ C.D. Kernig ed., Marxism, Communism and Western Society, New York, Herder and Herder, 1972/ Adam and JessicaKuper, The Social Science Encyclopedia, London, Routledge, 2003/ G.Lichtheim, Imperialism, New York · London, 1971/ K. Marx · F. Engels,On Colonialism, Moscow, Progress, 1968/ T. Meyer · K.-H. Klar · S. Mill-er · K. Novy · H. Timmermann hrsg., Lexikon des Sozialismus, Köln,1986. 〔宋秉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