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의 지배자들과 그 동조자들에 대항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고 하느님 나라를 세우고자 무력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서기 6년 갈릴래아 출신 유다(Yehudah ha-Galili, +6)라는 사람의 영도 아래 결성한 조직. '열혈당' 또는 '열심당' 이라 번역하기도 한다.
젤롯당에 대한 위와 같은 전통적인 설명은 헨겔(M. Hengel)의 종합적인 연구 결과를 담은 책(Die Zeloten, Leiden, 1961)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1971년에 스미스(M. Smith)는, 1920년에 레이크(Kir-shop Lake)가 지적한 것처럼, 서기 6년에 조직되어 활약한 국민적인 저항 운동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고 비판하였다.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F.Josephus, 37/38?~100?)는 젤롯당의 개념을 제1차 유대 독립 전쟁(66~70)에서 사용하고 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이 당파는 서기 6년 갈릴래아의 유다가 만든 '제4 철학' (The Fourth Philoso-
phy)과 무관하며, 66년 여름 제1차 유대 독립 전쟁에서 퇴각하여 마사다에서 자결한 시카리(Sicari)와도 무관하다. 그래서 제4 철학은 시카리를 통해 계승되었으나, 젤롯당은 이들과 관련 없이 오직 제1차 유대 독립 전쟁 때에만 등장한 혁명 조직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젤롯당의 성립 시기와 제4 철학 및 시카리와의 상관 관계에 대하여 학자들 간에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제4 철학과 시카리〕 제4 철학 : 서기 6년 로마 제국은 유대 지방을 관할하던 헤로데의 아들 아르켈라우스(Ar-chelaus)의 권한을 박탈하고 직접적인 통치권을 행사하면서 과세 정책의 일환으로 그 지방의 최고 세입액을 결정하기 위한 인구 조사를 실시하였다. 이때 갈릴래아의 유다는 바리사이파인 사독과 함께 제4 철학을 창설하고 (《유대 고대사》 18권, 9), 납세 거부 운동을 주도하였다(《유대 전쟁사》 7권, 253). 제4 철학은 요세푸스가 사두가이파, 바리사이파, 그리고 에세네파와 구별하기 위하여 붙인 이름이었다. 제4 철학의 로마 지배에 대한 반란의 정당성은 다음의 네 가지 사상에 근거하고 있었다. 첫째, 로마의 인구 조사는 유대인들을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을 대상으로 한 인구 조사를 금지하는 성서적 전통(1사무 24장)을 거스르는 것이다. 둘째, 유대인들에게 납세는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을 위반하는 것이다. 요세푸스가 기록한 대로 "그들은 하느님 한 분만이 그들의 지도자(ηγέτης)이며 주인(διευθυντής)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인간적인 주인을 섬겨서는 안 된다" 라고 강조하였다(《유대 고대사》 18권, 23). 셋째, 제4 철학은 바리사이파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일을 성취하는데 인간이 함께 협력한다는 신인 협동설을 믿었으나, 바리사이파들과는 달리 압살될 수 없는 자유에의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인간을 주인으로 섬기기보다 죽음을 선택하였으며, 혈족이나 동료들과의 투쟁도 마다하지 않았다(《유대 고대사》 18권, 23). 