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전체를 사목 관할 구역으로 하는 주교구. 주보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 1971년 6월 28일 광주대교구에서 분리되어 지목구로 설정되었으며, 1977년 3월 21일 교구로 승격됨과 동시에 광주대교구, 전주교구와 함께 광주 관구를 형성하였다. 제주도는 가장 늦게 복음이 전파된 지역 중의 하나였고, 본당 설립 초기에는 지역의 종교 상황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지만, 지금은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 가장 복음화율이 높은 지역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특히 제주 교회는 해방과 지목구 설정 이후 꾸준히 본당과 공소의 확대에 힘써 왔으며, 1996년의 지목구 설정 25주년과 1999년의 제주 본당 설립 100주년을 계기로 교구 성장과 지역 사회와의 화해와 나눔 운동에 노력해 오고 있다. 〔역대 교구장〕 초대 지목구장 헨리(H.W. Henry, 玄海) 대주교(197.6.28~1976.3.1), 초대 교구장 박정일(朴正一, 미카엘) 주교(1977.4. 15~1982.6.24), 2대 김창렬(金昌烈, 바오로) 주교(1983. 11.21~2002.7.20), 3대 강우일(姜禹一, 베드로) 주교(2002. 7. 20~현재). 〔교 세〕 1972년 9,252명, 1977년 13, 563명, 1983년 19,935명, 1987년 26,028명, 1993년 35,672명, 1999년 50,761명, 2002년 57,198명.
I. 제주 본당의 설립과 제주 교안
〔복음의 전래와 순교자의 탄생〕 천주교 신자에 의해 처음 제주 지역에 천주교 신앙이 알려진 것은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로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의 부인 정난주(丁蘭珠, 마리아)가 대정현의 노비로 유배되면서부터였다. 이어 1845년 9월 27일에는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Ferrèol, 高) 주교, 다블뤼(Daveluy, 安敦伊) 신부 등과 함께 귀국하다가 표류하던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가 제주 서쪽의 죽도(竹島, 즉 차귀도) 인근에 도착하여 용수 포구(현 북제주군 한경면 용수리)에서 배를 수리한 뒤 충청도로 떠났다. 그러나 정난주는 이웃에 복음을 전파하지 못하고 1838년에 사망하여 그 인근(현남제주군 대정읍 동일리)에 묻혔으며, 김대건 신부 일행도 제주도민들과 접촉할 여유를 갖지 못하였다.
제주 출신의 첫 신자가 탄생한 것은 1857년이었다. 그해 초 무역차 서귀포로 향하던 제주 함덕리 출신의 김기량(金耆良, 펠릭스 베드로)이 동료들과 함께 표류하다가 중국 광동 해역에서 홀로 구조되어 홍콩의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본부에 도착하였으며, 이곳에서 조선 신학생 이만돌(바울리노)에게 교리를 배운 뒤 1857년 5월 31일(음력 5월 9일) 루세이유(JJ. Rousseille)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귀국한 것이다. 이후 김기량은 제주와 육지를 오가면서 성사를 받거나 이웃과 친지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데 노력하여 일정한 성과를 얻었지만, 1866년의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무역차 여기저기로 다니다가 경상도 통영에서 체포되어 그해 12월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김기량의 순교로 제주의 복음사는 일시 단절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또 그의 인도로 영세 입교한 신자나 예비 신자들이 계속 신앙 생활을 이어 나갔다는 기록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후 제주 지역에 다시 복음이 전파된 것은 한국 천주교회가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된 뒤였으니, 1898년 4월경 대정군 색달리(현 서귀포시 색달동) 출신의 양용항(梁用恒, 베드로)이 육지에서 세례를 받고 제주로 돌아와 신 아우구스티노와 바오로 형제, 김 생원, 강 토비아 등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다. 지금까지 이어져 온 제주 복음사는 이렇게 재개되었다.
