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에 일어난 프로테스탄트의 종교 개혁을 지칭하는 용어.
이는 프로테스탄트의 기원인 독일의 루터(M. Luther, 1483~1546)에 의한 종교 개혁, 스위스의 독일어 사용권 취리히의 츠빙글리(H. Zwingli, 1484~1531)에 의한 종교 개혁과 재세례파(Anabaptistae)의 급진 종교 개혁, 스위스의 프랑스어 사용권인 제네바의 칼뱅(J. Calvin, 1509~1564)에 의한 종교 개혁과 같은 유럽 대륙의 종교 개혁 그리고 영국의 종교 개혁으로 구분된다. 아울러 종교 개혁은 단순히 루터의 <95개조 명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14~16세기 유럽의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교회의 복합적 역사 배경에서 발생하였다. 종교 개혁 시대는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이 가톨릭 교회에 대항하여 개혁 교회들을 세우고 종교 전쟁들을 거쳐 평화 공존에 이르는 기간으로 정의될 수 있다. 따라서 종교 개혁은 일반적으로 1517년 10월 31일에 루터가 대사(大赦) 명제를 발표함으로써 시작되어, 삼십년 전쟁(1618~1648)을 종식 시키기 위해 1648년에 체결된 '베스트팔렌 조약' (Pax Westfaliensis)으로 끝맺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의 기원은 같지만 끝맺음의 시기는 지역에 따라 다르다. 독일의 종교 개혁은 1555년의 '아우크스부르크 강화조약 (Pax Augustana)으로 끝났고, 영국에서는 1559년의 '엘리자베스 정착' 으로 종교 개혁이 끝났다.
라틴어 '레포르마시오' (Reformatio)라고 표기되는 종교 개혁은 과거에 가톨릭 입장에서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단일성을 파괴한 '교회 분열' 또는 '가톨릭 교회에 대한 반란' 으로 표현되었다.
I. 배경과 당시 교회 상황
〔시대 배경〕 정치적 상황 : 15세기 중엽에 프랑스, 스페인, 영국 등의 서부 유럽에서는 봉건 체제가 무너지고 중앙 집권 체제의 민족 국가가 등장하였다. 그런데 중앙 집권 체제는 서구 그리스도교 세계의 보편적 이익보다는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였고, 중앙 집권 체제의 군주들은 교회를 국가의 통제 아래 두려고 하였다. 따라서 국왕 중심의 강력한 집권 체제는 교황권의 약화를 초래하였다. 한편 독일과 이탈리아 등의 유럽 중부 지방에서는 지방 분권화라는 정치적 상황에 놓여 있었다. 신성 로마 제국에서 7명의 선제후(選帝侯)에 의해 선출되는 황제의 권력은 선제후들과 지방 제후들에 의해 제한을 받았다. 제후들은 황제에게 충성 선서를 하는 봉신들이었지만, 15세기에 황제 권한의 일부를 요구하고 나섬으로써 루터의 종교 개혁을 옹호하는 제후들이 등장하였다. 한편 이탈리아는 내부의 투쟁과 외세의 침입을 겪으면서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령을 가진 교황청 특히 알렉산데르 6세(1492~1503) , 율리오 2세(1503~1513), 레오 10세(1513~1521)의 교황청은 이탈리아의 정치 세력이었다. 이러한 정치 세력화는 교황청이 세속 국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게 함으로써, 교황의 영적 사명에 손상을 주었다.
경제적 상황 : 당시는 도시와 지방 사이에 빈부의 차이가 극심하였다. 도시에서 금융업, 광산업, 무역업을 운영하는 호상(豪商)들은 철저한 물질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전통적 윤리관이나 고리 대금의 금지를 무시하고, 금(金)은 부(富)를 가져오고 인간의 모든 행동의 동기이며 영혼을 천국에 이끌 수 있을 만큼 위력을 지니고 있다는 황금 만능주의에 젖어 있었다. 이는 대사(大赦, indulgentia)의 참된 신학적 의미를 외면한 오용과 남용의 길을 열어 주었다. 아울러 금융 재벌들은 대출 업무를 통해서 교회 문제에도 개입하였다. 1514년 브란덴부르크 후작이며 마크데부르크(Nanglengbug)의 대주교인 알브레히트(Albrecht von Brandenburg, 1490~1545)가 마인츠 (Mainz) 대교구를 겸임하면서 독일의 금융가인 푸거(J. Fugger, 1496~1525)의 은행에서 빌린 돈을 대사 시행을 통해서 갚는 과정이 대사 부여의 전통적 교회 관습을 상업적 의미(대사 판매)로 오해하는 세속화 현상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루터의 대사 시행을 공격하는 명제의 발표로 이어졌다. 반면 지방에 사는 일부의 귀족과 몰락한 기사 그리고 대부분의 농민들은 세금에 시달리면서 가난한 생활로 불만 속에 살고 있었다. 따라서 지방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혁명이 일어날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경제 · 사회적 상황에서 루터는 종교 개혁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었다.
문화적 상황 : 14~16세기의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의 탄생과 과학 정신의 발달에 이바지하였다.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을 존중하는 인문주의에서 태어난 그리스도교 인문주의는 인간 각자를 성령의 궁전으로 존중하였다. 고전 문학인 그리스 · 로마 문학에 대한 심미적 관심을 갖고 있던 인문주의는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교 고전인 그리스어 신약성서와 교부들의 저서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인문주의가 도입한 새로운 과학적 방법인 역사 철학적 방법, 즉 원전에 대한 비판적 조사 방법을 에라스무스(D. Erasmus, 1466/1469?~1536)와 같은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들은 신약성서와 교부 저서에 적용하였다.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들은 성서에 나타난 초대 교회의 제도와 규율을 다시 일으킬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성서를 강조하며 종교 개혁을 사도 시대로의 복귀로 믿었던 루터와 그리스도교 인문주의가 연결을 맺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직접적이기보다는 간접적으로 종교 개혁의 길을 마련한 원인이었다.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들은 내적 생활을 강조하면서 교회 개혁을 주장하였지만 대부분이 혁명적 인물들은 아니었다. 로체스터의 주교 피셔(J. Fisher, 1469~1535)와 대법관 모어(T. More, 1477~1535)처럼 그리스도교 세계의 일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을 거부하고 가톨릭 교회에 남아 있던 이들도 있었다.
