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벌주의

族閥主義

〔라〕Nepotismus · 〔영〕Nepot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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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벌주의 정책을 펼쳤던 교황 알렉산데르 6세.

족벌주의 정책을 펼쳤던 교황 알렉산데르 6세.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친척이나 측근 인물들에게 특혜를 베푸는 일. 공적보다는 친족 관계나 개인적 친분에 의거하여 직책을 맡기는 관습. 문벌주의(門閥主義) 또는 친족 정치(親族政治)로도 번역된다. 족벌주의를 뜻하는 라틴어 '네포티스무스' (Nepotismus)는 '조카' 라는 의미의 라틴어 '네포스' (nepos)에서 유래하였다. 교회사에서 족벌주의는 중세와 근세, 그중에서도 르네상스 교황들(1440~1520)이 위기와 혼란기에 신임할 만한 친척이나 측근들을 요직에 등용한 일을 의미한다. 많은 주교들, 대수도원장들, 고위 성직자들도 교황들처럼 교회 내에 자신의 친척을 중용한 적이 있었다.
〔형태와 양상〕 족벌주의의 시작은 교황 하드리아노 1세(772~795)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자신의 조카인 파스칼리스(Pachals)를 교황청 요직인 프리미체리우스(primicerius)에 임명하였다. 10세기 이후 교황들의 친족 중용은 도를 넘어섰다. 교황 알렉산데르 2세(1061~1073)는 족벌주의와 성직 매매 행위에 대하여 단호한 조치를 취하였다. 또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1073~1085) 역시 개혁을 통하여 족벌주의에 대한 금지 조치를 취하였다. 하지만 교황좌는 경쟁 관계에 있던 귀족들이 세력 다툼을 벌이는 빌미였다. 세력 다툼에서 승리한 편이 교황좌를 차지하고 교회와 세속의 권리들을 독차지하였다. 교회 역사상 가장 중요한 교황 중 한 사람인 인노첸시오 3세(1198~1216) 역시 자신의 형제인 리카르도(Richardo)를 내세워서 교황직을 세속적인 세력의 정점으로 만들었다. 교황 보니파시오 8세(1294~1303)는 가예타니(Gaetani) 가문에 속하는 자신의 조카들을 추기경에 임명하였다. 그들 중에는 이혼 경력이 있는 프란체스코(Francesco)도 들어 있었다. 아비뇽 교황들(1309~1376)은 물론 이 기간 중 추기경들도 같은 전철을 밟았다. 족벌주의의 절정은 르네상스 시기와 때를 같이한다. 교황 갈리스도 3세(1455~1458)는 친족인 보르지아 일족(Borgias)을 스페인에서 로마로 불러들였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選帝侯)들이 터키와 대결하는 자신을 돕기를 거절한 것에 대한 반발로 족벌주의를 행사하였다. 그는 후에 교황 알렉산데르 6세(1492~1503)가 되는 조카 로드리고 보 르지아(Rodrigo Borgia)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교황 식스토 4세(1471~1484)는 족벌 우대를 제도화하였다. 그는 교황권을 북부 이탈리아의 주요 도시 국가들과 대적할 수 있을 정도로 확장시키려고 하였고, 이를 위해서 계획적으로 족벌주의를 이용하였다. 그는 두 조카, 즉 후에 교황 율리오 2세(1503~1513)가 된 로베레의 줄리아노(Giuliano dellla Rovere)와 프란치스코 회원인 피에트로 리아리오(Pietro Riario, +1474)를 추기경단에 받아들였다. 또 다른 조카인 지롤라모 리아리오(Girolamo Riario)게는 이몰라(Imola)를 공국 봉토로 주었다. 그리고 알렉산데르 6세는 불륜 관계에서 태어난 아들 중 하나인 체사레 보르지아(Cesare Borgia, 1475~1507)를 7세에 교황청의 대서기관, 16세에 주교, 17세에 대주교, 18세에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체사레가 후일 추기경직을 포기하자, 교황은 그에게 중부 이탈리아에 세습 군주령을 마련해 주었다.
