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스캥 데 프레 (1440?~1521)

Josquin des P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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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랑드르 악파의 작곡가. 르네상스 시대 유럽의 위대한 작곡가 가운데 한 사람.
'데 프레' 는 간혹 다르게도 표기되며(des Prés, Des-prés), 라틴어로 '요스퀴누스' (Josquinus) 또는 '요도쿠스프라텐시스' (Jodocus pratensis, 풀밭의 요도코)라고도 표기 된다.
〔생 애〕 조스캥은 1440년경 북부 프랑스의 피카르디(Picardie) 또는 에노(Hainaut)에서 출생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아그리콜라(A. Agricola, 1446?~1506), 무통(J. Mouton, 1458~1522) . 이자크(H. Isaac, 1450~1517), 오브레흐트(J. Obrecht, 1450?~1505), 라 뤼(P. de La Rue, 1460?~1518) 등의 음악가들과 함께 1500~1520년 사이의 르네상스 제3기를 대표한다. 그가 오케헴(J. d'Ockeghem, 1430?~1495?)의 제자였다는 차를리노(G. Zarlino, 1517~1590)의 주장(1558)은 확실치 않다. 하지만 그는 일찍이 이탈리아로 가서 1459~1472년 밀라노 주교좌 성당에서 정식 가수(biscantor)로 활동을 시작하여, 1473~1479년 밀라노의 스포르차 공작의 경당, 1486~1499년 로마의 시스티나 경당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1505년까지 페라라에서 에르콜레(Ercole I d'Este) 공작의 성가대 지휘자로 있었다. 이후 페라라를 떠난 듯하며, 1512년 또는 1515년 프랑스의 국왕 루이 12세(1498~1515)의 개인 경당과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후에 그는 콩데쉬르레스코(Condé-sur-I'Escaut)의 주교좌 성당 참사회 책임자가 되었으며, 이곳에서 1521년 8월 27일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은 그의 빼어난 음악적 표현력을 극찬하며 그를 동시대 최고의 음악가, '음악의 군주' 라고 불렀다. 현재 그는 르네상스 시대의 첫 절정기를 이룩한 대가로 소개되고 있다.
〔작품과 경향〕 조스캥의 명예는 분명히 그의 빼어난 음악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많은 미사곡과 모테트(motet)가 보여 주듯이 성서와 전례 음악에 대한 해박한 지식, 앞선 대가들의 음악과 음악 이론에 대한 그의 깊고 포괄적인 이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작품에 대한 엄격한 비판 정신의 결과였다. 이는 작품의 독창성과 완성도를 높이기 위하여 작품을 연주한 후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쳐 몇 년 후에 비로소 출판하던 그의 작품 관리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그가 악보 이상으로 가수들을 심하게 질타한 것은 자기 작품의 완벽성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조스캥의 창작 분야는 미사곡과 모테트를 축으로 하는 교회 음악과 프랑스어 상송 중심의 세속 음악을 포괄한다. 후자는 16세기를 지나면서 이탈리아의 마드리갈로 발전하며 교회 음악과 균형을 이룬다. 이 균형은 교회 음악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미사곡만을 작곡하던 오케헴, 오브레흐트, 라 뤼와는 달리, 미사곡과 모테트를 거의 동일한 비중으로 창작하였다. 그는 동시대의 중심 언
어인 대위법적 폴리포니(polphony)를 구사하였다. 15세기 중엽부터 성악 음악은 4성부가 주도하며 다듬어진 선율, 호흡에 맞추어진 악구(樂句, phrase), 3박자의 단순한 무용적 리듬 등 단순성과 간결함을 추구하였다. 특히 장3도 화음의 구성과 베이스 음역의 확대는 기능 화성적 경향이 강하였다. 조스캥은 이러한 화성적 · 주관적 표현을 선도하며, 중세 음악을 극복하고 본격적인 르네상스 음악을 전개하였다.
조스캥의 많은 모테트들은 전통을 따라 주로 성서적 · 교회적 가사를 사용하나, 다가사(多歌詞)와 동질서 리듬을 포기하고 고정 선율의 사용도 매우 자유롭다. 그리고 고정 선율을 포기한 경우, 그는 악곡 전체의 통일성을 위하여 예외 없이 일관 모방 기법을 사용하였다. 일관 모방이란 모든 성부들이 주어진 하나의 모티브를 돌아가며 반복하는 것이다. 그의 초기 작품부터 나타나는 이러한 구조주의적 요소는 자주 쌍성부(bicinium) 구조로 확대되었다. 이것은 두 성부가 한 그룹을 형성하여 다른 두 성부에 대립하는 그룹별 모방 구조를 말한다. 이러한 구조 주의는 조스캥이 음악은 정신적 · 인간적인 것이 뿌리 내리고 있는 어떤 것이라는 기존의 음악관을 넘어, 음악을 하나의 소외된 자율적 · 미학적 소리 현상으로 파악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는 음악 작품의 구조에 내재하는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객관적 음악미를 강조하며, '예술을 위한 예술' 이라는 19세기의 자율 미학적 정신을 앞서 실천하였다.
