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연합회(Congregatio Ottiliensis Ordinis Sancti Benedicti) 초대 수석 아빠스인 베버(N. Weber, 1870~1956)가 저술한 조선 기행문. 원문의 제목은 《조용한 아침의 나라》(Im Lande der Morgenstille)인데, '조용한 아침' 은 한자 '조선' (朝鮮)을 한글로 풀어 설명한 것이다.
〔구 성〕 이 책은 1914년 오틸리엔 연합회 소속 출판사에서 간행되었고, 1923년 재판되었다.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소장하고 있는 책이 이 재판본이다. 변형 국배판으로 460여 쪽의 독특하고 우아하면서도 감격을 주는 문체의 대작인 이 책은, 구체성과 예술성을 더하는 그림 및 컬러 사진 52장과 290여 장의 스케치나 수채화, 사진과 지도 등으로 다양하고 풍부하게 장식된 호화본이다. 당시 한국의 풍속 · 민속 · 민간 신앙과 한국에서의 베네딕도회의 선교 활동을 소개하고 있는 이 저술은 출판 즉시 독일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신문들은 다투어 이 책을 소개하며 불후의 대작으로 높이 평가하였다. 그리고 뭔헨 대학은 베버에게 명예 신학 박사 학위를 수여하였다.
〔여행 배경과 과정〕 베버 아빠스의 한국 여행은 베네딕도회의 한국 진출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독일의 바이에른 지방에서 1884년에 설립된 이 베네딕도회는 외방 선교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1887년에 상트 오틸리엔으로 이전한 직후 아프리카의 독일령에 진출하였고, 이어 1909년에는 두 번째로 한국에 진출하였다. 베네딕도회 회원들은 서울 백동(栢洞, 현 혜화동)에 넓은 대지를 마련한 후, 불과 2년 사이에 임시 수도원 건물을 건립하고 수도원 본관과 직업 학교 교사의 준공도 목전에 둘 정도로 맹활약을 하였다. 그러나 회원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다. 한편 베버 아빠스는 그들을 직접 찾아가 격려하고, 무엇보다도 증원할 수사들을 이끌고 그들에게 기쁨을 주기 위하여 한국 방문을 결심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한국 방문은 일차적으로 사목 방문의 성격을 띠었다.
베버 아빠스는 1911년 1월 12일 비서 신부 한 명과 두 명의 신부 및 네 명의 수사를 이끌고 여행길에 올랐다. 그들은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배편으로 일본을 거쳐 2월 21일 아침 부산항에 도착하였고, 이곳에서 기차로 여행을 계속하여 그날 밤 서울의 남대문역(현 서울역)에 도착하였다. 그날 밤을 백동 수도원에서 지낸 베버 아빠스는 수도원을 거점으로 다음날부터 한국 방문을 시작하 였다. 6월 24일까지 4개월 동안 서울을 비롯하여 남쪽으로는 하우고개, 수원, 갓등이, 안성, 미리내, 공주를 둘러보고, 북쪽으로는 제물포에서 배편으로 해주에 상륙하여 신천의 청계동과 평양 등을 두루 방문하였다. 우선 그는 3월 7일 용산의 신학교와 새남터를 찾았다. 그는 새남터를 바라보며, 특히 신학교 성당의 김대건 신부의 지하 무덤 앞에서, 그리고 다음날 약현(藥峴, 현 중림동) 성당으로 가는 도중 죽음의 문, 아니 순교자의 문으로 불려야 하는 서소문을 지나면서 자신이 순교자의 땅에 와있음을, 따라서 그의 사목 방문이 또한 순례의 여정임을 절감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과거 한국 교회의 피의 역사를, 오늘의 활발한 개종 운동을, 내일의 밝은 전망을 직접 보고 들으며 확인하려 하였다. 그 밖에도 그의 머리에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목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한국의 전통 문화와 풍습 등을 이해하고 독일과 유럽에 알리는 것이었다. 베네딕도회 회원들은 그들의 수도원이 수도 생활과 선교 활동의 중심만이 아니라 문화의 중심지도 되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민족, 그 지역 문화에 순응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였다. 다시 말하면 자신들의 문화를 강요하거나, 현지의 전통 문화를 멸시하고 억압하지 말아야 한다. 베버 아빠스는 이것을 자신의 수도자들에게 각성시키고 싶었고, 이를 위해 자신부터 솔선수범해야 하였다. 그리고 현장에와 있기에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
그런데 막상 한국에 와 보니 전통 문화들은 사라져 가고 있었다. 사실 당시 한국에서는 급격한 변화가 일고 있었다. 근대화의 거센 바람을 타고 옛것이 사라지고, 더욱이 일제의 문화 말살 정책으로 한국적인 것은 더욱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실제로 이미 많은 것이 사라지고 없었다. 남은 것만이라도 보존해야 하겠다는 집념, 아니 일종의 사명감에서 베버는 여행에서 받은 인상과 옛것에 대한 추억을, 그리고 한국인의 문화와 예술과 생활 양식에 남아 있는 유물들을 펜과 크레용과 사진으로 담았다. 그로 인해 그의 여행 가방은 언제나 이러한 도구들로 가득 차 있었다.
유럽으로 돌아간 그는 처음에는 사목 여행과 순례에서 얻은 결실 및 한국 전통 문화의 유산을 공개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많은 것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된 그는 공개하기로 결심하고, 자료를 정리하여 간행하였다. 그는 한국에서 가져 간 한국인과 한국 문화에 대한 사랑을 독자들도 자신의 책에서 발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꾸밈이나 과장 없이 솔직하게 전하려 하였다. 실제로 그는 메모를 따라 일지식(日誌式)으로 쉽게 서술하였고, 결코 민속학적인 논문을 쓰려 하지 않았다.
베버는 한국 교회를 사랑하였고, 또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하였다. 그는 특히 망국(亡國)의 한을 한국인과 함께 나누고 싶어하였고, 6월 24일 한국을 떠나는 부산 부두에서 대한 만세(大韓萬歲)를 외치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한국민의 장례식을 치르고 돌아가는 심정으로 한국을 하직해야만 하였다.
〔가치와 의미〕 이 책이 지닌 역사적 가치는, 교회사뿐만 아니라 문화사적인 면에서도 더없이 귀중하다. 특히 풍부한 사진 자료, 예컨대 동소문, 서소문, 청계동 성당과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의사의 가족 사진 등 이미 사라졌거나 구할 수 없는 것이 많기 때문에 더없이 귀중 한 자료로 남을 것이다. 베버 수석 아빠스는 1925년 5월 다시 한국을 방문하였고, 특히 열흘 동안 금강산(金剛山)을 방문한 후 《조선》의 자매편이라 할 수 있는 《금강산》(In den Diamantenbergen Koreas, 1927)을 남겼다. (→ 베네딕도회 ; 베버, 노르베르트)
※ 참고문헌 N. Weber, Im Lande der Morgenstille, 2. Aufl., Missionsverlag, St. Ottilien, 1923/ 一, In den Dicmantenbergem Koreas, 1927/ <베버 저, 《조선》一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한국교회사연구입문 45, 《교회와 역사》 60호(1980. 8)/ <가톨릭 시보> 1151-1158호(1979. 4. 22~6. 24). 〔崔奭祐〕
《조선》
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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