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중앙 주교좌 본당

濟州中央主教座本堂

글자 크기
10
페네 신부와 김원영 신부가 마련한 주교좌 사제관(1899년경) .
1 / 2

페네 신부와 김원영 신부가 마련한 주교좌 사제관(1899년경) .

제주교구 소속 본당. 제주도 제주시 삼도2동 114 소재. 1899년 4월 22일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관할 구역은 삼도2동 전 지역과 건입동, 일도1동, 이도1동 일부 지역. 〔교 세〕 1965년 3,400명, 1972년 2,259명, 1976년 3,058명, 1980년 2,878명, 1985년 4,078명, 1989년 5,022명, 1992년 2,607명, 1996년 3,049명, 2001년 2,788명. 〔역대 신부〕 초대 페네(C. Peynet, 裵嘉祿) 가롤로(1899. 4~1900. 5), 2대 라크루(M. Lacrouts, 具瑪瑟) 마르첼리노(1900. 5~1915. 6) , 3대 김양홍(金洋洪) 스테파노(1915. 6~1916.5), 임시 타케(E. Taquet, 嚴宅基) 에밀리오(1916. 6~1922. 9) , 4대 주재용(朱在用) 바오로(1922. 9~1926. 5), 5대 이필경(李弼景) 안드레아(1926. 5~1929. 5), 6대 최덕홍(崔德弘) 요한(1929. 5~1936. 6), 7대 도슨(P. Dawson, 孫) 파트리치오(1936. 6~1941. 10), 임시 박문규(朴文奎) 미카엘(1944. 여름~1945. 5), 8대 스위니(A. Sweeney, 徐) 아우구스티노(1945. 11~1949. 4), 9대 도슨(1949. 7~1954. 4), 10대 쿠퍼(C. Cooper, 具) 가롤로(1954. 4~1959. 11), 11대 세비지(J.G. Savage, 元) 요한(1959. 11~1962. 9), 12대 모란(T. Moran, 安) 토마스(1962. 9~1964. 11), 13대 던(J. Dunne, 都) 요한(1964. 11~1965. 8), 임시 로반(M. Roban, 노) 마일스(1965. 8~1966. 2), 14대 세비지(1966. 2~1969. 10), 15대 오고르만(D. O'Gorman, 殷) 다니엘(1969. 10~1972. 9), 16대 월름센(G. Wilmsen, 진) 제랄드(1972. 9~1973. 8), 17대 김창훈(金昌勳) 다니엘(1973. 8~1975. 5), 18대 홍충수(洪忠秀) 마태오(1975. 5~1977. 6), 19대 허승조(許勝照) 바오로(1977 6~1983. 2), 20대 홍충수(1983. 2~1990. 7), 21대 이태수(李泰壽) 미카엘(1990. 7~1995. 8), 22대 고승헌(高昇憲) 마르코(1995. 8~2001. 8), 23대 이영조(李榮祚) 파트리치오(2001. 8~2003. 2), 24대 임문철(林文喆) 시몬(2003. 2~현재).
〔제주 지역의 복음 전래와 전사〕 제주 지역에는 정난주(丁蘭珠, 마리아)가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제주 대정현에 유배를 오게 되면서 천주교가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가 인도한 라파엘호가 1845년 제주 앞바다에 표착하여 미사를 드린 일이 있었다. 제주 지역에 전교 활동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김기량(金耆良, 펠릭스 베드로)에 의해서였다. 김기량은 풍랑으로 표류하던 중 홍콩에서 구조되어 한국인 신학생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이후 1858년 고향인 제주도로 돌아와 친척과 이웃을 중심으로 전교 활동을 펼치며 교우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그는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체포되어 경상도 통영에서 순교하였다. 제주 지역에 다시 복음이 전파된 것은 신앙의 자유기를 맞이해서이다. 색달리(현 서귀포시 색달동) 출신인 양용항(梁用恒, 베드로)과 이 라우렌시오는 육지를 왕래하던 중에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고, 1898년 4월경에 세례를 받고 제주로 돌아와 신 아우구스티노와 바오로 형제, 김 생원 등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제8대 조선 대목구장 뮈텔(G. Mutel, 閔德孝) 주교가 제주 본당의 설립과 성직자 파견을 결심한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제주 본당의 설립〕 1899년 4월 22일 성직자 피정이 끝나면서 제주 본당 설립이 발표되었다. 페네 신부와 김원영(金元永,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1899년 5월 제주에 도착하여, 6월 대로동(大路洞)에 거처를 마련하고 본격적으로 전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듬해 5월 페네 신부가 전라도로 전임되면서 2대 주임으로 라크루 신부가 부임하였다. 6월 12일에는 김원영 보좌 신부가 정의군에 제주 본당의 첫 번째 자(子)본당인 한논(大沓, 현 서귀포)본당을 설립하였다. 1901년 제주 교안 이후, 라크루 신부는 7월에 찰리사 황기연과 '교민 화의 약정' (敎民和議約定)을 체결하였으며, 교난 희생자의 매장지를 마련하는 등 혼란을 수습하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라크루 신부는 교난 문제가 해결될 무렵인 1903년에 제주 여학당을 설립하였으며, 소섬〔牛島〕으로 건너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또 같은 해 한림의 수원리에 기와집을 매입하여 수원 공소를 설립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소섬에도 공소집을 매입하였다. 1908년부터는 추자도 지역 전교를 시작하였고, 여학교 설립을 위해 노력한 결과 1909년 10월 18일 신성여학교(晨星女學校)의 설립 인가를 받았으며, 11월에는 학교 운영을 위해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를 초청하였다. 또한 1912년에는 병문골에 있는 향청 건물과 부지를 확보하는 등 교세 확장에 주력하였다.