조스캥의 미사곡 30개는 그의 전생애에 걸쳐 쓰여졌다. 그의 미사곡은 4성부가 주도한다. 하지만 하나의 미사곡 안에서 특정 부분들의 음향적 축소 혹은 확대를 위하여 자주 2~3성부 혹은 5~6성부로 변형된다. 이것은 무엇보다 명쾌하고 쉽게 파악될 수 있는 구조 안에서 대단한 표현력을 보여 준다. 조스캥은 고정 선율을 주로 테너 성부에서 긴 음표로 노래하게 하지만, 점차 다른 성부로 옮겨 간다. 그러나 이 고정 선율을 더 이상 그레고리오 성가에서 차용하지 않고 자신이 새롭게 창작하였다. 그는 자주 이 자작의 고정 선율을 모티브로 옛 디스칸투스-테노르 구조처럼 소프라노와 테너의 2성부 카논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조스캥은 미사곡에 고정 선율을 사용하여 음악적 통일성을 부여하는 노력을 연곡적 미사곡으로 발전시켰다. 사실 미사곡은 처음 기리에(Kyne) 등 각 부분들을 따로, 점차 이들을 묶어서 하나의 미사곡으로, 그리고 중세의 마지막 대가 마쇼(G.de Machaut, 1300?~1377)와 르네상스의 초기 작가 뒤페(G. Dufay, 1400?~1474)의 <제목 없는 미사>(Missa sine nomine)에 의해 음악적 통일성을 갖는 연곡적 미사곡으로 태어났다. 이러한 발전은 고정 선율의 점진적 포기와 일관 모방이라는 새로운 작곡 기법의 도입으로 가능하였다.
조스캥의 미사곡은 흔히 3기로 나누어 고찰된다. 초기의 미사곡들은 오스티나토(osinato) 체계, 시궨스 기법, 확대된 포부동 기법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러나 그의 참신하고 과감한 언어는 이미 큰 발전 가능성을 예시한다. 1485~1505년 사이의 중기 미사곡들은 폭넓게 보급되며 작곡가에게 최고의 명성을 안겨 주었다. <무장 인간>(Missa L'homme armè super voces musicales)은 구조적 · 예술적 미사곡의 절정이고, <라솔파레미>(Missa La sol fa re mi)는 조스캥의 가장 화려한 오스티나토 미사곡이며, 페라라의 에르콜레 공작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만들어진 <헤르쿨레스>(Hercules Dux Ferariae)는 대표적인 고정 선율 미사곡이다. <바다의 별>(Missa Ave maris stella)은 걸작 중 하나인데, 일관 모방이라는 후기의 양식적 특징을 예견하게 한다. 후기 작품으로는 미사곡 <복된 동정녀>(Missa de beata Virgine), <혀야 노래하여라>(Pange lingua), <평화를 주소서>(Missa da pacem)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마지막 곡 <평화를 주소서>는 조스캥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되며, 가장 많이 연주되었다. 이 후기 미사곡들의 특
징은 음악과 언어의 투명한 관계, 성부들의 평등함, 균형잡힌 구조, 그리고 무엇보다 성부들의 일관 모방 등이다.
조스캥은 또한 작품의 진위가 불분명한 곡들을 제외하고도, 시간 전례(時間典禮) 음악, 마리아의 노래, 찬가(canticum), 안티포나(antiphona) 등 적어도 95개 이상의 크고 작은 주옥 같은 교회 음악 작품들을 남겼다. 분명 조스캥은 작품의 폭과 다양성에서 동시대의 작곡가들을 능가한다. 그의 작품들은 앞선 대가들과 달리, 그의 사후에도 이탈리아를 비롯하여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 스페인 등에서 적어도 1550년까지 폭넓게 연주되며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특히 16세기 초에는 누가 직계 제자이고 아닌지를 파악할 수 없고 그래서 '조스캥 학파'를 따로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그의 작곡 양식은 가사를 여러 부분으로 나누고, 각각의 가사 내용을 주관적 ·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작업으로 압축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상징적 음구성과 음악적 표현은 '음악의 인간화' 라는 이름 아래 중세의 이성적 음악관을 극복하며 다음 시대에 더 확대되었다. 그의 작품은 16세기 중반까지 모범이었고, 19세기에 재발견되면서 다시 생명력을 얻었다.
조스캥의 작품들은 1501년부터 페트루치(Petruci, Venecia), 1512년부터 외글링(Oeglin, Augusburg), 1513년부터 쇠퍼(Schöffer, Mainz), 1527년부터 아테냥(Attaig-nant, Paris), 1543년부터 수사토(Susato, Antwerpen) 등의 출판업자들에 의해 출판되었다. (→ 가톨릭 음악 ; 미사곡)
※ 참고문헌  조선우 · 홍정수, 《음악은이》, 음악춘추사, 2000, pp. 130f. 228f. 242f. 245/ H. Osthoff, 《MGG》 6, pp. 190~214/ G. Reese · J. Noble, 《NGDMM》9, pp. 713~738/ W. Gurlitt ed., Riemann Musik Lexikon, Personenteil 1, Schott's Söhne, 1959, pp. 887~888. 〔趙善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