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 제사 문제

祖上祭祀問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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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에 대한 제사를 금지하는 교황청의 지침에 대해 조선 시대의 유학자들과 신자들이 보인 반응과 해결에 대한 문제.
〔조상 제사 금령과 천주교 탄압〕 한국 천주교회 창립 당시의 초기 신자들은 천주 외의 다른 신에 대한 경배와 제사 행위를 미신으로 알고서 배척하였다. 하지만 조상 제사 문제에 대해서는 금지 명령을 제대로 모르고 천주교 신앙과 함께 병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1785년 저술된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의 <천학문답>(天學問答)에 따르면, 양반인 천주교 신자 중에는 공자 공경 제사〔釋奠〕와 조상 제사에서의 신령 흠향(神靈欽香)에 대해, 천주교 교리에 따라 죽은 이의 영혼이 제사를 흠향하러 올 수 없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성교절요》(聖敎切要)를 통해 조상 제사에 관련된 금지 규정을 좀 더 명확히 알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신자들은 조상 제사 문제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고, 이에 조상 제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신주(神主)를 모셔도 좋은지에 대해 문의하는 편지를 1790년 사행원 윤유일(尹有一, 바오로)을 통해 북경 교회에 보냈다. 북경교구의 구베아(Gouvea, 湯士選) 주교는 조상 제사에 관한 질문을 받고서 교황청의 엄한 금령을 명백히 전달해 주었다.
이 제사 금령에 대한 조선인의 첫 반응은 윤유일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는 구베아 주교에게 "조상 제사의 근본 의도는 '돌아가신 이 섬기기를 살아 계실 때 섬기듯이 함' 〔事死如事生〕에 있으니, 만약 천주교를 믿으면서 제사를 지낼 수 없다면 매우 곤란한 일인데 무슨 방도가 없겠습니까?"라 안타까움과 함께 대안책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구베아 주교는 "천주교는 반드시 성실을 가장 중요시하는데, 사람이 죽은 후에 음식을 차려 놓는 것은 성실의 도〔誠實之道〕에 크게 어긋난다" 라고 대답할 뿐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구베아 주교가 이와 같은 입장을 견지한 이유는 교황 외에 누구도 제사 금령을 변경 또는 완화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제사 금령은 조상 숭배를 국교와도 같이 준행하던 당시 유교적 전통 사회에서 달레(Ch. Dallet, 1829~1878)의 말처럼 "조선 국민
모든 계층의 눈동자를 찌른 격"이었다. 이제 조선 신자들에게는 부모냐 천주냐, 조상 제사냐 천주 공경이냐의 양자택일의 길만이 주어졌다.
천주교회의 제사 금령에 따라 전라도 진산에 살던 선비 윤지충(尹持忠, 바오로)과 그의 외종형 권상연(權尙然, 야고보)은 조상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웠다. 그리고 1791년 5월 윤지충의 어머니 권씨가 세상을 떠나자 그들은 정성으로 장례를 치렀으나, 혼백(魂帛)이나 신주를 세우지 않고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이러한 처사는 당시 유교적 전통 사회에서 유학자들에게는 물론 일반인에게도 전통 사상과 윤리 질서를 근원적으로 부정하고 파괴하는 엄청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대한 유가와 조정의 대응은, 비록 시각과 방법의 차이는 있었지만, 공통적으로 전통 문화에 대한 긍지를 갖고 이를 옹호하고 진작시켰다. 그리고 천주교를 무부무군(無父無君)의 패륜적인 사교(邪敎)로 낙인 찍고 탄압하였는데, 이것이 1791년의 신해박해(辛亥迫害)이다. 조선에서 천주교회는 100여 년간 혹독한 박해를 받아 1만여 명의 순교자를 배출하였는데, 박해의 중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한 것이 바로 이 조상 제사에 대한 금령 문제였다.