이어 3대 주임으로 김양홍 신부가 부임하였으나, 1916년 5월 전임되면서 주임 신부 자리는 공석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신성여학교는 일제의 교사 명도령(校舍 明渡令)과 탄압으로 인해 무기한 휴교에 들어갔다. 이후 1922년 9월까지는 목포 산정동(山亭洞) 본당 5대 주임 타케 신부가 1년에 두 차례 제주를 왕래하면서 성사를 주었다. 이어 주재용 신부가 1922년 9월 산정동 본당 주임 겸 제주 본당 주임으로 부임함에 따라 본당은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6대 주임으로 부임한 최덕홍 신부는 1930년 12월 고딕식 적벽돌조의 새 성당을 완공하여 봉헌식을 가졌다. 그러다가 1933년 7월 6일 전라도 감목 대리구가 설정됨과 동시에 그 사목이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에 위임됨에 따라, 7대 주임으로 도슨 신부가 1936년 6월에 부임하였다. 광주지목구가 1937년 4월 13일 설정되면서 본당은 광주지목구 소속 본당이 되었으나, 일제 말기에 들어서면서 총독부의 탄압으로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도슨 신부는 1941년 10월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광주 형무소에 투옥되었으며, 성당은 일본군의 야전 병원으로, 부속 건물은 장교들의 숙소로 이용되었다. 이로 인해 다시 주임 신부 자리는 공석이 되었고, 산정동 본당 10대 주임 박문규 신부가 가끔 본당에 방문하여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었다. 박 신부는 1944년 여름부터 제주 본당의 임시 주임으로 임명되어 1945년 5월까지 제주에 거처하면서 사목 활동을 수행하였다.
해방 이후 도슨 신부는 석방되었고, 빼앗겼던 성당과 부속 건물도 되찾게 되었다. 8대 주임으로 부임한 스위니 신부는 몇몇 신자들과 함께 '신성 부흥회' 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그 결과 1946년 10월 18일에는 '신성여자중학원' 을, 다음해 10월 10일에는 그 부설로 신성유치원을 개원할 수 있었다. 이어 9대 주임으로 다시 부임한 도슨 신부는 1949년 8월 3일자로 신성여자초급중학 교를 인가받고, 11월에는 한강면에 용수 공소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1950년 한국 전쟁으로 인하여 본당은 다시 많은 변화를 겪어야만 하였다. 성당은 피난 온 신자들이 모여들면서 8월 증축되었고, 이듬해 2월에는 서울의 소신학교와 대신학교가 본당 구내에 있는 신성여자초급중학교 교실을 이용하여 피난 학교를 개교하였다가 5월에 부산으로 떠났다. 같은 해 4월에는 춘천교구 조응환(曹應煥, 타대오) 신부가 신창 준본당과 한림 공소를 설립하였으며, 신창 준본당은 1952년 6월 29일에 새 성당 봉헌식을 갖고 신창 본당으로 승격되면서 제주 본당의 두 번째 자(子)본당이 되었다. 한편, 신성여자초급중학교는 1951년 8월에 신성여자중학교로 개칭 인가되었으며, 1953년 11월 21일에는 신성여자고등학교의 병설 인가를 받았다.
