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르마노, 콘스탄티노플의 (634/640?~733)

Germanus Constantinopolitan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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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플의 제르마노.

콘스탄티노플의 제르마노.

성인.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715~730) . 축일은 5월 12일.
제르마노는 세 가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로, 8세기의 반이단론 저술가에 속한다. 그는 성화상 공경의 옹호자이며 성모 마리아에 대한 찬미를 담은 강론을 남겼고 전례를 권장한 분으로서 의미가 있는 사람이다.
〔생 애〕 제르마노는 634년 또는 640년경 동로마 제국의 헤라클리우스 황제(610~641)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 황제 세력간의 왕위 쟁탈 과정에서 거세를 당하였고, 콘스탄티노플의 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성직자들 손에 맡겨졌다. 그곳에서 좋은 교육을 받은 후 668년에 그 성당의 사제가 되었다. 그 뒤 신학 고문으로 인정을 받은 그는 황제에게 영향을 주어 그리스도 단의설을 단죄하기위해 제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680~681)를 소집토록하였다. 705년(706?)에 제르마노는 시지쿠스(Cyzicus)의 주교가 되었다. 그러나 황제 필립피쿠스(711~713)가 그리스도 단의설을 주장하는 이들을 돕기 위해 712년 소집한 주교 회의에서 황제의 강압에 굴복하여 그들의 주장을 복권시키는 문서에 서명을 하였다. 그러나 후에 단의설을 배척하고 정통 교리인 니체아 공의회의 결정을 옹호하였다.
715년 그는 정통 신앙을 지닌 황제 아나스타시우스 2세(713~716)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로 선출되었다. 착좌 후 곧바로 주교 회의를 소집하여 그리스도 단의설 이단과 그 추종자들을 단죄하였다. 725년 황제 레오 3세(717~741)가 성화상 공경을 배척하고 성화상 파괴를 지시한 것에 대하여 강론과 저술로써 단호하게 반대하였다. 계속된 억압에도 굴하지 않았고, 결국에는 항의의 표시로 730년 총대주교직에서 물러나 그리스 아테네근처에 있는 자신의 영지 플라토니움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의 역사적 저술인 《이단자들과 주교 회의에 대하여》(De haeresibus et synodis)라는 책을 집필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733년경 세상을 떠났다. 754년 그는 성화상파괴주의자들에 의해 단죄되었지만, 제2차 니체아 공의회(787)에서 복권되었다.
〔저 서〕 그의 대부분의 저작들은 성화상 공경을 반대하는 황제 레오 3세의 지시로 모두 불태워졌지만, 네 편의 교의 신학적인 서간들이 남아 있다. 그중 세 편에서 성화상 공경의 타당성을 역설하였다. 그 세 편의 서간들은 성화상 공경을 둘러싼 논쟁의 시작을 잘 보여 주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가 많다. 그리고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보낸 편지>(Ad Armenos)는 아르메니아 교회를 겨냥하여 그들이 그리스도 단성설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면서 칼체돈 공의회(451)의 결정을 설명하고 있다.
제르마노는 특별한 가치가 있는 일곱 편의 강론을 통하여 성모 마리아에 대하여 귀중한 가르침을 남겼다. 그가 남긴 이 강론들은 성모 마리아의 승천에 뒷받침이 되는 중요한 근거이다. 그는 성모 공경의 열렬한 옹호자였다. 제르마노는 마리아의 비교할 수 없는 순결함을 강조하였는데, 이것은 후에 교의로 확정된 가톨릭 교회의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를 미리 보여 주는 셈이었다. 그리고 천상의 축복을 세상에 전해 주는 성모 마리아의 중개자 역할을 강조하였다. 마리아에 대한 이러한 두 가 지 관점은 제르마노가 그의 강론 중에 가장 선호하여 자주 다루는 주제였다.
《인생의 한계》(De vitae termino)라는 저서에서 그는, 인생의 의미와 목적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하느님의 섭리를 가르친다. 또한 《가톨릭 교회의 신비로운 역사》(Historiamystica ecclesiae catholicae)라는 저서도 집필하였다. 그 당시의 비잔틴 전례에 대한 해설도 남겼고, 여러 편의 아름답고 섬세한 찬미가들을 만들었다. 그중에 많은 찬미가 들이 오늘날에도 비잔틴 교회의 전례에 사용되고 있다. 제르마노의 다양한 신학적 업적은 특별히 성화상 공경을 옹호하는 서간들을 작성한 사실과 강론을 통하여 천주의 모친이신 성모 마리아의 공경을 옹호한 점, 또한 성스러운 장소에서 거행되는 성찬 전례에 대한 설명으로 전례를 적극 권장한 점 등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또한 찬미가를 작곡한 사람으로서 이름을 남겼다. → 그리스도 단의설 ; 성화상 논쟁)
※ 참고문헌  J.P. Migne, 《PG》 98, pp. 39~454/ translated and commentaried from V. Fazzo, Omelie mariologiche, Roma, 1985/ P.Meyendorff hg.v., On the Divine Liturgy, Crestwood, 1984/ L. Lamza, Patriarch Germanus Ⅰ. von Konstantinopel, Wiirzburg, 1975/ D. Stein, Der Beginn des byzantinischen Bilderstreites, 1980/ P. Plank, Der heili-ge Germanus Ⅰ, 《COst》 40, 1985, pp. 16~21/ Bardenhewer V, pp. 48~51/ F. Cayre, 《DTC》 Ⅵ, pp. 1300~1309/ J. Darrouzes, 《DSp》 VI, pp. 309~311/ F.L. Cross,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Oxford Univ. Press, 1983, p. 561/ P. Plank, 《LThK》⁴, IV, p. 532/ H.G. Beck, 《RGG》 Ⅱ, p. 446. 〔張仁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