〔본당 설립과 제주 교안〕 한국 천주교회가 제주의 복음 전파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신앙의 자유 이후 선교사의 수가 많아지고 전국 곳곳에 본당이 설립되어 가던 시기였다. 1890년 이래 조선교구(즉 조선 대목구)의 제8대 교구장으로 재임하던 뮈텔(Mutel, 閔德孝) 주교는 1899년 4월 22일 '제주 본당' (현 제주 중앙 본당)의 설립을 결정하고, 갓등이 본당(현 수원교구 왕림 본당)에 재임하던 페네(Peynet, 裴嘉祿)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김원영(金元永, 아우구스티노) 신부를 보좌로 임명하였다. 이에 두 신부는 5월 23일 제물포를 출발하여 26일 제주에 도착하였으며, 6월 14일에는 제주 대로동(현 제주시 삼도 2동)에 사제관을 매입하고 전교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특히 김원영 신부는 정의 · 대정 지역으로까지 전교 지역을 넓혀 활동한 결과 1900년 5월에는 신자 20명과 예비 신자 30명을 얻게 되었다.
1900년 5월 4일에는 페네 신부가 전임되면서 라크루(Lacrouts, 具瑪瑟) 신부가 제주 본당의 2대 주임으로 임명되었고, 6월 12일에는 김원영 신부가 제주를 떠나 정의군의 한논(大沓, 현 서귀포시 호근동)에 정착함으로써 '한논 본당' (현 서귀포 본당)이 설립되었다. 김 신부는 이후 정의와 대정 지역의 선교에 노력하여 1901년 5월에는 신자 137명, 예비 신자 620명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이때 전교를 위해 《수신영약)(修身靈藥)이란 교리서를 저술하기도 하였지만 간행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초기의 선교 활동은 순조롭지 않았다. 이미 교회와 제주 지역 사회 안에서는 상호 간의 몰이해와 배타성, 월권 문제 등으로 갈등이 일고 있었던 것이다. 1901년 2월에 일어난 제주민 오신락(吳信洛)의 자살 사건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던 차에 5월 5일(음력 3월 18일) 대정 군수 채구석(蔡龜錫)이 설립한 상무사(商務社) 사원들과 대정 군민들의 민회가 개최되었고, 여기에 참석한 사람들이 오대현 · 이재수 · 강우백 · 강백이 등의 지휘 아래 천주교 신자들을 공격하면서 이른바 '제주 교안(濟州敎案, 신축 교안)이 발생하였다. 이후 교안은 5월 28일 상무사원과 민군이 제주성을 함락시키면서 300~350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희생되는 상황으로 발전하였고, 프랑스 함대의 제주 입항에 이어 6월 10일 찰리사 황기연(黃耆淵)이 이끄는 정부군이 민군의 주모자를 체포하면서 일단락되었다. 이에 앞서 라크루 신부와 김원영 신부는 4월의 연례 피정차 제주를 떠나게 되었는데, 4월 27일의 인사 이동 결과 김원영 신부 대신 무세(Mousset, 文濟萬) 신부가 한논 본당의 2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라크루 신부와 무세 신부는 교안의 와중인 5월 10일 제주에 입도하여 어려움을 겪어야만 하였다.
이후 1901년 7월 2일에는 라크루 신부와 황기연 사이에 '교민화의약정'(敎民和議約定)이 체결되었고, 다음해 4월 20일에는 무세 신부 대신 타케(Taquet, 嚴宅基)신부가 제3대 한논 본당 주임에 임명되어 두세 달 후 한논 본당을 홍로(烘爐, 현 서귀포시 서홍동)로 이전함으로써 '홍로 본당' 이 시작되었다. 이어 1903년 4월 29일에는 제주 교안 희생자들의 매장지가 황사평(현 제주시 화북 2동 소재)으로 결정되었으며, 11월 16일에는 정부에서 제주 교안의 배상금 원금을 지급하였다.