이 금령에 대해 초기에는 윤지충 · 권상연 ·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 등 소수만이 따랐을 뿐 대다수 신자들은 계속 조상 제사를 받들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1794년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가 입국하여 신앙의 절대성과 조상 제사의 허위성을 교육시키고, 천주 신앙과 조상 제사의 병행이 불가함을 명백히 하자 신자들은 양자택일의 결단을 내려야 했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당시 제사를 폐지하거나 제사 참례를 거부한 사람들 중 대표적 인물은 유항검과 관검(觀儉) 형제,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과 철상(哲祥, 가롤로) 부자, 윤지헌(尹持憲, 프란치스코),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 이중배(李中培, 마르티노), 최창현(崔昌顯, 요한), 최인철(崔仁喆, 마티아) 등인데, 이들은 신분상 봉건적 신분 제도에 시달리던 계층 또는 벼슬 길이 막혔거나 오르지 못한 양반 계층이었다. 또한 대부분 신해박해 후 영세 · 입교하였거나, 주문모 신부와 친밀히 접촉함으로써 천주교 신앙의 절대성을 믿고서 신앙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전통 사상과 기존 체제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사상인 천주교로 전면 대체하려는 혁명적 성향을 갖고 있었다.
다른 한편 이승훈(李承薰, 베드로),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정약전(丁若銓), 정약용(丁若鏞, 요한), 홍낙민(洪樂敏, 루가), 이가환(李家煥) 등은 제사 금령에 대해 거부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1791년 이전에 서학(西學)을 연구하다가 입교한 관료 지식인 내지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지성적 주체 의식과 현실 개혁 의지를 갖고 신앙 생활을 하였으며, 전통 사상인 유교와의 조화를 통해 점진적으로 사회를 혁신하고 민중을 구원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그들에게 전통 문화의 핵심이요, '돌아가신 이 섬기기를 살아 계실 때 섬기듯이' 하는 효도 행위인 조상 제사에 대한 천주교회의 금령은 납득할 수 없는 처사로 인식되었다.
제사 금령은 조선 교회의 성격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신앙의 순수성과 절대성이 강화된 반면, 전통 문화와의 대화와 문화의 복음화를 차단하게 되었다. 천주교와 전통 문화, 특히 유교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이성과 논리에 입각한 대화와 논쟁보다는 생사를 건 투쟁으로 전환되었으며, 천주교 신자들은 전통 문화의 파괴자 내지 비국민(非國民)으로 낙인 찍히게 되었다. 더구나 양반 지 식층이 교회를 떠나게 되면서 중인 계층이 지도적 역할을 하고 서민이 주류를 이룸에 따라, 반유교적 · 반봉건적 성격이 강화되고 민중 종교 운동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반면 초창기 복음의 토착화 모색에서 보였던 적극성과 창의성은 점차 사라지고 선교사 중심의 교회로 전환되어 갔으며, 유럽화된 교리가 그대로 수용 · 신봉되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자세로 변해 갔다. 또한 인륜과 현세 생활을 중시하는 유교와 결별하고 천주 신앙과 순교를 강조함으로써, 내세 천당 · 영혼 · 신앙 생활을 중시하고 현세 · 육신 · 사회 생활을 경시하는 이원론적(二元論的) 성향이 더욱 강화되었다. 더구나 거듭되는 박해로 현세적 삶이 극도로 어렵게 되자 이러한 성향은 더더욱 강화되어, 신앙의 동기와 목적을 오로지 영혼 구원과 사후 천당에 두게 되었다.
〔천주교의 제사 금지 논리와 유가의 반박〕 당시 조선의 신자들이 제사를 폐지한 이유는 한마디로 '천주교에서 금하기 때문 이었다. 천주교를 믿는 이상 천주교회에서 명하는 바를 따르지 않을 수 없으며, 천주교회가 명하는 것은 곧 대부대군(大父大君)인 천주의 명령이므로 부모와 임금의 명은 어길지언정 천주교의 가르침은 결코 위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이 내세웠던 구체적인 제사 폐지 논리 역시 당시 천주교에서 주장하던 논리였다.