넷째, 제4 철학은 요세푸스의 글에 분명히 나타나지는 않지만, 정의로운 하느님의 마지막 시대가 도래하리라는 종말론적인 기대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고난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유대 고대사》 18권, 23 : 《유대 전쟁사》 7권, 417~419). 요세푸스는 유다를 교사(δάσκαλος), 《유대 전쟁사》 2권, 118)라고 불렀는데, 마카베오 시대부터 외국의 지배에 저항하는 순교자 신학을 발전시켜 온 마스킬림(maskilim, 현인 · 교사들)의 오랜 전통(다니 11, 32-35 ; 12, 1-3)이 유다와 사독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처럼 유다와 사독은 백성들이 자유를 위하여 로마에 저항하도록 강하게 압박하였고(《유대 고대사》 18권, 4), 나라에 소요를 일으켰으며 다가올 불행의 원인을 제공하였다(《유대 고대사》 18권, 9)고 요세푸스는 평가한다. 그러나 서기 6년에 시작된 독립 전쟁 이후 제4 철학은 오랫동안 요세푸스의 저작에서 언급되지 않다가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후 시카리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시카리 : 서기 50년대에 예루살렘에 출현한 시카리라는 명칭은 로마인들이 '시카' (sica, 단도 · 단검)라고 부른 무기 이름에서 비롯되었다(《유대 고대사》 20권, 186). 시카리는 도시의 중심가 대로에서 백주에 사람을 죽였다. 특히 축제 기간에는 옷 속에 작은 단도를 숨기고 군중 속으로 섞여 들어가 원수를 찔러 죽였다. 홀슬리(R.A. Hor-sley)에 의하면, 시카리의 행동은 테러리즘에 속한다. 요세푸스의 글에 나타나는 시카리의 테러 전술은 선별적인 사람들에 대한 상징적인 암살, 부유한 자들과 권력자들의 재산에 대한 파괴 및 약탈에 수반되는 일반적인 암살 그리고 납치 등이다. 그들은 대사제 요나단과 예루살렘의 귀족들을 암살하고, 붙잡힌 동료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고위 관리들을 납치하는 테러 행위를 하였다(《유대 전쟁사》 2권, 254~257 ; 《유대 고대사》 20권, 165. 186, 204권, 208~210).
시카리는 로마 군대나 로마 시민이 아니라 항상 동료 유대인들을 목표로 하였다. 이들의 목표는 제4 철학의 이념대로 로마의 부당한 통치로부터 유대 백성을 현실적으로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먼저 로마에 협력하는 지배 집단에 테러를 가해서 긴장과 공포를 조성하였고, 지배자들의 분열 효과를 가져왔다(《유대 전쟁사》 2권, 256~257). 갈릴래아의 유다의 손자였고 유다처럼 현자라고 불렸던 메나헴(Menahem)은 전쟁이 발발하던 초기에 시카리를 이끌고 마사다를 점령하여 무기를 탈취한 뒤(《유대 전쟁사》 2권, 408, 434), 왕의 의관을 차려입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였다. 그는 앞장서서 엘리트 계층을 공격하고 대사제 아나니아스를 암살하였다(《유대 전쟁사》 2권, 435~442). 그러나 예루살렘 출신 혁명 세력의 지도자이자 대사제 아나니아스의 아들인 엘레아자르가 메나헴에게 반기를 들었고, 그는 결국 혁명주의자들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마사다로 도피하였고, 유다의 또 다른 후손인 엘레아자르 벤 야이르(Eleazar ben Jair)가 이들을 지도하였다. 서기 74년 로마 군대가 마사다 요새에 진입하였을 때, 시카리는 로마에 굴복하여 노예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자결을 선택하였다. 그 집단 자살자는 남자 960명에 여자 및 어린이들이었다(《유대 전쟁사》 7권, 320~388, 389~401).
