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성을 받은 주교가 전례와 예식을 집전하면서 착용하는 주교 품위의 상징물들.
그리스도교는 313년 신앙의 자유를 인정받았고, 이후 로마 제국의 국교로 받아들여진 후부터 정치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발전하였다. 특히 고위 성직자인 주교의 품위를 인정하는 데는 황제들이 앞장섰다. 종교적 입장에서 볼 때, 주교는 하느님의 자리 즉 교회에서 세상을 주재하며, 성부의 예형이고, 원로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이 때문에 주교에게는 특별한 자리가 제공되었다. 황제는 궁정의 상위 계층에 해당되는 특권을 주교에게 주었으며, 이러한 표징들은 동방과의 접촉을 통해 변화·발전되었다.
[주교관] 기원과 유래 : 주교관은 특별한 품위의 상징으로, 주교가 전례적인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썼던 두건이다. '미트라' (Mitra)라고 불리는 주교관은, 고대 페르시아에 등장하는 빛과 진리의 신인 미트라스(Mithras)의 모자에서 기원하였다. 제사 중에 미트라 또는 인풀라(Infula)를 머리에 썼던 베스타 신전의 성화를 지키는 처녀들과 이교 사제들과는 달리, 초기 교회의 주교와 사제들은 전례 중에 그와 비슷한 어떤 것도 사용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미트라는 4세기부터 언급되지만, 하느님께 봉헌된 동정녀들이 착용하는 모자로 나타난다. 이 모자에 대해 밀레비스의 읍타토(Optatus Milevitanus, +400?)와 세비야의 대주교인 이시도로(560?~636)가 자주 언급하였으며, 모자라빅 전례의 rOrdinum)에서는 그것을 여자 수도원장(Abbatissa)의 장식품들 중 하나로 언급하고 있다. 가정에서는 남자든 여자든 공통적으로 '필레올루스'(pileolus)라 불렸던 낮은 반구(半球) 모양의 머리 덮개를 썼다. 아마도 이러한 모자들 중 하나에서 교황의 사적 용품으로 넘어가 주교관과 교황관이 유래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필레올루스' 는 그 자체로 계속 전해져, 교계 제도에 따른 직분에 따라 색깔을 달리하게 되었다. 현재는 교황은 하얀색, 추기경은 붉은색, 대주교와 주교는 자주색, 신부는 검은색을 착용한다.
《연대 교황표》(Liber Pontificalis)의 저자는 교황 콘스탄티노 1세(708~715)의 콘스탄티노플 입성을 묘사하면서 '카멜라우쿰' (camelaucum, 흰 투구 비슷하게 생긴 7~8세기경의 교황관)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콘스탄틴의 증여> (Donatio Constantini, 8세기)도 교황 실베스테르 1세(314~335)에게 행렬 때 사용하도록 선물한 황제의 품목들 가운데 '카멜라우쿰' 을 언급하였다. 후에 '미트라' 라고 불리게 된 '카멜라우쿰' 은 흰색의 낮고 둥근 머리 덮개였는데, 교황 세르지오 3세(904~911)와 베네딕도 7세(974~983)의 화폐에서 교황 장식품으로 그려졌다. 11세기 초에 이것은 로마 미트라(Mitra romana)라는 이름으로, 주교들과 아빠스 및 로마 밖의 사제들에게 주어지는 특전으로 교황의 인가를 받기 시작하였다. 이 특전이 교황으로부터 자주 인가를 받고 고위 성직자들이 이 특전을 갈망하면서, 미트라는 일찍부터 공동의 보편적인 용품이 되었다. 교황 인노천시오 2세(1130~1143)는 미트라를 통상적인 주교의 표장으로 언급한다.
형태 : 가장 오래된 주교관 그림은 11세기 것으로 원추형의 흰색 형태를 하고 있다. 그러나 12세기 초에는 미트라의 중앙에 흔적을 내어 강조함으로써 머리 양 측면에 볼록한 돌출 부분이 두드러지기 시작하였다. 이 부분은 우묵한 곳에 표식을 놓아 더욱 독특하게 되었다. 이러한 주교관 형태는 1150년 이후까지 남아 있었다.