그렇다면 조상 제사를 금지한 천주교의 논리는 무엇이었는가? 천주교의 금지 논리와 함께 이에 대한 유학자들의 반박 논리를 비교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조상 제사의 근본 정신과 의의를 올바로 인식하고, 아울러 두 종교의 특성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천주교는 성실을 종지(宗旨)로 삼는데, 흠향할 수도 없는 죽은 이에게 조상 제사를 통해 술과 음식을 올리는 것은 성실의 도에 크게 어긋나는 허례요 가식이라고 보았다. 윤지충은 공술(供述)에서 잠자는 사람이 음식을 먹을 수 없듯이 영면(永眠)한 사람 역시 제물을 흠향할 수 없으며, 더욱이 음식은 육신의 양식일 뿐 영혼의 양식은 될 수 없으므로 조상 제사는 허위라고 역설하였다.
이러한 천주교의 논리에 대해 유학자들은 조상 제사의 근본 목적이 신령의 흠향에 있지 않고 자손의 '돌아가신 이 섬기기를 살아 계실 때 섬기듯이 함' 의 추효 보본(追孝報本)에 있다고 반박하였다. 김치진(金致振)은 "사람이 잠잘 때는 신혼(神魂)이 마음 안에 있고 신체에 은폐되어 있으므로 앞에 놓인 음식을 알지 못하나, 사후 혼(魂)은 (서교의 주장대로라면) 신체를 떠나 이미 자주적 이고 신령한데 어찌 대침(大寢 : 永眠)이라 할 수 있는가?"라고 힐문하였다. 그리고 "제사의 의의는 보본에 있으므로 자손은 마땅히 성경(誠敬)을 다할 뿐이요, 사후 영혼이 그것을 아느냐 모르느냐 또는 흠향하느냐 않느냐를 어찌 인도(人道)로써 해아리겠는가?" 라고 논박하였다. 이렇게 조상 제사의 근본 의의는 보본계효(報本繼孝)에 있지만, 유교에서 지성(至誠)의 제사는 반드시 신령이 흠향한다고 믿었기에 신령과의 감격(感格)과 흠향은 전적으로 자손의 성경에 달려 있는 것이었다.
둘째, 천주교에서는 천당이나 지옥 또는 연옥에 간 영혼은 제사를 흠향하러 이 세상에 올 수 없고, 대신 간교한 마귀가 와서 흠향하므로 조상 제사는 혼잡일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악마를 섬기는 미신 행위라고 배격하였다. 중세 교회에서는 천당 · 지옥 · 연옥을 공간적 장소로 이해하여 천당은 구중천(九重天)의 가장 높은 곳에 있고, 지옥은 땅속 가장 깊은 곳에 있으며, 연옥은 지옥보다는 조금 위쪽의 땅속에 있다고 믿었다. 또한 연옥 단련을 마친 영혼이 천당에 올라가는 경우와 천주의 특별한 허락을 받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각자의 처소에서 나올 수 없다고 믿었다. 따라서 아무리 극진한 효성으로 제사를 드린다 하더라도 선조와 감격이 이루어질 수 없고, 그 영혼이 와서 흠향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악마는 갖가지 교묘한 방법으로 인간을 유인하여 범죄케 함으로써 지옥에 떨어뜨리려고 하기에, 자손의 정성된 제사마저도 유혹과 타락의 계기로 삼는다는 것이다. 즉 조상 제사의 틈을 타서 선조 대신 흠향하고서는 마치 선조의 영혼이 임재(臨在)하여 흠향한 듯이 속인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조상 제사는 명색은 선조를 위한 의례이지만 실제로는 악마를 섬기는 미신 행위이다. 이렇게 마귀를 섬기는 자는 천주를 섬길 수 없으며, 결국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유학자들은 시공을 초월하는 영혼의 신령성(神靈性)을 들어 반박하였다. 즉 천주교에서는 천당에 있는 천주는 무소부재(無所不在)하고 성인들의 영혼 역시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기이한 일을 할 수 있으며 지옥의 마귀도 세상에 출몰하여 사람을 해칠 수 있다고 하면서, 유독 선조의 신령만 제사 드리는 자손의 집에 올 수 없다는 주장은 논리적 모순이라는 것이다. 신령은 본질상 신묘하고 영명(靈明)하여 오고 감〔屈伸往來〕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자재이므로, 제사를 흠향하러 올 수 없고 자손과의 감격도 할 수 없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라고 비판하였다.
