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섬 (1739~1830)

趙東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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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학자. 유배자. 세례명은 유스티노. 경기도 양근(楊根)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한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며 생활하였다. 그가 언제 어떠한 계기로 천주교를 믿게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김범우(金範禹, 토마스)로부터 교리를 들었음은 이후 심문 과정에서 확인되었다. 조동섬은 1791년 신해박해(辛亥迫害) 당시 천주교 서적을 본 일 때문에 양근군의 옥에 갇혀 9개월 동안 지내다가 석방되었다. 이후 1801년 2월 2일(음 1800년 12월 19일) 무렵 다시 한 번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뒤, 2월 22일 대왕대비 김씨의 공식 박해령이 선포된 후 3월 25일(음 2월 12일) 양근에서 체포되어 서울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그는 신문 과정에서 줄곧 자신은 신해년 이전에만 천주교를 공부했을 뿐 그 이후로는 천주교를 믿지 않았다고 진술하였다. 그리하여 조동섬은 4월 8일(음 2월 26일) 경기 감영으로 이송되어 이곳에서 유배형을 받아 함경도 무산(茂山)으로 유배되었다. 조동섬은 유배지에서 자신의 배교를 깊이 뉘우치고 주위 사람들에게 복음을 알렸고 유배지까지 자신을 찾아와 교리와 한문을 배우고자 하는 이들을 성심껏 가르쳤다.
한편 신유박해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조선 교회는 지도급 신자들을 중심으로 교회 재건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위해 이여진(李, 요한) · 조동섬 · 한 토마스 등이 참여하여 1811년 로마 교황과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편지를 작성했다. 조동섬은 1812년에도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편지를 작성하였다. 정하상(丁夏祥, 바오로)은 1816년 신부 파견을 요청하기 위해 북경으로 가는 준비 를 하고자 조동섬을 찾아갔다. 이때 조동섬은 여러 달 동안 그에게 한문을 가르치며, 정하상의 앞으로의 활동 계획에 대해 크게 격려하고 교회 재건과 신부 영입에 힘써줄 것을 당부하였다. 이와 같은 사정을 볼 때 당시 조동섬은 이 시기 교회 부흥 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조동섬은 성직자 영입 운동에 관여한 조숙(趙淑, 베드로)이 체포되자 1819년 그와 가까운 친척 간이라는 이유로 다시 관아에 끌려가 심문을 받았다. 이때 조동섬은 자신이 여전히 천주교를 믿고 있음을 명백히 밝히며 순교할 의지를 보였다. 이에 관장은 이후 아무도 그와 연락을 취하지 못하도록 명하였으나, 그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그를 따르던 많은 제자들은 이러한 명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조동섬을 찾아갔다. 결국 이러한 모습을 본 관장은 이들의 행동을 묵인하였다. 이후에도 조동섬은 유배지에서 활발한 신앙 활동을 펼치다가 1830년 8월 2일(음 6월 14일) 9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상, 중/ 《推案及勒案》 . 〔洪延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