양 측면이 볼록한 주교관에서 앞뒤 양 끝이 날카로운 현재 형태로 변천하는 과정은 볼록한 양 측면이 직선으로 이어져 한 점에서 만나는 경직된 모양으로 변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1125년부터는 어디서나 발견되는데 특히 프랑스가 대표적이다. 로마에서는 13세기 중반에 그려진 과트로 코로나티 교회의 프레스코화에서 주교관의 예를 발견할 수 있다.
아마도 미적인 이유 때문에 양 끝이 더 이상 관자놀이 위로 올라가지 않고 이마와 후두부 위로 올라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미트라를 보여 주는 최초의 확실한 예들은 1150년경에 나타나며, 이탈리아와 프랑스, 독일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등장하였다. 이 시대의 주교관들은 낮은 편으로, 평균 높이가 19~22cm이다. 14세기 이후 양 끝을 과장되게 높이기 위해 밑을 좁게 하였는데, 16~17세기에는 그 높이가 간혹 50~55cm까지 이르렀다. 특히 이탈리아에서 그러하였는데, 이 지역에서는 이러한 볼생사나운 형태가 계속되었다. 반대로 북쪽 지역에서는 옛 주교관의 절제되고 정연한 선을 계속 유지하였다.
처음부터 어깨 위로 드리우게 주교관의 뒤 또는 옆에 달려 있던 두 장의 작은 띠는 고대 이교 관습에서 유래한 것은 아니다. 아마도 턱 아래로 띠를 묶을 필요가 있었던 당시의 관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진다. 독일 황제의 관도 그와 유사한 두 장의 띠를 달았다.
종류 : 중세에는 두 종류의 주교관이 있었다. 즉 주교가 참회의 날들에 착용하였던 흰색의 장식하지 않은 주교관과 금빛 자수로 장식한 주교관이다. 주교관의 장식은 13세기 이후 더욱 다채롭고 화려해졌다. 자수로 주교관을 풍요롭게 꾸미려 함에 따라 16세기부터 장식 표면이 더욱 넓어지기 시작하였으며, 아래로 직선의 각으로 내려섰던 양 끝 면이 등그런 각의 모양이 되도록 활처럼 구부러지게 되었다. 주교관은 미사 제의의 전례 색깔과 일치시키지 않으며, 과거에는 형형색색의 주교관이 드물지 않았지만 항상 최초의 흰색을 유지한다.
아빠스의 관은 교황관인 '카멜라우쿰' 에서 유래한 것으로, 11세기 중반부터 교황이 몇몇 아빠스들에게만 수여한 특전이었다. 아빠스의 관 사용은 교황 글레멘스 4세(1265~1268)에 의해 처음으로 정해졌다. 이때 교황은 해당되지 않는 대수도원장들이 값진 보석이나 금 조각들로 장식된 관을 착용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흰색의 장식하지 않은 관을 쓰도록 규정하였다. 이러한 규정은 1659년 교황 알렉산데르 7세(1655~1667)와 1823년 교황 비오 7세(1800~1823)에 의해 재확인되었다.
[주교 지팡이] 주교가 예식 때 사용하는 지팡이를 목장(牧杖, Baculus pastoralis)이라 하는데, 이 목장은 주교의 품위와 관할권을 상징한다. 주교들과 대수도원장들의 표장인 지팡이에 대한 가장 오래된 언급은 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제4차 톨레도 교회 회의(633)의 28조와 세비야의 대주교인 이시도로도 이에 대해 언급하는데, 주교 권한의 상징으로 간주하였다. 9세기에 주교 지팡이는 모든 갈리아 주교들의 공동 표장이었다. 주교 지팡이의 가장 오래된 형태는 성작 덮개나 십자가로 씌운 목봉의 모양이거나, 그리스어 '타우' (τ)의 모양으로 뼈나 상아로 만든 작은 횡목으로 마무리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종류의 지팡이는 '타우' 라고 불렸다.