〔제주와 홍로 본당의 변모〕 제주의 라크루 신부와 홍로의 타케 신부는 1903년부터 교안의 마무리 작업에 노력하는 한편 본격적으로 전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무렵에 라크루 신부는 여학당을 설립하고 소섬〔牛島〕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였는데, 이 여학당은 1909년 10월 18일 '신성여학교' 로 설립 인가되었다(1916년 휴교). 또 1907년 여름에는 교구장 뮈텔 주교가 처음으로 제주를 방문하였고, 1909년 11월 28일에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제주에 진출하였다. 1904년 5월경 제주 지역의 신자수는 191~193명(제주 90~92명, 홍로 101명)으로, 1910년 5월경에는 402명(제주 207명, 홍로 195명)으로 증가하게 된다.
1911년 4월 8일 대구 대목구가 조선 대목구에서 분리 설정됨과 동시에 제주 교회는 새 대목구 소속이 되었다. 그러나 1914년에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으로 프랑스 선교사들이 소집되면서 제주와 홍로 본당이 제주 본당으로 통합되어 1915년 6월 7일 김양홍(金洋洪, 스테파노) 신부가 제3대 주임으로 임명되었고, 1916년 5월 김 신부가 전임되면서 제주 교회는 목포 산정동 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다. 이후 '목자 없는 공소 시기' 를 겪은 제주 교회는 1922년부터 1926년까지 '겸임 신부 시기 를 맞이하였으며, 1926년 5월 31일 이필경(李弼景, 안드레아) 신부가 제주 본당 주임으로 임명되면서 다시 본당 시대를 맞이하였다. 1929년에는 고군삼(高君三, 베네딕도) 신부가 첫 번째 제주 출신 사제로 서품되었고, 이 해 제주 본당을 맡게 된 최덕홍(崔德弘, 요한) 신부는 다음해 12월에 신축 성당(고덕식 적벽돌조, 건평 90평)을 완공하여 봉헌식을 가졌다.
1931년 5월 10일에는 전라도 감목 대리구가, 1933년 7월 6일에는 전라남도 감목 대리구가 설정되고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가 그 사목을 맡게 되면서 제주와 홍로 본당은 차례로 여기에 속하게 된다. 이어 1936년 6월 29일에는 도슨(Dawson, 孫) 신부가 제주 본당 주임으로, 라이언(Ryan, 羅) 신부가 홍로 본당 주임으로 각각 임명되었고, 1937년 4월 13일에는 대구 대목구에서 광주 지목구가 분리 설정되면서 제주의 본당들도 새 지목구 소속이 되었다. 라이언 신부는 이해 8월 15일 본당을 홍로에서 서귀리(현 서귀포시 송산동 596-1)로 이전함으로써 '서귀포 본당' 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무렵 제주와 홍로(서귀포) 본당은 수난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35~1936년 당시 제주의 교세는 2개 본당에 총 신자수 529명에 이르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점차 선교에 어려움을 겪어야만 하였고, 징발과 감시로 인해 신자들의 미사 참례도 어려울 지경이 되었다. 더욱이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0월에는 제주 본당 주임 도슨 신부와 보좌 스위니(Sweeney, 徐) 신부, 서귀포 본당의 라이언 신부와 몇몇 신자들이 일제 당국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1999년 8월 건국 훈장 수여). 이로써 제주 교회는 다시 목자 없는 시기를 맞이해야만 하였는데, 1944년 여름부터는 박문규(朴文奎, 미카엘) 신부가 임시로 제주 교회를 맡아 신자들을 돌보았다.
Ⅱ. 본당의 확대와 감목 대리구 설정
〔본당의 부활과 신설〕 1945년의 해방과 더불어 광주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골롬반회 선교사들이 석방되었고, 11월에는 제주 본당이 부활됨과 동시에 스위니 신부가 본당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또 그동안 휴교에 들어갔던 신성여학교가 1946년 10월 18일 신성여자중학원으로 개원하였으며(1949년 신성여자초급중학교로 승격), 다음해 10월에는 라이언 신부가 서귀포 본당 주임으로 재부임하였다. 또 1949년 7월에는 도슨 신부도 제주 본당 주임으로 재부임하였다.