기술의 발전 :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과학 정신은 기술의 발전을 가져왔다. 과학 기술에서 주목되는 것은 화약과 인쇄술의 발명이다. 국왕들은 화약을 이용하여 창을 지닌 기병을 총으로 무장된 보병으로 대치함으로써, 밖으로 국력을 팽창하고 안으로는 봉건 제후의 저항을 무력화하여 강력한 왕권의 중앙 집권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인쇄술은 정보와 사상을 빠르고 정확하게 널리 전파할 수 있었고, 그 결과 방언이 극심하여 의사 소통이 어려웠던 유럽 국가들에서 국왕과 국민의 의사 소통을 수월하게 해줌으로써 국왕이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는 데 공헌하였다. 아울러 인쇄술은 문자 해독률이 점증하는 유럽에서 저렴한 가격의 서적을 보급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영세 출판업자들은 독자들이 원하고 살 만한 내용을 팸플릿이나 소책자에 담아 내놓았다. 당시에 잘 팔리는 책은 기존 체제에 도전하고 도전에 반론을 제기하는 내용을 담은 책들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루터가 동료신학자들에게 보낸 대사 명제를 입수한 인쇄업자가 루터의 허가 없이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명제를 95개조로 분류하여 소책자로 출판하였고, 이어지는 교리 논쟁이 활발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인쇄 기술을 하느님의 선물로 간주한 루터도 개혁 사상을 담은 팸플릿을 내놓음으로써 독일과 유럽에서 추종 세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이처럼 인쇄술은 종교 개혁이 뿌리를 내리고 전파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교회의 위기〕 교황권의 약화 : 그리스도교 세계의 단일성은 아비뇽 교황 시대(1309~1376)와 서구 대이교(西歐大離敎, 1378~1417)로 인해 약화되었다. 프랑스 출신인 7명의 교황들은 신심 깊은 신앙인들이었지만 프랑스 국왕의 영향 아래에 놓여 있어, 독일 지방에서는 보편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이기보다는 프랑스 왕실의 주교로 격하시켜 생각하였다. 단테(A. Dante, 1265~1321)와 이탈리아 인문주의자인 페트라르카(F. Petrarca, 1304~1374)는 70년 동안 이루어진 교황의 아비농 장기 체류를 '교황의 아비뇽 유수(幽囚)' 라고 비꼬았다. 더욱이 교황청의 점증되는 재정적 요구는 종교적 보편성을 남용하는 원인이 되었고, 교황청에 대한 반감과 적의를 불러일으켰다. 이어진 서구 대이교는 정치권의 분열과 교회의 혼란을 일으켰다. 아울러 교황청 분규는 13세기에 나타난 공의회 우위설(Conciliarismus)을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만들었다. 피사 공의회(1409), 콘츠탄츠 공의회(1414~1418), 바젤 공의회(1431~1449) 등에서는 정통 교황과 대립 교황을 사임, 해임, 선출함으로써 교황권이 약화되었다. 1460년 8월 1일 교황 비오 2세(1458~1464)가 공의회 우위설을 단죄하는 칙서를 반포함으로써 교황권은 회복되었지만, 실추된 윤리적 · 영신적 권위는 회복될 수 없었다. 공의회 우위설은 루터가 아우크스부르크 제국 의회 이후 파리 소르본 대학의 공의회 소집에 관한 청원서를 본떠 '공의회 소집 호소문' (1518. 11. 28)을 발표하는 데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이단의 발생 : 아비뇽 교황청과 서구 대이교와 같은 교회 상황에 대한 불만은 비난과 개혁의 외침으로 이어져 지역 교회에서 이단이 발생하였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의 신학자인 위클리프(J. Wycliffe, 1330?~1384)는 반(反)교황적 국수주의를 배경으로 아비뇽 교황청의 세금 징수와 교회의 지나친 재산 소유를 비난하였다. 또한 주권론을 내세워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통치권을 행사할 자격을 갖추지 못한 교황청의 영국 교회에 대한 지배를 비판하였으며, 16세기 종교 개혁가들에 앞서 성찬례와 같은 정통 교리와 대사와 같은 신심의 실천을 반대하였다. 이로써 위클리프는 국가의 영웅과 종교 개혁의 선구자라고 일컬어졌다. 위클리프와 그의 추종자들인 '롤라드파'(Lollards)의 운동은 콘츠탄츠 공의회에서 단죄되었으나, 이는 영국 프로테스탄트 발생 원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 위클리프의 사상은 영국보다 보헤미아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 프라하 대학의 학장 후스(J. Hus, 1372?~1415)는 위클리프의 이단 교리를 강의하면서 교회의 속화와 성직자의 비도덕적 생활을 비난하였다. 1414년에 후스는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단죄받고 이듬해 처형되었으나 '국가영웅' 또는 '순교자' 로 받들어졌다. 이제 동부 유럽에서도 교황청에 대한 반감은 심화되어 교회의 개혁을 요구 함으로써 후스의 죽음은 동부 유럽에서 종교 개혁을 이끈 민족주의를 일깨워 주었다.
신학과 신앙의 변화 : 교회의 신학 영역에서는 대학이 누리던 학문의 자유가 신학의 불확실성 시대를 초래하였다. 종교 개혁가들이 논쟁 대상으로 삼은 교리들이 공의회를 통해서 확실하게 정의되었더라면 대사 논쟁으로 시작된 종교 개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새로운 학문으로 등장한 오컴(W.of Ockham, 1285~1349)의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us) 신학에 따르면, 계시된 '성서만' (sola scriptura)이 신앙의 원천을 이루고, 인간 이성은 무력하며'신앙만' (sola fides)이 하느님을 알게 하고 구원을 성취케한다. 또한 인간의 본능이 무능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은총만' (sola gratia)이 만능의 근거가 된다. 루터는 빌(G.Biel, 1420?~1495)의 저서를 통해 유명론을 가톨릭의 정통 신학으로 받아들여 '성서만' , '신앙만' , '은총만' 이라는 세 가지 유일 사상을 발전시켰다. 아울러 유명론의 윤리 신학은 펠라지우스(Pelagius, 354?~418?)의 구원관을 강조하였다. 이는 '나의 구원' 을 최대의 관심사로 삼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대사 획득에 대한 열망을 일으켜 대사의 오용으로 이끌었다. 루터도 이단인 펠라지우스 구원관에 영향을 받아 수도 생활을 선행의 실천으로 삼고 엄격한 생활을 하던 중, 육욕(肉慾)의 체험 때문에 '하느님의 능동적 정의' 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러한 영성적 고뇌 속에서 그는 개인 체험(탑실 경험)을 통해 펠라지우스 구원관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수동적 정의' 즉 '신앙만에 의한 의화' 의 교리를 창안하였고, 이는 종교개혁의 기본 원리가 되었다.