1567년 교황 비오 5세(1566~1572)는 교황의 친척들을 교황청 요직에 등용하는 것을 금하는 칙서 <앗모네트 노스>(Admonet nos)를 반포하였다. 그러나 족벌주의 형태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교황 우르바노 8세(1623~1644)는 세 명의 조카와 한 명의 형제를 추기경에 임명하였다.
후에 이 행동에 가책을 받은 교황은 자기 친척들의 재산을 조사하라고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하지만 이 위원회는 그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 교황 알렉산데르 7세(1655~1667)는 친척들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 하였고, 그래서 친척들이 로마에 오는 것을 금하였다. 하지만 친족들의 지지를 얻지 못함으로써 교황좌가 약화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때문에 자신의 형제들과 조카들을 교황청의 행정직에 임명하였고, 그로 인해 그의 가문은 부유해졌다. 교황 알렉산데르 8세(1689~1691)는 친척들의 이익을 위해서 불필요한 직책들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교황 인노천시오 12세(1691~1700)는 1692년에 칙서 <로마눔 데체트 폰티피쳄>(Romanum decet Pontificem)을 발표하여 교회 재산으로 교황의 친척들이 치부하는 행위를 금지하였다. 이 칙서는 교황은 자신의 친척들 중 한 명 이상을 추기경으로 임명할 수 없으며, 어떤 이유로도 자신의 친구와 친척들에게 교회의 재산과 직책을 수여할 수 없다고 규정하였다. 만일 궁핍한 친척이 있다면, 전혀 안면이 없는 사람의 입장에서 도와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 칙서는 주교들이 교회 재산으로 친척들을 치부하도록 하는 행위를 교회법에 근거하여 금지시켰다. 이로 인하여 모든 추기경들과 교황들은 이 규정을 준수하게 되었다.
〔평 가〕 교황들의 족벌 중용은 혈족에 대한 배려, 교황의 빈번한 교체, 세속화로 치닫는 어수선한 시대 상황에 교황들의 인간적인 약점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갑작스러운 신분의 변화 등 새로운 환경, 이리저기 휩쓸리기 좋아하는 로마인들의 기질, 용맹이 지나친 로마 귀족들의 발호, 기득권을 고수하려는 선임자의 일가 붙이들, 적대적인 추기경단의 저항과 업무 파악이 용이
하지 않은 교황청의 방대한 기구들, 고국과 외국 영주들의 교황령에 대한 무력 침공 등이 교황들로 하여금 친족들에게 눈을 돌리도록 만든 계기들이었다. 더구나 교황들의 고령화(高齡化)로 세계 교회를 직접 돌보기에는 역부족인 면도 많았다. 물론 교황의 친척들 중에도 훌륭한 업적을 남긴 이들이 있다. 예를 들어, 교황 비오 4세(1559~1565)의 조카인 보로메오(C. Borromaeus, 1538~1584)나 교황 그레고리오 15세(1621~1623) 치하의 추기경 루도비시(L.Ludovisi)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과학이나 예술 면에서 공헌이 컸으며, 교회 내부에 머무르던 중세의 가톨릭 사상을 보편적인 근대 사상의 수준과 범위로 넓히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교황들의 친족 중용 정책은 교회사에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중세와 근세의 교황사를 통하여 족벌주의는, '되풀이되어 터지는 암처럼' 오래 끌었다. (⇦ 네포티즘 ; → 르네상스 교황 ; 아비뇽 교황들)

※ 참고문헌  G. Schwager, 《LThK》 7, 1968, pp. 878~879/ L.E. Boyle, 《NCE》 10, 2003, p. 247/ A. Franzen, 최석우 역, 《개정 증보판 세계 교회사》, 신학텍스트총서 2.1, 분도출판사, 2001/ M. Leonore, S.C., 《CE》 7,pp. 531~532. 〔朴日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