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신부. 세례명은 모세. 한국명은 조득하(趙得夏). 1866년 2월 6일 출생한 그는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사제 서품을 받은 후, 1888년 12월 12일 임지인 조선으로 떠났다. 1889년 초에 조선에 도착하여 서울에서 기초적인 조선 말을 배우고 곧 경상도 북부 지방을 맡아 약 1년 동안 선교 활동을 하였다. 당시 부산이 빠르게 발전할 것이라고 판단한 제7대 조선 대목구장 블랑(Blanc, 白圭三) 주교는 경남 일대를 관할하는 부산 본당을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조조 신부를 1890년 초에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조조 신부는 처음에 부산 시내에 터전을 마련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인근의 절영도에 정착하여 지금의 청학(靑鶴) 본당 수녀원
자리에 초가 한 채를 지어 임시 성당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섬이라는 지역적 특수성으로 인하여 선교 활동에 어려움이 따르자, 1890년 가을 초량에 대지를 구입하고 이듬해 봄부터 소성당을 포함한 사제관 공사를 시작하여 7월경에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이후 그는 여러 곳의 벽촌과 섬을 순회하면서 복음 전파에 전념한 결과 3년 후에는 약 1,800여 명의 신자가 생겼다. 1893년 그는 부
산을 떠나 전라도의 배재〔梨峴〕 본당(현 수류 본당)으로 전임되어 사목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에 일어난 동학 농민 전쟁으로 배재 본당은 많은 피해를 입었고, 그도 농민군들에게 여러 차례 습격을 당하였다. 결국 한 교우촌이 완전히 전멸되었고 교우들은 깊은 산중으로 숨어 들어가는 등 상황이 위급해지자, 조조 신부는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에게 전보를 쳐 도움을 청하였다. 이후 1894년 7월 27일 뮈텔 주교와 프랑스 공사에게 전황(戰況)을 자세히 보고하기 위하여 상경하던 그는, 이틀 뒤 성환(成歡)에서 일본군에 패하여 공주 방향으로 도주하던 청군 패잔병에게 체포되어 공주 금강 장기(長岐) 나루에서 마부 정보국(바오로)과 함께 살해되었다.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뮈텔 주교 일기》/ 《M.E.P. 선교사약전》/ 《서울대교구 교구 총람》 附錄, 가톨릭출판사, 1984/ 한국교회사연구소 · 대전교구 홍보국,《대전교구사 자료 제1집 -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서한집》, 천주교 대전교구, 1994. 〔金志煥〕
조조, 모이즈 (1866 ~ 1894)
Jozeau, Moy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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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