14세기의 유럽은 정치적 동요, 전염병, 농민 반란과 같은 사회적 불안과 교회의 내분으로 불안정한 시대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인간의 마음 속에서 세속적 관심을 제거하고, 영혼이 하느님과 직접 대면할 수 있다는 새로운 창조적 정신이 움텄다. 에크하르트(J.Eckhat, 1260~1327/1328)와 타울러(J. Tauler, 1300?~1361) 등의 독일의 사변적 신비주의자들은, 신앙의 우위성을 강조하고 개인적 체험을 통해서 하느님이 자유롭게 베푸는 구원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고 강조함으로써 성사의 의미와 가치를 감소시켰다. 루터는 타울러의 《설교집》(Predigten, 1348)을 통해서 사변적 신비주의의 영향을 받아 구원에 이르는 신앙과 은총을 강조하며 선행과 성사와 교계 제도를 거부하였다. 사변적 신비주의에 이어 실천적 사변 주의가 네덜란드에서 일어나 그리스도 중심의 개인 신심을 강조하는 신앙 부흥 운동인 '새 신심 운동' (Devotio Moderma)과 함께 공동 생활 형제회(Brethren of the Common Life)가 탄생하였다. 이들은 속화된 교회의 개혁을 추구하면서 개혁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종교적 자각을 이루는 지름길을 가르쳤다. 이들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교회 쇄신을 주창한 인물들이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들과 종교개혁가들이었다.
〔교회 생활〕 교황과 주교들 : 15세기 말에는 사도 시대의 교회로 돌아가자는 교회 쇄신의 외침과 함께 교회 폐해에 대한 불만도 만연하였다. 쇄신과 불만의 주요 대상은 교황청과 고위 성직자들의 성직주의와 자본주의였다. 이러한 불만과 개혁에 대한 열망이 종교 개혁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었다. 8세기 교황령의 탄생과 함께 보편 교회의 영적 지도자와 교황령의 세속 군주라는 위상을 지니고 있던 르네상스 교황들이 교권 수호를 위해 정치적 협상을 진행하면서 세속 군주로 처신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교황직은 세속적 군주직으로 간주되었다. 이는 교황들의 도덕적 및 종교적 위상을 약화시켰다. 그들은 공의회 우위설에 대한 우려로 개혁 공의회 소집을 주저함으로써 교회 개혁에 소
극적 태도를 보였다. 교황들은 이단 운동에 대응하여 정통 신앙을 수호하였고 대부분 인문주의자들로서 문화적 업적을 이루었지만, 로마 베드로 대성전의 건설비 모금 방법으로 대사 시행을 선택함으로써 <95개조 명제>를 등장시켰다. 아울러 대부분의 주교들은 교구 사목에 헌신하였지만, 고위 성직자들 중 일부는 봉건 교회의 영주 (특히 독일의 경우) 또는 문예 진흥의 후원자로 활동함으로써 주교직이 세속적 직업과 같은 평범한 인상을 주었다. 그들은 영적 사명을 망각하고 전례 생활을 소홀히 하면서 세속 통치자들과 어울려 부유한 생활을 하였다. 교구의 정상적 수입으로는 이러한 생활을 누리기에 부족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여러 가지 교회록을 취득해야 했고, 결과적으로 임지 상주에 대한 의무를 지키지 못하였다. 이러한 악폐의 원인은 주교직이 거의 귀족의 독점물이었기 때문이다.
수도회 : 일반적으로 수도회들도 폐해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수도원은 감독과 제재가 없는 휴식처로 간주되었고, 참다운 수도 성소가 매우 드물었다. 지원자는 엄격한 심사 없이도 입회할 수 있었으며, 입회자들은 마음대로 생활하도록 방치되었다. 사람들은 더이상 부양할 수 없는 어린이들을 위한 도피구로 수도 생활을 생각하였고, 부모들은 자녀들의 성향이나 능력을 생각하지 않고 수도원에 보냈다. 그리고 '새 신심 운동' 의 대표적 단체인 빈데스하임 참사 수도회(Canons Regular of Windesheim)와 공동 생활 형제회의 신심 운동은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수도회들은 규칙의 준수 방법을 두고 내분의 소용돌이 속에 휩싸였다.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는 14세기부터 재산 소유 문제로 엄수파와 온건파 사이에 대립이 있었다. 이러한 대립은 루터가 속해 있던 아우구스티노 은수자회(Fratress Eremitae Ordinis Sancti Augustini)도 예외는 아니었다. 독일 관구장 슈타우피츠(J. von Staupitz, 1468/1469~1524)가 추진하는 수도회 통합 개혁에 반대하던 엄수파 에르푸르트(Erfurt) 수도원은 교황청에 상소하기 위해 루터를 파견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불복하였다. 루터는 교회 권위를 따르지 않는 에르푸르트 수도원에서 비텐베르크(Wittenberg) 수도원으로 옮겼지만, 그 역시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여 비텐베르크에서 종교 개혁에 착수하였다. 루터는 슈타우피츠의 권고로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교수로서 성서를 강의하였다. 그는 연구와 강의를 통해 키운 종교 개혁 정신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비텐베르크 대학교는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의 발상지가 되었다.
신심 생활 : 15세기 후반기에 대중의 신앙 생활은 매우 활발하였다. 신앙의 활성화는 성당의 증설, 교회 예술(고딕 건물, 성당 조각과 회화, 교회 음악)의 발전, 신심 단체의 창설, 공동 예배 참석자의 증가, 자선 단체의 증설,새로운 신심(묵주 기도, 삼종 기도, 십자가의 길 기도)의 성공, 성인 및 유해 공경과 성지 순례, 대사에 대한 관심, 신심 서적과 자국어 성서의 번역 및 배부에서 나타났다. 출판업자들은 잘 팔리는 상품으로 성서를 인쇄하여 대중이 성서를 쉽게 접촉할 수 있게 하였고, 이는 복음적 생활에 대한 열망과 실천에 공헌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풍부한 신심 행사에는 몇 가지 어두운 면도 있었다. 중세 말기의 신심은 너무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모습이었고, 교회 예절의 공동체적 성격이 희미해졌다. 또한 이 시대의 영성 생활 중심이 하느님에서 성인과 유해에 대한 공경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신심은 지나칠 정도로 외형적인 면에 치중하였고, 미신적 요소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폐단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관심, 죄에 대한 의식과 죄의 용서를 얻고자 하는 신심 노력은 대사 획득에서 구현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종교 개혁은 대중의 종교적 열망에 대한 표현으로 간주될 수 있다.
