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파리의 수호 성인, 프랑스어 이름은 주느비에브(Geneviève). 축일은 1월 3일.
〔생 애〕 419년 혹은 422년 파리에서 멀지 않은 작은 마을 낭테르(Nanterre)에서 세베르(Sévère)와 제롱시아(Gérontia) 사이에서 태어났다. 성녀의 부모는 가난한 농 부였다고 하지만, 부유하고 존경받는 도시 사람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제노베파가 세상을 떠난 뒤 씌여진 그녀의 전기에 따르면, 429년에 제르마노(Germainus of Auxerre, 378?~448)를 만났다고 한다. 이때 제르마노는 펠라지우스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루푸스(Lupus of Troy-es)와 함께 영국으로 파견되어 가는 도중이었다. 그들은 지나는 길에 낭테르에 잠시 머물렀고, 제르마노는 설교를 하는 도중 어린 여자 아이가 경건하고 진지한 자세로 설교를 듣는 모습을 보았다. 설교가 끝난 뒤 제르마노는 그 여자 아이를 불러달라고 하였다. 당시 일곱 살이었던 여자 아이에게 여러 가지를 물은 뒤 성덕을 향해서 꾸준히 나아가라고 격려했다. 그 아이가 제노베파였다. 제르마노는 어린 제노베파가 하느님께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어하는 것을 알고 그 부모들을 만났으며, 그녀의 모범과 가르침으로 많은 처녀들이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게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낭테르 근처에는 수녀원이 없었기에 제노베파는 집에 머물면서 기도 생활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제노베파가 언제 수도자가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제르마노가 사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녀에게 수도복을 입혀 주었다고도 하고, 16세 무렵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두 명의 동료와 함께 파리의 주교 빌리코(Vilicus)에서 수도복을 받았다고도 한다. 어쨌든 그녀는 부모가 돌아가시자 곧 파리로 가서 대모와 함께 머물며 자선과 금욕의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전기에 따르면, 15세 때부터 50세 때까지 계속 단식을 실천했고, 주일과 목요일에만 단식하지 않았다고 한다. 장상들이 그녀의 건강을 걱정하여 단식을 금할 것을 명하자 단식을 그쳤다고 한다. 이런 성인 주변에는 그 모범을 보고 모여든 처녀들이 큰 무리를 이루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의 주변에는 시기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들은 제노베파가 신성을 모독하는 위선자라고 비난했다. 또한, 제노베파가 환시를 자주 체험하자, 그녀의 환시와 예언을 기만과 사기로 취급했다. 그녀를 질시하는 이들이 많은 음모를 꾸몄지만, 제르마노의 중재로 그들의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파리의 주교는 그녀에게 파리에 살며 수도 생활을 원하는 처녀들을 돌보는 임무를 맡겼다. 제노베파는 가르침과 모범으로 그들을 높은 성덕으로 이끌었다. 451년 훈족의 왕인 아틸라(Atila, 434~453)가 쳐들어와 파리를 위협하자, 주민들은 모두 피난 준비를 서둘렀다. 이때 제노베파는 하느님을 믿고 용기를 가지라고 격려하면서 회개와 보속을 하면 파리는 안전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사람들은 그녀의 말을 믿었고, 아틸라의 군대는 오를레앙에서 패배하였다. 몇 해 뒤 프랑크족의 왕인 메로비히(Merowig)가 파리를 점령했다. 점령 기간 동안 제노베파의 자선과 자기 희생은 더욱 빛났다. 그녀의 영향을 받은 메로비히와 후계자인 아들 힐데리히 1세(?~481/482), 손자인 클로비스 1세(466?~511)는파리 시민들을 특별히 관대하게 대했다. 특히 힐데리히1세는 제노베파로부터 영향을 받아 파리의 초대 주교이자 순교자인 디오니시오(?~258)의 무덤 위에 성당을 짓게 하였다고 한다.
〔기념 성당과 공경〕 제노베파는 파리에 베드로와 바오로를 기념하는 성당을 세우려고 처음으로 계획하였다.이 성당은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511년 클로비스 1세에 의해 건축되기 시작되었다. 그녀가 이듬해 세상을 떠나고 성당이 완공되자 그녀의 유해는 성당에 안치되었고, 이 성당은 이후 주느비에브 성당이라고 불렸다. 성인의 묘소에서 기도한 이들에게 수많은 기적이 일어나자 사람들은 그녀를 성녀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847년 노르만인들이 성녀의 묘를 파괴해 부분적으로 복구되었으나 1177년 완전히 복구되었다. 이 성당이 다시 낙후되자, 1746년 루이 15세(1715~1774)가 새로운 성당의 건축을 시작하였다. 이 성당이 봉헌되기 전에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났고 1791년 헌법 제정 위원회에 의해 접수되어, 프랑스의 저명 인사들이 묻히는 팡테옹(Panthé-on)이 되었다. 이 곳은 1828~1830년과 1851~1870년에 다시 성당으로 사용되었으나 1885년에 프랑스의 국립 묘지가 되었다. 성녀의 유해는 1793년 플라스드그레브에서 화장되었으며, 유골은 생테티엔뒤몽(Saint-Etienne du Mont) 성당에 안장되었다.
성녀에 대한 신심은 많은 기적을 낳았다. 834년 홍수가 일어나 파리가 완전히 침수되는 위기에 놓였을 때 성녀에게 전구하여 이 위험에서 벗어났다. 1129년에 열병으로 만 사천 명이 목숨을 잃었을 때, 성녀를 기리는 행렬 도중 병마가 사라졌다고 한다. 1130년 대립 교황 아나글레토 2세에 맞서 프랑스 왕의 도움을 청하러 파리에 온 교황 인노첸시오 2세(1130~1143)는 이 기적을 개인적으로 검토한 후, 기적임을 확신하여 그 기적이 일어난 11월 26일을 축일로 지낼 것을 명하였다.
제노베파의 대표적인 상징은 그녀가 성당에서 밤에 기도하기 위해 갔을 때 찾아왔던 마귀와 함께, 또는 마귀가 없이 그려지는 초이다. 그녀의 이름은 예로니모 순교록에 등장한다. 그리고 그녀를 기념하는 전례는 오래되었지만, 그녀의 전기는 세상을 떠난 지 몇 세기 뒤에 만들어졌다.
※ 참고문헌 D. Kelleher, 《NCE》 6, 2003, pp. 134~135/ P. Viard,《Cath》 4, pp. 1829~1831/ D. Farmer, Oxford Dictionary of Saints,Oxford Univ. Press, 1996, pp. 195~196/ Storia dei Santi e della SantitàChristiana, Grolier Hachette International, vol. 3, 1991 pp. 136~141. 〔宋炯萬〕
제노베파 (419/422?~512)
Genovefa
글자 크기
10권

성녀 제노베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