〔본당의 발전과 변모〕 제주 본당은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크게 성장하였으며, 이는 곧 제주 지역 교회의 성장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광주교구장 하롤드(H.W. Henry, 玄海) 신부는 1956년 8월 21일자로 '제주 감목 대리구' 를 설정하고, 10대 주임 쿠퍼 신부를 초대 감목 대리로 임명하였다. 1959년 12월 11대 주임으로 임명된 새비지 신부는 2대 감목 대리를 겸하면서 냉담자들을 교회로 돌아오게 하고 지식층의 입교에 힘썼으며, 황사평(黃沙坪) 묘역을 공원화하는 데 힘썼다. 이어 12대 주임 모란 신부는 1964년 11월 김녕 공소의 경당 축복식을 가졌으며, 13대 주임 던 신부는 1965년에 신성여자중 · 고등학교 교사를 신축한 뒤 그해 8월 15일부터 신성학교 교장만을 전담하였다. 이에 따라 보좌로 재임하던 로반 신부가 잠시 동안 임시 주임을 겸하다가 세비지 신부가 1966년 2월 다시 14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신자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였고, 1968년 4월 21일에는 세 번째 자본당인 동문(東門) 본당이 분리됨과 동시에 본당의 이름이 제주 중앙 본당으로 변경되었다. 본당 분할에도 불구하고 신자수의 증가로 성당이 비좁게 되자, 새비지 신부는 1968년 4월 기존의 고딕식 성당을 철거하고 새로이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5월 18일 새 성당(166평)을 완공하고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1970년 2월에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철수하는 대신 까리따스 수녀회가 본당의 사목을 돕게 되었다. 광양(光陽) 본당이 같은 해 11월 9일 네 번째 자본당으로 분리 · 설립되었고, 본당 구내에 있던 신성여자중학교가 11월 28일 도남동으로 이전하였다.
제주 감목 대리구는 1971년 6월 28일 제주 지목구로 설정되었고, 그 결과 본당은 주교좌 본당으로 설정되었다. 17대 주임으로 부임한 김창훈 신부는 1974년 6월 '추자 공소 신축 추진위원회' 를 조직하여 모금 운동을 전개한 결과 12월 10일 공소 경당을 완공하고, 1975년 4월 5일 봉헌식을 갖게 되었다. 이어 18대 주임으로 부임한 홍충수 신부는 무엇보다도 평신도 사도직 단체의 활성화에 노력하여 청년회 · 병자 후원회 · 젬마회 · 성지회 등을 창단하였으며, 1977년 7월에는 수녀원을 신축하였다. 허승조 신부가 19대 주임을 맡고 있던 1977년 11월 서문(西門) 본당이 분리 · 설립되었다. 허 신부는 5년 동안 주임 신부로 재직하면서 본당의 내실화에 주력하는 한편 황사평 묘역을 단장하였다. 20대 주임으로 재부임한 홍충수 신부는 1985년 3월 2층 교육관(262평)을 건립하였으며, 1987년 8월에 인접 부지를 매입하고, 1988년 1월에 수녀원을 개축하였다. 2월에는 추자 공소를 서문 본당으로 이관하였으며, 1990년 4월 교육관(92평)을 증축하였고, 1989년 5월에는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 성당 건립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어 21대 주임으로 부임한 이태수 신부는 1995년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 사업 추진위원회' 를 구성하여 기념 사업을 전개해나
가기 시작하였고, 같은 해 7월 13일에는 수녀원 신축 공사를 시작하였다. 22대 주임 고승헌 신부는 1995년 11월 수녀원(49평)을 완공하고 축복식을 거행하였으며, 신자 배가 운동을 전개해 나가면서 쉬는 신자 회두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이와 함께 본당 100주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주교좌 대성당 건립 계획을 수립하여, 1996년 8월 15일 건립 계획을 확정 발표하고 기존 성당을 철거한 뒤 1997년 8월 21일에 기공식을 가졌다. 그 후 대성당 건립 공사는 교회 안팎의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모든 본당 신자들의 봉헌과 노력, 제주교구와 제주 지역 모든 본당과 신자들의 후원에 힘입어 2000년 7월 2일 지하 2층 지상 3층의 대성당(1,368평)을 완공하고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 제주교구 ; 신창 본당)
※ 참고문헌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 사업 추진위원회, 《제주 천주교회 100년사》, 천주교 제주교구, 2001. 〔金善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