Ⅱ. 과정과 전개
〔독 일〕 독일의 종교 개혁은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대사 명제를 발표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루터의 종교 개혁은 처음에 독일 안에서 토론과 저술을 통해 전개되었다. 이어서 교황청이 개입하여 루터의 가르침에 대한 경고와 청문회를 통해서 해결을 시도하였으나, 루터의 반증과 거부로 실패하였다. 교황청은 교황 교서 <주님, 일어나소서>(Exsurge, Domine, 1520. 6. 15)를 발표하여 오 류의 취소를 명령하였으나, 루터의 불복으로 1521년 1월 3일 파문 칙서를 공표하였다. 이후 루터 문제에 대한 해결은 정치 영역으로 옮겨갔다. 1521년에 황제는 보름스(Worms) 제국 의회에서 루터의 국외 추방령을 담은 '보름스 칙령' 에 서명하였으나, 제1차 슈파이어(Speyer) 제국 의회(1526)는 교회 문제를 제후들에게 위임함으로써 일부 지역은 신교화(新敎化)되었다. 제2차 슈파이어 제국 의회(1529)에서 결의한 '보름스 칙령' 수행에 루터파는 반대하였다. 1530년 가톨릭 교회와 신교파의 재일치를 위한 아우크스부르크 제국 의회에 루터파인 멜란히톤(P. Melanchthon, 1497~1560)이 작성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Confesio Augustana)을 제출하였으나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루터가 사망한 이후 황제와 신교파 사이의 슈말칼덴(Schmalkalden) 전쟁(1546~1555)을 거쳐 1555년의 아우크스부르크 강화 조약에서 '교파 속지권' (敎派屬地權, Cujus religio, eius religio)을 선포함으로써 독일의 종교 개혁은 끝났다.
덴마크 : 1520년대에 루터의 사상은 독일에서 공부한 성직자들과 상인들을 통해서 스칸디나비아에 전파되었다. 1520년에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국왕 크리스티안 2세(1513~1523)는 12세기 이후 막강한 정치 권력을 갖고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가톨릭 교회의 고위 상직자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루터파 설교가를 초청하였다. 그리고 주교들의 권리 박탈 및 교황청 상소의 금지와 함께 성직자의 결혼을 허용함으로써 종교 개혁이 시작되었다. 1526년에 프레데리크 1세(1523~ 1533)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수학한 타우센(H.Tausen, 1494~1561)을 궁정 사제로 임명하였다. 1530년 7월에는 타우센의 지도로 21명의 루터파 설교가들이 코펜하겐 신앙 고백(Confessio Hafniensis)을 선언하였다. 크리스티안 3세(1534~1559)는 루터파 목사를 초청하여 교회 직무를 설정하고 교회 법규를 작성하게 하였으며, 1538년에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을 덴마크 교회의 신조로 삼았다. 1550년에는 덴마크어로 번역된 성서(크리스티안 성서)가 간행되었고, 종교 개혁의 반대 세력은 투옥되거나 추방되었다. 또한 크리스티안 3세는 덴마크형의 종교 개혁을 시행하여 교회와 수도회의 재산을 덴마크 왕실에 귀속시켰다. 1539년에 귀족 회의가 덴마크의 교회 법규를 인준하고 1607년 루터교 교회 체제가 도입됨으로써, 종교 개혁은 종결되었다. 아이슬란드도 덴마크의 국왕 크리스티안 3세에 의해 종교 개혁이 도입되어, 독일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아이날손(G. Einarsson, 1515~1548)에 의해 추진되었다.1550년에 가톨릭 성직자들의 투옥과 축출과 함께 가톨릭 전례의 폐지로 루터교가 국교회로 되었다.
스웨덴 : 1521년에 구스타프 에릭손 바사(Gustaf Eriksson Vasa, 1496?~1560)는 가톨릭 교회를 옹호하고 루터 사상을 반대하는 입장을 보이면서도, '유일한 최고 교황 그리스도' (a solo et summo pontifice Christo)에 의해 선택된 사람을 교황의 허가 없이 주교로 서품하겠다고 위협하였다. 1523년에 그는 구스타프 1세 바사라는 이름으로 스웨덴 국왕(1523~1560)이 된 다음, 왕권의 강화를 위해 루터파 종교 개혁을 받아들였다. 종교 개혁은 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2년 동안 수학하고 루터파가 되어 귀국한 페테르손(O. Petersson, 1493~1552)에 의해 추진되었다. 1529년에 외레브로(örebro) 교회 회의는 교황의 수위권을 거부하였고, 1531년 개혁 정신이 담긴 스웨덴 미사 전례서가 간행되었으며 국왕은 교황청과의 단교를 선언하였다. 1571년에 스웨덴의 국왕 요한 3세(1568~1592)는 스웨덴 국교회를 조직하고, 가톨릭 교회와의 재일치를 위해 페테르손이 작성하였던 교회 직제(1561)를 개정하여 스웨덴 전례서를 간행하였으나 결실을 거두지 못하였다. 1593년에 스웨덴 정부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을 받아들여 정식으로 루터 교리를 채택하였고, 1595년 쇠데르쾨핑(Söderköping) 의회는 가톨릭 신자의 국외 추방과 수도원의 폐쇄를 결의하였다. 스웨덴의 속구인 핀란드에서도 루터파 종교 개혁이 진행되었다. 1523년 독일의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수학하고 돌아온 세르킬락스(P. Särkilax, +1529), 아그리콜라(M.O. Agricola,
1508?~1557) 등이 국왕에 의해 루터파 국교회의 감독으로 임명됨으로써 종교 개혁은 완성되었다.