1950년의 한국 전쟁은 제주 교회가 발전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많은 피난민들이 제주에 입도하면서 신자수도 더불어 증가하였으며, 한때는 제주에 피난 신학교가 설립되기도 하였다. 게다가 1951년 4월에는 춘천 교구 소속의 조응환(趙應煥, 타대오) 신부가 신창 공소에서 사목 활동을 시작하면서 '신창 준본당' 이 설립되었고, 1952년 4월에는 새비지(Savage, 元) 신부가 서귀포 본당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또 같은 해 6월 29일 신창 준본당이 본당으로 승격된 데 이어 9월 14일에는 모슬포 훈련소 안에 강병대(强兵隊) 성당이 완공되었다(프로테스탄트와 공동 사용). 1953년 11월 21일에는 신성여자고등학교가 병설 인가되었으며, 다음해 3월에는 모슬포 공소가 봉헌되었고, 4월 1일에는 '한림 본당' 이 설립됨과 동시에 맥그린치(McGlinchey, 임피제)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한림 본당이 신설되면서 신창 본당은 그 산하 공소로 변모하였다. 한편 1954년 10월에는 헨리(玄 하롤드) 신부가 제5대 광주 지목구장에 임명되었다.
1955년 7월에는 신성여자중 · 고등학교의 신축 교사가 완공되고, 7월 6일에는 한림 성당 봉헌식이 있었다. 그리고 이를 전후하여 서귀포 본당의 호근 · 모슬포 · 하늘의 문 · 성산포 · 가나안 · 남원 · 예래 공소, 한림 본당의 고산 · 귀덕 · 청수 공소, 제주 본당의 조천 공소 등이 설립되었으며, 1955년 12월에는 제주 본당과 한림 본당에서 쁘레시디움을 창단함으로써 제주 최초로 레지오마 리애를 도입하였다.
〔제주 감목 대리구 설정〕 1956년 9월 21일 광주 지목 구장 헨리 신부는 '제주 감목 대리구' 를 설정함과 동시에 제주 본당 주임으로 재임하던 쿠퍼(Cooper, 具) 신부를 초대 감목으로 임명하였다. 장차 제주 교회를 독립된 교구로 설정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제주 감목 대리구의 교세는 3개 본당에 3,261명이었다. 이어 1957년 1월 21일에는 광주 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되었고, 헨리 신부는 주교로 임명되었다. 이 무렵 한림 본당의 맥그린치 신부는 제주의 농촌을 위해 교회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모색하고 있었다. 바로 이해 3월 맥그린치 신부는 4H 클럽을 조직하고 가축 은행을 설립하는 등 농촌 개발 운동을 전개해 나가기 시작하였으며, 1957년 4월에는 그의 건의에 의해 '신창 본당' 이 부활하면서 아이젤(Eisel, 梁) 신부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1958년 6월에는 모슬포 공소가 '모슬포 본당' 으로 승격됨과 동시에 캠피온(Campion, 巴)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를 전후하여 한림 본당의 금릉 · 금악 · 곽지 공소, 서귀포 본당의 효돈 공소, 신창 본당의 판포 · 조수 공소, 모슬포 본당의 화순 인항 공소, 제주 본당의 김녕 · 애월 공소 등이 설립되었으며, 1959년 3월에는 맥그린치 신부에 의해 한림의 직조 강습소 (현 수직사)가 개설되었다. 또 1959년에는 한국 순교 복자 성직 수도회가 홍로에 진출하였고, 신성여자중학교가 9학급으로 증설 인가를, 1961년에는 신성여자고등학교가 9학급 증설 인가를 받았다. 이에 앞서 학교 당국에서는 옛 제주남초등학교 교사 부지를 매입하여 부지를 확장하였다.