13세기에 들어 주교 지팡이들은 나선형으로 구부러지기 시작하였다. 나선형으로 마감한 부분에 조각해 놓은 상징적 주제는 십자가를 진 어린 양이나, 용과 맞서는 미카엘 대천사의 전투 장면이었다. 보다 후대에 주교 지팡이들은 화려하고 다채로운 여러 작은 조각상들과 첨탑들로 아름답게 장식되었다. 이 시대에 지팡이 끝에 금실과 레이스와 술 등으로 장식한 손수건 모양의 수다리움(su-darim, 수건)을 매다는 관습이 널리 확산되었다. 아마도 지팡이를 쥐고 다녀야 했던 고위 성직자에 대한 존경의 정서를 드러내고, 손의 땀이 지팡이를 더럽히지 못하도록 막고자 한 데서 기인하였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시종복사는 비단(명주) 천으로 감싼 손으로 지팡이를 붙잡는다. 보통 수도원장들의 지팡이에만 그것을 사용하였으나, 이따금 주교들도 사용하곤 하였다. 충만한 통치권의 상징으로서 주교 지팡이는 주교 예식, 서품식, 행렬, 장엄 축복에서 이동할 때마다 주교에 의해 착용된다. 하지만 장례 예식을 거행할 때에는 사용하지 않는다.
〔주교 반지] 주교의 반지(Anulus)는 주교의 품위와 신앙의 모범을 보여 주는 상징이다. 그러므로 주교의 품위와 관할권의 표지로서 주교 서품식 때 받으며, 주교와 자기 지역 교회와의 영성적인 일치와 계약을 의미한다.
스페인에서 반지는 주교와 자기 지역 교회와의 신비스런 혼인의 상징으로 7세기 초부터 주교 표장들 가운데 하나로 도입되었다. 제4차 톨레도 교회 회의와 세비야의 이시도로가 언급한 것을 보면, 반지의 사용은 단순한 상징적 이유보다 주교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인증하고자 하는 편의에서 도입되었을 것이며, 옛부터 자주 사용되어 온 관습이었음이 분명하다. 9세기에 반지는 주교들의 일반적인 장신구가 되었다. 대수도원장들은 11세기 이후부터 반지를 착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처음에는 단지 사도좌에서 내리는 특전이었다. 반면 교황 반지는 금으로 만들고 값진 보석으로 장식되었다. 주교는 법에 따라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에 반지를 착용하며, 미사 중에도 착용한다.
교황이 소칙서를 봉인하는 데 사용하는 이른바 '어부의 반지' 의 기원에 대해서는, 그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 교황 글레멘스 4세의 1265년 서한에서 발견되지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반지는 금으로 만들며, 재임 교황의 이름과 어부의 모습으로 수염을 기른 베드로의 형상을 새긴다.
[주교 십자가] 주교 십자가(Crux pectoralis)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가슴에 지니고 다녔던 호부(護符)인 '엔콜피아' 에서 찾아야 한다. 4세기에 신자들은 대개 십자 모양을 한 얇은 금속판이나 작은 캡슐에 순교자들이나 성인들의 유해, 복음의 문장, 하느님께 드리는 기원이나 진품 '십자가' 의 조각들까지 담아 넣었다. 이 관습이 중세 시대에 특히 주교들에 의해 실천되었다. 투르의 그레고리오(538~594) 교황 그레고리오 1세(590~604), 아이다노(Aidano, +651), 수아송의 로타디오(Rothadio di Soi-ssons, +868), 캔터베리의 엘페고(Elfego, +1012)등이 '엔콜피아' 를 지니고 다녔다.
주교 십자가는 교황의 전례 장신구로 교황 인노첸시오 3세(1198~1216)에 의해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그는 십자가를 가슴에 착용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2세기에 주교들은 의무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일반적으로 착용하였다. 오늘날 주교는 언제 어디서나 십자가를 착용할 수 있다.
[팔리움] 가톨릭 교회에서 교황과 대주교가 자신의 직무와 권한을 상징하기 위해 제의 위 목과 어깨 부분에 둘러 착용하는 좁은 고리 모양의 양털 띠가 팔리움(Palli-um)이다.