〔젤롯당〕 전통적인 견해에 의하면, 갈릴래아의 유다가 창설한 제4 철학은 유대인들의 해방 운동 전반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유대의 혁명 세력이 젤롯당이었다고 한다. 모든 혁명 세력이 젤롯당이고, 제1차 유대 독립 전쟁은 젤롯당의 운동이라는 것이다. 이 입장을 따르는 학자들은 로마인들과 이들에게 협조하는 유대인들을 거룩한 땅에서 제거하고 율법에 충실하려는 종교적인 열성이 제1차 유대 독립 전쟁의 근본 동기라고 본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젤롯당을 제4 철학이나 시카리와 무관한 독자적인 그룹으로 67~68년의 겨울에 비로소 언급하기 시작한다. 젤롯당의 기원에 대하여 홀슬리는 유대 농민 도적떼와 관련시켜 설명하였다. 67년 가을 로마 군대가 북서 유대 지방으로 이동하면서 마을마다 약탈과 살인을 저지르는 초토화 작전을 전개하자, 수많은 유대 농민들이 일련의 도적떼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수 많은 도적 집단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젤롯당을 구성하였으며, 68년에 임시 정부를 전복시키고 제비뽑기에 의해 새로운 대사제를 선출하는 등 평등을 지향하는 일종의 대안 정부를 조직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로즈(D. Rhoads)는 젤롯당이 하위 사제들과 예루살렘의 혁명군, 그리고 유대 시골에서 올라온 도적떼가 연합된 조직이었다고 본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66년 로마 총독 플로루스(Plous, 64~66)와 헤로데 아그리파 2세(Herod Agrippa II, 27~93?)가 예루살렘에서 축출된 뒤, 하위 사제들은 일부 고위 사제들의 지도를 받고 일부 예루살렘 평신도들의 협조하에, 로마 황제를 위하여 하루에 두 번씩 바치던 제사를 중단하였다(《유대 전쟁사》 2권, 409~417). 대사제 아나니아스의 아들로 성전대장이었던 엘레아자르는 이들 하위 사제들을 지휘하여 모든 이 방인의 영향으로부터 성전을 정화하였다. 이 제사 중지는 유대인들의 독립과 주권에 대한 선언이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서 시민 전쟁이 발발하였다(《유대 전쟁사》 2권, 418~456). 시몬의 아들인 사제 엘레아자르는 예루살렘 혁명 세력의 지도자였다가 이 그룹과 결별하고,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 9~79)가 갈릴래아와 유대를 초토화하면서 발생시킨 도적떼 및 난민들과 연합하였다. 엘레아자르의 추종 세력과 유대 북서부의 난민들, 도적떼, 지역 의용군들은 성전에 머물며 요새를 구축하였다. 요세푸스는 이 연합군을 젤롯당이라 불렀다(《유대 전쟁사》 4권, 160). 당시 예루살렘에는 젤롯당이 2,400명, 기살라(Gishala)의 요한의 군대가 6,000명, 시몬 바르 기오라(Simon bar Giora)의 군대가 10,000명, 이두메아인 군대가 5,000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도시의 장악권을 둘러싸고 서로 경쟁 관계에 있었다(《유대 전쟁사》 5권, 248~251). 젤롯당은 숫자 면에서는 열세였으나 예루살렘을 포위한 티투스(Titus, 39~81)의 로마 군대에 용감하게 대항하였다. 마침내 70년 8월 예루살렘이 함락되자 젤롯당의 일부 병력은 도시를 빠져나왔으나 야르데 숲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유대 전쟁사》 7권, 210~215)
오늘날 학계에서는 66년에 로마 황제를 위한 제사를 중단하였던 대사제 아나니아스의 아들 엘레아자르가 이끄는 사제 그룹과 68년에 결성된 젤롯당 사이에 연속성이 있는지에 대하여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스턴(Stem)과 로즈는 시몬의 아들 엘레아자르가 사제로서 젤롯당의 지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이두메아인 의용군의 지휘관으로 지명된 아나니아스의 아들 엘레아자르와 젤롯당이 연대하였다는 점에서(《유대 전쟁사》 2권, 566), 젤롯 운동에는 사제 그룹이 행한 역할과 이념의 연속적인 성격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래서 로즈는 젤롯당이 성전과 예루살렘을 정화하고자 하였던 유대인들로서 종교적인 동기를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스미스와 홀슬리에 의하면, 젤롯당은 예루살렘에 이미 존재하였던 혁명 세력과 무관하며, 베스파시아누스가 북서부 유대 지방을 초토화시킨 결과 예루살렘으로 몰려온 농민들과 도적떼들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집단이다. 이 양자의 견해를 균형 있게 평가한다면, 하위 사제 계급과 유대 농민 도적떼가 연합하여 구성된 젤롯당 안에는 성전 정화의 종교적인 측면과 평등한 대안적 사회를 꿈꾸는 정치 사회적인 동기가 공존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젤롯당은 제비뽑기를 통하여 유대 지방의 무식한 농부 한 사람을 대사제로 선출하고 집단 지도 체제하의 평등한 정부를 구성하였던 것이다(《유대 전쟁사》 4권, 153~157).