〔츠빙글리〕 독일어 사용권인 취리히에서는 1519년 1월 2일 주교좌 성당 참사회원과 츠빙글리가 복음을 주제로 한 설교를 함으로써 개혁이 시작되었다. 1520년에 그는 교황 율리오 2세(1503~1513)의 용병 군목 복무로 14년 동안 받아 오던 교황청 연금을 거부함으로써, 교황청과 단교하였다. 같은 해 사순 시기의 한 만찬 모임에서 츠빙글리의 동료들이 복음의 자유를 증거한다는 뜻에서 소시지를 먹은 사건으로, 시의회와 교회는 사순 시기의 육식에 대한 설교와 대화를 금지하였다. 이러한 금령에 대해 1522년 4월 츠빙글리는 금육제를 반대하는 논문을 발표하였고, 7월에는 비밀 결혼을 한 츠빙글리와 결혼한 신부들 10명이 독일어 사용권 연방 정부에 복음에 맞는 설교의 자유와 성직자 독신 의무의 폐지를 청원하였다. 그리고 8월에 츠빙글리는 성서가 신앙의 유일한 원천임을 선언하였고, 10월에 참사회원직을 사임함으로써 가톨릭 신부에서 개혁 설교가로 변신하였다. 1523년 두 차례에 걸친 가톨릭 교회와 복음주의파의 토론회(1월, 8월)에서 시의회가 츠빙글리를 지지함으로써 종교 개혁은 빠르게 추진되었다. 1524년 4월 성직자의 결혼이 허용되고 성지 순례가 폐지되었으며, 수도회가 폐쇄되고 성화상과 성인 유해가 성당에서 제거되었다. 1525년 시의 회는 미사를 폐지하고 파스카 목요일에 거행되던 '주님의 만찬' 을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기념제와 감사제로 집전함으로써 취리히의 복음주의화는 완성되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1531년 10월 11일 제2차 카펠 전쟁에서 전사함으로써 연방 전체의 복음주의화라는 계획의 결실을 거두지 못하였다.
〔제세례파〕 1520년대에 유럽 대륙에서 루터와 칼뱅이 주도하는 개혁 운동과 달리 '종교 개혁의 좌파' , '과격파' , '급진파' 라고 일컬어지는 재세례파와 심령파의 운동이 진행되었다. 취리히에서는 츠빙글리의 추종자인 그레벨(C. Grebel, 1498?~1526)과 만츠(F. Mantz, 1500?~1527)를 중심으로 한 재세례파(스위스 형제단)가 '신앙만' 과 '성서만' 이란 종교 개혁의 원리를 철저하게 적용하기를 희망하였다. 이러한 희망의 표현으로 재세례파는 유아(신생아)의 세례를 성서적인 근거 부족으로 거부하고, 신앙 고백으로서의 성인 세례를 시행하였다. 1525년 시의회의 '신앙 세례' 금지에도 불구하고, 그레벨은 비밀 집회에서 성인 세례식을 거행하였다. 그레벨이 병사한 후 1527년 1월 5일 만츠는 사형을 당하여 재세례파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1530년대에 이르러 취리히에서는
재세례파 운동이 사라졌다. 그러나 취리히에서 축출된 재세례파인 자틀러(M. Sattler, 1490?~1527), 후브마이어(B. Hubmaier, 1485~1528), 덴크(H. Denck, 1500?~1527)는 독일 남부 지방에서 개혁 운동을 지속하였다. 호프만(M.Hofmann, 1495/1500?~1543), 마티스(J. Mathijs, +1534), 로트만(B. Rothman, 1495 ~1535), 메노 시몬스(Menno Simons, 1496~ 1561 : 메노파의 창시자)의 주도로 개혁 운동은 독일 북부 지방과 네덜란드에서 전개되었고, 후터 (J. Hutter, +1536)는 모라비아(Moravia)에서 후터 형제단(Hutterite)을 조직하였다. 한편 심령파 운동은 유아 세레를 거부하는 제세례파의 성향을 지니고 있지만, 재생한 신앙인의 가시적 공동체를 구성하던 재세례파와는 달리 '보이지 않는 교회' 를 내세웠다. 심령파의 중요한 대표인 프랑크(S. Franck, 1499?~1542?)는 사도 시대 이후 그리스도의 가시적 교회는 파괴되어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성령을 통해서 모든 것을 이루도록 하셨다고 주장하면서, 프로테스탄트 개혁가들은 영성의 원칙을 포기하였다고 공격하였다.
〔칼 뱅〕 제네바 : 스위스의 프랑스어 사용권인 제네바에서는 칼뱅의 종교 개혁이 진행되었다. 칼뱅은 파리(1523~1528)와 오를레앙(1528~1531)에서 신학과 법학을 공부하면서 프로테스탄트 개혁 성향의 인문주의자들을 만났다. 1533/1534년 겨울에 영적 체험( '돌발적 회심' )을 통해서 교회 개혁의 사명을 깨닫고 프로테스탄트 개혁가들의 교리를 받아들였다. 1534년 3월에 성직 수행 약속으로 미리 받아 오던 교회록을 포기함으로써 교회와의 관계를 단절하였다. 1535년에 프로테스탄트 박해를 피해 바젤로 옮겨 다음해에 《그리스도교 강요》(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 1536)를 저술하였다. 1536년에 제네바에서 개혁가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성서 강사' 로 설교를 통해 개혁에 나섰다. 1537년에 설교가들은 칼뱅의 주도로 작성된 교회 조직에 관한 문서를 시의회에 제출하였고, 칼뱅은 23개항의 신조가 첨부된 《제네바 교리 문답》(Geneva Catechism, 1537)을 간행하였다. 1538년 2월의 시의원 선거에서 다수석을 차지한 반대파의 추방령으로 스트라스부르로 옮긴 칼뱅은, 프랑스인 피난민 공동체에서 설교를 하면서 독일에서 소집된 종교 회의에 참석하였다. 1541년 9월 제네바로 돌아온 그는 11월에 스트라스부르 프로테스탄트 공동체의 법규를 본떠 《교회 법규》를 작성하였고, 목사 · 박사 · 장로 · 집사의 교회 직책을 설정하였다. 1555년 이후 가혹하게 저항 세력을 제거한 칼뱅은 1559년에 학술원을 설립하여 목사들을 양성한 후 프랑스,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영국으로 파송하여 개혁 교회를 확립하였다. 신앙만에 의한 의화, 예정설, 가시적 교회와 비가시적 교회, 하느님 법의 유일한 원천인 성서와 같은 칼뱅 사상은 프로테스탄트의 방향을 정하였다.