1962년 3월 10일에는 한국 천주교회의 교계 제도가 수립되면서 광주 대목구가 광주대교구로 승격되었다. 이어 맥그린치 신부는 같은 해 5월 한림에서 신용 협동 조합 운동을 처음으로 도입하였고, 골롬반 외방선교 수녀회를 초청하여 한림 수직사의 운영을 맡겼으며, 1962년 10월 15일에는 전해에 설립한 한림 목장(현 이시돌 목장)을 중심으로 '이시돌 농촌 산업 개발 협회' 를 창립하였다. 또 1963년 5월에는 제주 중앙 신용 협동 조합이 설립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과정에서 제주 감목 대리구의 교세도 크게 증가하여 1965년 말에는 5개 본당, 21개 공소에 신자수 10,161명을 기록하게 된다.
이와 같은 교회 안팎의 상황은 특히 제주시의 본당 분할을 가능하게 하였다. 우선 제5대 감목 대리 새비지 신부는 헨리 대주교와 의논하여 일도리(현 일도2동)에 새 성당 부지를 매입한 뒤 성당을 건립하여 1968년 4월 21일 성당 봉헌식과 함께 '동문 본당' 을 설립하였다. 이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는 퀸(Quinn, 변) 신부가 임명되었으며, 동시에 제주 본당은 '제주 중앙 본당' 으로 개칭되었고, 12월 18일에는 까리따스 수녀회가 동문 본당에 첫 분원을 설립하였다. 이후 헨리 대주교는 1970년 6월에 개최된 주교 회의에 제주교구의 설정을 정식으로 제기하였으며, 같은 해 11월 9일자로 '서귀 중앙 본당' (현 서귀복자 본당)과 '광양 본당' 을 동시에 설립하고 아이젤 신부와 새비지 신부를 각각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이에 앞서 1967년에는 고승욱(高昇都,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제주 출신의 두 번째 사제로 서품되었고, 1969년에는 홍충수(洪忠秀, 마태오) 신부와 김창훈(金昌勳, 다니엘) 신부가 사제로 서품되었다. 또 다음해에는 신성여자중학교가 제주의 도남동에 교사를 마련하고 그곳으로이전하였다.
Ⅲ. 교구 설정과 성장
〔지목구 설정과 교구 승격〕 1970년 7월 헨리 대주교는 주교 회의의 승인을 얻어 제주교구 설정 요청서를 교황청에 제출하였다. 그러자 교황청에서는 이를 받아들여 1971년 6월 28일자로 제주 감목 대리구를 '제주 지목구 로 설정하는 동시에 광주대교구장 헨리 대주교를 지목구장에 임명하였다. 1899년 제주 본당이 설립된 지 72년 만이었고, 1956년 제주 감목 대리구가 설정된 지 15년 만이었다. 당시 제주의 교세 현황은 8개 본당, 24개의 공소에 신자수 11,920명, 성직자수 20명(한국인 6명, 외국인 14명)이었다. 지목구 설정 한 달 뒤인 7월 18일에는 제주 출신의 이태수(李泰壽) 미카엘 신부와 허승조(許勝照) 바오로 신부가 사제로 서품되었다.
