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교황(492~496). 5세기 교황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 축일은 11월 21일.
아프리카 출신으로 로마 교회의 대부제(arhidiaconus)를 역임하였다. 그가 492년 3월 교황으로 선출되기 이전의 생애와 활동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전임 교황들 재임시 교회를 다스리는 일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 같다. 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당시, 그리스도의 본성에 관한 동방 교회와 교황청 사이의 신학 논쟁은 두 교회 사이의 대립과 경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이 상황은 신학적 영역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었으며, 정치와 개인적인 신앙 생활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451년의 칼체돈 공의회에서 그리스도 단성설(monophysitismus)을 이단으로 규정한 이후 양 교회의 대립은 심각한 국면에 직면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방 교회에서는 단성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으며,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제논(474~491)이 동방 교회 주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교황청과는 상의 없이 이른바 헤노티콘(Henotikon)이란 평화 신조를 발표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아카치우스(Acacius, 471~489)마저 이에 동조하자, 젤라시오 1세의 전임자였던 교황 펠릭스 3세(483~492)는 그를 파문하고 동방 교회와의 교류를 단절시켰다.
〔활 동〕 이단에 대한 대응 : 젤라시오가 교황으로 선출되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에우페미우스(Euphe-mius, 490~496)는 교황에게 서한을 보내어 자신의 신앙 고백을 전달하는 등 교황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을 하였다. 하지만 교황은 답신을 통하여 이단과 함께하고 있는 동방 교회와 신앙적 일치를 이루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하였다. 또한 아카치우스에 대한 파문은 불공정할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콘스탄티노플 총대 주교의 주장을 전혀 수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였다. 이미 공의회를 통하여 이단으로 단죄받은 내용을 주장하는 이들과 만나고 교류를 하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파문은 정당하다고 언급하였다. 사실 이 편지의 내용은 로마 주교좌의 수위권과 이에 순명해야 한다는 필연성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는 교황에게 순명하는 것을 거부하고 분열과 대립은 가속화되었다.
이처럼 교황은 그리스도 단성설을 확고하게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이단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단죄하였다. 당시에 달마티아(Dalmatia)와 피체눔(Picenum)에서 펠라지우스주의가 다시 발흥하고 있었고, 특히 피체눔에서는 주교들과 신부들이 펠라지우스주의를 신봉하고 있었다. 교황은 해당 지역의 주교들은 물론 성직자들에게 서한을 보내어 이단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하였으며, 원죄에 관한 정통 교리를 재천명함으로써 이단 단죄의 의지를 강력하게 표명하였다. 동시에 신앙과 교리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하여 교황청이 세상의 모든 교회를 보살펴야 한다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교황은 또한 로마 내에 마니교를 믿고 따르는 이들이 있음을 확인하고, 마니교에 관한 서적들을 성모 마리아 대성전 앞에서 소각하였다.
정치 권력과의 관계 : 교황의 또 다른 업적은 정치적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제논의 뒤를 이어 동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한 아나스타시우스 1세(491~518)는 동고트족의 왕(471~526)으로 이탈리아의 왕(493~526)이 된 테오도리쿠스(Theodoricus)는 물론 교황청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동로마 제국에 파견되었던 테오도리쿠스 왕의 사절들이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는 길에, 로마에 들러 황제 즉위 이후 교황청으로부터 아무런 예우도 받지 못하였다는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불평을 교황에게 전달하였다. 이에 교황은 강경한 어투로 494년 장문의 서한을 황제에게 보내어 세속적인 권력과 교회의 권력이 상호 다른 차원에 있음을 역설하였다. 즉 교황은 이 서한에서 양권론(兩權論)을 명백히 정식화하였다. "세상을 지배하는 두 가지 권력이 있다. 그 하나는 성직자의 신성한 권위이고, 다른 하나는 왕의 권위이다." 교황은 제권(帝權, imperium)과 성권(聖權, sacer-dotium)을 엄격히 구분함으로써 동로마 제국처럼 양권을 동일시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주교들은 교황으로부터 종교적인 기능을 행사할 수 있는 축성된 권한을 위임받았기 때문에, 비록 황제라 하더라도 종교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주교의 가르침을 존중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주교들은 공공 질서의 영역에서 황제의 법률을 따라야 한다. 하지만 결국에는 성권이 제권보다 우선한다는 점을 밝힌 것인데, 이후 중세 시대에 두 권력이 지속적으로 경쟁 관계에 놓이게 되는 출발점이 되었다.
