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 15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조선천주교회사 연구에 종사한 일본인 사학자 야마구치 마사유끼(山口正之, 1901~1964)가 작고한 후 그의 애제자들이 야마구치의 연구 논문을 통사 형식으로 꾸며 발간한 한국 천주교회의통사서(국판, 301쪽, 日文) 1967년 10월 도쿄 웅산각(雄山閣)에서 간행하였고 10편으로 구성되었다. 본문에 앞서 일본 기리시탄사 연구자인 이와기 이게이치(岩生成一)의 서문과 필자 자신의 서문을 수록하였고, 권말에는 필자가 일제 시대 서울 경성중학교에서 근무할 때의 제자인 사학자 미야하라 토이치(宮原鬼一)가 스승의 사후 3년 만에 이 책을 편서 · 간행하게 된 사정을 적은 발문이 수록되어 있다.
총 열편 가운데, 1편 <16세기 말 조선 기리시탄의 여명>, 2편 <17세기 조선 천주교회의 여명>, 3편 <개교(開敎)〉, 4 · 5편의 <유혈 시대>는 박해 시대를 다루고, 6편<근대 문화의 태동>에서는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의 <백서>(帛書)와 순교자 조사기록인 《기해일기》(己亥日記)를 다루고 있다. 또한 6편에서는 한글 천주교서의 발간과 프랑스 선교사들에 의한 조선어 문법과 조선어 사전 간행 문제를, 7편 <배외 쇄국>에서는 흥선 대원군에 의한 병인박해와 양요의 문제를, 8편 <조선 천주교회의 성격>에서는 조선 천주교회의 성격을 나름대로 논하고 있다. 이상 8편까지는 임진왜란에서 시작하여, 고종 초의 병인박해까지 280년간의 조선 천주교회의 통사에 해당한다. 9편은 두 가지 귀중한 사료-조선 교회 탄생 후 북경 교구장 구베아(Gouvea, 1751~1808) 주교가 이 사실을 중국 사천 교구 칼렌드로(Calendro) 주교에게 보낸 서한(1797년 8월 15일 북경에서 발송)과 1801년 신유박해 때의 순교자 황사영이 작성한 <백서>一를 소개하는 한편이 사료들을 일본어로 번역하여 <북경 주교의 수기(手記)와 황사영의 밀서(密書)>라는 이름으로 묶어 소개하였다. 10편 <비기(秘記) · 서한 · 업적>은 병인박해 당시 중국으로 피난했던 리델(Ridel, 李福命) 신부가 1869년 조선 교구 제6대 교구장으로 임명받고 1877년 조선에 잠입했다가 다음해 1월에 체포되어 중국으로 추방되기까지 28일간의 옥중 기록을 소개하는 글인 <리델의 경성 수인기(京城幽囚記)〉와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이며 1839년 기해박해 때의 순교자인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가 1838년 12월 24일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장에게 보낸 이른바 <앵베르 주교의 서한>을 일역(日譯)하여 소개한 두 편의 서한, 그리고 저자의 조선 교회사 연구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후원을 아끼지 않은 조선교구 제8대 교구장인 뮈텔(Mutel, 閔德孝)주교의 생애와 학문을 소개하는 글인 <대주교 위텔 백(伯)과 그의 업적> 등 세 편의 글을 수록하고 있다.
야마구치는 본래 일본 출신이나, 1925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사학과로 진학하여 1929년 <조선 천주교회의 전래>라는 졸업 논문을 쓴 후 일생동안 조선 천주교회사 연구에 종사한 일본인 사학자이다. 대학 졸업 후 일본의 패전으로 본국으로 귀국할 때까지 평양고등여학교와 경성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이왕직 조선사 편수회(李王職朝鮮史編修會)의 편수관으로 일하며 고종· 순종 실록 편찬에도 관계하였다. 귀국 후에는 지방 교육위원회 교육장과 고등학교장을 하면서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를 계속하다가 1964년 10월 22일 사망하였다. 그는 한국에서 열한 편의 논문을, 귀국 후 일본에서 여덟 편의 논문을 학회지에 발표하였고, 두 권의 한국교회사 관계 저서를 출간하였다.(《黃嗣永 帛書의 研究》, 大阪, 全國書房 刊, 1946 ; 《朝鮮西教史研究》, 東京, 雄山閣 刊)
야마구치는 역사학을 전공하고 일제 시대에는 한국에서, 그리고 본국으로 귀국한 후에도 일본에서 계속 조선 교회사를 연구한 일본인으로서는 유일한 조선 교회사 분야의 정통 연구자였다. 그가 조선 교회사를 연구하던 1930~1940년대 전반기는 선교와 관련된 해외 사료는 물론, 국내의 관찬 사료도 매우 접하기 어려운 때였다. 하지만 그는 경성제국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하여 국내 사 학계 인사들과 인맥을 가질 수 있었고, 조선사 편수회 편수관으로 일하며 국내 왕실 비고의 관찬 사료를 접할 수 있었다. 또한 뮈텔 주교의 특별한 후원을 얻음으로써 조선 거주 서양인들과의 지적 교류를 통해 서양인들의 학술 조직이던 대영 왕립 아세아 협회 조선 지부(大英王立亞細亞協會 朝鮮支部, The Korea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의 회원 자격을 얻었기에 서양의 원 사료들을 가까이할 수 있었다. 그의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는 철저한 실증 사학 교육을 받은 일본인 사학자로서의 사실 추구는 매우 진지하였으나, 때에 따라 식민지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한 일본인 연구자로의 감정 이입을 배제하지 못한 해석도 있으므로 그의 논저를 이용할 때는 주의가 필요하다. 〔李元淳〕
《조선서교사》
朝鮮西教史
글자 크기
10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