프랑스 : 1555년부터 프랑스에는 칼뱅의 제네바 공동체가 파송한 목사들을 통해서 '위그노파' (Huguenots)라는 칼뱅파 공동체가 증가하였다. 1558년에 위그노파들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비밀 집회에서 벗어나 파리에서 공공연하게 예배를 거행하였다. 1559년 5월 25일 파리에서 50개의 공동체 대표들이 모인 첫 칼뱅파 전국 회의가 소집되어 칼뱅의 갈리아 신앙 고백(Confesio Gallica-
na)을 발표하였다. 한편 부르봉가의 나바르 왕국 여왕과 대귀족들 및 유력 인사들 중에도 칼뱅 추종자 또는 적어도 칼뱅 동조자들이 있었다. 그로 인해 종교 문제가 정치 문제화하여 1562년 1월, 당시 프랑스의 섭정이었던 가타리나(Catherine de Medicis, 1519~1589)는 국가의 분열을 막기 위해 위그노파에게 제한된 신앙 생활을 허용하는'생 제르맹 칙령' 을 반포하였다. 이러한 관용 정책에 대해 가톨릭측은 반대하였고, 위그노파는 만족하지 않았으며, 의회는 접수하지 않았다. 이로써 '바르톨로메오 축일 사건' 을 포함하여 여덟 차례의 위그노 전쟁(1562~1563, 1567~1568, 1569~1570, 1573~1574, 1576, 1577, 1579~1580, 1585~1598)이 발발하였다. 1593년 5월 17일에 위그노인 나바르의 앙리가 가톨릭으로 개종을 선언하고 7월 25일에 칼뱅 사상을 포기함으로써 샤르트르에서 앙리 4세(1589~1610)로 등극하여 1594년 3월 파리로 들어왔다. 1598년 4월 13일 앙리 4세는 낭트 칙령(Edictum Namnetense)을 공포하여 위그노파의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플랑드르 지역에는 1544년부터 칼뱅의 저서들이 번역, 보급되었다. '네덜란드의 개혁가 로 불리는 기 드 브레(Guy de Bray, 1522~1567)는 제네바에서 수학하고 돌아와 1567년 처형될 때까지 칼뱅 사상을 전파하면서 벨기에 신앙 고백(Confessio Belgica, 1561)을 작성하였다.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의 새 국왕 펠리페 2세(1556~1598)는 네덜란드 정부를 인수하여 이단 심문을 설치하고 프로테스탄트를 탄압하였다. 이 탄압 정책에 투쟁하기 위해 1566년 오라네(Orange) 공(빌렘 1세)과 대귀족들은 '고이센 동맹' 을 결성하였고, 이는 네덜란드의 독립 전쟁(1568~1648)으로 이어졌다.
1579년에 칼뱅파인 북부 7개주는 '위트레흐트 동맹'을 결성하고 1581년 7월 독립을 선언하였다. 전쟁 중 해외로 망명한 칼뱅파 공동체( '십자가 아래 교회' )는 베셀 총회(1568)와 엠덴 교회 회의(1571)를 소집하였다. 엠덴 회의는 네덜란드 개혁 공동체들이 하나의 국가 교회로 단일화하기 위한 교회 행정 계획을 세웠고 벨기에 신앙 고백을 채택하였으며, 프랑스어 사용권은 《제네바 교리 문
답》을 받아들였고 플랑드르어 사용권에서는 《하이델베르크 교리 문답》이 수용되었다. 1618년에 도르트에서 소집되어 유럽의 거의 모든 대표들이 모인 전국 회의(1618~1619)는 칼뱅주의 교리를 제정하고 《하이델베르크 교리 문답》을 승인하였으며 <도르트 신조>를 선포함으로써 네덜란드에 개혁 교회가 확립되었다.
스코틀랜드 : 프로테스탄트 개혁가인 해밀턴(P. Hamilton, 1504?~1528)과 위샤트(G. Wishart, 1513?~ 1546)를 이단으로 단죄하여 화형으로 처벌하며 교회 개혁을 반대하였던 세인트 앤드루스의 대주교 비턴(D. Beaton, 1494?~1546) 추기경이 사망하자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의 길이 열렸다. 스코틀랜드에는 프로테스탄트 개혁에 유리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러나 생후 6일 된 메리 스튜어트(Mary Stuart, 1542~1567)의 섭정자로서 친(親)프랑스 성향의 가톨릭 신자인 모후 메리(Mary of Lorraine, 1515~1560)의 등장으로 위축되어 있던 프로테스탄트들에게 위샤드의 협력자이며 '스코틀랜드의 개혁가 로 알려진 녹스(J. Knox, 1505?~1572)는 개혁 운동을 촉구하였다. 1552년에 소집된 스코틀랜드 지역 교회 회의의 결정에 따라 성직자들이 성서를 해설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해밀턴 교리 문답서》를 간행하였다. 녹스는 메리 여왕의 박해를 피해 제네바에서 1년 동안(1554~1555) 머물면서 칼뱅의 철저한 제자가 되어 1555년에 귀국하였다. 1560
년에 모후 메리가 사망하자 녹스의 강력한 요구로 에든버러에서 소집된 '스코틀랜드 프로테스탄트' 총회는 교황의 관할권 폐지, 미사 봉헌 금지, 스코틀랜드 신앙 고백(Confessio Scotica) 선언 등의 세 가지 사항을 결의하였다. 이로써 프로테스탄트 교회인 스코틀랜드 개혁 교회가 성립되었다. 1561년에 추밀원은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국교회로 받아들였다.