셋째, 천주교에서는 백 가지 예〔百禮〕 가운데 제사가 가장 존귀하고 만유 위에 천주만이 홀로 존귀하므로 제사는 유일 절대자인 천주께만 드려야 하며, 천주 외의 어떤 존재에게 드린다면 그것은 참례(僭禮)요 범죄 행위라고 엄격히 배척하였다. "천주를 만유 위에 공경하라" 는 계명을 십계명 중 가장 으뜸으로 받드는 천주교에서는 천주에게 흠숭(欽崇)의 예(禮)를, 다른 존재에게는 공경(恭敬)의 예를 드리도록 명하고 있다. 그런데 제사는 오직 천주께만 드릴 흠승의 예이므로, 천주 외의 다른 존재에게 드리는 것은 아무리 의도와 목적이 좋더라도 제1 계명을 거스르는 중죄라고 하였다. 예컨대 천자를 공경하는 예로써 부모를 공경한다면 아무리 그 의도가 순수하더라도 천자에게 범죄하는 행위가 된다. 그렇다면 "천주를 공경하는 예로써 부모 공경의 예를 삼는다면, 어찌
천주께 대죄를 짓지 않겠느냐"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대해 유학자들은 조상 제사의 근본 의도가 생명의 근본을 잊지 않고 보본(報本) · 보은(報恩)하려는 인간의 도리에 기인한 것이므로, 생명의 근원인 천제(天帝)에게뿐만 아니라 부모에게도 보본의 제사를 드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하였다. 예컨대 부모, 관리, 임금을 섬김에 있어 신분에 맞는 예법을 따르기만 한다면 다 함께 섬길 수 있고 또 모두 다 섬겨야 하듯이, 천제와 선조에 대해서도 각각 알맞는 예법에 따라 성경의 제사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선조에게 제사를 드림이 참례라고 하는 것은, 마치 임금에게 4배(四拜)의 예를 행하기 때문에 부모에게 1배(一拜)의 예도 행할 수 없다는 어리석음과 같다고 반박하였다. 더욱이 부모 섬김과 하늘 섬김을 일통지사(一統之事)로 보고, '부모를 잘 섬김이 바로 하늘〔天〕一을 잘 섬김' 이라고 믿고 있던 유학자들에게 조상 제사를 참례로 규정하고 엄금하는 천주교의 처사는 천주의 강한 시기심과 전횡독존(專橫獨尊)의 이기심을 드러내는 반증으로 인식되었다.
넷째, 천주교에서는 신주에 대해 자손의 골육 생명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나뭇조각[木片]에 지나지 않으며, 사람이 죽으면 그 혼이 어느 물건에 깃들어 있을 수 없으므로 마땅히 없애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정하상(丁夏祥, 바오로)은 <상재상서>(上宰相書)에서 신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이른바 사대부의 목주(木主)역시 천주교에서 금하는 바이다. 이미 기맥(氣脈)과 골육에 있어서도 아무 상관이 없고, 또한 낳고 기른 생육에 있어서도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 부모의 호칭이 얼마나 중하고 큰데, 목수가 만들어 분칠을 하고 먹으로 쓴 것을 보고 진짜 부모라고 하겠는가."