헨리 대주교는 1971년 9월 6일 지목구장 착좌식을 가졌고, 10월에는 용담동에 주교관 겸 지목구 청사를 완공하였다. 이어 다음해에는 성 글라라 수도원이 이시돌 목장 내에 첫 거처를 마련하였으며, 1973년 8월 23일에는 '성산포 본당 이 설립되었고, 같은 해 교회사가 김구정(金九鼎, 이냐시오)에 의해 대정에 있는 정난주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헨리 대주교가 1976년 3월 1일
에 선종하면서 제주 지목구장은 일시 공석이 되었다. 그러자 교황청에서는 1977년 3월 21일 제주 지목구를 '제주교구' 로 승격시킴과 동시에 4월 15일 광주 대건신학대학(현 광주 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재임하던 박정일 주교를 교구장으로 임명하였다. 이로써 제주 교회는 지목구 설정 5년 9개월 만에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제주교구가 설정된 지 3개월 만인 6월 30일에는 '서문 본당' 이 설립되었다. 그 결과 1977년 말의 제주 교세는 10개 본당, 2개 공소에 성직자수 17명, 신자수 13,563명을 기록하게 되었으나, 지역 복음화율은 아직 3.1%에 지나지 않고 있었다.
박정일 주교는 1977년 5월 31일에 착좌식을 갖고 6월 7일에는 교구 참사회를 구성하였는데, 당시 교구청은 사무처와 사목국 · 관리국 등 1처 2국제로 운영되었다. 이어 교구에서는 8월 15일을 기해 교구 주보를 창간하고, 9월 25일에는 최초로 '교구 순교자 현양 대회' 를 황사평 묘역에서 개최하였다. 또 이를 전후하여 사제와 신자들은 청년 연합회, 성소 후원회, 교사회 등 평신도 사도직 단체를 조직하고, 1979년 4월 29일에는 '제주교구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 를, 같은 해 8월 23일에는 정의 평화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또 10월 2일에는 신성여자고등학교가 신성여자중학교 이웃인 도남동으로 이전되었으며, 1980년 5월 11일에는 제주 레지오 마리애가 '치명자의 모후' 꼬미시움으로 승격되었다. 이에 앞서 1976년에는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가 서귀포 중앙 본당에, 1978년에는 인보 성체 수도회가 신창 본당에 처음으로 진출하였다.
〔본당의 확대와 교구의 성장〕 1980년대는 교회 안팎으로 시련과 기쁨이 교차하던 시기였다. 특히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1984년에 맞이하게 될 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 행사들을 준비해 가고 있었으며, 한국 순교 복자 103위의 시성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에 제주교구에서도 1980년 7월 5일 서귀포 중앙 본당에서 신축한 성당을 봉헌하면서 본당 명칭을 '서귀 포 복자 본당' 으로 개칭하였다. 이어 1981년 10월 25일에는 신제주에 신축한 성당 봉헌식이 있었고 11월 1일자로 '신제주 본당' 이 설립되었으며, 11월 29일에는 '금악 준본당' (1985년 10월 본당 승격)이 설립되었다.
교구의 이러한 변화 과정 속에서 1982년 6월 24일 교황청에서는 교구장 박정일 주교를 제6대 전주교구장으로 임명하였다. 이에 따라 새비지 신부가 교구장 직무 대행을 맡아 황사평 묘역 성역화 사업을 시작하였고, 1983년 7월에는 가톨릭 회관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1983년 11월 2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가톨릭 중앙 의료원장으로 재임하던 김창렬 신부가 주교 로 승품되는 동시에 제2대 제주교구장에 임명되었다. 김주교는 다음해 1월 6일 로마에서 주교 서품식을 갖고 1월 26일 제주 중앙 주교좌 성당에서 착좌식을 가졌다. 1984년 말 교구의 교세는 12개 본당, 21개 공소에 성직자수 18명, 신자수 21,143명이었다.
김창렬 주교의 착좌식 직후인 1984년 5월 6일 교구 신자들은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 신앙 대회와 103위 시성식을 함께 하였다. 이어 9월 20일에는 가톨릭 회관 축복식이 거행되었고, 다음해 5월에는 교구 청소년을 위한 '사랑과 일치의 대향연' 이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1986년 9월 2일에는 1970년 제주에서 철수했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성산포 본당에 재진출하였으며, 9월 21일에는 제1회 교구 성체 현양 대회가 개최되었다(장소 : 한라체육관). 그리고 이를 전후로 사진가 협회, 운전기사 사도회, 성령 쇄신 봉사회 등 평신도 사도직 단체가 신설되고, 1988년에는 미리내 성모 성심 수녀회가 제주에 진출하였다.