잉글랜드 : 16세기 영국의 개혁파들은 여왕 메리 1세(1553~1558)의 프로테스탄트 박해로 제네바에 피신하였다가 엘리자베스 1세(1558~1603)의 즉위와 함께 철저한 칼뱅주의자로 귀국하였다. '청교도' (Purian)라고 불리던 칼뱅파는 《공도서》(公禱書, Book of Common Prayer)와 주 교 체제 등의 가톨릭적 요소가 남아 있는 영국 국교회를 복음에 따른 순수한 교회로 정화한다고 나섰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엘리자베스 1세 치하에서 선포된 '예배 통일법' 때문에 개혁 교회의 체제를 발전시킬 수 없었다. 따라서 일부 청교도들은 민주적 교회 체제를 수립하고, 《공도서》의 전례 법규를 무시하고 자유로운 예배 형식의 모임을 가짐으로써 장로교인들이 되었다. 더 나아가 일부 급진적 장로교 소속 청교도들은 영국 교회 안에서 청교도주의가 구현될 수 없다고 믿고 국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왔다. 이 분리주의자들은 독립 교회(회중교회)를 세웠다. 그 결과 박해로 분리주의자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네덜란드와 신대륙으로 떠났다. 찰스 1세(1625~1649)가 국교회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청교도들을 억압하자, 장로회 청교도들이 장악한 의회와 국왕 사이의 전쟁(청교도 혁명, 1642~1646, 1648~1649)이 일어났다. 내란 중인 1644년에 의회는 장로회파인 스코틀랜드의 도움을 받아 영국 교회의 교계 체제 폐기를 선언하고 1649년 찰스 1세를 처형함으로써 영국에는 장로회적 교회 체제가 수립되었다. 이는 1660년 주교 중심의 교회 행정 체제가 영국 성공회에 의해 회복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한편 1648년 6월에는 영어를 사용하는 지역 장로회의 표준 교리서가 될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가 간행되었다.
〔영국 성공회〕 영국에서는 헨리 8세(1509~1547)가 아라곤의 캐서린(1485~1536)과의 혼인 문제 해결이라는 개인적 목적과 중앙 집권 체제의 강화라는 정치적 동기에서 '수장령' (首長令, 1534) 제정을 통해 교황청과 단교하였다. 에드워드 6세(1547~1553) 시대에 이르러 영국 교회는 추밀원의 결정, 국왕의 포고령, 의회의 법령을 통해 프로테스탄트 교회로 탈바꿈하기 시작하였다. 두 차례(1549,1552)에 걸쳐 《공도서》가 발간되고, 《공도서》 사용을 의무화한 '예배 통일법' 이 공포되었다. 1553년에 가톨릭 여왕인 메리 1세가 즉위하였으나 실정(失政)으로 영국의 가톨릭 복귀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인 1559년에 '국왕 수장령' 과 개정판 《공도서》의 발간과 함께 '예배 통일법' 이 공포되었다. 1559년에 캔터베리 대주교 지명자인 파커(M. Parker, 1504~1575)가 새 《서품 예식서》에 따라 영국 교회의 첫 캔터베리 대주교로 서품됨으로써 영국 교회의 새 교계 체제가 출발하였다. 1571년에 엘리자베스 1세는 <39개 항 신조>를 영국 교회의 공식 교리 체제로 공포하였다. 이로써 영국 교회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에서 중도 노선을 견지하면서 가톨릭적이면서 개혁적인 교회(Catholic Reformed Church)로 자리잡는 '엘리자베스 정착'(Elizabethan Settle-ment)이 이루어졌다.
〔동부 유럽〕 프로이센 : 프로이센 공국에서는 1511년 알브레히트(Albrecht, 1490~1568)가 튜튼 기사단(독일 기사 수도회)의 단장으로 선출된 이후 루터의 종교 개혁이 시작되었다. 1524년 1월 20일에 삼란트(Samland)의 주교 게오르크 폰 폴렌츠(1478~1550)는 자국어로 작성된 교구용 세례 예식서를 간행하였고, 교구민들에게 루터의 저서들을 읽도록 권장하였다. 그리고 종교 개혁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서 루터파 설교가들을 여러 도시에 파견하였다. 1525년 여름에 폴렌츠는 대부분의 성직자들과 함께 결혼하였다. 1525년 12월 의회에서 폴랜츠가 작성한 교회 법규와 교회 직제를 채택함으로써 프로이센 공국의 루터파 종교 개혁은 확립되었다. 리보니아(Livonia)에서는 리가(Riga) , 레발(Reval, Tallin), 도르파트(Dorpat, Tartu)와 같은 도시가 종교 개혁의 거점이 되었다. 1524년과 1525년 겨울에 교회와 수도원을 겨냥한 폭동이 일어났을 때, 시 당국은 이 사건을 계기로 교회를 재조직하고 교회의 재산을 처리하였다. 1525년에 리가 시 당국은 가톨릭 교회와의 결별을 선언하였고, 1527년에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 Kaliningrad)의 종교 개혁가 요한네
스 브리스만을 주교좌 성당의 설교가로 임명하여 교회 법규(1529)를 작성하도록 지시하였다. 1533년에 간행된 독일어 교회 전례서는 리가, 레발, 도르파트에서 의무적으로 사용되었다. 1559년에 국왕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1520~1572)는 독일인의 도시들에 자율권을 부여하였고,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에 따른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였다.
폴란드 : 1520년대에 이르러 개혁 운동이 독일에서 수학한 학생들과 상인들의 아들들, 그리고 루터의 저서를 통해서 도입, 전파되어 루터의 저서들이 출간되기 시작하였다. 크라스코브와 쾨니히스베르크는 종교 개혁의 중심지가 되었고, 1544년에 설립된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는 종교 개혁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561년에 국왕 지그문트 2세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을 승인하였고, 1573년 1월 28일 바르샤바 연방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였다. 그러나 폴란드는 루터파, 칼뱅파, 보헤미아 형제단(Unitas Fratrum), 반(反)삼위 일체파(Socinianismus)로 분산되어 있었다. 루터교인은 독일 중산층으로 구성되었고, 칼뱅파 추종자들은 폴란드 국민과 귀족들로 이루어졌다. 칼뱅파에서 갈라져 나온 반삼위 일체파는 1605년에 《라코브 교리 문답》을 간행하였고, 보헤미아 형제단은 슈말칼덴 전쟁(1546~1547) 이후 구성되어 국민들과 귀족들의 호응을 받았다.
헝가리 : 이 지역은 민족과 지역에 따라 루터교, 칼뱅주의, 가톨릭 교회로 분산되었다. 트란실바니아의 개혁가 요한네스 혼터(1498~ 1549)는 독일인 가운데서 루터의 종교 개혁을 진행하였고, 마자르인들은 트란실바니아 독일인들과 순회 설교가들을 통해서 루터파 종교 개혁을 받아들였으나 1550년대 이후 칼뱅주의를 따랐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1574년에 《슬로베니아 교리 문답》이 간행되었고, 17세기 초에는 토마스 흐렌 주교(1560~1630)가 저술한 교리 문답, 복음서, 기도서, 성가집이 간행되었다. 그러나 1564년에 종교 개혁을 지지하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2세(1564~1576)는 트리엔트 공의회(1545~ 1563)의 문헌 출판을 금지하였다.