이러한 천주교의 주장에 대해서 유학자들은 인간의 본성적 조건상 볼 수 없는 존재를 극진히 섬기기 위해서는 가시적 표상이 필요함을 들어 반박하였다. 김치진은 신주를 모심이 헛된 일이라고 한다면 서교(西敎)에서 무형한 천주와 천신의 형상을 만들어 모심은 더욱 큰 모독 행위로 범죄 행위가 될 것이라고 비판함으로써 천주교에서 십자가나 성상의 상징성을 인정한다면 유교 신주의 상징적 기능 역시 인정해야 함을 명확히 하였다. 이기경(李基慶) 역시 신주가 자손의 애련한 마음의 의지처요, 정성의 추효(追孝)를 하기 위한 상징적 신상(神像)이라고 역설하였다. 더 나아가 홍정하(洪正河)는 신주가 비록 생시와 같은 선조의 형체는 아니더라도 선조의 신기(神氣)가 의빙(依憑)해 있으므로 실제 선조와 다를 바 없다고 하였다. 이렇게 유교에서 신주는 자손의 애련한 마음의 의지처로서의 신상이며 동시에 무형한 신령의 의빙처인데, 이 두 기능 중 신상의 기능이 더 중요하고 근원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유교에서는 신주가 돌아가신 분에 대해 추효 보본하기 위한, 살아 있는 이들의 본성상 요구와 필요성에서 근원적으로 유래하였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욱이 살아 있는 사람의 지성에 의해서만 신령과의 감격도, 신령의 의빙도 이루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상의 논변에 나타난 두 종교의 사후 효도관(死後孝道觀)과 조상 제례관(祖上祭禮觀)을 비교해 보면 양자의 동이성(同異性)과 특성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첫째, 두 종교 모두 사후에도 계속 효도를 하라고 하지만 그 목적과 방법에 있어서는 상이하다. 천주교에서는 사후 효도의 의의를 죽은 이의 영혼 구원에 두기에, 천주께 기도하고 대속적(代贖白) 선공(善功)을 바침을 중요시한다. 반면 유교에서는 산 이의 도리인 추효 보본에 근본 의의를 두기에 '돌아가신 이 섬기기를 살아 계실 때 섬기듯이 함' 의 제사를 중요시한다.
둘째, 두 종교 모두 제사가 신적 존재에게 드리는 인간 최대의 정성의 표현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천주만이 생명의 유일한 근원이요 절대자이므로, 그에게만 제사를 드려야 하고 다른 존재에게 드리는 것은 참월(僭越)한 범죄 행위라고 단죄하였다. 반면 유교에서는 천(天)뿐만 아니라 선조도 자손 생명의 근원이므로, 사은(謝恩)의 제사 역시 먼 근본〔遠根本〕인 천에게뿐만 아니라 가까운 근본〔近根本〕인 부모에게도 드림이 당연하다고 본다.
셋째, 두 종교 모두 산 사람과 죽은 사람 간의 통교(通交)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천주를 통해서만 통공(通功)이 이루어진다고 믿는 반면, 유교에서는 산 사람의 지성을 통해서만 감격이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따라서 통교의 가능 근거 내지 매체가 전자의 경우에는 천주와의 결합이기에, 아무리 혈육이라도 세례를 받지 않은 비그리스도인이나 지옥에 간 영혼과는 통공이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반면 후자의 경우에는 그 매체가 후손의 성경이기에, 일반적으로 비혈연 관계와는 감통(感通)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믿는다.
넷째, 전통 조상 제사에 대해 천주교는 그 근본 의의가 신령의 흠향과 강복(降福)에 있다고 이해한 반면, 유교에서는 자손의 계효 보본(繼孝報本)에 있으며 신령의 흠향과 강복은 거기에 따르는 결과라고 보았다. 제사의 의의를 실효성에서 이해한 천주교에서는, 사후 영혼은 제물을 흠향할 수도 없고 또 복을 내려 줄 권한도 없으므로 조상 제사는 무익한 허례라고 단죄하였다. 이와는 달리 산 이들의 도리와 효도의 상징성에 제사의 근본 의의를 둔 유교에서는, 비록 신령의 흠향과 강복이 없다 하더라도 효성의 상징적 표현으로서의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확신하였다.