결국 젤롯당은 갈릴래아의 유다가 창설한 제4 철학의 후신이었던 시카리, 기살라의 요한, 시몬 바르 기오라, 그리고 이두메아 의용군과 함께 제1차 유대 독립 전쟁에 참여한 5대 조직 중 하나였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에 대한 항쟁을 젤롯 운동이라고 일반화하여 표현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제1차 유대 독립 전쟁은 단지 로마인들로부터 자유를 추구하는 독립 전쟁이었을 뿐 아니라, 로 마에 협조하여 유대인들을 억압하던 정치 · 종교적인 엘리트들에 대항하여 일어난 내란이기도 하였다. 그것은 하위 사제들이 대사제들을 거슬러서 일어나고, 가난한 농민들이 도시의 부유한 지주들을 상대로 저항하며, 하층민이 귀족 계급을 상대로 일으킨 시민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 내포된 요인은 정치, 사회, 경제 그리고 종교에 걸쳐 다양하고도 복합적이다. 그리고 이 모든 배후에 종교적인 동기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이유는 유대 사회에서 종교와 현실이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요세푸스가 제1차 유대 독립 전쟁의 발발과 그 비참한 최후에 대한 책임이 제4 철학에 있음을 강조하였을 때(《유대 고대사》 18권, 1), 그것은 그만큼 종교적인 동기가 제1차 유대 독립 전쟁 전반에 작용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예수와 젤롯당〕 예수 당대에 젤롯당이 존재하였는가를 판단하는 데 학자들은 예수의 제자 중에 시몬에게 붙여진 "호 젤로테스" (Ό Ζττήτής : 루가 6, 15 : 사도 1, 13)또는 "호 카나나이오스" (Ό Καναναίος, : 마르 3, 18 : 마태 10, 4)라는 명칭을 중요한 시금석으로 삼고 있다. 헨겔과 그의 지지자들은 시몬에게 별명으로 부여된 호 젤로테스 (단수)부터 예수 시대에 젤롯당(οί Zn入cotou, 복수)이 존재하였음을 추론하는 것이 합당하고 본다. 그러나 로즈와 홀슬리 등 북미 학자들은 젤롯당이 제1차 유대 독립 전쟁 발발 후에 비로소 요세푸스의 저작에 등장한다는 점을 들어 시몬의 별명 호 젤로테스 를 달리 해석한다.
'젤로테스' (Ζττήτής)에 해당하는 아람어는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는 데 강한 열정을 가지고 이방인들의 부도덕과 우상 숭배로부터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을 분리시키는 수단으로 율법을 엄격하게 준수할 것을 강조하는 유대인을 뜻하였다. 구약성서에서 사제 비느하스, 예언자 엘리야, 왕 예후, 사제 마타티아스는 엄격한 율법 준수를 동족에게 강조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모세의 율법에 충실하지 않은 유대인들을 처벌하거나 심지어 살해하였다. 그래서 1세기 유대교에서 '젤로테스' 는 이방인들에게서 이스라엘을 분리시키기 위하여 무력을 행사할 용의가 있는 사람을 지칭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율법 준수에 남다른 열정을 가진 개인들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of Alexandria, 기원전 15/10~서기 45/50)는 많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무자비했던 율법의 열성주의자들(zelotai nomon)이었다고 말하였다(De Speci-alibus Legibus 2. 46. 253). 신약성서에서도 사도 바오로는 자신을 일러 조상의 전통을 지키는 데 누구보다도 열성적(Ζττήτής)이었다고(갈라 1, 13-14 ; 필립 3, 6) 하였다. 이러한 표현은 바오로가 교회를 박해하는 상황에서도 사용되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바오로가 하느님께 대한 열성주의자(사도 22, 3)로서 교회를 박해했다고 하였다(사도 22, 19).