1988년에 들어와 교구에서는 한마음 한몸 운동을 전개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또 1989년 10월 8일에는 많은 신자들이 서울 제44차 세계 성체 대회(여의도 광장)에 참가하였고(14개 본당 1,700여 명), 다음해 8월 23일 교구 성지 개발 추진위원회가 발족된 데 이어 1991년 10월 28일에는 이시돌 목장 경내에 있는 '삼뫼소 은총의 동산 축복식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1992년 2월 6일에는 사목국에서 교육국이 분리 신설되면서 교구청 직제가 1처 3국으로 구성되었으며, 10월 12일에는 아라1동에서 신축 주교관 축복식이 거행되었다. 그리고 1993년 9월 25일에는 대정 성지 축복식을 겸하여 대정읍 동일리 현지에서 교구 순교자 현양 대회가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이 시기에는 본당의 변화도 눈에 띄었다. 1985년에 금악 준본당이 본당으로 승격된 데 이어 1986년 6월에는 성산포 본당의 신축 성당 봉헌식이 있었으며, 1988년 2월 10일에는 '효돈 본당' 과 '중문 본당' 이 동시에 신설되었고, 1990년 2월 22일에는 '고산 본당' 이, 1995년 4월 30일에는 '동광 본당' 이 설립되었다. 또 1988년 6월과 11월에는 신축된 신제주 성당과 광양 성당 봉헌식이 이루어졌고, 1993년 1월에는 신축 효돈 성당 봉헌식이, 1994년 3월과 4월에는 서문 성당과 신창 성당 축복식이 각각 거행되었다. 아울러 1990년 1월 신 제주 신용 협동 조합이 창립식을 가졌으며, 가톨릭 실업 인회, 교리 교사 연합회, 가톨릭 교수회 등이 설립되었고, 1993년 3월에는 작은 예수회(여자)가, 다음해 7월에는 살레시오 수녀회가 각각 제주에 진출하였다. 1995년말 현재 제주교구는 본당수 16개, 교구 출신 사제 26명, 신자수 39,602명, 지역 복음화율 7.6%를 기록하는 성장세를 보였다.
〔교구 설정 25주년과 본당 설립 100주년〕 이와 같은 성장 속에서 제주교구는 1996년에 지목구 설정 25주년을, 1999년에는 제주 선교 10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에 교구에서는 1993년 8월 10일 '제주 선교(제주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 사업 준비위원회' 를 구성하였는데, 그 위원장으로는 처음 이태수 총대리 신부가 임명되었다가 다음해 2월 허승조 총대리 신부로 변경되었다. 이어 25주년과 100주년 사업의 일환으로 1993년 12월 제주교안의 순교자 신재순(申才淳, 아우구스티노)의 유해가 황사평 묘역으로 이장된 데 이어 병인 순교자 김기량의 시복 시성을 위한 자료 조사 작업이 시작되었고, 1995년 5월 3일에는 무명 순교자 유해 합동 봉안식이, 12월 2일에는 헨리 대주교와 라이언 신부의 유해 이장식이 각각 황사평 묘역에서 거행되었다.