Ⅲ. 종교 개혁의 결과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입장
〔결 과〕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은 중요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첫째는 그리스도교의 파쇄화(破碎化, Fragmentation) 또는 교파화(敎派化, Confessionalization)이다.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 자체는 교회 쇄신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었지만, 이로써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가 무너지고 중세 유럽 세계가 누리고 있던 그리스도교의 단일성이 파괴되었다. 그리고 네 조각 즉 가톨릭 교회, 루터교, 개혁 교회, 영국 성공회로 갈라져 각기 고유한 교회 모습을 갖추었다. 둘째는 그리스도교의 지역화이다.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유럽 그리스도교 세계는 한 교회 또는 교파가 우세한 국가나 지역으로 뚜렷하게 드러났다.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에서는 대다수 국민이 가톨릭 교회의 신앙을 지녔고, 칼뱅주의(개혁 교회)는 네덜란드와 스코틀랜드에서 국교가 되었다. 독일 북부 지역과 스칸디
나비아 반도는 루터교가 국교 또는 우세한 지역으로 남았고, 영국에서는 성공회가 국교회로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셋째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다원화이다. 17세기 초 프로테스탄트 학자들은 종교 개혁가들의 '프로테스탄트 정통성' (Protestant Orthodox) 또는 '프로테스탄트 스콜라주의' 를 차단하고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고유한 신학 정립에 헌신하였다. 그들은 종교 개혁 과정에서 작성된 신앙 고백들을 바탕으로 가톨릭 교회가 내세우는 전승(Tradito)에 대응하고, 프로테스탄트 좌파들 이 주창하는 내적 체험에 맞서 성서의 유일한 권위를 보장하는 신학을 정립하였다. 루터교는 공통 신경인 사도신경, 니체아 신경, 아타나시오 신경과 루터의 《소교리 문답》(1529)과 《대교리 문답》(1529)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1530),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 변론서》 (1531), <슈말칼덴 조항>(1537) <협화 신조>(1577)에 교리의 뿌리를 두고 있다. 영국 성공회는 《공도서》와 <39 개 항 신조>(1571)를 신학의 주춧돌로 삼고 있으며, 개혁 교회와 장로교는 칼뱅의 《그리스도교 강요》의 가르침을 고수하면서, 갈리아 신앙 고백(1559) , 벨기에 신앙 고백(1561), <하이델베르크 교리 문답>(1562), <도르트 신조>(1619),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1648)과 같은 신앙 고백 문헌들을 신앙 교리로 국가에 따라 채택하고 있다.
〔종교 개혁에 대한 가톨릭의 견해〕 지난날 가톨릭 교회는 종교 개혁을 가톨릭 교회에 대한 증오의 표현으로 규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가톨릭 교회 안에서 종교 개혁의 원인이 교회의 병폐에 있음을 시인하고, 종교 개혁을 반(反)가톨릭 운동이라는 부정적 사건으로 정의하기보다는 긍정적 의미에서 평가하였다.
교황 하드리아노 6세(1522~1523)는 신성 로마 제국의 뉘른베르그 제국 의회(1522~1523)에 파견된 교황 사절이 1523년 1월 3일 공개한 훈령에서, 루터 사건으로 교회가 받는 어려움에 대한 책임이 교황청과 성직자들의 잘못에 있다고 시인하였다. 그리고 성직자들은 하느님의 노여움의 벌을 받기 전에 반성할 것을 촉구하였고, 교회 분열의 원인이 된 교황청을 개혁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구속주회(救贖主會)의 알프스 북부 지방 책임자이며 빈의 사도' 라고 불리는 호프바우어(C.M. Hofbauer, 1751~1820) 성인은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21년 동안 독일인 사목에 힘쓰고 돌아온 다음, 1816년에 바르샤바 생활을 회고하면서 종교 개혁은 가톨릭 교회에 대한 적의보다는 독일 민족의 종교적 열망에서 발생하였다고 확언하였다. 교황 바오로 6세(1963~1978)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제2 회기 중 공의회에 참석한 프로테스탄트 대표들과의 만남(1963. 10. 17)에서 그리스도교계의 분열에서 가톨릭 교회로부터 상처를 받았다고 느끼는 갈라진 형제들에게 용서를 청하였고, 가톨릭 교회가 받은 피해를 즐거운 마음으로 용서하고 오랜 기간의 분쟁을 통해서 받은 고통을 잊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하느님이 이러한 선언을 받아 주고 그리스도인 모두가 참다운 형제적 평화
를 되찾도록 해 주기를 기원하였다. 교황 바오로 6세의 상호 용서 정신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Unitatis Redintegratio)에서 나타나고 있다. "하느님의 이 하나이고 유일한 교회에서는 처음부터 이미 분열이 생겨났으며, 사도는 이 분열을 단죄하여야 한다고 엄중히 책망하였다. 후세기에는 더 많은 불화가 생겨, 적지 않은 공동체들이 가톨릭 교회의 완전한 일치에서 갈라졌으며, 어떤 때에는 양쪽 사람들의 잘못이 없지 않았다" (3항). (⇦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 ; ← 가톨릭 개혁 ; 녹스 ; 농민 전쟁 ; 대사 ; 루터 ; 루터교 ; 멜란히톤 ; 반종교 개혁 ; 발도파 ; 베스트팔렌 조약 서구 대이교 ; 슈말칼덴 동맹 ; 스위스 ; 아비뇽 교황들 ; 아우크스부르크 강화 조약 ;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 ; 위그노파 ; 위클리프 ; 재세례파 ; <주님, 일어나소서> ; 청교도 ; 츠빙글리 ; 칼뱅 ; 후스 ; → 공의회 우위설 ; 르네상스 교황 ; 새신심 운동 ; 영국 ; 영국 성공회 ; 트리엔트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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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개혁 I. 배경과 당시 교회 상황
宗教改革
〔라〕Reformatio · 〔영〕The Reform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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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

1 / 6
종교 개혁을 일으킨 루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