팔리움은 교황의 고유한 전례적 표장으로 교황 마르코(336) 시대부터 나타난다. 《연대 교황표》에 따르면, 마르코 교황은 로마 인근의 오스티아(Ostia)의 교구 주교에게 팔리움을 수여하였다. 5세기 중반 두 명의 주교가 그려진 그림에서 그들의 목 주변을 두른 후 앞으로 드리워진 팔리움을 발견할 수 있으며, 6세기에는 더욱 빈번하고 확실한 팔리움에 대한 자료를 발견할 수 있다. 513년에 교황 심마코(498~514)는 아를의 체사리오(?~542)에게 팔리움의 특전을 허락하였고, 545~546년에 교황 비질리오(537~555)는 아욱사니오(Auxanius)와 아우렐리아노(Aurelianus)에게 같은 특전을 허락하였다. 이 무렵부터 갈리스도 카타콤바의 프레스코화와 교황 요한 3세(561~574)를 그린 그림에서 보여지는 로마의 팔리움을 좀 더 확실하고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다. 그 후 이탈리아 내외의 주교들에 대한 교황들의 팔리움 수여가 빈번해졌다. 하지만 교황의 특전이 로마 외의 다른 서방 지역 교회 주교들에게는 수여되지 않았기에 팔리움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펠루시오의 이시도로(+440)는 주교 팔리움을 '공동 표지' (omophorion)라는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주교가 어깨 위에 두르는 팔리움은 주교들의 공동 표지로서 아마포가 아니라 양털의 실로 만들어지는데, 이는 주님께서 찾아 나서신 길 잃은 어린 양, 즉 주님께서 마침내 발견하시고 어깨 위에 짊어지셨던 어린 양의 양털을 의미한다." 당대 알렉산드리아 세밀화는 이 '공동 표지' 가 일종의 스카프처럼 목을 두르고 어깨 위에 걸쳐진 후 한쪽끝은 앞으로 드리워지고 다른 쪽 끝은 등 뒤로 드리워졌음을 보여 준다.
전례 문제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것 중 하나인 팔리움의 기원에 대해서는 수많은 가설들이 제기되었다. 혹자는 사도 베드로의 외투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역사적 근거는 확실하지 않다. 일부 학자들(De Marca, Bo-a,Thomassin)은 팔리움이 황제의 허락과 관련된 것으로 여긴다. 그들의 주장은 6세기 교황들이 제국에 속하지 않은 주교들에게 팔리움을 수여할 때 통상 황제의 허락을 청하였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브라운 (Braun)은 영대(Stola)에 대해 주장하였던 것처럼, 팔리움이 순수하게 교회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였다. 교황들은 처음부터 팔리움을 그들 고유의 전례적 표장과 견장으로 여기고 착용하였다는 것이다.
고대 형태를 간직한 전례적 팔리움이 팔리움-망토의 과정을 거쳐 순전히 어깨 위에 두르는 형태가 되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라벤나 산 비탈레(San Vitale)의 주교 마시미아노(Massimiano)의 인물상(4세기 중반 초)에는 팔리움이 둘러져 있다. 줄무늬의 십자 표시가 된 한쪽 끄트머리를 왼쪽 앞에서 잡고 왼쪽 어깨 위로 올려 목을 두른 후 오른 어깨를 지나 가슴 아래로 내렸다가 마지막에 왼쪽 어깨 위를 다시 돌아 등 뒤로 드리우고 있다. 이러한 팔리움의 착용 방법은 9세기까지 이어졌으며, 이후부터는 양 끝을 정확히 가슴과 등 한복판에 맞추기 시작하였다. 장식핀을 이용하여 둥글게 고정시킨 형태는 11세기 이후 나타나는데, 이 형태가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고있다. 그러나 14세기 이후 보다 발전적으로 간소화되어 현재의 형태에 이르기 전까지는 양 끝이 매우 길었다.