교회 개혁 : 교황은 교회 내 개혁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그는 당시 이탈리아 교회에 성직자의 숫자가 부족하다는 점을 알고는, 중대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거나 혹은 두 번 결혼하지 않은 수사들에게 사제품을 주는 것을 허가하였다. 하지만 평신도들을 서품할 경우에는 사전에 면밀하게 관찰하라고 요청하였다. 또한 교황청의 허가 없이 주교들이 새 성당을 봉헌하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세례성사 혹은 견진성사를 이유로 성직자들이 신자들에게 금품을 요구하는 행위를 단죄하였다. 교황의 허락 없이 주교들이 사제와 부제를 독자적으로 임명하는 것도 금지하였다. 또한 부제들에게 서한을 보내어 사제의 권한에 해당되는 기능을 수행할 수 없음을 밝혔으며, 반드시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세례를 주는 것은 물론 성체와 성혈을 신자들에게 분배하는 일도 금지하였다. 교황은 부활 대축일과 성령 강림 대축일을 제외한 다른 날에 세례를 베푸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미혼 여성들에게는 주님 공현 대축일과 부활 대축일 및 사도들의 축일에 머리에 미사보를 착용할 것을 요구하였고, 과부들이 수도회에 입회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또한 당시 몇몇 교회에서 행해지던 관습처럼 여성이 미사 전례를 돕는 행위를 강력하게 비난하였다.
교황은 494년에 개최된 로마 교회 회의에서 교회의 재산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관리하도록 하였다. 즉 주교, 신부, 빈민, 그리고 교회 건물을 건립하는 교회 재산 관리 위원회를 위한 것이었다. 교황은 또한 안드로마쿠스(Andromachus)를 비롯한 로마의 원로원 의원들이 로마의 전통적인 축제인 목신제(牧神祭)를 부활시키려는 것에 반대하였으며, 미신적인 행위를 단죄하였다. 그러나 로마 시민들은 그러한 이교도적인 오래된 관습의 부활을 바라고 있었다. 이에 교황은 그 축제일을 '주님 봉헌 축일' 로 정하였다.
〔저 술〕 교황 젤라시오 1세의 저술로는 100편이 넘는 편지와 논문이 있다. 우아하지만 다소 모호한 문체로 작성된 교황의 서한과 논문들은 당시를 '젤라시오 르네상스 로 규정할 만큼 중요한 가치를 갖고 있다. 이 저작들은 교황이 로마 교회의 관습들에 정통하였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교황의 이름으로 전해져 오는 문서 중 대표적인 것으로 《젤라시오 교령》(Decretum Gelasianum)이 있다. 다섯 부분으로 구성된 이 문서는 그리스도와 성령, 정경으로 인정된 성서의 각 책들, 로마 교회의 정통성을 지닌 교회 회의들과 정통 교부들, 로마 교회로부터 인정받은 교부들의 저서와 교회로부터 거부당한 저서들이 수록되어 있다. 로마 교회의 수위권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이 문서가 교황의 저술이라고 처음으로 언급한 사람은 힝크마르(Hincmar de Reims, 806?~882) 대주교였다. 하지만 이 교령은 젤라시오 1세의 재임 시기보다는 후대의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현대 학자들의 견해이다.
교황의 저술로 여겨지는 또 다른 대표적인 저술이 《젤라시오 성무 집전서》(Sacramentarium Gelasianum)다. 이 성무 집전서에는 《구 젤라시오 성무 집전서》(Sacramen-tarium Gelasianum Vetus)와 《신 젤라시오 성무 집전서》(Sa-cramentarium Gelasianum Novum)가 있는데, 이 두 가지 모두 젤라시오 1세가 만든 것으로 잘못 이해되어 붙여진 명칭이다.
〔평 가〕 교황 젤라시오 1세에 대한 평가는 이중적이다. 교황은 섬세한 정신의 소유자였으며, 자신의 권위를 가치 있게 만들 줄 알았던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교황은 질서와 규율을 사랑하였으며, 확고한 신중함을 겸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정도로 지나친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 성무 집전서)
※ 참고문헌 Histoire des Papes, Administration de Librairie, tome Ⅱ, 1842, pp. 349~356/ Gaston Castella, Histoire des Papes, Zurich, Fraumunster, 19441 August Franzen, 최석우 역, 《세계 교회사》, 분도출판사, 2001/ J.ND. Kelly, Oxford Dictionary ofPopes, Oxford Univ. Press, 1996, pp. 47~49/ J. Chapin, 《NCE》 6,pp. 135~136. 〔琪燦〕
젤라시오 1세 (?~496)
Gelasius Ⅰ
글자 크기
10권

교황 젤라시오 1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