이러한 언어적인 활용은 시몬에게 붙여진 '젤로테스'가 제1차 유대 독립 전쟁 때 등장한 젤롯당과 관련이 없음을 보여 준다. 무엇보다도 예수 당대에 갈릴래아에서는 유대인 왕자 헤로데 안티파스(Herod Antipas)가 독자적인 군대와 납세 조직을 운용하여 다스렸기 때문에 로마 군대에 항쟁하는 젤롯당의 존재가 있을 리 없다. 결국 예수의 제자 시몬에게 붙여진 호 젤로테스 는 그가 요세푸스가 말하는 혁명주의 세력으로서 젤롯당원이기 때문이 아니라, 율법을 어기는 자들에 대해 그가 과격한 입장을 취함으로써(루가 6, 15 ; 사도 1, 13 ; 참조 마태 10, 4 ; 마르 3, 18) 얻어진 별칭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시몬이 과연 어떻게 율법에 대한 자신의 열성을 표명하였고, 어느 정도까지 폭력을 사용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알수 없다.
역사가 중에는 예수를 젤롯당원이라 주장하는 사람(Reimarus, Eisler)도 있었고, 또 그를 젤롯당의 동조자로 보는 사람(Brandon)도 있었다. 그리고 예수는 사상적으로는 혁명적이었으나, 폭력을 거부하고(마태 26, 52) 세리를 받아들였으며(마르 2. 15-17) 원수 사랑을 명령함으로써(마태 5, 44 ; 루가 6, 27-31. 35) 젤롯당을 거부하였다고 생각하는 사람(M.Hengel)도 있다. 그러나 젤롯당을 제1차 유대 독립 전쟁 중에 등장시키는 요세푸스의 기록에 근거할 때, 예수와 젤롯당과의 관계를 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예수는 비폭력을 가르치고 실천하였으나, 하느님 나라에 관한 그의 주장은 유대 당국자나 로마 지도자들에게 심각한 위협이었다. 그는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의 빛 속에서 성전과 율법 중심의 현 체제와 로마 지배를 비판하였고, 하느님이 새로운 메시아적인 질서를 세워줄 것이라고 선포하였기 때문이다. 하느님 중심적이고 묵시주의적인 전망에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고 그 나라 의 현실을 살아간 예수는 결국 유대 당국자들에 의해 사형을 언도받고 로마인에 의해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 열혈당 ; → 마사다 ; 유대교)
※ 참고문헌 E. Bammel · C.F.D. Moule eds., Jeus and the Politics of His Da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4/ S.GF. Brandon,Jesus and the Zealots, Manchester, 1967/ M. Hengel, Die Zeloten, Leiden, 1961/ -, Was Jesus a revolutionanry?, Philadelphia, 1971/ R.A. Horsley, Jesus and Spiral ofViolence, Sanfrancisco, 1987/ R.A. Horsley · B. Hanson, Prophets and Messiahs, Harper & Row, 1985/ F. 벨로 · R.A. 홀슬리 《예수 시대의 민중 운동》, 한국신학 연구소, 1990/ J.P. Meier, A Marginal Jew, vol Ⅲ, Doubleday, 2001/ D. Rhoads, 《ABD》 6, pp. 1043~1054/ M. Smith, Zealots and Sicarii, 《HTR》 64, 1971, pp. 1~19/ E. Schürer, The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in the age ofJesus Christ, rev. and ed. by Geza Vermes · Fergus Millar, vol. 2, Edinburgh, T.&.T.Clar, 1973/ I.M. Zeitlin,Jesus and the Judaism of His Time, Polity Press, 1988. 〔白雲哲〕
젤롯당
ㅡ 黨
〔그〕Ζηλωτής · 〔라〕Zelotani · 〔영〕Zea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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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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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롯당원들이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마사다 요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