다섯째, 신주의 의미에 대해서도 천주교에서는 신령이 의빙한 신물(神物)로 이해하여 금지하였다. 반면 유교에서는 신령의 의빙처로서의 기능도 인정하나, 이보다는 근원적으로 자손의 애련한 마음의 의지처로서의 상징적 신상이라고 여겨 받드는 것이다.
〔한국 천주교 사목 회의와 조상 제사의 복음화〕 조선 교회는 100여 년간의 참혹한 박해 끝에 1886년 한불 조약을 계기로 신앙의 자유를 얻어 선교에 활기를 되찾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전통 문화에 대한 선교사들의 무관심 내지 무시는 여전하였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자세는 당시 발생한 수많은 교안(敎案)의 한 원인이 되었다. 또한 여전히 제사 거행은 물론 제사와 관련된 일체의 행위 까지도 엄금하였다. 1925년에 간행된 《천주교 요리》(天主教要理)에서는 제1 계명을 거스르는 이단 행위로 제사를 거행하는 것뿐만 아니라 제사에 참석하는 것, 제사 장소에서 음식을 먹는 것, 제사를 도와 주는 행위, 제사에 사용되는 물건을 빌려주거나 만들어 주는 것, 제사 음식을 만드는 일, 향교나 사당을 짓는 일, 시신에 절을 하는 행위 등을 예로 들면서 엄히 금하였다.
1939년 12월 8일 교황청은 <중국 의례에 관한 훈령>을 통해 공자 공경 의식을 전면 허용하고, 조상 제사에 대해서는 전면적인 허용이 아니라도 상당히 관용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이 훈령은 1940년 2월 《경향잡지》에 <중국 예식과 그에 대한 서약에 관하여>라고 번역 · 게재되었다. 같은 해 7월 한국 주교단은 <조선 8교구 모든 감목의 교서>를 발표하여 조상 제사에 대한 교황청의 허용 조처를 "교회의 신앙 도리가 변함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말라" 고 당부하였다. 그리고 교회의 도리는 만세불변하는 진리이며 다만 시대의 변화에 따라 조상 제사에 대한 현대인의 정신이 변했기 때문에 용납하는 것에 불과하고, "교회는 항상 어느 지방의 관례가 교회 신덕 도리에 분명히 위반되지 않으면 이를 금한 일이 없다"라고 언명하였다.
1958년 한국 주교단은 라틴어로 간행된 《한국 교회 공동 지도서》에서 제례와 상례에 관한 일반적인 원칙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허용 의식과 금지 의식의 목록까지 제시하였다. 허용 의식은 시체나 죽은 이의 사진이나 이름만 적힌 위패 앞에서 절을 하고 향을 피우고 음식을 진설하는 행위 등이며, 금지 의식은 제사에 있어서 축문(祝文) , 합문(闔門), 장례에 있어서의 고복(皇復), 사자밥, 반함(飯含) 등이다.
1962년에 개최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타종교 문화에 대한 존중과 토착화 선교 정책을 확립하는 획기적 계기를 마련하였다. 같은 해에 한국 천주교회도 완전한 자치 교회로 인정받는 정식 교계 제도로 설정됨으로써 교계 제도에 있어 토착화의 전기를 맞았다. 이후 전통 문화에 대한 연구와 복음의 토착화에 대한 관심이 점차 움트기 시작하였다.