1996년 10월 6일 교구에서는 지목구 설정 25주년 기념 신앙 대회를 개최한 뒤, 다음해 1월 1일부터는 매년 첫날 '원죄 없으신 성모 성심' 께 교구를 바치는 갱신 미사를 봉헌하였다. 또 1997년 8월에는 100주년 기념 사업으로 연평동의 신성여자중 · 고등학교 통합 캠퍼스와 제주 중앙 주교좌 성당의 기공식을 가졌으며, 다음해 3월부터는 《제주 천주교회 100년사》 편찬을 시작하였다
(2001년 12월 간행). 이어 5월 17일에는 교구 각 본당 합동 예비 신자 환영식을 열었고(3,172명 입교), 7월 31일 부터 3일 동안 청소년 신앙 대회를 성대하게 개최하였다. 100주년 기념 사업은 계속 이어져 1998년 9월 황사평에서 파리 외방전교회와 골롬반 외방선교회 선교사 공덕비, 순교자 김기량 순교비 제막식이 있었고, 1999년 7월에는 교구 성가 발표회가, 9월 19일에는 용수(龍水) 포구에서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 순교자 현양대회 및 성지 선포식' 이 개최되었다. 이에 앞서 기념 사업 위원회에서는 성 김대건 신부가 용수 표착 시에 타고 온 라파엘(Raphael)호를 고증을 통해 복원하였다. 이 100주년 기념 사업과 행사들은 1999년 11월 21일에 개최된 신앙 대회를 끝으로 종결되었는데, 당시 교구의 신자수는 50,761명으로 지역 복음화율 9.4%를 기록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100주년 행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1997년 2월 5일에는 '남원 본당' 과 '표선 본당' 이, 9월 11일에는 '노형 본당 과 '화북 본당' 이 각각 설립되었다. 그리고 다음해 1월 15일에는 '하귀 본당' 이, 1999년 1월에는 '조천 본당' 이 설립되었으며, 이로부터 2년 뒤인 2001년 7월 20일에는 '연동 본당' 이 설립되었다. 아울러 2000년 3월에는 신축 서귀포 성당 봉헌식이 있었고, 1999년 12월에는 '제주 중앙 주교좌 성당' (지하 2층 지상 3층, 연건평 1,375평)의 신축공사가 완료되어 이듬해에 교구장 김창렬 주교의 집전으로 봉헌식이 거행되었다. 2001년 6월과 7월에는 노형 성당과 한림 새 성당 봉헌식이 있었으며, 10월 14일에는 삼뫼소에 건립한 삼위 일체 성당이, 2002년 1월에는 화북 성당이 각각 봉헌되었다. 또 2002년 8월 30일에는 신성여자중 · 고등학교 통합 캠퍼스의 이전 축복식이 거행되면서 두 학교의 연평동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제주교구는 이제 삼천 년기의 시작을 맞이하여 23개 본당에 5만여 명의 신자수를 기록하게 되었다. 아울러 지역 복음화율은 10% 가까이 증가하였으며, 교구청 직제는 물론 교구의 각 기관과 단체들도 꾸준히 안정과 확대의 길을 걸어 왔다. 그러던 중 20년 가까이 교구를 이끌어 오던 김창렬 주교가 2002년 초 교황청에 은퇴 의사를 표명하였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를 받아들여 2002년 7월 20일 서울대교구의 총대리로 재임하던 강우일 주교를 제3대 제주교구장에 임명하였다. 이에 따라 강 주교는 10월 8일 교구장 착좌식을 가진 데 이어 11월 9일에는 남원 성당 봉헌식 미사를 집전하였다. 그리고 미래의 또 다른 교구 성장을 위한 사목 활동을 모색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 제주 교안)
※ 참고문헌 제주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 편, 《제주교구 100년사 출간을 위한 자료집 제1집》, 1993 1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 사업추진위원회, 한국교회사연구소 역편, 《제주 복음 전래 100년사 자료집》 2-4집 천주교 제주교구, 1997 3~51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 사업추진위원회 편,《제주 천주교회 100년사》, 천주교 제주교구, 2001/ 천주교 제주교구 시복 시성 추진위원회 편, 《제주 순교자 김기량 자료집》, 2002. 〔車基眞〕
제주교구
濟州教區
Ⅰ. 제주 본당의 설립과 제주 교안 · Ⅱ. 본당의 확대와 감목 대리구 설정 · Ⅲ. 교구 설정과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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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분할 계통도(1899~2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