십자가로 팔리움을 장식하는 것은 라벤나의 모자이크에서 발견되는데, 계속해서 그 장식이 다채로워졌다. 일반적으로 네 개나 여섯 개 또는 여덟 개의 붉은 십자가를 수놓았으며, 후대에는 검은색 십자가도 수놓았다. 테두리에는 술을 달아 장식하였다. 오늘날의 팔리움 형태는 띠의 폭이 5cm 정도이고 두 개의 늘어뜨린 장식과 함께 검은색의 작은 십자가가 여섯 개 장식되어 있다. 팔리움의 색깔은 항상 흰색을 유지하였다.
팔리움은 법률상 교황과 대주교들에게 유보된 명예와 재치권의 표장이다. 단순한 명예의 표시에서 재치권의 표장이란 가치를 갖게 된 시점이 언제인지 정확히 규명하기는 어렵다. 적어도 7세기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742년 수아송 교회 회의에서 사도좌에 팔리움을 청원하도록 모든 수도 대주교들에게 권고되었다. 따라서 이 청원은 엄격한 의무가 아니라 칭송될 만한 관습이었다. 교황 니콜라오 1세(858~867)가 주목한 바와 같이, 갈리아 전역과 독일 및 다른 지방의 대주교들이 따르지 않을 수도 있는 관습이었다. 교황 요한 8세(872~882)는 877년의 라벤나 교회 회의에서 팔리움의 수여와 그와 관련된 신앙 고백을 대주교들의 통치권 행사를 위한 필수적인 조건으로 삼았다.
교회법에서 재확인한 이 법에 따라 대주교는 추기경 회의의 지지를 통해 주교 축성 또는 서임된 후 3개월 이내에 추기경 회의에서 교황에게 팔리움을 청원해야 한다. 오늘날에도 각 교구는 대주교 성성식(成聖式) 후 3개월 이내에 팔리움을 위한 청원을 교황에게 해야 한다. 이 청원이 허락되어 대주교가 장엄 주교 미사에서 팔리움을 착용함으로써 비로소 관할 구역 내에서의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오늘날 팔리움 제작은 로마의 토레 데 스페키(Torre de' Specchi) 수도원에 위임하고 있으며, 성 아네스 성당에서 매년 아네스 축일(1월 21일)에 축복되는 어린 양의 양털로 만들어진다. 새 팔리움들은 교황 베네딕도 14세(1740~1758)의 헌장 <레룸 에클레시아스티카름>(Rerum Ecclesi-asticarum)을 따라 베드로와 바오로의 축일 전날 아침에 베드로 대성전으로 옮겨지고, 제1 저녁 기도 후 교황이나 대표 추기경이 축성하여 사도의 무덤 곁에 보존된 은제(銀製) 금고 속에 간직해 둔다. 12세기에는 축일 전날 밤에 베드로의 무덤 위에 팔리움을 놓았으며, 성당 사제가 공식적인 철야 기도를 바쳤다. 이른바 '팔리움 전야제' 라고 불리는 예식이었다. 그리고 축일과 그 후 8일까지 그곳에 두었다.
팔리움이 공경을 받는 성인의 유해와 통교하게 됨으로써 팔리움은 언제나 정당하게 최고 권력을 전달하는 표 지로서, 교황 권위에 참여하는 표지로서 간주된다. 이와 함께 교황 베네딕도 14세가 언급한 바와 같이 팔리움은 사도좌와의 일치를 보여 주는 외적 상징이다. (← 주교관 ; 주교 반지 ; 주교 십자가 ; 주교 지팡이 ; 팔리움 ; 필레올루스 ; → 교황관 ; 모관 ; 수단)
※ 참고문헌 AA.VV., Liturgia, Milano, 2001/ 一一, The dictionary of the Liturgia, New York, 1989/ 一一, Encyclopedia of Catholicism, New York, 1985/ M. Righetti, Manuale di Storia liturgica, Milano, 1950. 〔鄭義哲〕
주교 복장 主敎服裝 [라]Pontificalia [영]Pontific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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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비오 9세의 삼중관(1854, 왼쪽)과 교황 바오로 6세의 삼중관( 1 963, 가운데). 주교관.