1984년 한국 교회는 창설 200주년을 맞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이 땅에 실현하고자 교회사상 처음으로 성직자 · 수도자 · 평신도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사목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사목 회의의 특별 주안점 중 하나는 민족 문화의 고유한 유산을 계시의 빛으로 조명 · 수용하고, 신앙 생활 전반에 걸쳐 토착화의 가능성을 탐구하여 적극 추진함으로써 민족 문화 창달과 인간다운 삶을 증진시키는 데 있었다. 조상 제사 문제에 관해서는 먼저 한국 신자들의 의식을 조사하였다. 그 결과 평신도들은 대체적으로 유교적 조상 제사에 대해 긍정적으로 이해하면서 많은 이들이 조상 제사를 실천하고 있음을 파악하였다. 이와 아울러 전통 조상 제사를 현대에 맞게 복음화한 제례 예식을 만들 필요가 있음을 깊이 인식하였다. 그리고 현대적이고도 한국적이면서 그리스도교
적인 제례 예식을 만들기 위해 다음과 같은 지침을 제시하였다. "제례 전에 목욕 재계하고 고해성사를 받음으로써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다. 십자가를 걸고 그 밑에 사진을 모시고, 촛불을 켜고 향을 피운다. 정성의 표시로 꽃이나 음식을 진열할 수 있다. 고인의 신상인 신주나 지방(紙傍)은 사진으로 대치하고, 합문은 묵념으로 하며, 축문은 생시에 직접 말씀드리듯이 고인에게 간절한 사모 와 효성의 마음을 표하는 위령문으로 함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전통적인 제사 형식에 따라 조상 제사를 지내야 하는 가정에서는 지방을 모시고 축문을 읽는 것도 허용됨이 요망된다." 또한 그리스도교적 제례 의식의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기도 · 성서 봉독 · 가장의 말씀 · 위령문 낭독 · 묵념 · 분향 배례 · 일치의 식사(음복) 등으로 구성됨이 바람직하다고 제시하였다. 이러한 예식을 통해 생 명의 뿌리를 재인식함으로써 선조와 하느님께 더욱 효성을 드리며, 그리스도 신비체의 신비와 모든 성인의 통공 안에서 선조와의 일치와 유대를 느끼고 선조의 유지를 더욱 성실히 따르며, 가족 공동체의 화목과 유대를 도모하기를 권하고 있다. 이러한 사목 회의 결론을 바탕으로하여 한국 천주교 주교 회의 산하의 한국 사목 연구소에서는 <상제례 예식서 시안>을 작성하였으며, 주교 회의 전례 위원회의 신중한 검토를 거쳐 마침내 2002년 10월 한국 주교 회의 추계 정기 총회에서 세 가지 안을 승인하였다.
한국에서 상제례는 복음의 토착화와 문화의 복음화를 위한 좋은 소재이며, 선교를 위해서도 좋은 방편이요 길이다. 그런데 이 상제례만큼 각 가문의 상황과 사정이 다른 경우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규범적 예를 중시하고 법식대로의 시행을 강조하는 유교에서도 상제례만은 가가례(家家禮)라고 하여 각 가문에 맞는 특성 있는 가례를 허용하였다. 그렇다면 한국 천주교회도 가톨릭적인 상제례를 마련함에 있어서 다양한 예식을 만들어 표본으로 제시하고, 신자들이 각 가문의 실정에 맞게 다양하게 시행하도록 함이 바람직하다. 이것이 바로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를 지향하는 현대의 시대 정신이요, 평신도 사도직과 사제직을 강조하는 현대 교회의 방향일 것이다. 이렇게 할 때 과거 동양 선교에 지대한 장애가 되었던 조상 제사 문제는 한국과 아시아 복음화를 위한·
'복된 탓' 이 될 것이다. (→ 조상 숭배 ; 중국 의례 논쟁)
※ 참고문헌  丁夏祥, 《上宰相書》/ 샤를르 달레, 安應烈 · 崔奭祐譯註, 《韓國天主教會史》 上, 분도출판사, 1979/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 위원회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 의안4 전례》, 1984/ 崔基福, 《儒敎와 西學의 思想的 葛藤과 相和的 理解에 關한 研究》, 成均館大學校 博士學位論文, 1989/ 一, <교황청의 선교 정책과 동양 제례의 영욕>,《가톨릭 사상 연구》 4집 , 대구가톨릭대학교 가톨릭사상연구소, 1991. 〔崔基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